세상을 떠난 패션 천재, 이사벨라 블로우.

슈리팜2008.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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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떠난 패션 천재, 이사벨라 블로우.





5월 7일자 과 패션 섹션은 각각 “패션, 창의적인 아이콘을 잃다” “패션계는 가장 반짝이는 별 중 하나를 잃었다”라는 슬픈 제목과 서두의 기사를 내보냈다. 그들의 긴급 속보 속에 대서특필된 이름은 스타일리스트 이사벨라 블로우(Isabella Blow). 현재까지 그녀의 사인은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난소암이란 소문에서부터 최근 종양 제거 수술을 받고 몸이 몹시 허약해졌다는 소문과 극도의 우울증 증세 얘기가 떠돌뿐.

48세를 일기로 사망했단 소식이 공식 발표되자 패션 언론들은 이사벨라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을 측근들로부터 듣느라 분주했다. 그 가운데 안나 윈투어는 1981년 미국 의 패션 디렉터로 일할 무렵 가수 브라이언 페리에게 소개받아 자신의 어시스턴트로 일을 시작한 이사벨라에 대해 에 이렇게 품평했다. “점점 기업화되어가는 문화계에서 놀라울 정도로 밝은 불빛이었다.” 그러면서 그녀의 대담한 의상은 아주 유명했다고 회상했다. “그리스 여신이나 잔다르크나 인도의 공주처럼 입고 출근하기도 했다.”

패션에 대한 그녀의 광적인 집착은 패션 천재들을 발굴해내는 심미안과 변별력을 갖게 했다. 이사벨라의 눈에 들어 스타덤에 오른 인물들을 들자면 한도 끝도 없다. 디자이너 맥퀸, 갈리아노, 샬라얀, 타카하시, 모델 테넌트, 프레이저, 달, 모자 디자이너 트리시, 존스 등등(인재 발굴을 모자만큼 애지중지하던 그녀는 자신을 “숲속에서 송로버섯을 찾는 돼지 같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이사벨라 커넥션’ 가운데 트리시는 2002년 란 책을 내며 런던 디자인 박물관에서 함께 모자 전시도 열었다. 당시 이 전시를 다룬 2002년 8월호엔 이사벨라를 향한 그의 품평이 이렇게 쓰여 있다. “이사벨라는 세속성과 글래머와 유머를 고루 갖춘 인물이다. 그녀의 열정, 위트, 엉뚱함, 그리고 강박증은 전염성이 강하며 사람을 고무시킨다.”

그런가 하면 맥퀸 발굴 무용담은 전설이 된 지 오래다. 91년 세인트 마틴 스쿨 졸업 작품전에서 그의 작품을 보고 홀딱 반한 이사벨라는 코트 한 벌을 사려고 했지만 맥퀸이 제시한 금액은 당시 3백50파운드. 내친김에 그녀는 5천 파운드에 달하는 맥퀸의 전 컬렉션을 몽땅 샀고, 커다란 쓰레기 봉투에 담겨온 옷들의 돈을 갚기 위해 일주일에 1백 파운드씩 내느라 진땀 뺐다는 후문. 여기서 잠시 그녀의 이력을 들춰보자면 다음과 같다. 1958년생으로 히쓰필드 스쿨과 비서양성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70년대 후반에 잠시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고대 중국미술을 공부했다. 스콘 가게 점원이나 가정부로도 일했던 그녀는 패션 어시스턴트를 거쳐 의 매거진 패션 디렉터, 패션 사교 매거진 패션 디렉터 등 최고 자리에 앉게 됐고, 뒤퐁 라이크라, 라코스테,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의 컨설턴트로도 일했다.

한편, 패션 코리아에서도 이 슈퍼 스타일리스트와의 인연을 간직한 패션 피플들이 있다. 디자이너 하상백은 런던 유학 시절 그녀와의 일화를 들려준다. “그녀와 처음 대화를 나눈 건 2001년 폴 스미스 봄 컬렉션 맨 앞자리에서였고, 마지막으로 본 건 작년 9월이었어요. 특히 지난가을엔 제가 그녀를 봐오던 중 모자를 쓰지 않은 유일한 모습이었어요. 머리 숱이 예전처럼 풍성하지 않아 좀 의아하게 여겼었죠.” 그녀의 사인을 둘러싼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때부터 항암 치료를 받고 있었던 걸까. 그녀는 하상백을 볼 때마다 안부를 물을 만큼 친절했다. “2003년쯤 제가 통신원으로 일한다고 했더니 미국 패션 에디터 해미시 보울스를 소개해주기도 했어요.”







세상을 떠난 패션 천재, 이사벨라 블로우.





그녀의 표정엔 어떤 종류의 두려움을 내포한다. 스키아파렐리를 흠모하듯 가재 모자나 비행접시 모양의 모자 아래로 빨간 입술과 얼굴 윤곽만 드러낸 채 그녀가 들어설 때마다 사람들은 화들짝 놀란다. 이사벨라 역시 자신의 경직된 입체파적 얼굴을 “플랜태저넷 가(Henry 2세로부터 Richard 3세까지(1154~1485) 영국을 통치한 왕가)의 초상화 같다”고 재치 있게 묘사해줬다. 그러나 괴물 같은 표정만으로 그녀를 오해해선 안 된다고 하상백은 얘기한다. “아주 다정하고 호기심 가득한 여자였어요.” 그런 그녀가 한국에 호기심을 보였다면? “한국에 꼭 한번 가고 싶고 한국 패션이 어떤지 궁금하다”고 했다는 것. 하상백이 “서울에서도 정기적으로 패션위크가 열린다”고 말하자 그녀는 “꼭 한국을 방문하겠다”고 다시 대답했다. 그녀가 하상백과의 인연으로 서울에 들렀다면 누가 그녀의 눈에 들었을까. 언젠가 깃털 달린 검정 모자에 테일러드 팬츠 수트를 입고 쇼장에 와 하상백에게 “나 오늘 너무 ‘보울링’하게 입어 좀 부끄럽다”고 고백한 적도 있었다. 물론 하상백은 다음 쇼에서 흰 모자에 스커트 수트로 갈아입은 그녀와 마주쳤다. 사실 그녀는 전 세계 패션위크 때 하루에 7번도 넘게 옷을 갈아입은 진기록의 소유자다. 다리 하나짜리 팬츠 수트에서부터 일본 디자이너의 부르카 버전을 입고 출현함으로써 전통을 비웃고 행복을 느끼는 데서 즐거움을 찾기도 했다는. 이런 스펙터클한 일상 뒤에 극도의 우울증이 숨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나. “그녀는 자기 정체성이 약했고 아트 딜러였던 남편과의 결혼 생활이 파탄에 이르자 그런 불안감은 악화됐다. 둘이 화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계속해서 끔찍한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는 보도했다.

전 세계의 ‘한다’ 하는 패션 피플들과 눈을 마주쳐온 사진가 KT에게도 각별한 인연이 있다. “이모나 누나가 돌아가신 것 같군요”라며 그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발리 쇼룸에서 팀과 취재 중이었는데 이사벨라가 납시니까 모두 그녀에게 몰리더군요. 반사적으로 저는 렌즈를 그녀 쪽으로 맞췄죠. 쇼장에서는 유쾌하게 제 렌즈를 대하던 그녀였지만, 그곳은 프라이빗하게 여겼는지 ‘실례지만 나에게 양해를 구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라며 저를 꾸짖었어요. 저는 ‘너무 반가운 나머지 렌즈가 마담을 향했군요’라고 정중히 용서를 구했어요. 결례를 인정하고 사과했더니 금세 표정이 밝게 바뀌더군요. 그때 깨달았습니다. 거친 백스테이지 사진가라 해도 ‘신사적 애티튜드’는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을요. 그녀 덕분에 백스테이지에서 다른 사진가들과 제가 다를 수 있다는 걸 터득했습니다.”

그의 기억속엔 이사벨라의 소탈한 이미지도 저장됐다. “ 패션 디렉터 시절 그녀가 꾸뛰르 취재를 위해 사진가들이 들던 큰 트라이포트를 직접 들고 누비는 걸 봤어요. 어느 스타일리스트가 그처럼 행동할까요?” 물론 그때도 KT는 그녀에게 렌즈를 맞췄다. “그녀가 거들을 올리던 무방비 상태도 촬영했지만, 이젠 촬영을 허락한다는 미소 띤 눈빛을 제게 보내줬어요.” KT에게 이사벨라와의 인연은 프로페셔널한 백스테이지 사진가로서의 성장통을 의미한다. “함께 밥을 먹거나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진 않았지만, 제 렌즈와 그녀의 눈빛 교감을 통해 패션쇼 현장에서만 통용되는 귀한 인연을 쌓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사진집 의 ‘Rule is Rule’ 챕터에 얼른 추모 멘트를 넣어야겠다고 덧붙였다.

최근 우리는 패션 슈퍼스타들이 하늘에서 우르르 지는 것을 목격해왔다. 90년대 중반 지아니 베르사체의 죽음에서부터 다이애나, 최근에는 허브 리츠, 헬무트 뉴튼, 리차드 아베돈, 그리고 디자이너 제프리 빈 등등. 데뷔 초기에 이사벨라의 집 지하실을 아틀리에로 쓴 트리시는 또 하나의 패션 신화로 기록될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며 에 추모 멘트를 보냈다. “그녀는 젊은이들의 위대한 승리자였다. 그녀는 기성세대였지만 마음은 늘 펑크였다. 그녀는 돈보다 재능을 사랑했다. 그녀의 용기는 아주 보기 드문 것이었다.” 언젠가 그의 ‘꿩’ 모자를 쓰고 무덤에 묻히고 싶다고 말했던 이사벨라는 지금쯤 하늘 어딘가에서 트리시를 보며 미소를 보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 에디터 / 신광호
- 포토 / KT.KIM
- 출처 / www.vogu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