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광주민주화와 부마항쟁 ...읽어주세여 ㅋ

황인찬2008.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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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휴가를 본후...

화려한휴가를 보기전 안증재 중대장님께서 광주민주화가 일어나기전 부마항쟁이란 것에 대해 가르쳐주셔서 이렇게 기사를 찾아 읽었다.

<기사>

·18민주화운동을 그린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관객의 정서를 가장 자극하는 장면은 공수부대의 유혈진압 장면이다. 비록 발포 경위와 희생자 수를 둘러싼 논란이 있긴 하지만, 육군 특전사 소속 공수부대원들의 잔혹한 폭력과 집단 발포로 많은 시민이 죽은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각종 자료와 기록이 이를 뒷받침하며, 김영삼 정부 시절 진행된 이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와 재판을 통해서도 확인된 바 있다.

이렇듯 5·18은 국민의 가슴에 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놓은, 창군(創軍) 이래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다. 그런데 그보다 약 7개월 전인 1979년 10월에 발생한 부마민주항쟁 당시 시위진압군이던 해병대가 보인 태도는 그와는 딴판이었다. 부산과 마산에 투입된 해병대원들은 철저하게 비폭력 노선을 지켰다.

그간 해병대의 부마항쟁 시위진압 실태는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다. 뒷날 광주의 비극을 일으킨 공수부대는 부마항쟁 때도 투입됐는데, 그때도 시위진압 방식에서 해병대와 달리 폭력적인 양태를 보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해병대와 공수부대는 왜 그토록 달랐던 걸까.

맞아도 묵묵히 ‘무력(無力)행진’
이처럼 공수부대의 활동상에 대해선 어느 정도 알려진 반면 해병대가 어떻게 시위진압을 했는지는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다. 단지 해병대 1사단 7연대가 부산대학교를 주둔지로 삼았다는 사실만이 공개됐을 뿐이다. 관련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해병대의 진압과정은 충정훈련으로 단련되고 최루탄으로 무장한 공수부대와는 매우 달랐다.

당시 군 작전상황에 대한 기록은 아직 공개되지 않고 있다. 기록물 존안(存案) 당시인 1980년 ‘향후 30년 동안의 기밀’로 분류돼 2010년에 빛을 볼 예정으로 육군 문서보관소에서 먼지만 들이켜고 있다.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학술과장인 이동일씨는 “광주 민주화운동과 달리 부마항쟁에 대한 군 관련 기록은 전혀 공개된 바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계엄군으로 참여한 해병대 관계자들과 현장에서 지켜보던 시민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3공수여단의 대규모 병력과 달리 해병대는 7연대 73대대라는 소규모 병력이 계엄 1진으로 투입돼 시위진압에 나섰다. 7연대 71대대와 72대대는 10월26일 수영비행장 투입 직후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을 맞아 지역 관공서와 부산대로 이동했다.

해병대는 공수부대의 강경진압과는 달리 시위진압시 학생들과 시민들이 던진 벽돌과 돌멩이에 맞아 피를 흘려도 묵묵히 ‘무력(無力)행진’으로만 시위대를 밀어냈다. 제일 앞줄은 간부와 병장이, 두 번째 선은 상병이, 그 뒤로 일병, 이병이 서서 총기 멜빵끈으로 서로 팔을 동여맨 채 시위대에 대응했다. 앞줄이 돌에 맞아 쓰러지면 뒷줄이 앞으로 나섰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이등병은 앞에 세우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소대장으로 현장에 투입됐다는 김동일(53)씨는 “전경은 말할 것도 없고 육군도 시위진압훈련을 해왔지만, 우리 해병대는 한 번도 진압훈련을 해본 적이 없어 그런(몸으로 때우는) 방식이 최선이었다”면서 “총기를 뺏기지 않기 위해 멜빵끈을 최대한 늘려 옆 동료와 팔을 동여매고 무조건 전진만 했다”고 회고했다.

학생시위대의 돌에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해병대원들이 계속 전진하자 나중엔 주변의 시민들이 나서서 시위대를 말리기까지 했다. 당시 박구일(뒷날 해병대사령관 역임) 7연대장은 “해병대는 국민의 군대다. 시민들이 때리면 그냥 맞아라. 절대 시민들에게 손대지 마라. 다만 총은 뺏기지 마라”는 지시를 내렸다. 박구일 연대장이 장병들에게 직접 정신교육을 했던 내용은 해병대 예비역들 사이에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박구일씨는 후에 14대 국회에 진출, 민자당 전국구 의원을 거쳐 1992년 국민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박 전 의원은 기자의 거듭된 요청에도 당시 사건에 대한 인터뷰를 거부했다.

대학생으로 시위대에 참여했다는 김현숙(48)씨는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는 ‘맞기만 하는 해병대와는 재미가 없어 시위를 포기했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왔다”고 전했다.

시민들이 빵, 우유 건네

10월20일 마산과 창원지역에 내려진 위수령으로 505명이 연행되고 59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부산에선 1058명 연행, 66명 군사재판 회부)되는 것을 끝으로 부마민주항쟁은 일단락됐다. 10·26사태 직후 공수부대 1여단과 3여단은 부산에서 철수했지만, 해병대는 남아서 계엄작전을 계속했다. 주된 작전은 ‘위민 및 선무활동’이었다.

10월27일 소대별로 부산역과 시청 등 관공서로 이동한 해병대는 건물 인근에 있는 싸리나무를 잘라 빗자루를 만들어 오전, 오후 매일 2시간씩 주둔지 건물 주변과 골목길 등을 청소했다. 특히 해병대 1사단의 의전행사 담당부대인 32대대(일명 99대대)로부터 근무교대 의장식을 전수받아 시민들의 이동이 잦은 출·퇴근 및 낮 시간대에 집중적으로 선보였다. 국기 게양식과 군가를 우렁차게 부르게 행진하는 해병대원들의 구보 광경도 시민들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시위대가 무기로 사용하기 위해 뽑아놓은 가로수 받침대도 제자리로 돌아갔다. 도심 교통정리도 해병대의 몫이었다.

이쯤 되자 시민들은 계엄군인 해병대를 신뢰하기 시작했고, 이들이 군복을 입고 버스를 타거나 대중목욕탕을 찾을 때 무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열흘 전 시위학생들에게 우유며 음료수, 빵 등을 나누어주던 시민들이 그때부터는 해병대원들에게도 똑같은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유신독재의 먹구름이 걷히며 민주주의 햇살이 부산 일대를 환하게 비추었다.

당시 부산역 주변에서 술집을 운영했다는 박경미(64)씨는 “계엄령이 내려져 밤 10시면 통금이었는데 고위 공무원들로 보이는 손님들이 돌아가지 않고 난동을 피우는 일이 종종 있었다”면서 “이럴 때면 해병대에 신고해 이들을 쫓아내곤 했다”고 말했다.

“여러 번 신세를 져서, 집으로 가기 전 경계근무를 서고 있는 해병대 초병에게 술과 안주를 건네곤 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 반응도 없었다. 한번은 바지주머니 속에 술병과 안주를 집어넣는데도 미동조차 하지 않더라. 내심 ‘이게 바로 해병대구나’ 하고 감탄했다.”

당시 부산시청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했다는 강민호(61)씨가 들려준 얘기도 비슷하다.

“해병대가 오기 전에는 수송, 보급 등 육군 기간병들이 주둔했다. 해병대는 이들과 달랐다. 국기게양식과 경계근무, 아침 구보 등 하나부터 열까지 절도 있는 모습을 보여 공무원들, 특히 여직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해병대가 광주에 투입됐더라면…”

또 다른 해병대 관계자도 “당시 전두환 정권은 해병대의 전통을 인정하는 듯했으나 ‘어떻게 하면 해병대의 위상을 격하시킬까’ 하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면서 “박정희 대통령도 월남 파병 이후 비대해진 해병대를 버겁게 여겨 1973년 사령부를 해체하고 사령관 계급도 대장에서 중장으로 끌어내려 해군에 통합시켰다”며 해병대에 대한 ‘정치적 탄압’을 제기했다. 그는 “이후 대선을 앞두고 노태우씨가 해병대 표심(票心)을 얻기 위해 1987년 11월 해병대 사령부를 재창설하기까지 해병대는 14년간 시련을 겪어야 했다”고 토로했다.

이들은 특전사와 해병대의 지휘계통과 정치적·지역적 상황의 차이에 대해 언급하면서 “당시 해병대를 광주에 투입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하지만 “해병대가 광주에 투입되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다행이었는지 모른다”는 말로 5·18민주화운동의 또 다른 희생자인 공수부대원들의 처지를 배려했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책임 있는 인물 중 하나로 전쟁이 끝난 후 아르헨티나에서 숨어 지내다 이스라엘 비밀경찰에 의해 체포됐다. 재판과정에서 그는 “나는 업무를 수행하면서 사람을 죽이려는 어떤 의도도 갖고 있지 않았고, 유대인에 대한 그 어떤 증오도 없었다. 다만 제3제국이 ‘합법적’으로 나에게 부과한 의무를 수행했을 뿐”이라며 “나의 위치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그도 동일하게 행동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재판을 지켜본 정치철학자 한나 이렌트는 아이히만이 악의 화신도 괴물도 아닌 극히 평범한 인간이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아이히만의 증언을 들은 세계는 경악했다. 아이히만 개인이 유대인에 대한 독자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상태, 이런 ‘완전한 무사고(無思考)’가 그가 유죄인 이유였다. 이에 대해 이렌트는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라는 교훈을 얻게 됐다고 말한다.

부산·마산과 광주에서 전개된 군의 진압방식 차이를 두고 ‘공수부대는 악하고 해병대는 선하다’는 이분법을 세운다면 옳지 않다. 공수부대나 해병대나 명령에 충실히 복종하고 국민의 군대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수부대와 해병대의 진압과정 차이는 ‘명령과 복종’으로 대변되는 군대라는 특수한 조직에서 지휘관 등 상급자의 의식과 태도, 그리고 조직이 존재하는 목적에 대한 구성원의 공감대가 어떤지에 따라 얼마나 상반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역사적 교훈이라 할 만하다.

우선 해병대 7연대는 박구일 연대장이 직접 나서서 장병들에게 작전에 임하는 자세와 목적에 대해 정신교육을 하고, 그 공감대를 바탕으로 부대를 이끌었다. 그러나 광주의 공수부대원들에게는 이와 같은 교육이 없었고 ‘내가 왜 광주에 왔는지’에 대해, 다시 말해 부대의 출동 목적에 대한 주체적인 자각이 없었다.

공수부대와 해병대의 진압과정 차이를 조직구조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군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해병대 지휘계통은 공수부대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해병대는 적 후방에 침투해 게릴라전을 펴는 것이 주목적인 부대다.

‘불합리한 권위에 대한 복종’

그렇기에 간부 중심 지휘체계인 특전사에 비해 해병대는 병(兵) 통솔만으로도 작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병대의 지휘체계는 소대나 중대 단위로 작전임무를 수행할 때 적의 집중 폭격이나 사격을 받아 전멸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평시 소규모 분대 단위의 전투훈련에 집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반면 간부 중심으로 구성된 공수부대는 원리원칙을 존중한다. 그들은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상부의 지시를 철저히 수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부당한 명령에도 공수부대원들은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모토처럼 공수부대에는 ‘안 되면 되게 하라’ ‘사나이 태어나 한번 죽지 두 번 죽냐’는 상징적 표현이 존재한다.

심리학의 유명한 학설인 ‘불합리한 권위에 대한 복종’은 1961년 스탠리 밀그램이 처음 이론화했다. 그는 사람들이 권위에 굴복하는 이유는 성격보다는 상황에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대단히 설득력 있는 상황이 발생하면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도 도덕적인 규칙을 무시하고 명령에 따라 비도덕적 행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가설을 세우고 이를 입증했다. 이러한 상태를 복종을 넘어선 단계, 즉 ‘응종(應從)’이라고 부른다.

전문가들은 ‘불합리한 권위에 대한 복종’이라는 심리가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에게도 있었을 거라고 추측한다. 그들이 불합리한 상부의 명령에 복종해 시민들을 강경하게 진압한 것도 인간 내부에 잠재된 심리적 본성의 하나라는 설명이다. 특히 책임을 명령권자와 희생자들에게 돌리며, 도덕적 판단의 의무로부터 회피하려는 것은 군과 같은 조직사회의 구성원이 불가피하게 가질 수밖에 없는 속성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서정근 군사전문지 D&D Focus 기자 scrapor@hanmail.net

 

꼭 한번쯤 읽어 봣으면 누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