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 여행기(2)

김지훈2008.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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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슬픔과 제갈량의 한 보초당

 두보의 슬픔과 제갈량의 한

 

두보초당

  이번 여행의 본격적인 시작은 성도부터이다. 새로운 곳에서의 시작이라서 그런지 14일간의 여행 내내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오늘은 성도 주변의 유적지를 돌아보기로 하였다. 특히 앞에서 말했듯이 성도는 역사가 깊은 곳으로 이곳 사천성의 중심 도시이다. 옛날 촉나라의 전통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도시 곳곳에 그러한 흔적들이 찾아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촉을 세운 유비와 제갈 량을 모신 무후사와 당대의 이백과 더불어 시성이라 불리우는 두보를 모셔놓은 두보초당에 가기로 하였다.

  

티벳 여행기(2)

두보 초당 / 두보가 안사의 난을 피하여 760년부터 약 4년간 살면서 그 동안 240여수의 시를 지은 곳이다. 대나무 숲속에 지어진 초당은 약 20ha정도이다.


  대학 시절에 실학자 정약용이 유배 생활을 하였던 강진의 다산 초당을 가본 적이 있지만 두보 초당에 비하면 정말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정약용의 사상과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세계는 두보와 비교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중국인들이 두보를 시성으로 평가하며 존경하는 만큼 우리는 정약용을 너무나도 모른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 일 것이다.

  아무튼 내 눈에 펼쳐진 두보 초당은 하나의 거대한 공원 그 자체였다. 중국의 많은 문화 유산들이 웅장함을 과시하듯이 이 두보 초당도 그러했다. 아니 중국인들의 두보에 대한 존경심의 표현이라고 해야 할 듯 싶다.

  입구에 들어서자 우릴 반겨주는 것은 시각적으로는 연꽃이었으며, 청각적으로는 중국 악기의 청아한 소리였다. 이 두보 초당이 대나무 숲에 위치하였지만 오히려 연꽃으로 초당을 더욱 아름답게 하였다. 연꽃을 너무 좋아하는 나로서는 연꽃의 단아한 매력에 흠뻑 빠질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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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악기의 연주 / 악기의 종류는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초당 내 두 곳에서 울러퍼졌다.


  음악 소리를 뒤로 하고 우리는 초당 내의 이곳 저곳을 돌아보았다. 대나무 숲과 작은 연못 그리고 연못을 더욱 아름답게 해주었던 연꽃들, 매화나무들이 넓은 초당의 구석구석을 채워 주었다. 그래서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봄에 이곳을 찾으면 더욱 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아니, 이 곳의 쉼자리에 앉아 그 매화꽃을 따서 술잔에 띄어 두보의 시를 읊으며 이곳에 거주하게 된 두보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다.

  사능 초당과 매화나무가 반겨주는 정원에 들어서면 두보의 동상이 세어져 있다. 보통 한국에서는 한 인물에 대하여 동상을 세울 정도라면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인물이라든가, 아님 정말 국가를 위해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에 한하여 통상 세워지는 것인데 과연 두보가 그런 인물인가? 하는 좁은 소견에 난 잠시 빠져들었다. 나 역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에 얽매이는 그런 사람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런 역사를 배워왔고  그 속에서 살아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대나무 숲을 지나 우린 두보 초당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대화당에 들렀다. 이곳에서는 두보가 어떻게 성도까지 오게 되었으면 두보가 어떤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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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당 앞의 두보의 동상 / 역시나 연꽃과 어울려져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서도 중국 악기의 청아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엇보다도 눈에 띠는 것은 두보가 안사의 난을 피하여 성도로 피난하여 온 일정이 표시되어 있었고, 그가 안사의 난 때 포로로 장안에 붙잡혀 생활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과 전쟁이 빨리 끝났으면 하는 마음이 담긴 시가 우리 일행의 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春望 봄날 고국 산천을 바라보며

國破山河在, 고국은 엉망이어도 산천만은 의구하니

城春草木深. 온누리에 봄이 되어 초목이 무성하다

感時花濺淚, 시국이 어려우니 꽃을 봐도 눈물 나고

恨別鳥驚心. 생이별 한스러워 새소리에도 가슴 저려

烽火連三月, 전란(戰亂)에 휩싸인지 어언 석달째라

家書抵萬金. 고향 편지 한 통에 만금은 족히 되리

白頭搔更短, 흰머리는 긁을수록 자꾸만 빠져버려

渾欲不勝簪. 이제는 비녀조차 꽂기가 어렵구료


  정말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두보의 맘을 적절하게 표현한 시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우리 일행들은 전시되어 있던 이 시의 한 구절, 한 구절을 짧은 한문 실력으로 해석해나갔다. 2% 부족한 해석이었지만 두보의 마음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한편 이곳에서는 국어선생님이신 권석자 선생님의 가이드가 빛을 발하였다.

  대화당을 나와 정원의 벤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성도의 날씨에 대하여 하염없이 투덜거렸으며, 이곳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새로운 곳으로 이동하였다. 그런데 다시 한번 얘기하지만 정말 넓었다. 우리 나라 경복궁마저도 여기에 비할 수가 없었다.

  다시 대나무 숲을 지나자, 만불루라는 거대한 4층의 누각이 나타났다. 예전에 세워진 터가 있었는데 그것을 유리막으로 보존하고 있었고 주춧돌을 피해서 다시 최근에 새롭게 세워진 것이었다.    우리는 4층까지 올라가보았다. 물론 일행 중 박선생님은 포기하셨다. 천식을 이유로 그러하셨지만 그 이후로도 여행 일정에서 특히 티벳 여행에서도 박선생님께서는 가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셨다. 4층에 올라서자 두보 초당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으며, 심지어는 성도 시내까지 보였다. 박선생님께서 밑에서 독서에 열중하는 모습도 보였다. 정말 가끔은 엉뚱하다고 생각도 되었지만 이번 여행에서 정말 많은 웃음과 경험담을 선사해주셨다.

  만불루 왼편으로 나있는 길을 따라 4층에서 바라보았던 호수 아니 연못으로 이동하였다. 가는 길에 산책을 나온 많은 중국인들을 볼 수 있었다. 시내에 이렇게 잘 조성된 공원을 산책한다는 것 자체가 자연의 축복 내지는 문화의 혜택을 받고 있다는 것이며, 그들에게는 이곳이 낙원이요, 천국이 아닐까 싶다.


티벳 여행기(2)

당대 유적 전시관 앞에서 나, 이상돈 교장선생님 / 항상 나를 김대위라고 불러주셨다.


  이번에도 연꽃으로 가득 찬 연못을 지나니 두보가 살았던 시대를 보여주는 듯이 당대 유적 발굴지가 전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발굴지보다는 전시관 벽에 게시된 당나라 때의 관복과 의복이 눈에 띄었다. 특히 무관이 입었던 관복에 한참이나 눈길이 머물렀다. 중국에 오기 전 역사 드라마를 많이 본 탓도 있겠지만, 군 생활을 오래한 나이기에 군복에 관심이 갔었다.

  이곳을 끝으로 두보 초당의 관람을 마쳤다. 미로 속을 헤매이듯이 여러 번 이곳을 지나쳤다. 또 한번 드넓은 두보 초당의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다산 초당이었더라면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에 빠져본다.

  두보 초당을 나온 우리는 허기진 배를 채우기를 위해 숙소의 주인이 알려준 이름 있는 식당에 가서 정통 사천 요리를 먹기로 하였다. 한 30분은 걸은 것 같았다. 걷는 동안 배고픔에 더욱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리고 그 배고픔은 식당에 들어서도 여전하였다.

  식당 이름은 6글자 정도였던 것 같은데, 아쉽게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숙소 주인이 추천해 준 곳으로서 정통 사천 요리 식당이었다. 일행들은 마파두부, 우리 나라의 짜장면 같은 요리, 양(?) 고기 요리 등 이것 저것 여러 음식을 주문하였다. 물론 밥은 당연히 나온다는 것, 하지만 한국에서 볼 수 있는 밥은 아니었다. 넓은 두보 초당의 관람으로 허기진 우리 일행들은 시켜놓은 음식으로 허기를 달랠 수 있었다. 너무 허기진 데다, 유달리 입이 짧았던 나는 정통 사천 요리의 맛을 느끼기에는 아쉬움이 많았다. 식사하는 동안 주변을 둘러 보았는데 한 외국인이 자신이 먹는 음식을 사진으로 찍어가면서 맛있게 식사하는 모습이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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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의 영수증 / 식사하고 나서 계산서라고 주는데 무슨 입장권, 영화 티켓같은 느낌을 받았다.


  어느 정도 허기를 채운 우리는 두 번째 코스인 무후사로 택시를 타고 이동하였다. 대학 시절 이문열의 삼국지를 10번 이상이나 읽을 정도로 삼국지, 특히 유비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나에게는 무후사가 나의 지대한 관심 안에 있었다. 이 무후사는 원래는 유비를 모신 조열묘와 나란히 세워졌다고 한다. 그러나 14세기 말에 조열묘와 병합되어 정식 명칭으로는 한조열묘이지만 유비를 능가하는 제갈 량의 재덕을 기려서 지금까지도 이곳을 무후사라 부른다고 한다. 


티벳 여행기(2) 조열묘 / 유비를 모신 사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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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후사 / 제갈량을 재덕을 기려서 세운 사당이다.


   여전히 무후사에는 많은 중국인과 관광객들로 붐볐다. 촉한의 수도라고 할 수 있는 성도에서 촉한을 세웠던 유비와 그의 책사였던 제갈 량을 모신 곳이니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입구를 들어서자 양 옆으로 무후사에서 특히 유명한 삼절로 이름 높은 당비들이 우뚝 서서 우릴 반겨주었다. 문장과 서법, 석각 기술로 유명하다고 하는데 사진만 찍었을 뿐, 아쉽게도 그 유명세를 직접 느껴보지는 못했다. 유비전으로 들어가면 제갈량이 위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황제에게 바쳤던 출사표가 전시되어 있고, 그 양 옆으로 촉한 시대에 주군인 유비를 받들던 문 ․ 무관 28인의 소상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소상 밑에 기록된 내용을 보지 않고도 그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삼국지 광이었던 나는 금방 알 수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뛰어난 지략과 용맹 그리고 유비에 대한 충성심으로 의형제에게 뒤지지 않았던 조운(자룡)이 가장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티벳 여행기(2)촉한의 선주 유비의 상 / 의형제인 관우, 장비와 제갈 량의 도움을 얻어 촉한을 세웠다. 다소 유유 부단한 성격으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온화한 인품의 대명사로서 귀가 상당히 컸다고 한다. 일행 중에 박선생님의 귀가 상당히 컸는데 여기서 빛을 발하였다.


  안으로 들어가면 중앙에 촉한의 선주인 유비의 상이 온화한 모습으로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었고, 옆으로 유비의 아들과 손자의 상이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유비의 아들인 유선, 황제로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아버지 대부터 충성을 다해온 제갈 량에게 모든 것을 위임함으로써 제갈량이 죽자, 촉나라의 멸망을 가져오게 한 장본인이었다. 그런데 유선의 아픔 뒤에는 바로 유비에게 있다는 일화가 삼국지에 전해져 온다. 삼국지의 백미인 적벽대전, 그 서막이라고 할 수 있는 유비와 조조의 대결에서 비록 당대 최고의 책사인 제갈 량을 얻었지만, 군사적으로 열세였던 유비가 조조에게 쫓기면서 가족들과 떨어지게 되는데 그때 조운이 홀로 조조의 수십만 대군 속에서 이 유선을 구해내게 된다. 그러나 그것을 알게 된 유비는 ‘못난 아들을 구하려다가 나의 훌륭한 장수를 잃을 뻔 했다’고 땅바닥에 아들 유선을 내동댕이 치는 바람에 머리를 다쳐 제대로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한다. 어쩌면 유비의 입장에서는 어린 아들보다도 자신을 위해 당장 열심히 싸워 줄 훌륭한 장수가 필요했을 것이다.  

  유비전을 나와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제갈 량을 모신 무후사가 나온다. 그 기둥이 세 개인데 그 이유는 유비가 책사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제갈 량을 얻기 위해 삼고 초려 하였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유비는 삼고 초려에서 알 수 있듯이 절실하였다. 나이 오십 줄에 국가다운 국가를 세워보지도 못하고 다른 군웅들에게 밀려나야 했던 유비의 입장에서 제갈 량 같은 훌륭한 인재를 얻는다는 것은 가뭄의 단비와 같은 것이었다.

  또한 그가 제갈 량을 얻으면서 위의 조조, 오의 손권과 함께 삼국시대를 열어갈 수 있었으니 더욱 제갈 량에 대한 마음은 세상의 모든 것으로 표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유비의 삼고 초려에 제갈 량은 가장 세력이 약했던 유비를 선택하게 되었다. 물론 자신의 야망과 능력을 천하에 펼칠 기회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책임이 막중하다는 것을 알았던 그였기에 유비의 삼고 초려를 가져오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가장 세력이 약한 유비가 아닌 다른 주군을 선택했더라면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가설에 빠져본다. 아마도 역사 속에서 삼국지라는 소설책은 없어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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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한의 책사인 제갈 량 / 유비를 도와 촉한을 세우고 3대째 촉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왼편으로 가면 처음 유비, 관우, 장비가 의형제을 맺은 즉 도원결의를 했던 곳이 정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주변에 복숭아 나무들과 삼형제의 석상들이 그때의 결연한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콜라를 나눠 마시면서 어설픈 흉내를 내어보았다. 어설프게나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고자 하는 우리들이지만 그들의 도원결의에 누가 되지 않을까 싶다. 


티벳 여행기(2)

도원에서 첫 단체 사진 / 센스 있는 외국인의 도움으로 이 상황을 연출할 수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멤버, 그러나 14일의 일정동안 정말 즐거웠다.


  도원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건물 벽쪽으로 유비의 일생과 더불어 촉한의 변천사가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일행 중의  이 교장선생님께서 그림에 대해서 물어보셨다. 그래서 난 대학 시절에 읽은 이문열의 삼국지에 대한 기억을 배경으로 열심히 설명을 하였다. 끝부분에서는 기억이 가물가물하기도 하였다. 이번 참에 삼국지를 아무래도 다시 한번 봐야 될 것 같다.

  다시 발길을 옮겨 공명전에 들러 제갈 량의 흔적들을 볼 수 있었다. 제갈 량이 탔던 마차, 황제에게 올렸던 닥나무의 문서, 그리고 전쟁터에서 군량 수송으로 사용되었던 장비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멀티를 통해 제갈 량에 대한 영상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력이 유비를 일약의 영웅으로 만들어내었으며 그 또한 후대의 존경받는 인물로 만들었을 것이다.


티벳 여행기(2)

통로를 따라 건물 벽면에 촉한의 성립과 변천 과정을 그림으로 전시하였다. 도원결의에서 촉한의 멸망까지 순서대로 그림을 해석하면 더욱 보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


  공명전을 나와 왼쪽으로 가게 되면 각종 분재들이 진열된 곳이 나온다. 그 곳을 돌아서면 바로 유비의 무덤인 혜능이 나오게 된다. 혜능에 대한 기대를 갖고 한 바퀴를 돌았다. 그러나 별다른 것은 없었다. 그냥 능이었다. 다른 중국의 황제들의 능에 비해 작은 것도 있었지만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온갖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어서 새삼 인생무상을 느꼈다.

  제갈 량이나 유비가 큰 꿈을 가지고 나라를 세웠고 삼국간의 항쟁에서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그렇게 노력을 했지만 결국 그들은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한줌의 흙이 되어버렸다. 그런 애달픈 삶을 이 혜능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대나무 숲길을 따라 처음 들어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서 무후사를 나왔다. 여전히 성도의 하늘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햇살을 볼 수 없었고, 후덥지근함이 숨통을 막 조여왔다. 버스를 타기 위해 이동하던 중 한 노점상의 복숭아가 눈에 띠었다. 몇 개를 사서 그 자리에서 깎아 먹는데 정말 맛있었다.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라는 곳에 버스 기사의 안내로 내렸지만 아무리 걸어도 낯설기만 하였다. 길을 정확히 몰랐던 우리는 여러 중국인에게 길을 확인하였고 마지막으로 경찰관에게 확인한 결과 숙소와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택시로 타고 숙소로 복귀하였다. 

우린 잠깐의 휴식과 더불어서 미역국으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내일부터 시작될 3박 4일간의 구체구와 황룡에 대한 일정에 대해서 숙소 주인에게서 브리핑을 들은 다음 내일부터 시작될 새로운 여행을 준비하였다. 




                                            2007. 7. 21. 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