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것이 좋아

이영주2008.01.19
조회226
  뜨거운 것이 좋아 (2008)

감독 : 권칠인

 

 

싱글즈로부터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한 여자이야기

 

내가 좋아하는 글귀 중 이런 게 있다. "정체된 진보란 없다.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퇴보이고 보수일 뿐이다"

오로지 의 감독이 만들었다는 이유 하나로 개봉일 극장으로 달려가 본 영화 를 보며, 자꾸만 이 글귀가 떠올랐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5년 전에 만난 의 나난과 동미는 내게 가히 혁명과도 같았다. 일과 사랑의 이분법을 넘어 자아찾기에 나선 스물아홉 두 처자의 좌충우돌을 보며 서른을 막 넘긴 나는 마치 안개 속에 파묻혀 있던 나의 자아라도 찾은 양 흥분하고 열광했다. 그녀들의 자못 전투적이기까지 한 결말은 짜릿함을 넘어 큰 깨달음이라도 안겨준 듯했다.

그리고 강산이 절반쯤 바뀌었을, 요즘같은 변화속도로는 열두 번도 더 바뀌었을 5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어떻게 남자감독이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었을까 의아스럽기까지 했던 권칠인 감독은 라는 다소 자극적인 제목으로 관객을 다시 찾았다.

뭐, 결론부터 말하자면 라는 제목은 완전 사기다. 뜨거운 것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억지로 찾아내자면 뜨거운 라면냄비 정도가 최고로 뜨거운 장면이었다. ㅋ

서른을 앞둔 나난과 동미가 를 이끌어가는 하나같은 둘의 짝패라면, 는 10대 소녀 강애와 싱글즈 세대인 아미, 그리고 40대 영미까지 세대를 넓힌 여자이야기에 욕심을 낸다. 그러나 세대만 넓혔을 뿐, 강애와 아미, 영미는 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강애는 나난 혹은 동미의 10대 시절이고, 아미는 나난과 닮은꼴이며, 영미는 동미의 10여년 후의 모습이다. 동미가 미혼모로서 출산을 준비했던 싱글즈의 엔딩은 10여년의 세월을 훌쩍 넘겨 아버지의 존재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고 엄마의 성을 물려받은 소녀 강미와 동미가 나이들면 꼭 이렇게 변했을 것 같은 싱글맘 영미, 그리고 여전히 나난처럼 삽질하는 20대 이모 아미, 이렇게 의 오프닝으로 이어진다.

그래서였을까? 이미 에서 할 얘기 다 해버린 (감독의 능력 안에서, 혹은 감독의 가치관 안에서) 20대 아미 이야기는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세 축 중 가장 중심축임에도 불구하고 싱겁기 짝이 없다. 이후 브라운관이든 스크린이든 나난과 동미는 끊임없이 진화와 복제를 거듭하며 일취월장 성장해 왔으나(이미 TV에서는 등 20대 후반 30대 초반 여자드라마들을 통해 제2, 제3의 나난과 동미들이 다양한 상황과 결론을 만들며 이야기를 확장해 왔다), 의 아미는 나난과 동미로부터 한 뼘도 자라지 않은 탓이다.

그래서였다. 자꾸만 그 글귀가 입가를 맴돌았던 것은. 의 아미가 '88만원세대'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5년 전보다는 훨씬 더 퍽퍽해지고 훨씬 더 전망 없어진 20대 후반 여자를 그렸음에도, 아미를 분한 김민희의 열연에 미친듯이 웃었음에도(굿솔 때 보여준 김민희의 매력은 이 영화에서 200% 정도 증폭된다. 특히 김민희의 술취한 연기는 괄목상대, 명불허전, 천의무봉, 킹왕짱, 암튼 최고다.), 의 나난을 동어반복하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5년 전 백마 탄 왕자님인데다가 성격마저 좋은 수헌을 뿌리치고 홀로 남은 나난과 아버지와 상관 없이 자신의 아이를 낳아 키우겠다는 동미는 가히 혁명적이라 느껴질 정도로 진보적이었다. 그러나 나난과 동미를 5년 뒤에 반복해서 보니, 현실과 비교할 때는 여전히 진보적이긴 하나 식상하기만 하다. 오히려 5년 전보다도 더 현실로부터 괴리된 판타지처럼 느껴질 뿐 생기가 없다. 나의 가슴을 뛰게 하지 않는다.

대신, 싱글즈 이후 세대인 40대 영미의 복잡다난한 연애와 연애에서도 도덕책에서 배운 그대로 질풍노도의 시기, 주변인의 시기, 아노미를 겪고 있는 강애의 혼란은 아미 이야기보다 훨씬 상큼하다. 특히 "어머나"밖에 못 할 줄 알았더니 가수가 아니라 배우가 제 옷인 듯 깜찍발랄 순진무구 소녀의 혼란을 제대로 보여준 원더걸스의 소희가 분한 강애의 에피소드는 가벼우면서도 식상하지 않은 매력이 있다.

문제는 이 영화의 중심축이 아미의 이야기이고, 영미와 강애의 이야기는 전체 줄거리를 보조하는 역할이다 보니, 관객이 감정이입할 만큼 캐릭터와 상황묘사에 공을 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동어반복으로 영화를 찍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권칠인 감독이 보여줄 수 있는 여자이야기는 딱 여기까지가 한계인 듯해서 씁쓸함마저 남는 영화 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의 연기는 맛깔나는 영화, 그래서 더 아쉬운 영화로 남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