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일주일동안의 몽골여행을 다녀왔다.생소하고 다양했던 볼거리보다 더 많은 몸에 붙은 먼지를 땀과 함께 씻어 내렸다. 머릿속에 미처 정리 못한 여정이 아쉬운 숙제처럼 가슴을 짓누르고 있다.
여러 곳을 여행해 보았지만 ‘몽골은 멋모르고 호기심에 처음 가고, 멋이 없어 후회하면서도 다시가고 줄 것이 없어도 형제 같은 느낌 때문에 도움을 주고 싶어 세 번째 가는 곳’이다.
보통 지인들이나 혹은 매체를 통해 그곳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나같이 그 나라에 관련을 가진 사람이 몽골경험을 얘기하면 대부분 한번쯤 같이 가고 싶어 한다. 내가 들려주는 몽골 이야기는 여행 중 불편했거나 멋없던 부분은 일부러 감춰둔다. 신기한 얘기에 듣는 이들의 기대와 관심 그리고 스스로 이야기에 취해 벌여놓은 소제들을 채 수습도 하지 못하고 끝내는 경우가 있다.
이듬해 봄이 오면 내 얘기를 들었던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몽골에 가자고 한다. 그 곳으로 함께 떠나는 날에야 나는 공항대합실에서 솔직히 이렇게 얘기해준다. ‘괜히 왔다’는 소리가 나올 수도 있다고 말을 흘린다.
물론 출발하는 그 자리에서는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기대에 대한 추후실망을 일부 줄여보겠다는 뜻이다.
그곳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는 여행객에게는 세 시간 반의 비행거리 중 한 시간가량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황량한 고비사막은 마치 지구의 종말을 보는 느낌을 줄 수 도 있다.
고생을 했던 여행일수록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눈으로 느낀 추억’보다는 ‘여행이후 감정’이 시간과의 숙성과정을 지냈기에 가능하리라믿는다.
그런데 추억이나 감정보다 더 무겁고 큰 짐을 8년 전, 두 번째 방문 때 가지고 왔다. 흘려서 듣기에는 너무 간절한 숙제를 받아왔다. 몽골인사들이 고민하여 제안한 ‘한국과의 국가연합’ 이야기였다. 처음엔 농담으로 여겼었다. 자리를 옮겨가며 그리고 밤을 새워 의논했던 기억이 아직 남아있다.
몇 년을 책임 없이 머릿속에 담아두었고, 사석에서 얘기도 하였고 작년 말에는 몇몇 지도자에게 이와 같은 내용을 서면으로 제안하게 되었다. 가시적이긴 하만 작년 3월에는 양국 학계와 외교관이 심포지움을 했다
10여 년 전까지는 그곳초등학교에서 러시아어로 공부하였으나 지금은 몽골어로 하고잇다.
10명중 1명이 한국어를 할 수 있고 그 비율로 한국을 다녀왔다고 한다.그리고 못 돌아온 몽골처녀를 기다리다 장가 못간 총각들이 많다고 얘기를 들었다.
우리보다 7배나 큰 대지위에 함께 대륙의통과 거점을 만들었으면 한다.
3년 탈상을 지내는 풍습을 보고 놀랐던, 첫 번째 경험은 겨울 민박 여행이었다. 두 번째 방문은 6월이었다. 그때까지의 몽골여정은 눈으로 보고 느꼈지만 2006년 세 번째 방문은 가슴으로 느꼈다. 감동과 역동의 800주년 나담축제(매년 7월 11일부터 전후로 1개월)를 보고난 후 몽골을 더 많이 알게 되었다.
서울에서 북서쪽 3000km에 울란바타를 만나는 것은 3시간 반이라는 비교적 짧은 비행거리에 의아함을 느낀다. 칭기스칸이 살았던 800년 전의 인구가 250만이었는데 지금 인구가 그때 인구에서 크게 변화되지 않았다는 것이다.지금의 유럽의 대부분을 정복한 이후 헝가리나 터키 등에 남겨져 살고 있거나 러시아(울란우데)나 중국(중국에서 얘기하는 내몽고)에서 살아가고 있는 몽골 후손은 오히려 숫자가 더 많을 수도 있다.
그들은 우리의 고려인이나 조선족 재일본 교포처럼 전쟁의 역사 속에 내몰리며 자기의지 보다 타의에 의해 내몰리어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흩어진 몽골민족을 규합할 수 있도록 힘을 키워주고 밀어주어야 할 것이다.
몽골인은 그저 눈빛을 보고 얼굴만 마주해보면 말을 하지 않아도 영락없는 우리 형제라고 느껴지니 어찌된 일일까? 몽골말을 배우기도 전에 그들이 하는 언어엔 우리말과 비슷하거나 같은 단어가 많다. 가끔 대화중 말을 막고 다시 들어 본다. ‘바른쪽’ ‘닭’ ‘왔다 갔다’ ‘말(동물)’ ‘인두’등 우리말과 똑같이 소리를 내어 쓰며 의미도 같음을느낀다.
몽골에 기간산업을 일으켜주자. 그리고 그곳에 러시아 연방에 흩어져 사는 고려인들에게 보금자리와 일자리를 주고 50년 후에 진정한 선진 강국에 함께 설수 있도록 해보자. 그들은 지금 애타게 우리의 손길을 지켜 볼뿐이다.
중국인들이 받아주지 않던 탈북자들이 갈 곳이 없어 고비사막을 맨발로 몽골국경을 넘어 갔을 때 그들은 ‘솔롱고스(무지개가 뜨는 나라 사람)’라 하여 따뜻하게 받아 주었다.
드라마 ‘대장금’을 번역할 때 자기나라에 없는 식재료를 이름붙이기 힘들었다는 나의 몽골 친구의 전화목소리를 오래전에 들었다. 그들은 지금 2개의 채널로 한국TV를 보고 있으며 실시간으로 컴퓨터에 접속하여 우리드라마를 즐기고 있다.
그곳 나담축제 때 입고나온 전투병들의 전투복과 민속의상들을 보면서 다양성과 아름다움에 감동하여, 나는 인터넷 카페에 ‘제3의 한류를 꿈꾼다면 나담축제에서 배워라!’ 라고 글을 올렸다.
빚쟁이 같은 나의마음을 아직도 “쯔 쯔 쯔..” 하며 몽골족과 우리에게만 사용하는 혀차기를 하며 고민에 빠진다. 나담축제 주경기장 한가운데에 그들과 관련이 없는 2008년 북경올림픽 광고탑이 서있는 것을 보고 나는 깜짝 놀라며 분개하였다.
몽골만세
801주년 나담축제방문/'츠쿠바타르' 광장의 그이름을 딴 동상앞에
몽 골 만 세
김 동 곤
지난여름 일주일동안의 몽골여행을 다녀왔다.생소하고 다양했던 볼거리보다 더 많은 몸에 붙은 먼지를 땀과 함께 씻어 내렸다. 머릿속에 미처 정리 못한 여정이 아쉬운 숙제처럼 가슴을 짓누르고 있다.
여러 곳을 여행해 보았지만 ‘몽골은 멋모르고 호기심에 처음 가고, 멋이 없어 후회하면서도 다시가고 줄 것이 없어도 형제 같은 느낌 때문에 도움을 주고 싶어 세 번째 가는 곳’이다.
보통 지인들이나 혹은 매체를 통해 그곳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나같이 그 나라에 관련을 가진 사람이 몽골경험을 얘기하면 대부분 한번쯤 같이 가고 싶어 한다. 내가 들려주는 몽골 이야기는 여행 중 불편했거나 멋없던 부분은 일부러 감춰둔다. 신기한 얘기에 듣는 이들의 기대와 관심 그리고 스스로 이야기에 취해 벌여놓은 소제들을 채 수습도 하지 못하고 끝내는 경우가 있다.
이듬해 봄이 오면 내 얘기를 들었던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몽골에 가자고 한다. 그 곳으로 함께 떠나는 날에야 나는 공항대합실에서 솔직히 이렇게 얘기해준다. ‘괜히 왔다’는 소리가 나올 수도 있다고 말을 흘린다.
물론 출발하는 그 자리에서는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기대에 대한 추후실망을 일부 줄여보겠다는 뜻이다.
그곳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는 여행객에게는 세 시간 반의 비행거리 중 한 시간가량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황량한 고비사막은 마치 지구의 종말을 보는 느낌을 줄 수 도 있다.
고생을 했던 여행일수록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눈으로 느낀 추억’보다는 ‘여행이후 감정’이 시간과의 숙성과정을 지냈기에 가능하리라믿는다.
그런데 추억이나 감정보다 더 무겁고 큰 짐을 8년 전, 두 번째 방문 때 가지고 왔다. 흘려서 듣기에는 너무 간절한 숙제를 받아왔다. 몽골인사들이 고민하여 제안한 ‘한국과의 국가연합’ 이야기였다. 처음엔 농담으로 여겼었다. 자리를 옮겨가며 그리고 밤을 새워 의논했던 기억이 아직 남아있다.
몇 년을 책임 없이 머릿속에 담아두었고, 사석에서 얘기도 하였고 작년 말에는 몇몇 지도자에게 이와 같은 내용을 서면으로 제안하게 되었다. 가시적이긴 하만 작년 3월에는 양국 학계와 외교관이 심포지움을 했다
10여 년 전까지는 그곳초등학교에서 러시아어로 공부하였으나 지금은 몽골어로 하고잇다.
10명중 1명이 한국어를 할 수 있고 그 비율로 한국을 다녀왔다고 한다.그리고 못 돌아온 몽골처녀를 기다리다 장가 못간 총각들이 많다고 얘기를 들었다.
우리보다 7배나 큰 대지위에 함께 대륙의통과 거점을 만들었으면 한다.
3년 탈상을 지내는 풍습을 보고 놀랐던, 첫 번째 경험은 겨울 민박 여행이었다. 두 번째 방문은 6월이었다. 그때까지의 몽골여정은 눈으로 보고 느꼈지만 2006년 세 번째 방문은 가슴으로 느꼈다. 감동과 역동의 800주년 나담축제(매년 7월 11일부터 전후로 1개월)를 보고난 후 몽골을 더 많이 알게 되었다.
서울에서 북서쪽 3000km에 울란바타를 만나는 것은 3시간 반이라는 비교적 짧은 비행거리에 의아함을 느낀다. 칭기스칸이 살았던 800년 전의 인구가 250만이었는데 지금 인구가 그때 인구에서 크게 변화되지 않았다는 것이다.지금의 유럽의 대부분을 정복한 이후 헝가리나 터키 등에 남겨져 살고 있거나 러시아(울란우데)나 중국(중국에서 얘기하는 내몽고)에서 살아가고 있는 몽골 후손은 오히려 숫자가 더 많을 수도 있다.
그들은 우리의 고려인이나 조선족 재일본 교포처럼 전쟁의 역사 속에 내몰리며 자기의지 보다 타의에 의해 내몰리어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흩어진 몽골민족을 규합할 수 있도록 힘을 키워주고 밀어주어야 할 것이다.
몽골인은 그저 눈빛을 보고 얼굴만 마주해보면 말을 하지 않아도 영락없는 우리 형제라고 느껴지니 어찌된 일일까? 몽골말을 배우기도 전에 그들이 하는 언어엔 우리말과 비슷하거나 같은 단어가 많다. 가끔 대화중 말을 막고 다시 들어 본다. ‘바른쪽’ ‘닭’ ‘왔다 갔다’ ‘말(동물)’ ‘인두’등 우리말과 똑같이 소리를 내어 쓰며 의미도 같음을느낀다.
몽골에 기간산업을 일으켜주자. 그리고 그곳에 러시아 연방에 흩어져 사는 고려인들에게 보금자리와 일자리를 주고 50년 후에 진정한 선진 강국에 함께 설수 있도록 해보자. 그들은 지금 애타게 우리의 손길을 지켜 볼뿐이다.
중국인들이 받아주지 않던 탈북자들이 갈 곳이 없어 고비사막을 맨발로 몽골국경을 넘어 갔을 때 그들은 ‘솔롱고스(무지개가 뜨는 나라 사람)’라 하여 따뜻하게 받아 주었다.
드라마 ‘대장금’을 번역할 때 자기나라에 없는 식재료를 이름붙이기 힘들었다는 나의 몽골 친구의 전화목소리를 오래전에 들었다. 그들은 지금 2개의 채널로 한국TV를 보고 있으며 실시간으로 컴퓨터에 접속하여 우리드라마를 즐기고 있다.
그곳 나담축제 때 입고나온 전투병들의 전투복과 민속의상들을 보면서 다양성과 아름다움에 감동하여, 나는 인터넷 카페에 ‘제3의 한류를 꿈꾼다면 나담축제에서 배워라!’ 라고 글을 올렸다.
빚쟁이 같은 나의마음을 아직도 “쯔 쯔 쯔..” 하며 몽골족과 우리에게만 사용하는 혀차기를 하며 고민에 빠진다. 나담축제 주경기장 한가운데에 그들과 관련이 없는 2008년 북경올림픽 광고탑이 서있는 것을 보고 나는 깜짝 놀라며 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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