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내 인생에서 재론의 여지가 없는 확실한 성공 하나를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사르트르와의 관계이다. 우리는 30년이 넘게 단 하루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않고 잠든적이 없다. 오랫동안 가까이서 지낸것이 우리가 대화를 통해서 갖게 되는 관심을 결코 줄어들게 하지는 않았다."
몽파르나스의 이 문학가 커플은 유럽 전체에 엄청난 빛을 발산했다. 두 사람 다 에세이와 소설로 성공을 거두었고, 지성인의 정직성과 정치적 참여 문제에서도 큰 힘을 발휘했다. 한마디로 작가와 여론 형성자로서 거의 뜻을 같이했던 커플인 것이다. 게다가 경쟁, 질투, 우월성으로 인한 다툼이 존재하지 않는 강한 사랑으로 결속되어 있기까지 했다. 그러한 싸움 대신 서로에 대해서 깊고 침착한 애정을 지니고 있었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서로에 대해서 상대방을 후원해 주고, 이따금 의견이 달라도 항상 일치된 목표를 이끌어 내고 있었다.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가 사망했을 때, 여론은 조화를 이루었던 이 모법적 커플에 대한 신화를 깨뜨리기 위해 뒤에 남겨진 편지와 사적인 기록들을 향해 덤벼들었다. 그 과정에서 여러가지 다양한 사실들이 발견되었다. 여러 번의 위기, 제 3자로 인한 관계의 불안함, 상실에 대한 두려움, 일탈에 대한 생각, 분노등이 존재했다. 하지만 모든 혼란은 결국에는 영향력이 미미했던 일시적인 사건에 불과했다. 그리고 20세기의 가장 지성적인 커플은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일 것이다.
그 이유는 두 사람이 저명 인사였으며 평생 서로에게 파트너였다는 사실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유일무이하게 성취했던 사랑과 자유, 결속과 독립, 상대방에 대한 성실과 독립의 결합에 있다.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는 1929년 대학에서 만나 사랑하게 되었으며 -- 그녀는 스물한 살이었고, 그는 스물네 살이었다 -- 일정 기간만을 함께 지내기 위한 계약을 맺었다. 즉, 2년 동안 함께 지낸 다음에 자신들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던 것이다.
그들은 의식적으로 공간을 분리해서 사용하고자 애썼다. 자신들의 사랑을 시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을 위한 기회를 더 늘리고, 또 다른 사람들과도 교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시험 기간이 지나기도 전에 이미 자신들이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당신과의 관계가 나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며, 다른 관계들은 그저 우연일 뿐이오" 라고 사르트르는 보부아르에게 고백했다. 하지만 그는 이 부수적인 ' 우연한' 관계들을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았고, 또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녀에게도 똑같은 자유를 허용했고, 그녀도 그 자유를 누렸다. 제 3자들이 그들의 관계를 파괴할 수 없었던 것은 아마 그 관계의 깊이와 특별함 때문일 것이다. 두 사람은 계약을 체결하면서 평생 서로에 대한 정직을 맹세했다. 그리고 이 맹세를 철저하게 지켰던 것 같다. 그런데 정직이란 무엇일까? 정직성을 요구하는 사람은 자신은 진실을 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누가 그와 같은 일을 완벽하게 양심적으로 행할 수 있을까?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도 정직에 대한 규정에서 다른 커플들과 마찬가지로 같은 문제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이점이 있었다. 그들은 이 문제가 철학의 근원적 수수께끼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철학자였고, 논쟁과 사고의 교환이 그들이 함께하는 생활의 매체였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해결책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았다. 또한 그들은 정치성에 대한 과감성과 사회적 실험에 대한 용기도 더 많이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경험하고 느꼈던 것을 자신들의 철학인 (자유에 대한 문제와 개별적 인간의 자기 구상이 중심 문제였던 ) '실존주의' 로 끌어들여 일과 삶을 그런식으로 끊임없이 교차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위기에 빠져 있을때도 함께 했고,
또한 바로 그 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보부아르와 사르트르 커플은 시민계급 출신이었다. 이 계급의 건방진 완고함이 두 사람을 평생동안 괴롭혔다. 사르트르는 아버지 없이 성장했고, 보부아르는 그 답답함에 일찍이 반항했던 엄격한 가톨릭 교육을 받고 자랐다. 두 사람은 대학 시절 학문 동지로서 개별적인 개인의 자유는 어디에 놓여 있는지에 대한 의문에 몰두하기도 했다. 그들은 결혼하지 않고 , 서로에 대한 성적인 성실성을 토대로 하지 않고 , 공동의 가정 및 자녀에 대한 계획을 세우지 않고 함께 지내기로 결정한 후, 자신들의 자유를 실행에 옮겼다. 결혼에 대해 전혀 알고 싶어하지도 않았고, 함께 거주하는 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상대방을 존칭으로 부르는 일을 단 한번도 중단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파리에서 항상 곁에 가까이 살면서
자신들의 감정, 생활, 사상, 작업에서 중요한 모든 사실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논의 했고, 조언과 행동으로써 변함없이 서로를 후원해 주었다. 그들의 신뢰와 친밀함은 세월이 흐르면서 더욱 두터워 졌고, 결국 그들은 곳곳에서 단숨에 유명해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사르트르가 더 중요한 사상가로 부각되다 보니, 그의 곁에서 버티는 일이 보부아르에게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가 자신보다 정신적으로 우월하다는 사실 때문에 반했지만, 그녀의 자기 존중은 탁월한 남자의 그늘 속에서 자신이 위축되는 것을 거부했다.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와 함께 지내기 위해서 사르트르에 필적하는 자신만의 고유한 양식과 목표들을 발전시켜야만 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하는 일이 쉽지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무엇보다도 사르트르가 그 자신에게 도전하고 영향을 줄 수 있는 상대를 원했을 때 그 난관을 타계해 나갔다.
두 사람은 교사로서 직업 경력을 시작했으나, 작가로서 그 가치를 인정 받고자 했다.
사르트르는 『 파리떼 』라는 희곡으로, 보부아르는 『 그녀가 와서 머물렀다 』 라는 소설로 각각 연극과 출판 시장에서 처음으로 큰 성공을 거둔 뒤에, 교사직을 그만두고 글 쓰는 일에만 전념하며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세계대전과 그 이후의 식민지 해방, 특히 알제리전쟁은 개인의 문제를 그들 사상의 중심으로부터 밀어내게 된다. 그들은 정치적인 변화를 겪으면서 좌파 활동에 참여한다. 그리고 보부아르는 스스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을 때, 더 이상 자신에게서 학문적 욕구를 위해 대학에서 공부하며 아내의 운명을 포기한 특권을 가진 여성의 모습만을 보지 않게 된다. 그녀는 전체로서의 여성을 생각하고 여성 모두를 보게 되면서 자신처럼 그렇게 결정할 수 있는 기회가 모든 여성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그녀는 억압이 존재한다는 것과, 남성과 여성, 즉 개별적인 개인들에 의한 힘의 차이가 단순한 의지에 의해서 거부되거나 수용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보부아르는 그 문제에 전념해서 『 제 2의 성 』을 집필한다. 이 책은 베티 프리던의 『여성의 신비 』와 더불어 새로운 여성 운동의 성서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를 넘어서는 문화사적인 업적으로 남게 된다. 보부아르는 이 작품으로
세계 문학가의 반열에 오른다. 장 폴 사르트르는 『 존재와 무 』로 철학적 신조를, 『가정의 바보 』로 문학적 신념을 각각 표현했다. 보부아르와 사르트르의 가정 생활은 곧 문학 작업이고, 그들의 자녀는 그들이 쓴 작품들이었다.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
" 나는 내 인생에서 재론의 여지가 없는 확실한 성공 하나를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사르트르와의 관계이다. 우리는 30년이 넘게 단 하루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않고 잠든적이 없다. 오랫동안 가까이서 지낸것이 우리가 대화를 통해서 갖게 되는 관심을 결코 줄어들게 하지는 않았다."
몽파르나스의 이 문학가 커플은 유럽 전체에 엄청난 빛을 발산했다. 두 사람 다 에세이와 소설로 성공을 거두었고, 지성인의 정직성과 정치적 참여 문제에서도 큰 힘을 발휘했다. 한마디로 작가와 여론 형성자로서 거의 뜻을 같이했던 커플인 것이다. 게다가 경쟁, 질투, 우월성으로 인한 다툼이 존재하지 않는 강한 사랑으로 결속되어 있기까지 했다. 그러한 싸움 대신 서로에 대해서 깊고 침착한 애정을 지니고 있었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서로에 대해서 상대방을 후원해 주고, 이따금 의견이 달라도 항상 일치된 목표를 이끌어 내고 있었다.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가 사망했을 때, 여론은 조화를 이루었던 이 모법적 커플에 대한 신화를 깨뜨리기 위해 뒤에 남겨진 편지와 사적인 기록들을 향해 덤벼들었다. 그 과정에서 여러가지 다양한 사실들이 발견되었다. 여러 번의 위기, 제 3자로 인한 관계의 불안함, 상실에 대한 두려움, 일탈에 대한 생각, 분노등이 존재했다. 하지만 모든 혼란은 결국에는 영향력이 미미했던 일시적인 사건에 불과했다. 그리고 20세기의 가장 지성적인 커플은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일 것이다.
그 이유는 두 사람이 저명 인사였으며 평생 서로에게 파트너였다는 사실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유일무이하게 성취했던 사랑과 자유, 결속과 독립, 상대방에 대한 성실과 독립의 결합에 있다.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는 1929년 대학에서 만나 사랑하게 되었으며 -- 그녀는 스물한 살이었고, 그는 스물네 살이었다 -- 일정 기간만을 함께 지내기 위한 계약을 맺었다. 즉, 2년 동안 함께 지낸 다음에 자신들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던 것이다.
그들은 의식적으로 공간을 분리해서 사용하고자 애썼다. 자신들의 사랑을 시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을 위한 기회를 더 늘리고, 또 다른 사람들과도 교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시험 기간이 지나기도 전에 이미 자신들이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당신과의 관계가 나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며, 다른 관계들은 그저 우연일 뿐이오" 라고 사르트르는 보부아르에게 고백했다. 하지만 그는 이 부수적인 ' 우연한' 관계들을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았고, 또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녀에게도 똑같은 자유를 허용했고, 그녀도 그 자유를 누렸다. 제 3자들이 그들의 관계를 파괴할 수 없었던 것은 아마 그 관계의 깊이와 특별함 때문일 것이다. 두 사람은 계약을 체결하면서 평생 서로에 대한 정직을 맹세했다. 그리고 이 맹세를 철저하게 지켰던 것 같다. 그런데 정직이란 무엇일까? 정직성을 요구하는 사람은 자신은 진실을 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누가 그와 같은 일을 완벽하게 양심적으로 행할 수 있을까?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도 정직에 대한 규정에서 다른 커플들과 마찬가지로 같은 문제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이점이 있었다. 그들은 이 문제가 철학의 근원적 수수께끼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철학자였고, 논쟁과 사고의 교환이 그들이 함께하는 생활의 매체였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해결책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았다. 또한 그들은 정치성에 대한 과감성과 사회적 실험에 대한 용기도 더 많이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경험하고 느꼈던 것을 자신들의 철학인 (자유에 대한 문제와 개별적 인간의 자기 구상이 중심 문제였던 ) '실존주의' 로 끌어들여 일과 삶을 그런식으로 끊임없이 교차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위기에 빠져 있을때도 함께 했고,
또한 바로 그 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보부아르와 사르트르 커플은 시민계급 출신이었다. 이 계급의 건방진 완고함이 두 사람을 평생동안 괴롭혔다. 사르트르는 아버지 없이 성장했고, 보부아르는 그 답답함에 일찍이 반항했던 엄격한 가톨릭 교육을 받고 자랐다. 두 사람은 대학 시절 학문 동지로서 개별적인 개인의 자유는 어디에 놓여 있는지에 대한 의문에 몰두하기도 했다. 그들은 결혼하지 않고 , 서로에 대한 성적인 성실성을 토대로 하지 않고 , 공동의 가정 및 자녀에 대한 계획을 세우지 않고 함께 지내기로 결정한 후, 자신들의 자유를 실행에 옮겼다. 결혼에 대해 전혀 알고 싶어하지도 않았고, 함께 거주하는 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상대방을 존칭으로 부르는 일을 단 한번도 중단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파리에서 항상 곁에 가까이 살면서
자신들의 감정, 생활, 사상, 작업에서 중요한 모든 사실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논의 했고, 조언과 행동으로써 변함없이 서로를 후원해 주었다. 그들의 신뢰와 친밀함은 세월이 흐르면서 더욱 두터워 졌고, 결국 그들은 곳곳에서 단숨에 유명해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사르트르가 더 중요한 사상가로 부각되다 보니, 그의 곁에서 버티는 일이 보부아르에게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가 자신보다 정신적으로 우월하다는 사실 때문에 반했지만, 그녀의 자기 존중은 탁월한 남자의 그늘 속에서 자신이 위축되는 것을 거부했다.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와 함께 지내기 위해서 사르트르에 필적하는 자신만의 고유한 양식과 목표들을 발전시켜야만 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하는 일이 쉽지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무엇보다도 사르트르가 그 자신에게 도전하고 영향을 줄 수 있는 상대를 원했을 때 그 난관을 타계해 나갔다.
두 사람은 교사로서 직업 경력을 시작했으나, 작가로서 그 가치를 인정 받고자 했다.
사르트르는 『 파리떼 』라는 희곡으로, 보부아르는 『 그녀가 와서 머물렀다 』 라는 소설로 각각 연극과 출판 시장에서 처음으로 큰 성공을 거둔 뒤에, 교사직을 그만두고 글 쓰는 일에만 전념하며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세계대전과 그 이후의 식민지 해방, 특히 알제리전쟁은 개인의 문제를 그들 사상의 중심으로부터 밀어내게 된다. 그들은 정치적인 변화를 겪으면서 좌파 활동에 참여한다. 그리고 보부아르는 스스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을 때, 더 이상 자신에게서 학문적 욕구를 위해 대학에서 공부하며 아내의 운명을 포기한 특권을 가진 여성의 모습만을 보지 않게 된다. 그녀는 전체로서의 여성을 생각하고 여성 모두를 보게 되면서 자신처럼 그렇게 결정할 수 있는 기회가 모든 여성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그녀는 억압이 존재한다는 것과, 남성과 여성, 즉 개별적인 개인들에 의한 힘의 차이가 단순한 의지에 의해서 거부되거나 수용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보부아르는 그 문제에 전념해서 『 제 2의 성 』을 집필한다. 이 책은 베티 프리던의 『여성의 신비 』와 더불어 새로운 여성 운동의 성서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를 넘어서는 문화사적인 업적으로 남게 된다. 보부아르는 이 작품으로
세계 문학가의 반열에 오른다. 장 폴 사르트르는 『 존재와 무 』로 철학적 신조를, 『가정의 바보 』로 문학적 신념을 각각 표현했다. 보부아르와 사르트르의 가정 생활은 곧 문학 작업이고, 그들의 자녀는 그들이 쓴 작품들이었다.
다이아몬드 하우스, 드미르
http://www.demir.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