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을 알고 보니

김초연2008.02.01
조회98
사실을 알고 보니

 

 김초연 여사가 외출을 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아파트 근처 시장에 들러 저녁 찬거리를 사가지고 집에 도착한 시각은 정확히 오후 네 시였다. 집 문의 자물쇠 구멍에다 열쇠를 꽂으면서 손목시계를 보니 시계 바늘들이 그렇게 백 도 정도, 벌어졌다면 벌어졌고 가까워졌다면 가까워져 있었다. 인제 잠시 후면 시계 바늘들이 또 한차례 오후 네 시대에서 랑데부를 하게 된다는 사실을 김초연 여사는 다시금 명확하게 인식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집안에서 울려퍼지는 전화기의 신호음이 김초연 여사가에게 빨리 들어오라고 재촉을 해대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정확히 네 시에 맞춰 전화를 거는 건지나 아닌지 모르겠네. 조금은 신기해지는 느낌을 삼키며 김초연 여사는 서둘러 집에 들어간 다음 저녁 찬거리들을 소파에다 놓고 거실의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여보세요" 하기가 바쁘게,

"거기 최대룡씨 댁 맞는교?"

투박하고도 뻣뻣한 경상도 사나이의, 그러나 점잖을 빼는 듯한 음성이 김초연 여사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네, 그런데요."

"아, 그럼, 지금 전화 받으시는 분은 최대룡 선생의 부인되시는 분이신가예?"

"네, 그런데요."

처음 듣는 목소리인 데다가 이상한 낌새 같은 것이 느껴져서 김초연 여사는 자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예…. 저어, 이렇게 전화를 드려서 차암 죄송한데요. 저는요, 사모님을 한번 만나서 중요한 얘길 좀 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시간 좀 내주실 수 있겠는교?"

"댁이 누구신데 그러시죠?"

"저는요, 최대룡씨 댁 사모님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제 신분은 중국음식점 주인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감히 여사님을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어머머!"

"왜 그리 놀라십니꺼? 그렇게 놀라지 마이소. 여사님."

그러나 그 순간 김초연 여사는 머리에 퍼뜩 떠오르는 게 있어서 상대방 남자가 누구라는 것을 훤히 알 수 있었다.

"여보세요. 최말룡씨."

남편이었다. 남편이 장난 전화를 한 것이었다.

"얼라, 너무 쉽게 들통이 났는디."

아내까지 처음엔 감쪽같이 속을 정도로 경상도 사나이를 흉내내는 음성 연기만큼은 천하 일품이었던 남편 최말룡씨가 아쉬운 듯 쩝쩝 입맛을 다셨다.

"그렇게 재능을 발휘한다고 누가 속을 줄 알아요?"

김초연 여사는 의기양양해지는 기분이었다. 남편에게 그런 재주가 있다는 것이 신기할 뿐 아니라 남편의 그런 재주를 오늘에서야 우연히 처음 알게 된 사실도 신기했고, 자신이 남편에게 말한 '재능'이라는 표현도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김초연 여사는 다음 순간 남편이 왜 오늘 갑자기 그런 재주를 처음으로, 그리고 왜 그런 식으로 발휘했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고 절로 긴장이 되었다.

"허 참, 내가 귀신같이 실력을 발휘허겄다고 칼을 뺐는디, 당신이 어떻게 나라는 걸 그렇게 금방 알었디야?"

"당신 모성 연기는 거의 완벽했어요. 허지만 내 앞에서는 안 통해요."

"그려. 맞어. 당신헌티는 통하지 않은 게 분명헤졌어. 그런디 뭔 귀신을 삶어먹었길래 그렇게 나보다두 더 귀신 같디야?"

"내가 귀신 같은 게 아니예요. 당신이 실수를 허신 거지."

"내가 실수를 헸다구?"

"그럼요."

"뭐라나, 그게?"

"최말룡이라는 자신의 본 이름을 놔두고 스스로 자신을 최대룡이라구 부르는 당신의 그 의지를 이해하는 사람이 마누라밖에 더 있남요?"

"그럼, 내가 이번에두 내 이름을 최대룡이라구 불렀남?"

"그럼요. 그래서 곧 눈치를 챈 거라구요."

"이크, 젠장에…. 일생 일대의 실수가 될 것 같구먼."

"그러게 자신의 이름을 그렇게 함부로 바꿔 부르는 게 아니예요."

김초연 여사는 또 한번 의기양양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남편에게 미안해지는 마음도 들었다.

남편 최말용 씨는 몸과 마음이 헌걸스럽고 평퍼짐한 것과는 달리 자신의 이름에 대해 일종의 콤플렉스 같은 것을 지니고 있었다. 아버지가 이름을 잘못 지어주셨다며, 자신은 결코 말룡(末龍)이가 아니라 대룡(大龍)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말룡인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위로 형님이 세 분 있는데, 맨위로부터 이름이 일룡, 차룡, 삼룡이니, 넷째에다 막내인 그로서는 도리없이 말룡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세상 고르지 못함을 증명하느라 내리 아들 셋을 낳고 나서 이번에는 제발 딸이기를 빌고 바라며 또 하나 자식을 낳고 보니 역시 아들인지라 역심이 떨어진 나머지, 딸이고 뭐고 다시는 생산을 하지 않을 작심을 하고 넷째 아들에게 지어붙인 이름이 바로 말룡이라는 것이었다.

아무튼 최말룡씨는 자신이 태어난 순간부터 아버지께 역심을 안겨 주었다는,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사실도 떨떠름한 사항이었고, 말룡이라는 이름은 더더욱 불만 사항이었다. 막둥이라는 뜻으로보다는 끝막음을 한다는 뜻으로, 그렇게 이름을 쉽게 공도 들이지 않고 지었다는 것이 영 섭섭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그는 어느 날부터 자신을 스스로 대룡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대룡이 너무 거창하다며 장룡(長龍)으로 부를까 하였으나 그건 아무래도 장남의 이미지를 지니는 것이라 포기를 하고 그냥 대룡을 채택한 것이었다. 그러나 형님 세 분이 모두 시퍼렇게 살아 있는 마당에 그것을 널리 선포하거나 공식적으로 써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또 '박차고나온힘셈이' 식의 부르기 불편한 이름이 아닌 담에야 아버지가 지어주신 별 무리 없는 이름을 자식이 멋대로 파기하여 호적 이름까지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그가 스스로 자기 이름을 대룡으로 바꿔 부르는 것은 가까운 친구들과 마누라 앞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는 몸꼴이나 성질로 봐서 말룡보다는 대룡이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정말 그는 헌헌장부다운 데가 있었다. 그것은 누구보다도 아내인 김초연 여사가 진정하는 인정하는 사항이었다.

중매 반 연애 반으로 인연이 지어져서 육년 전 결혼을 한 그날, 신랑인 그가 새각시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나이 차가 십년이나 나니께, 내가 앞으루 살면서 더러 더러 반말을 헤두 그냥 이해헐 만허겄지유?"

그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쿡,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김초연 여사는 순식간에 그런 저런 일이 떠올라서 또 쿡, 작게 웃음소리를 내었다.

"왜 그려? 당신 지금 전화에다 대고 웃는 거 아녀? 내 실수가 재밌어서 그러남?"

"솔직히 말해서 그래요.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예요."

"이거 완전히 내 작전이 초장에 삼천포로 빠져버렸구먼."

"그런데 여보,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왜 느닷없이 그런 장난을 하신 거예요? 이유가 뭐예요, 도대체?"

"그려. 당신이 물었으니께 내 얘기허지. 당신, 내가 아까 경상도 말루다가 중국음식점 주인 어쩌구 헸을 때, 냉큼 생각나는 사람 읎었남?"

"글쎄요…."

김초연 여사가 잠시 기억을 더듬자니 남편 최말룡씨가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것에 대헤서는 좀 둔감허구먼. 어제 저녁에 우리가 애들 데리구 가서 저녁 먹은 집 있잖어. 아파트 근처 만선장이라는 중국집."

그제서야 김초연 여사는 명료히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네. 그러고 보니 생각이 나요. 그 만선장이라는 중국음식점 주인…."

"당신, 그 사람을 어제 처음 본 게 아니지?"

"무슨 뜻이예요, 그게?"

"기억을 더듬어서 한번 대답헤 봐요."

"며칠 전에도 그 사람을 봤어요. 당신 처제가 와서 중국음식 먹고 싶다고 하길래, 밖에 나가기 싫어서 그 만선장으로 주문을 했더니 그 주인 아저씨가 직접 배달을 해 주었어요. 그때 잠시 봤어요. 근데 그게 왜요?"

"역시 그랬군."

"도대체 왜 그러세요? 대체 무엇 땜에…."

김초연 여사는 정말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자칫하면 기분이 매우 나빠질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남편의 다음 말은 더더욱 뜻밖이었다.

"아무래도 그 사람이 당신을 연모허는 것 같어."

"네?"

그 순간 김초연 여사는 너무 뜻밖이면서도 그 '연모'라는 말이 자못 낭만적인 낱말이어선지 살큼 감미로운 기분이 기어들었다.

"아무래두 그 사람이 당신을 사모하는 것이 분명혀. 어제 내가 그것을 느꼈어."

물론 얼굴이야 보이지 않지만 남편 최말룡씨는 자못 심각한 표정인 것 같았다.

"무엇에 근거를 두고 그런 말을 하세요, 당신?"

"어제 당신을 바라보는 그 사람의 눈빛이며 친절을 가장허는 것 같은 짓거리들에서 이상헌 것이 나헌테 느껴졌다구. 증말 그 사람 수상혀. 당신을 짝사랑허구 있는 게 틀림없다구."

"아니, 지금 왜 그래요, 당신?"

그러면서도 김초연 여사는 왠지 싫지 않은 느낌이었다. 연모, 사모, 짝사랑…거기에 해당되는 낱말이 다 나온다 싶고, 남편의 표현법이 풍부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당신은 그 사람의 태도에서 이성헌 느낌 안 받었남?"

"아뇨. 전혀…"

"탕수육이 떨어져갖구 아이들이 아쉬워허는 것 같으니께, 더 시키지두 않었는디 얼른 써비스루 더 만들어다 갖다주구 헌 디서, 그러구 아무래두 우리 가족 쪽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은 태도들에서 증말 이상헌 점을 못 느꼈느냐구?"

"그거야 참 친절한 집이다, 써비스며 음식 인심이 아주 후한 집이다, 이런 음식점도 있구나 하는 정도였지, 그게 뭐…."

"그려?"

"그거야 사람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구, 있어서 좋은 일 아니예요?"

"그거야 그렇지먼, 자꾸만 당신을 바라보는 그 사람 눈빛은 증말루 이상했었어. 뭔가가 있었다구. 당신은 그런 것두 뭇 느꼈남?"

"그 사람 눈에 내가 유달리 매력적으로 보였나 보죠, 뭐. 호호."

"웃지 말어요. 난 지금 상당히 신경이 쓰인다구. 이 험악헌 세상에…."

"어머머."

"그 사람, 그러면 안돼. 나랑 똑같이 처자가 있는 처지에…. 지 마누라헌테 미안허지두 않나, 나 원…."

그 순간 김초연 여사는 남편에게 고마운 느낌이 들었다. 자기 마누라에 대한 보호 본능의 민감한 작용일 수도 있고, 그만큼  그가 아내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는 감미로운 생각이 가슴속에서 은은하게 번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오늘은 이렇게 일찍 전화를 거신 거예요?"

그녀는 한결 나긋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아까 두 시와 세 시에도 전화를 걸었는디, 집이 비었더면 그려. 그러구 네싯대 시계 바늘 랑데부 때를 기다릴 수가 있어야지. 그래 갖구 지금쯤은 당신이 집에 들어와 있을 것 같아서…."

김초연 여사는 한결 감미로워지는 기분이었다. 남편 최말룡씨가 회사 사무실의 자기 자리에 있건 어디에 있건 간에 퇴근 시간 좀 전인 네싯대에, 시계의 큰 바늘과 작은 바늘이 다시 랑데부를 할 즈음에 집의 아내에게 전화를 한 번씩 걸기로 한 것은 신혼 때 부부간에 약조를 한 일이었다. 결혼 생활 육 년 동안 남편은 그 약속을 성실하게 지켜오고 있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실행을 한 것은 아니지만, 지킨 날이 지키지 않은 날보다 월등히 많은 것이었다. 아무리 결혼과 함께 직장을 그만두고 오로지 가정을 지키는 주부라지만 요새 세상에 젊은 여자가 오후 네싯대에 꼭꼭 집에만 붙어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전화기에다 자동 응답기를 설치했는데, 남편 최말룡 씨는 그 자동 응답기도 착실하게 활용하는 것이었다.

"고마워요, 여보."

가슴에 번지는 행복감 때문에 김초연 여사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그건 그렇고 말여. 오늘 저녁에 또 한번 그집에 가서 외식을 해 봅시다."

"왜요?"

"그 만선장의 주인이 오늘도 그럴라나, 또 그런다면 도대체 그 이유가 뭔가를 좀 확인해 봐야겄어. 뭔가를 미연에 방지허는 것두 생각헤 볼 수 있는 일이니께…."

"당신두 참…. 당신 너무 과민하신 거 아니예요?"

"하여간 저녁 짓지 말구 글루 나오너. 여섯 시에 그 집이서 만나요."

"알았어요. 저녁 찬거리 장만한 게 아쉽긴 하지만…. 아이들은 이모가 오전에 와서 만리포에 데리고 갔는데, 그 안에 올 거에요."

김초연 여사는 송수화기를 내려놓고 나서 혼자 살풋이 미소를 지었다.

 

중국음식점 만선장의 주인은 삼십대 중반의 인상이 좋게 생긴 사람이었다. 중국음식점이라고 해서 주인이 모두 중국 사람인 것은 아니듯이, 명백히 한국 사람인 그는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친절하고 싹싹했다.

그리고 그의 그런 태도는 김초연 여사 앞에서 좀더 유난스러운 것 같았다. 또한 어제 최말룡씨가 간파한 그 이상스런 눈빛과 행동거지가 오늘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것을 머리에 담고 보아서 그런지, 김초연 여사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어딘가 모르게 예사스럽지가 않은 것이었다.

역시 탐색의 눈빛으로 그것을 확인한 최말용 씨가 음식을 다 먹고 나서 만선장의 주인을 불러 조용히 말을 건넸다.

"좀 미안헌 질문 하나 허겄습니다. 어제부터 우리 집사람을 보시는 눈이 좀 유난스러운 것 같고, 우리 가족에게 지나치게 친절허구 써비스를 잘헤 주시는 것 같은디, 무슨 까닭이라두 있습니까?"

그러자 만선장의 주인이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어이쿠, 제가 무례하고롬 그랬구먼예. 제가 그랬다캐도 오해는 하지 마이소예. 다른 뜻은 없습니더. 제가 여기 와서 이 음식점을 하면서 선생님 사시는 아파트로 음식 배달을 참 많이 허거든예. 종업원들이 주로 하지만 제가 직접 하는 때도 많습니더. 그런데예, 음식을 시켜먹은 집들이 백이면 백, 비운 음식 그릇들을 그냥 문 밖에다 내놓습니더. 우리 집은 환경보호 차원에서 일회용 그릇들을 절대루 안 쓰는데에, 빈 그릇을 닦아갖구서 내놓는 집을 여태껏 내사 한 번도 못봤습니더. 그런데 며칠 전에 선생님댁 사모님이 처음으로 우리 집 음식을 시켜 드셨는데예, 나중에 그릇 가지러 가서 보이까네, 그릇들을 전부 깨끗이 닦아서 내놓아주셨습니더. 정말이지 제가 그걸 처음 보았어예. 그래서어, 그게 하도 신기하고 고마워갖고, 제가 사모님 얼굴이 환히 기억나서 자꾸 쳐다본 겁니더. 지금 세상에도 저런 젊은 여자 분이 계시다카는 게 도무지 믿기지가 않기도 해서…."

"그래요? 허허, 그거 별것두 아닌 일을 가지구…!"

그 순간 최말룡씨는 기분이 찢어지게 좋은 모양이었다. 만선장 주인의 손을 덥썩 잡더니,

"당신, 오늘 나허구 술 한잔 헙시다. 이리 앉어요. 허기는 우리 마누라가 좀 유별난 데가 있어요. 어디 놀러갔다가 돌아올 때마다 우리 쓰레기를 꼭꼭 집으루 챙겨오는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요. 그런디, 당신 눈두 보통이 아니구먼 그려."

결국 최말룡씨는 만선장 주인과 함께 고량주 두 병을 거뜬히 비우고 일어섰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내 김초연 여사의 허리를 껴안는 남편 최말룡 씨의 팔에는 더욱 힘이 실려 있었다. *

                                                (1995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