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버필드 Cloverfield

한상원2008.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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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늘 불안 속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를 보는 내내 생각했다. 영화 속의 괴물은 뉴욕을 강타하지만, 우리는 이미 비슷한 광경을 9.11 테러 때 경험하지 않았던가? 그 이후 전 세계는 테러위협에 시달려 왔다. 언제 어디서 자살폭탄이 터지지는 않을지, 내가 탄 버스가 폭발하지는 않을지, 지하철 휴지통에 폭탄이 설치되지는 않을지(실제로 지하철 휴지통은 테러위험을 이유로 철거됐다). 어디 테러뿐이랴? 이라크에서 벌어진 전쟁 역시 국가가 저지른 명백한 테러행위임이 자명하거니와, 북-미간의 긴장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한반도에서 핵전쟁이 벌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한다.

 

이뿐 아니다. 위기의 자본주의가 매일같이 간신히 자신을 지탱하는 모습은 암초에 부딪힌 타이타닉호를 보는 것처럼 아슬아슬하다. 연일 폭락하는 주가, 머리를 움켜쥐고 주식시세표를 들여다보는 투자가들, 목을 매단 펀드회사 직원들을 보라. 내 자산이 반토막이 나지는 않을지, 1929년의 악몽이 재현되지는 않을지 우리는 항상 불안해 하며 살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최근 들어 우리는 환경대재앙의 두려움 속에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50년만의 중국의 대 폭설 사태를 보라. 한겨울에도 30도 이상의 고온을 유지해야 할 중동의 사막에 폭설이 내리는 것을 보라! 영화 가 바로 우리의 '내일'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거대한 쓰나미가 인류를 재앙으로 몰고 갈 수 있다는 불안감 속에 이거 어디 두 다리를 뻗고 잘 수 있을까?

 

불안과 두려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정신상태를 요약하는 키워드다. 전쟁, 대학살, 경제공황, 환경 재앙의 위협 속에서 매일같이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도감을 느껴야 하는 우리를 보라. 이러한 상황 속에서 누구나 정신착란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루쉰의 소설 에 등장하는 광인은 주변인들이 자신을 죽이고 살점을 뜯어먹을 것이라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다.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 에서는 주변인들이 모두 악마이며 내 아이를 납치해갈 것이라는 두려움이 영화의 주요 모티브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히스테리 환자. 내일에 대한 확신 없이 불안과 공포 속에서 애써 태연함을 유지하는 환자.

 

그래서 어쩌면 는 사실주의 영화인지도 모른다! 쫓겨가다니며 두려움에 떨고 있는, 실체 모를(영화가 끝날 때까지 괴물의 정체가 무엇인지 밝혀지지 않는다) 위협에 대해 무기력하게 도망다닐 수밖에 없는, 절대적 공포 속에서 담담하게 종말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인 것이다. 에서 우리에게 공포감을 주는 '대상'은 중요하지 않다. 괴물의 자리에 외계인, 쓰나미 등 다른 요소를 삽입했더라도 영화에서 달라질 것은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대상이 누구냐가 아니라, 우리가 이미 '그 무엇'에 쫓기며 공포에 떨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인 것이다!

 

는 하나의 영상 혁명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영화 밖의 관객이 아니라 영화 속 등장 인물 중 한 명이 된다. 괴물의 공격에 맞서 숨어다니고 피해다녀야 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극도의 체험감이다. 여기서 카메라는 느긋하게 괴물과 인간의 대결을 바라보는 제3자가 아니다. 카메라는 공포에 떨고 있는 나 자신의 시선인 것이다. 영화를 보고나서 올라오는 울렁증은 내가 이미 그 현장에 있었던 것 같은 사실감을 극대화하는 효과를 낸다.

 

롤로코스터를 한 시간 내내 타는 재미를 주는 영화다. 그러나 영화를 보다가 게워낸다 해도 하등 창피할 게 없다. 당신이 모르고 있었을 뿐. 당신은 '이미' 구역질나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니까! 구역질이 멈출 때 쯤 자본주의라는 '괴물'이 스멀스멀 당신을 노릴테니까!

 

p.s: 이 영화를 보러 가면서 팝콘을 사들고 가는 미친 짓을 두 번 되풀이하는 가련한 사람은 제발 없기를! 내가 토하지 않은 것은 오로지 정신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