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빈민법(1601년)
영국의 엘리자베스 빈민법은 최초로 구빈에 대한 국가(지방정부)의 책임을 명시했다는 점에서 종전에 산발적이었던 구빈법들을 집대성한 최초의 법이자 복지국가를 향한 국가개입의 전조로서 평가되는 법이다. 이와 같이 빈민문제에 대해 정부가 대응하게 된 이유는 농민을 농촌에서 내몬 인클로저 운동과 흉작, 또한 중상주의시대의 국가의 부와 연관된 귀금속의 대량유입으로 인한 극심한 인플레로 인해 부랑자가 증가한 것이다.
이는 정부 당국이 실업의 원인이 부랑자의 게으름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에 이 전까지의 구빈책임은 교구(구빈행정의 기본단위)의 교회가 졌으나 이 법 이후 구빈의 책임을 교회가 아닌 정부(지방정부)가 최초로 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지방기금에 의한, 지방관리에 의한 지방빈민에 대한 구빈행정의 원칙이 세워졌고, 교구단위로 주민들의 구빈세를 재원으로 사용하였으며, 노동능력의 유무에 따라 빈민을 노동능력자, 노동무능력자 및 빈곤아동으로 세가지로 분류하여 노동능력자에게는 교정원, 작업장에서 강제노역을 시키고 자선 및 이주를 금지하거나 제한하였다. 노동무능력자에게는 자선에 자선원, 구빈원에서 최저한의 구제를 제공하였으며, 거주할 집이 있으면 원외구제를 병행하였다. 그리고 가족책임을 우선적 원칙으로 삼았기 때문에 보호할 가족이 있을 경우에는 구제의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빈곤아동은 도제로 삼는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이 법은 빈민들을 분류처우하는 방침은 노동력을 조직적으로 활용하고자 한 것으로써 생산력 향상과 관리의 편의를 도모한 법으로써 빈곤아동들을 노예에 가까운 비참한 대우를 받았으며, 무보수의 구빈감독관은 불성실, 부패한 경우가 있었고, 지방정부의 재정적 능력 및 실천의지가 부족하여 이 법이 실현되지 못하였으며, 또한 빈민을 구제할 능력이 있는 교구는 극소수였고, 대부분 교구가 구빈을 자체적으로 해결하였다. 그리고 교구의 구빈비용의 부담은 새로운 부양자의 발생을 꺼려 교구 내 결혼을 가능한 억제하여 다수의 사생아가 발생하는 문제를 야기하였다.
이렇듯 이 법은 수급자의 권리에 대한 인식보다는 이들의 통제에 목적이 있었으며 잔여적 모형의 전형이었다.
엘리자베스빈민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