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2005년 목회와 신학이라는 책에 10회 연재되었던 임영수 대표님의 글 중에서 형제자매님들께 도움이 될만한 내용들을 발췌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여러분께 이 글이 신앙 안에서 행복한 삶을 이뤄가시는데 도움이 되길 바라며 남깁니다. 중요하고 좋은 내용이니 길다고 중간에서 포기하지 마시고 끝까지 읽으시고 스크랩 많이 해가셔서 널리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제목: 자신과의 관계를 맺는 기술
우리는 자신을 꾸미는 데 아주 능숙합니다. 또 자신을 숨기는데도 아닌 척하는데도 상당히익숙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작 자신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대하는 데 너무 서툽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매우 미숙합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좀더 원숙하게 나아가려면 자신에 대해 보다 자연스러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꾸미고 숨기며 자신의 모습을 힐끗힐끗 엿보면서 외면해 버린다면 하나님과의 만남은 더욱 어려워질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및 이웃과의 관계를 잘 이뤄가려면 먼저 자신과의 관계를 잘 이뤄가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기술은 테크닉이 아닌 아트를 말합니다. 통합적으로 잘 만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신을 잘 대할 뿐 아니라 사람, 자연, 하나님과의 관계도 잘 이뤄가는 것을 하나의 기술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흔히 우리가 자신을 대하는 기술에서 천편일률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은 억압입니다. 스스로 숨기거나 부정하면서 아닌 척하는 것을 주된 방법으로 하기 때문에 이웃과의 관계도 억압하고 단칼에 거절해 버립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런 스타일로 일관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방언이라도 해서 무언가 터트려 보려고 은사에 대한 집착으로 소리를 지르는 게 고작입니다. 그런 것들에서 벗어나 원숙한 관계로 들어가려면 우선 자신을 잘 대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말하는 경건이란 주로 엄격주의로 이해됩니다. 하지만 경건은 자신을 학대하는 식의 엄격주의가 절대 아닙니다. 경건은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삶을 일컫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면 자신의 이상과 기대대로 만든 스케줄에 따라 스스로 잘 지켜 가면 나는 좋은 사람이다 라는 인식을 합니다. 그러다 실수를 하면 자신을 미워하며 지금까지 잘한 일도 모두 하찮게 여기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실수했을 때 그것을 객관화시켜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의 신앙은 상당히 성숙한 상태입니다. 여기서 객관화시킨다는 것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은 실수할 수밖에 없지만 실수 자체가 자신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상처와 허물과 실수가 있는 자신과 함께 살지 않으려 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을 자꾸 거절 하면서 이상 속의 자신과 일치시키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면 아무리 예수님을 믿은 연한이 오래되었다고 하더라도 항상 오락가락하게 됩니다. 일정한 진보를 보이는 듯하다가도 일순간 무너져 내립니다. 이것이 반복되다 보면복음에서 말하는 인간 변화를 믿지 못하고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상처, 허물, 실수가 있는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저는 젊은 시절에 신앙생활이 조금 되는 듯하다가도 일순간에 무너지는 일을 여러 번 경험하면서 그때마다 경구 같은 것을 써놓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항목들을 철저히 지켜 나가도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것들이 무너지곤 했습니다. 그런 현상들이 꽤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좌절감과 신경질 등이 저를 상당히 괴롭혔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떤 원칙이나 이상 또는 스케줄에 자신을 집어 넣는게 아니라, 허물 많고 상처투성이인 자신이 주님과 함께 하루하루 걸어가는 것임을 터득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뒤로 돌아가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무엇인가 잘못하면 그 자리에서 '아, 이거 내가 잘못했구나. 나는 이 잘못과 동일한 사람이 아니야. 그러나 나는 이럴 수가 있어' 라면서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며 그 자리에서 다시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후 계속해 저의 삶에 진보가 있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진보가 있는 삶을 살아가라는 말을 아주 새롭게 이해하면서 저의 약점들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달리, 사람들과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자신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합니다. 영성생활은 하나님과의 관계인 동시에 자신과의 관계입니다. 자신과의 화해 없이 하나님과 화해하기 어렵고 하나님과의 화해 없이 자신과의 화해 역시 힘듭니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평가를 스스로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나 그의 행동에 의해 영향을 받습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좋은 사람이라고 하면 우리는 곧 좋은 사람이고, 나쁜 사람이라고 하면 곧 깊은 절망감에 빠집니다.
남의 칭찬이나 비난을 객관화시키지 못하고 철저하게 주관화시킨다면 거기에 놀아나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이 남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니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저력이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삶에 중심에서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하는데, 항상 외부의 영향에 의해 우리의 실존자체가 송두리째 무너지기도 하고 세워지기도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계실 자리가 없습니다.
늘 혼란 속에서 허덕이게 됩니다. 하루에도 몇 번의 희비애락과 증오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외적 요인에 의해 자신을 규정하고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은 자신의 실수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침해받지 않는 자신만의 내적자유공간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 입니다.그의 실존자체가 타율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에 피곤하고 마음의 평강을 지니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조차 그런 공간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신앙은 감정의 변화와 함께 조석으로 편차가 너무 심합니다.
상처와 실수와 죄를 곧 자신으로 여길 때 우리는 스스로를 추하고 나쁜 사람으로 단정해 버립니다. 그래서 한 순간에 의인이고 선한 사람이었던 자신은 안개처럼 사라지고 깊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그런 사람에게 신앙의 진보는 없습니다. 자신의 자아만 맴도는 악순환의 연속일 뿐입니다. 그런 사람은 스스로 믿음이 있다고 자부할 때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든지, 아니면 자신의 이상이라고 여기는 수준의 삶을 계속 유지해 가야합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중심적 기준에서 내린 평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만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안에 계시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함께하는 그 중심이 확보돼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칭찬이 전부 자신의 표상이라면, 그 표상은 모두 허구이고 우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희망적인 복음을 듣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칭찬, 인정, 업적뿐 아니라 비방, 실수, 정죄, 상처에 의해 규정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에 의해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자유로운 영적공간을 발견하는 희망의 복음이 있습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부정적인 생의 역사,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낼 수 없는 상처, 알려지면 체면에 손상이 가는 실수, 다른 사람들을 실망시킬 수 있는 끊지 못한 부끄러운 습관 등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나입니다. 남들이 칭찬하는 '나' 는 '나'가 아닙니다. 또한 남들에게 비난받는 '나' 도 '나' 가 아닙니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 자신을 용납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근거는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으로 있을 때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를 저주의 자리에서 나오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이르게 될 소망의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현재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규정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멸망의 자녀로 규정하시지 않고 삶의 최종 목적지를 하나님의 보좌로 초대된 사람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나는 참 부족하고 상처가 많다'는 고백을 억지로 숨기거나 인위적으로 바꾸지 않을 뿐 아니라 이것으로 기분 나빠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며 받아주신다. 하나님께서 나를 더욱 성숙 시키신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믿지 못할 때 자꾸 과장이 나오고 크게 보이려고 애를 씁니다. 또한 크게 보이는 것을 붙잡지 못했을 때 열등의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것 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내가 못난 인간인데도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셨다'고 고백하게 됩니다.기독교인의 감사는 남들보다 더 잘되었다는 데서 오는 상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현재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용서되고 받아들여지며, 화해되고 치유되며, 상실한 것을 보상받고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지옥이 아니며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입니다. 그런 희망과 새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은혜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어떤 외적인 것들로부터 침해받지 않을 수 있는 자유의 공간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 공간에서 자신의 그림자를 잘라낸 존재가 아닌 자신의 그림자를 그대로 갖고 있는 우리를 만나게 됩니다. 이런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을 그림자와 함께 동고동락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게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그림자는 우리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제시해 주는 메시지가 됩니다.
우리는 그 공간에서 자신의 분노. 공포, 죄, 실수, 상처를 숨기거나 판단하지 않고 그저 바라봅니다. 즉 자신과 동일화시키지 않고 객관화시킵니다. 여기서 공간은 주님과 함께 이뤄가는 곳을 말합니다.
모든 기독교인 필독하실것 - 자신과의 관계를 맺는 기술
임영수 모새골 대표(전 영락교회 담임목사님)의 글
이글은 2005년 목회와 신학이라는 책에 10회 연재되었던 임영수 대표님의 글 중에서 형제자매님들께 도움이 될만한 내용들을 발췌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여러분께 이 글이 신앙 안에서 행복한 삶을 이뤄가시는데 도움이 되길 바라며 남깁니다. 중요하고 좋은 내용이니 길다고 중간에서 포기하지 마시고 끝까지 읽으시고 스크랩 많이 해가셔서 널리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제목: 자신과의 관계를 맺는 기술
우리는 자신을 꾸미는 데 아주 능숙합니다. 또 자신을 숨기는데도 아닌 척하는데도 상당히익숙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작 자신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대하는 데 너무 서툽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매우 미숙합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좀더 원숙하게 나아가려면 자신에 대해 보다 자연스러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꾸미고 숨기며 자신의 모습을 힐끗힐끗 엿보면서 외면해 버린다면 하나님과의 만남은 더욱 어려워질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및 이웃과의 관계를 잘 이뤄가려면 먼저 자신과의 관계를 잘 이뤄가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기술은 테크닉이 아닌 아트를 말합니다. 통합적으로 잘 만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신을 잘 대할 뿐 아니라 사람, 자연, 하나님과의 관계도 잘 이뤄가는 것을 하나의 기술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흔히 우리가 자신을 대하는 기술에서 천편일률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은 억압입니다. 스스로 숨기거나 부정하면서 아닌 척하는 것을 주된 방법으로 하기 때문에 이웃과의 관계도 억압하고 단칼에 거절해 버립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런 스타일로 일관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방언이라도 해서 무언가 터트려 보려고 은사에 대한 집착으로 소리를 지르는 게 고작입니다. 그런 것들에서 벗어나 원숙한 관계로 들어가려면 우선 자신을 잘 대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말하는 경건이란 주로 엄격주의로 이해됩니다. 하지만 경건은 자신을 학대하는 식의 엄격주의가 절대 아닙니다. 경건은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삶을 일컫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면 자신의 이상과 기대대로 만든 스케줄에 따라 스스로 잘 지켜 가면 나는 좋은 사람이다 라는 인식을 합니다. 그러다 실수를 하면 자신을 미워하며 지금까지 잘한 일도 모두 하찮게 여기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실수했을 때 그것을 객관화시켜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의 신앙은 상당히 성숙한 상태입니다. 여기서 객관화시킨다는 것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은 실수할 수밖에 없지만 실수 자체가 자신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상처와 허물과 실수가 있는 자신과 함께 살지 않으려 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을 자꾸 거절 하면서 이상 속의 자신과 일치시키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면 아무리 예수님을 믿은 연한이 오래되었다고 하더라도 항상 오락가락하게 됩니다. 일정한 진보를 보이는 듯하다가도 일순간 무너져 내립니다. 이것이 반복되다 보면복음에서 말하는 인간 변화를 믿지 못하고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상처, 허물, 실수가 있는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저는 젊은 시절에 신앙생활이 조금 되는 듯하다가도 일순간에 무너지는 일을 여러 번 경험하면서 그때마다 경구 같은 것을 써놓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항목들을 철저히 지켜 나가도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것들이 무너지곤 했습니다. 그런 현상들이 꽤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좌절감과 신경질 등이 저를 상당히 괴롭혔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떤 원칙이나 이상 또는 스케줄에 자신을 집어 넣는게 아니라, 허물 많고 상처투성이인 자신이 주님과 함께 하루하루 걸어가는 것임을 터득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뒤로 돌아가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무엇인가 잘못하면 그 자리에서 '아, 이거 내가 잘못했구나. 나는 이 잘못과 동일한 사람이 아니야. 그러나 나는 이럴 수가 있어' 라면서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며 그 자리에서 다시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후 계속해 저의 삶에 진보가 있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진보가 있는 삶을 살아가라는 말을 아주 새롭게 이해하면서 저의 약점들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달리, 사람들과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자신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합니다. 영성생활은 하나님과의 관계인 동시에 자신과의 관계입니다. 자신과의 화해 없이 하나님과 화해하기 어렵고 하나님과의 화해 없이 자신과의 화해 역시 힘듭니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평가를 스스로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나 그의 행동에 의해 영향을 받습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좋은 사람이라고 하면 우리는 곧 좋은 사람이고, 나쁜 사람이라고 하면 곧 깊은 절망감에 빠집니다.
남의 칭찬이나 비난을 객관화시키지 못하고 철저하게 주관화시킨다면 거기에 놀아나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이 남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니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저력이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삶에 중심에서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하는데, 항상 외부의 영향에 의해 우리의 실존자체가 송두리째 무너지기도 하고 세워지기도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계실 자리가 없습니다.
늘 혼란 속에서 허덕이게 됩니다. 하루에도 몇 번의 희비애락과 증오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외적 요인에 의해 자신을 규정하고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은 자신의 실수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침해받지 않는 자신만의 내적자유공간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 입니다.그의 실존자체가 타율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에 피곤하고 마음의 평강을 지니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조차 그런 공간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신앙은 감정의 변화와 함께 조석으로 편차가 너무 심합니다.
상처와 실수와 죄를 곧 자신으로 여길 때 우리는 스스로를 추하고 나쁜 사람으로 단정해 버립니다. 그래서 한 순간에 의인이고 선한 사람이었던 자신은 안개처럼 사라지고 깊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그런 사람에게 신앙의 진보는 없습니다. 자신의 자아만 맴도는 악순환의 연속일 뿐입니다. 그런 사람은 스스로 믿음이 있다고 자부할 때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든지, 아니면 자신의 이상이라고 여기는 수준의 삶을 계속 유지해 가야합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중심적 기준에서 내린 평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만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안에 계시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함께하는 그 중심이 확보돼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칭찬이 전부 자신의 표상이라면, 그 표상은 모두 허구이고 우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희망적인 복음을 듣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칭찬, 인정, 업적뿐 아니라 비방, 실수, 정죄, 상처에 의해 규정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에 의해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자유로운 영적공간을 발견하는 희망의 복음이 있습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부정적인 생의 역사,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낼 수 없는 상처, 알려지면 체면에 손상이 가는 실수, 다른 사람들을 실망시킬 수 있는 끊지 못한 부끄러운 습관 등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나입니다. 남들이 칭찬하는 '나' 는 '나'가 아닙니다. 또한 남들에게 비난받는 '나' 도 '나' 가 아닙니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 자신을 용납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근거는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으로 있을 때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를 저주의 자리에서 나오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이르게 될 소망의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현재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규정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멸망의 자녀로 규정하시지 않고 삶의 최종 목적지를 하나님의 보좌로 초대된 사람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나는 참 부족하고 상처가 많다'는 고백을 억지로 숨기거나 인위적으로 바꾸지 않을 뿐 아니라 이것으로 기분 나빠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며 받아주신다. 하나님께서 나를 더욱 성숙 시키신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믿지 못할 때 자꾸 과장이 나오고 크게 보이려고 애를 씁니다. 또한 크게 보이는 것을 붙잡지 못했을 때 열등의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것 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내가 못난 인간인데도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셨다'고 고백하게 됩니다.기독교인의 감사는 남들보다 더 잘되었다는 데서 오는 상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현재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용서되고 받아들여지며, 화해되고 치유되며, 상실한 것을 보상받고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지옥이 아니며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입니다. 그런 희망과 새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은혜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어떤 외적인 것들로부터 침해받지 않을 수 있는 자유의 공간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 공간에서 자신의 그림자를 잘라낸 존재가 아닌 자신의 그림자를 그대로 갖고 있는 우리를 만나게 됩니다. 이런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을 그림자와 함께 동고동락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게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그림자는 우리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제시해 주는 메시지가 됩니다.
우리는 그 공간에서 자신의 분노. 공포, 죄, 실수, 상처를 숨기거나 판단하지 않고 그저 바라봅니다. 즉 자신과 동일화시키지 않고 객관화시킵니다. 여기서 공간은 주님과 함께 이뤄가는 곳을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