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018956.25 당시 숭례문(崇禮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ㅠ 숭례문은... 남대문이라고 부르지마요! 동대문, 남대문이라는 것은 일제시대 이후에 불려진 이름입니다. 엄연한 숭례문이란 이름이 있어요.. 조선시대 서울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그러나,, 이젠 610살 숭례문 할아버지 돌아가셨다ㅠ지금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 수리 때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이 문은 중앙부에 홍예문(虹蜺 門)을 낸 거대한 석축기단 위에 섰으며, 현존하는 한국 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모양의 우진각지붕인데, 원래는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곡이 심하지 않고 짜임도 건실해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지봉유설』의 기록에는 ‘숭례문’이라고 쓴 현판을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 서울 성곽의 다른 문의 현판들은 가로로 달려 있지만, 숭례문의 현판은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하여 세로로 달았다고 전해진다.처음 지은 시기도 정확히 알 수 있으며 견고한 수법과 당당한 모습을 보이는 조선 전기 건축의 대표가 되는 문화재이다. 서울 4대문 및 보신각(普信閣)의 이름은 오행사상을 따라 지어졌는데, 이런 명칭은 인(仁: 동), 의(義: 서), 례(禮: 남), 지(知: 북), 신(信: 중앙)의 5덕(五德)을 표현한 것이었으며, 숭례문의 "례"는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숭례문의 역사 1395년(조선 태조 4년) - 숭례문 시공 1398년(조선 태조 7년) - 숭례문 준공 태종의 맏아들이던 양녕대군이 숭례문 현액을 씀.[4]세종 30년(1448년)에 개축했으며, 성종 10년(1479년)에 중수.[5]1907년 - 일본 황태자가 방한하자 일제는 "대일본의 황태자가 머리를 숙이고 문루 밑을 지날 수 없다"면서 숭례문과 연결된 서울 성곽을 헐어버렸다. 성곽을 헌 자리에 도로와 전차길을 내고, 숭례문 둘레에 화강암으로 일본식 석축을 쌓았다. 문앞에는 파출소와 가로등을 설치했다.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6]1916년 - 고적급유물보존규칙 공표. 조선총독부에 고적조사위원회 설치 1924년 - 조선총독부가 고적급유물등록대장초록을 간행. 1호 원각사지십층석탑 등 193점의 유물을 등록함.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없었다.[7]1933년 8월 9일 - 제령 제6호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 공포1934년 -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보물 1호로 남대문을, 보물 2호로 동대문을, 보물 3호에 원각사지십층석탑을, 보물 4호로 보신각종을 지정하였다.[8]1962년 - 한국 정부는 조선총독부의 문화재 지정을 참고해서 남대문을 국보 1호, 원각사지십층석탑을 국보 2호, 동대문을 보물 1호, 보신각종을 보물 2호로 각각 지정 1994년 11월 - 미술전문지 「가나아트」 40호가 미술인 70명에게 여론조사한 결과 서울의 랜드마크로 국보 1호 남대문이 33표로 1위로 선정되었다.[9] 2002년 2월 - 문화재위원회는 서울시의 숭례문 근접 관광 계획을 불허했다. 불허 이유는 차량으로 인해 관람객이 위험에 처할 수 있고 복잡한 도로사정으로 숭례문을 차분하게 감상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10]2003년 - 일제가 1907년에 헐어버린 서울 성곽의 성곽을 숭례문 좌우로 10m씩 복원했다. 2003년 9월 - 일제는 돈의문 등 조선의 왕성인 궁궐과 성곽을 항일의 상징으로 보고 철저히 파괴했으나,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숭례문을 지나갔으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흥인지문을 지나갔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가 있다며 보존했다고, 2002년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오타 히데하루(太田秀春) 일본 도호쿠대특별연구원이 서울대 국사학과 기관지인 '한국사론' 49집에 발표한 논문에서 밝혔다.[11 평양성일대에 현존하는 현무문과 칠성문, 보통문, 모란대, 을밀대, 만수대 등도 모두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승리한 것과 관련되는 유적이라 해서 고적으로 지정돼 보호받았다고 한다. 2005년 5월 27일 - 숭례문 주변을 광장으로 단장함. 2006년 3월 1일 - 1907년 일제에 의해 출입금지된 숭례문이 99년만에 일반에 개방이 결정되어 3월 3일부터 일반인 출입이 가능하게 되었다.[12]2008년 2월 10일 - 화재가 발생하여 전소. ㅠㅠ 숭례문의 역사가 끝이 나버렸다_ 우리 조상님들이 남겨주신 최대의 성문, 서울에서 최고로 오래된 목조 건물, 단지 이 뿐만이 아닐것이다.. 서민들 곁에서 610년을 내려다봐 주시고 지켜주신 얼이다... 그 곳에 자리한 것만으로도 정말 큰 의미였는데.... 오늘은 정말 가슴이 답답한 하루다... 우리 조상님들의 역사를 담은 숭례문을 다시는 보지 못할거야.. 지금도 시간은 흐르고... 화재 또한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었겠지... 얼마나 빨리 복원되냐보다,정말 정성을 다해 복원이 되기를.. 뒤늦게 유난을 떨어봅니다.. ▶◀= 2008. 02. 11 =2
숭례문(崇禮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ㅠ
1880
1895
6.25 당시
숭례문(崇禮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ㅠ
숭례문은...
남대문이라고 부르지마요!
동대문, 남대문이라는 것은 일제시대 이후에 불려진 이름입니다.
엄연한 숭례문이란 이름이 있어요..
조선시대 서울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
그러나,, 이젠 610살 숭례문 할아버지 돌아가셨다ㅠ
지금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 수리 때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문은 중앙부에 홍예문(虹蜺 門)을 낸 거대한 석축기단 위에 섰으며,
현존하는 한국 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모양의 우진각지붕인데,
원래는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곡이 심하지 않고 짜임도 건실해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봉유설』의 기록에는 ‘숭례문’이라고 쓴 현판을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
서울 성곽의 다른 문의 현판들은 가로로 달려 있지만,
숭례문의 현판은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하여 세로로 달았다고 전해진다.
처음 지은 시기도 정확히 알 수 있으며 견고한 수법과
당당한 모습을 보이는 조선 전기 건축의 대표가 되는 문화재이다.
서울 4대문 및 보신각(普信閣)의 이름은 오행사상을 따라 지어졌는데,
이런 명칭은 인(仁: 동), 의(義: 서), 례(禮: 남), 지(知: 북), 신(信: 중앙)의
5덕(五德)을 표현한 것이었으며, 숭례문의 "례"는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숭례문의 역사
1395년(조선 태조 4년) - 숭례문 시공
1398년(조선 태조 7년) - 숭례문 준공
태종의 맏아들이던 양녕대군이 숭례문 현액을 씀.[4]
세종 30년(1448년)에 개축했으며, 성종 10년(1479년)에 중수.[5]
1907년 - 일본 황태자가 방한하자 일제는 "대일본의 황태자가
머리를 숙이고 문루 밑을 지날 수 없다"면서 숭례문과 연결된
서울 성곽을 헐어버렸다. 성곽을 헌 자리에 도로와 전차길을 내고,
숭례문 둘레에 화강암으로 일본식 석축을 쌓았다.
문앞에는 파출소와 가로등을 설치했다.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6]
1916년 - 고적급유물보존규칙 공표. 조선총독부에 고적조사위원회 설치
1924년 - 조선총독부가 고적급유물등록대장초록을 간행.
1호 원각사지십층석탑 등 193점의 유물을 등록함.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없었다.[7]
1933년 8월 9일 - 제령 제6호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 공포
1934년 -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보물 1호로 남대문을, 보물 2호로 동대문을,
보물 3호에 원각사지십층석탑을, 보물 4호로 보신각종을 지정하였다.[8]
1962년 - 한국 정부는 조선총독부의 문화재 지정을 참고해서
남대문을 국보 1호, 원각사지십층석탑을 국보 2호, 동대문을 보물 1호,
보신각종을 보물 2호로 각각 지정
1994년 11월 - 미술전문지 「가나아트」 40호가 미술인 70명에게
여론조사한 결과 서울의 랜드마크로 국보 1호 남대문이 33표로 1위로 선정되었다.[9]
2002년 2월 - 문화재위원회는 서울시의 숭례문 근접 관광 계획을 불허했다.
불허 이유는 차량으로 인해 관람객이 위험에 처할 수 있고
복잡한 도로사정으로 숭례문을 차분하게 감상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10]
2003년 - 일제가 1907년에 헐어버린 서울 성곽의 성곽을 숭례문 좌우로 10m씩 복원했다.
2003년 9월 - 일제는 돈의문 등 조선의 왕성인 궁궐과 성곽을
항일의 상징으로 보고 철저히 파괴했으나,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숭례문을 지나갔으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흥인지문을 지나갔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가 있다며 보존했다고, 2002년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오타 히데하루(太田秀春) 일본 도호쿠대특별연구원이
서울대 국사학과 기관지인 '한국사론' 49집에 발표한 논문에서 밝혔다.[11
평양성일대에 현존하는 현무문과 칠성문, 보통문, 모란대, 을밀대,
만수대 등도 모두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승리한 것과 관련되는
유적이라 해서 고적으로 지정돼 보호받았다고 한다.
2005년 5월 27일 - 숭례문 주변을 광장으로 단장함.
2006년 3월 1일 - 1907년 일제에 의해 출입금지된 숭례문이
99년만에 일반에 개방이 결정되어 3월 3일부터 일반인 출입이 가능하게 되었다.[12]
2008년 2월 10일 - 화재가 발생하여 전소. ㅠㅠ
숭례문의 역사가 끝이 나버렸다_
우리 조상님들이 남겨주신 최대의 성문,
서울에서 최고로 오래된 목조 건물,
단지 이 뿐만이 아닐것이다..
서민들 곁에서 610년을 내려다봐 주시고 지켜주신 얼이다...
그 곳에 자리한 것만으로도 정말 큰 의미였는데....
오늘은 정말 가슴이 답답한 하루다...
우리 조상님들의 역사를 담은 숭례문을 다시는 보지 못할거야..
지금도 시간은 흐르고...
화재 또한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었겠지...
얼마나 빨리 복원되냐보다,
정말 정성을 다해 복원이 되기를..
뒤늦게 유난을 떨어봅니다.. ▶◀
= 2008. 02. 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