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보는 기독교인에 대하여

박민진2008.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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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행19:18~20)

 

점술이라는 말을 들으면 과거 서낭당 같은 이미지와 굿을 행하는 무당, 또는 마술을 행하는 신흥 종교들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실제로 세상 사람들은 이런 것들에 혹하여 물질을 바치며 복을 빌기도 하며 주문을 수천 번 외우면 꿈이 실현된다는 식의 믿음을 가지기도 합니다.

 

이런 사상들은 사회 전반과 문학 속에도 넘쳐납니다. 그 중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던 것이 노벨 문학상을 받은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입니다. 이 책은 기독교의 모양새를 갖춘 뉴에이지로 인간이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그것을 돕는다는 식의 사상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은 자기개발 서적에도 넘쳐흐릅니다. 자기개발계의 황태자 브라이언 트레이시를 비롯하여 꿈을 이루고자 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허황된 믿음과 자기암시를 계속해서 주입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보면 사실 이런 모든 사상의 조류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갖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평가절하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점술을 즐기는 기독교인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이 세대는 아침에 지하철역마다 비치되어 있는 무료 일간지를 비롯하여 각종 인터넷과 방송, 그리고 심지어 점술카페에 이르기까지 점술이 넘쳐납니다.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무료로도 얼마든지 점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저녁에 배포되는 무료일간지는 오늘의 운세가 아닌 ‘내일의 운세’를 알려 줍니다. 서울의 고속터미널이나 사람이 많이 몰리는 곳에 가보면 여지없이 의자가 쭉 놓여있고 역술인들이 값 싸게 점을 봐줍니다. 그리고 연인들이나 마음이 조마조마한 사람들이 그곳에 갑니다. 그런데 이런 인스턴트식 점술부터 용한 점집에 이르기까지 이런 곳에 세상 사람을 비롯하여 기독교인들도 간다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점을 보는 이유는 그저 재미나 호기심 때문이기도 하고 답답한 현실의 중압감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점을 본다면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바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신앙(信仰)’이라는 말은 믿고 앙모한다는 의미인데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믿고 앙모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근심이 그 발걸음을 점술로 옮기게 하는 것입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타로점’입니다. 기독교가 황폐화 된 유럽에서 건너온 이 점술은 누구나 카드를 통해 미래를 점칠 수 있는 손쉬운 도구입니다. 카드에 그려진 신비스런 그림과 함께 편리성은 사람들의 점술에 대해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고 호기심은 배가시켰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기독교인 카페에서도 타로점 같은 것들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저는 처음에 이런 것들이 기독교인들에게 아무 필터링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에 무척 놀랐습니다.

 

다시 한 번 이야기 하지만 어떤 이유가 되었든 기독교인이 점술로 가는 것은 불신앙의 증거입니다. 사울은 박수들을 억압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그러나 답답한 전쟁의 대치상황에서 그는 몰래 박수를 찾아가 죽은 사무엘을 불러들입니다.(이때 나타난 사무엘을 진짜 사무엘이 아니라 귀신의 속임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교계의 통념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불신앙의 모습입니다. 평소에는 믿음이 있는 사람 같지만 위기 앞에서는 점술을 이용하여 귀신이나 사탄의 통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냥 재미로 본다는 것은 더더욱 오만한 불신앙의 표현입니다.

 

사도행전 19장에는 바울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여 마술을 행하던 자들이 그 모든 책들을 불사르고 주님께 회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행19:18~20)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저 가죽으로 둘러싸인 인쇄용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는 살아 운동력 있어서 우리의 심령 근본을 변화시킵니다. 믿음을 자라게 해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4:!2)

 

믿음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자라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제가 사회에 나와서 믿음이 자라지 않는다고 말하는 기독교인들을 만나거나 그간의 공동체 경험을 통해 볼 때 그들은 분명 말씀과 무관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즉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듣는 것이 믿음의 비밀입니다. 기독교가 무너져버린 유럽교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변질된 형식주의의 로마 가톨릭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유럽의 교인들 중에는 성경을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허다하며 로마 가톨릭은 성경 위에 교황의 권위를 두어서 성경과 전혀 관련 없는 종교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기독교 강요]를 통해 말씀의 중요성을 이렇게 역설합니다.

 

“성경을 버리고 하나님께 이를 수 있는 어떤 길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오류에 사로잡혀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광란에 빠져있다고 보아야 한다.”[기독교강요](Jean Calvin)

 

점을 보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기독교인들이 있다면 당장 돌아서십시오. 오스 기니스는 [소명]이라는 그의 저서를 통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이라는 항해 속에서 다른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지 않고 언제나 그 자리에서 방향을 알려주는 북극성을 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북극성 되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분 자체이신 말씀.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 흔들리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열쇠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미래에 대한 두려운 마음 가진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우리의 길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실수를 했다고 인생이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는 그것마저도 하나님께서 선을 이루는 재료로 사용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철저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말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벧전 5:7)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하늘의 참새 한 마리도 마음대로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사탄도 욥을 시험할 수 없었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권고하시는 하나님, 우리 항해의 북극성 되시는 하나님만 바라보며 나아갑시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점술을 가증하게 여기십니다.

 

주여, 하나님이 가증이 여기시는 것을 저도 가증이 여기며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저 역시 사랑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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