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선 낯선 이름이다. 그러나 중국에선 ‘교수들의 교수’로 평가받는 중국의 ‘국학대사(國學大師)’다.
그는 중국에서 최후의 고전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천산리(陳三立)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소년 시절 고전에 빠져 읽지 않은 책이 없었고, 12세에 일본을 시작으로 16년 간 서구 유학을 통해 익힌 언어만 20종이 넘는 등 동서문화를 겸비한 대학자였다.
기억력 또한 비상했다. 조교에게 필요한 자료를 찾아오라고 시킬 때는 언제나 어느 책 몇 쪽에 있을 것이라고 말해주었고, 이는 십중팔구 들어 맞았다. 그는 인생에서 몇 가지 큰 선택을 했다. 1927년 쇠락하는 문화에 대한 연민 끝에 자살을 택한 국학자 왕궈웨이(王國維)와 달리,
그는 오히려 왕궈웨이의 기념비명을 지으며 죽음 대신 삶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다졌다. 또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의 패색이 짙어짐에 따라 1948년 후스(胡適)가 미국행을, 푸스녠(傅斯年)은 대만행을, 궈모뤄(郭沫若)는 베이징행을 각각 선택할 때, 이미 시력을 잃은 그는 “왜 하필 부모의 땅을 떠나느냐”라며 광저우로 향했다.
이후 베이징의 ‘공산 왕조’는 그에게 중고사(中古史·중세사)연구소 소장을 맡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미 삶과 죽음을 초월해 ‘독립정신과 자유사상’을 신봉하는 학자였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맡을 연구소에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신봉하지 않으며, 정치학습을 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마오쩌둥이 허락 증명서를 내준다면 기꺼이 부름에 응하겠다는 조건을 걸 정도로 기개가 높았다.
그는 생전에 단 한마디의 정치적 발언도 하지 않았다. 그는 고금중외(古今中外)의 풍부한 문화와 켜켜이 쌓인 역사가 한 몸에 응집된 문화적 거장이었다.
역사가로서 그는 역사 문제를 볼 때 종(縱)의 방향으로 보는 것을 매우 중시했다. 현상으로부터 본질로 파고 들어가 신선하면서도 남들이 따르지 않을 수 없고, 전혀 예상을 벗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미 예상할 수 있었던 해석을 내리는 천부적인 역사가였다.
“사대부 계급 중에는 어진 자(賢者)와 어리석은 자(不肖子), 서투른 자(拙者)와 약사빠른 자(巧者)의 구분이 있기 마련이다. 어진 자와 서투른 자들은 늘 고통을 느끼다가 결국 나중에는 소멸돼 버린다.
반면 어리석은 자와 약삭빠른 자들은 대부분 향락과 부귀영화를 누리며, 신분 상승으로 명예를 떨치기도 한다”는 변환 시대의 지식인 군상에 대한 그의 평가는 마치 지금의 우리를 꾸짖는 듯 하다. 서른 여덟 책벌레와 결혼해 눈먼 학자 옆에서 반려자 역할을 하며 동시에 저술 활동을 도왔던 부인 탕윈(唐)과 나눈 순애보 또한 눈물 겹다.
이 책은 저자 루젠둥(陸鍵東)이 수많은 자료와 고증을 통해 천인커가 중국의 공산화가 분명해졌음에도 해외로 떠나지 않고 대륙을 선택한 1948년부터 69년 사망할 때까지의 20년을 재구성한 것이다. 95년 이 책이 중국에서 첫 출판됐을 때 전 대륙이 ‘천인커 신드롬’에 빠져들 정도로 뜨거운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저자의 유려한 미문(美文)과 수많은 시구를 섬세한 역주로 풀어낸 역자 박한제·김형종 교수의 수 년에 걸친 번역작업은 이웃나라의 후학이 대학자에게 드리는 애정의 표시인 듯하다.
중안일보 서평 /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가족 사진
정치 격랑와 부대낀 中 지식인의 기막힌 운명
늘그막에 세 번에나 난리를 당하니/ 눈물이 마르고 피가 쏟아지는구나.” 1945년 항일 전쟁의 끝자락, 55세의 노학자는 또 황망히 비행기에 오르면서 피를 토했다. 처자식을 거느린 가장인데다, 고서를 연구하느라 뒤늦게 두 눈까지 먼(망막 각리) 그에게 역사의 격랑은 가차없었다.
진인각(陳寅恪ㆍ1890~1969)은 중국 역사학의 거두이면서 종교학, 언어학, 고증학, 문화학 등에서도 르네상스적 인간의 이상을 구현한 인물이다. 중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부대껴야 했던 마지막 20여년은 기구한 한 편의 드라마다.
중국 문화사가이자 극작가인 육건동이 1995년 ‘어느 중국 지식인의 운명’이라는 부제를 달아 그 기막힌 세월을 생생히 복원한 결과다. 대만으로 가기를 거부하고 본토에서 학자의 길을 택한 진인각이 환생했다. 도처에 진인각이 당시 심경을 읊은 한시를 실어, 시집을 읽는 듯한 감흥마저 자아낸다
시대와 부대끼고, 마침내 승리하기까지를 기록한 이 책에서 1950~60년대 중국의 격랑을 재현해 내는 서술 방식은 대하 소설과 다를 바 없다. 끝까지 본토에 남아 각고 속에서 학문을 다듬은 진인각, 미국으로 건너가 공산당 천하를 비난하며 자신의 문명을 떨쳤던 호적 등 격랑을 건너가는 지식인들의 다양한 모습이 근거리에서 복원된다.
그가 지금도 호소력을 갖는 것은 당시 중국인으로서는 극히 예외적일 정도로 바깥 세계와 소통했다는 데 있다. 일본에서의 고등학교 시절을 시작으로, 독일ㆍ스위스ㆍ프랑스에서의 어문학 연구 10여년 결과, 그는 세계인으로 거듭났다. 1911년 스위스에서 맑스의 ‘자본론’을 원문으로 읽었을 정도다. 그럼에도 제자에게는 맑스ㆍ레닌의 견해를 추종해서는 안 된다며 경계한, 별난 한문학자였다.
책은 도처에서 이념의 맹목성과 허망함을 지적한다. 그는 프롤레타리아 유물론을 숭배하는 공산당의 강령에 복종하지 않은 대가로 ‘낡은 골동품(老古董ㆍ완고한 노인)’ 취급까지 받아야 했다
신산 끝에, 그는 중국 사학의 거봉으로 살아 있다. 수당시대 통치자들의 열린 사고를 강조한 그의 이론(관롱집단설)덕에 중국은 역동적인 나라로 자기 주장을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중국 민족의 독립정신과 자유사상을 만천하에 드러내 밝히자는 열정이고, 중국은 결국 다시 떨칠 것이라는 신념이었다. 오늘날 중국의 용틀임을 예견한 듯. 5년에 걸쳐 이 책을 함께 옮겨낸 서울대 동양사학과 박한제ㆍ김형종 교수의 유려한 역문 덕에 다음 장을 재촉하는 마음이 급하다.
한국일보 서평
문화혁명 광기에 맞선 역사학자의 고집
진인각(陳寅恪·천인커·사진)이 문화대혁명 중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시끄러운 스피커 소음이었다. 그것도 2년이 넘는 기간 밤낮으로 사면팔방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오래 전 실명했기 때문에 아무 것도 볼 수 없었고 오직 들을 수만 있었다. 홍위병들은 비판투쟁 대회를 열 때마다 스피커 여러 대를 그의 집 앞뒤에 설치했다. 어떤 때는 작은 스피커를 침상 앞에 걸어두기까지 했다. "반동적 학술의 권위자에게 혁명 군중의 분노에 찬 고발을 듣게 하자"는 명분이었다.
진인각은 1890년에 태어나 1969년에 죽은 중국 역사학자다. 현대 중국의 '4대 역사학자'로 꼽히는 진인각은 호족(胡族)과 한족(漢族)의 경계를 초월한 정치집단이 수당(隋唐) 세계제국을 만들었다는 '관롱집단설(關?集團說)'을 주창해 지금까지도 중국 역사학계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 출신으로 국공내전 당시 베이징 칭화대 교수였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이 파죽지세로 대륙을 장악할 기세를 보이자, 국민당의 장개석(蔣介石·장제스)은 대륙의 학자들을 대만으로 이송할 계획을 세운다. 1948년 12월 난징(南京) 비행장에 도착한 소형 비행기에 학계의 거물 호적(胡適·후스)과 함께 타고 있던 진인각은 끝내 대만으로 가지 않고 광저우(廣州)의 링난(嶺南) 대학에 남는다. 그의 운명이 완전히 바뀌는 이 순간부터 '최후의 20년'은 시작됐다.
끊임없는 정치적 파란이 몰아치는 가운데서도 그는 어디까지나 학자이고자 했다. 1953년 중고사(中古史) 연구소의 소장을 맡으라는 상부의 명령을 그는 거부했다. 당국이 설득에 나서자, 그는 참으로 믿을 수 없는 조건을 내세운다. "연구소가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신봉하지 않고 정치학습을 하지 않는 것을 허락해 주시오." 그의 원칙은 '단지 학문을 물을 뿐 정치는 묻지 않는다(只問學問, 不問政治)'는 것이었다.
1957년부터 대대적인 '반(反)우파 투쟁'이 전개됐다. '영향력을 반드시 쓸어내야 할 부르주아 전문가 측의 대표'라는 섬뜩한 구호들이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심지어 이런 일까지 있었다. 전국 대학에서 '책 한 권 더 읽기' 운동을 벌였는데 그 이유는 "진인각 같은 학자들이 80여 권의 자료를 읽었다면, 100명의 사람들이 한 권씩 읽게 되면 그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는 것이다.
문화혁명의 소용돌이가 본격적으로 닥친 뒤로 그 고초는 극에 달했다. 1969년 그가 세상을 떠날 무렵에는 심력이 쇠진한 데다 장이 경색됐고, 극소수의 지인들이 몰래 방문했을 때 끊임없이 눈물을 흘린 자국이 눈가에 보였다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죽을 때까지 역사 연구의 외길에 매진했다.
그는 그 폭력적인 시대를 겪으며 이렇게 담담하게 말했다고 한다. "무릇 하나의 문화가 쇠락의 길을 걷게 됐을 때, 그 문화에 익숙해진 사람은 반드시 고통을 겪기 마련이다." 극작가이자 명청 시대 중국문화사 저술가인 저자는 때론 감정적이고 주관적인 문체로 몰입을 방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험난한 세월과 정면으로 맞닥뜨린 지식인의 처신을 다시 돌아보게 할 만큼 묘사가 뛰어나다.
[행복한책읽기] 자유사상으로 ‘수절’한 현대 중국의 지성
[행복한책읽기Review] 자유사상으로 ‘수절’한 현대 중국의 지성
[진인각, 최후의 20년]
육건동(陸鍵東) 지음
박한제·김형종 옮김
사계절, 819쪽, 3만9000원
천인커(陳寅恪·1890-1969).
국내에선 낯선 이름이다. 그러나 중국에선 ‘교수들의 교수’로 평가받는 중국의 ‘국학대사(國學大師)’다.
그는 중국에서 최후의 고전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천산리(陳三立)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소년 시절 고전에 빠져 읽지 않은 책이 없었고, 12세에 일본을 시작으로 16년 간 서구 유학을 통해 익힌 언어만 20종이 넘는 등 동서문화를 겸비한 대학자였다.
기억력 또한 비상했다. 조교에게 필요한 자료를 찾아오라고 시킬 때는 언제나 어느 책 몇 쪽에 있을 것이라고 말해주었고, 이는 십중팔구 들어 맞았다. 그는 인생에서 몇 가지 큰 선택을 했다. 1927년 쇠락하는 문화에 대한 연민 끝에 자살을 택한 국학자 왕궈웨이(王國維)와 달리,
그는 오히려 왕궈웨이의 기념비명을 지으며 죽음 대신 삶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다졌다. 또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의 패색이 짙어짐에 따라 1948년 후스(胡適)가 미국행을, 푸스녠(傅斯年)은 대만행을, 궈모뤄(郭沫若)는 베이징행을 각각 선택할 때, 이미 시력을 잃은 그는 “왜 하필 부모의 땅을 떠나느냐”라며 광저우로 향했다.
이후 베이징의 ‘공산 왕조’는 그에게 중고사(中古史·중세사)연구소 소장을 맡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미 삶과 죽음을 초월해 ‘독립정신과 자유사상’을 신봉하는 학자였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맡을 연구소에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신봉하지 않으며, 정치학습을 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마오쩌둥이 허락 증명서를 내준다면 기꺼이 부름에 응하겠다는 조건을 걸 정도로 기개가 높았다.
그는 생전에 단 한마디의 정치적 발언도 하지 않았다. 그는 고금중외(古今中外)의 풍부한 문화와 켜켜이 쌓인 역사가 한 몸에 응집된 문화적 거장이었다.
역사가로서 그는 역사 문제를 볼 때 종(縱)의 방향으로 보는 것을 매우 중시했다. 현상으로부터 본질로 파고 들어가 신선하면서도 남들이 따르지 않을 수 없고, 전혀 예상을 벗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미 예상할 수 있었던 해석을 내리는 천부적인 역사가였다.
“사대부 계급 중에는 어진 자(賢者)와 어리석은 자(不肖子), 서투른 자(拙者)와 약사빠른 자(巧者)의 구분이 있기 마련이다. 어진 자와 서투른 자들은 늘 고통을 느끼다가 결국 나중에는 소멸돼 버린다.
반면 어리석은 자와 약삭빠른 자들은 대부분 향락과 부귀영화를 누리며, 신분 상승으로 명예를 떨치기도 한다”는 변환 시대의 지식인 군상에 대한 그의 평가는 마치 지금의 우리를 꾸짖는 듯 하다. 서른 여덟 책벌레와 결혼해 눈먼 학자 옆에서 반려자 역할을 하며 동시에 저술 활동을 도왔던 부인 탕윈(唐)과 나눈 순애보 또한 눈물 겹다.
이 책은 저자 루젠둥(陸鍵東)이 수많은 자료와 고증을 통해 천인커가 중국의 공산화가 분명해졌음에도 해외로 떠나지 않고 대륙을 선택한 1948년부터 69년 사망할 때까지의 20년을 재구성한 것이다. 95년 이 책이 중국에서 첫 출판됐을 때 전 대륙이 ‘천인커 신드롬’에 빠져들 정도로 뜨거운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저자의 유려한 미문(美文)과 수많은 시구를 섬세한 역주로 풀어낸 역자 박한제·김형종 교수의 수 년에 걸친 번역작업은 이웃나라의 후학이 대학자에게 드리는 애정의 표시인 듯하다.
중안일보 서평 /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가족 사진
정치 격랑와 부대낀 中 지식인의 기막힌 운명
늘그막에 세 번에나 난리를 당하니/ 눈물이 마르고 피가 쏟아지는구나.” 1945년 항일 전쟁의 끝자락, 55세의 노학자는 또 황망히 비행기에 오르면서 피를 토했다. 처자식을 거느린 가장인데다, 고서를 연구하느라 뒤늦게 두 눈까지 먼(망막 각리) 그에게 역사의 격랑은 가차없었다.
진인각(陳寅恪ㆍ1890~1969)은 중국 역사학의 거두이면서 종교학, 언어학, 고증학, 문화학 등에서도 르네상스적 인간의 이상을 구현한 인물이다. 중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부대껴야 했던 마지막 20여년은 기구한 한 편의 드라마다.
중국 문화사가이자 극작가인 육건동이 1995년 ‘어느 중국 지식인의 운명’이라는 부제를 달아 그 기막힌 세월을 생생히 복원한 결과다. 대만으로 가기를 거부하고 본토에서 학자의 길을 택한 진인각이 환생했다. 도처에 진인각이 당시 심경을 읊은 한시를 실어, 시집을 읽는 듯한 감흥마저 자아낸다
시대와 부대끼고, 마침내 승리하기까지를 기록한 이 책에서 1950~60년대 중국의 격랑을 재현해 내는 서술 방식은 대하 소설과 다를 바 없다. 끝까지 본토에 남아 각고 속에서 학문을 다듬은 진인각, 미국으로 건너가 공산당 천하를 비난하며 자신의 문명을 떨쳤던 호적 등 격랑을 건너가는 지식인들의 다양한 모습이 근거리에서 복원된다.
그가 지금도 호소력을 갖는 것은 당시 중국인으로서는 극히 예외적일 정도로 바깥 세계와 소통했다는 데 있다. 일본에서의 고등학교 시절을 시작으로, 독일ㆍ스위스ㆍ프랑스에서의 어문학 연구 10여년 결과, 그는 세계인으로 거듭났다. 1911년 스위스에서 맑스의 ‘자본론’을 원문으로 읽었을 정도다. 그럼에도 제자에게는 맑스ㆍ레닌의 견해를 추종해서는 안 된다며 경계한, 별난 한문학자였다.
책은 도처에서 이념의 맹목성과 허망함을 지적한다. 그는 프롤레타리아 유물론을 숭배하는 공산당의 강령에 복종하지 않은 대가로 ‘낡은 골동품(老古董ㆍ완고한 노인)’ 취급까지 받아야 했다
신산 끝에, 그는 중국 사학의 거봉으로 살아 있다. 수당시대 통치자들의 열린 사고를 강조한 그의 이론(관롱집단설)덕에 중국은 역동적인 나라로 자기 주장을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중국 민족의 독립정신과 자유사상을 만천하에 드러내 밝히자는 열정이고, 중국은 결국 다시 떨칠 것이라는 신념이었다. 오늘날 중국의 용틀임을 예견한 듯. 5년에 걸쳐 이 책을 함께 옮겨낸 서울대 동양사학과 박한제ㆍ김형종 교수의 유려한 역문 덕에 다음 장을 재촉하는 마음이 급하다.
한국일보 서평
문화혁명 광기에 맞선 역사학자의 고집
진인각(陳寅恪·천인커·사진)이 문화대혁명 중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시끄러운 스피커 소음이었다. 그것도 2년이 넘는 기간 밤낮으로 사면팔방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오래 전 실명했기 때문에 아무 것도 볼 수 없었고 오직 들을 수만 있었다. 홍위병들은 비판투쟁 대회를 열 때마다 스피커 여러 대를 그의 집 앞뒤에 설치했다. 어떤 때는 작은 스피커를 침상 앞에 걸어두기까지 했다. "반동적 학술의 권위자에게 혁명 군중의 분노에 찬 고발을 듣게 하자"는 명분이었다.
진인각은 1890년에 태어나 1969년에 죽은 중국 역사학자다. 현대 중국의 '4대 역사학자'로 꼽히는 진인각은 호족(胡族)과 한족(漢族)의 경계를 초월한 정치집단이 수당(隋唐) 세계제국을 만들었다는 '관롱집단설(關?集團說)'을 주창해 지금까지도 중국 역사학계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 출신으로 국공내전 당시 베이징 칭화대 교수였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이 파죽지세로 대륙을 장악할 기세를 보이자, 국민당의 장개석(蔣介石·장제스)은 대륙의 학자들을 대만으로 이송할 계획을 세운다. 1948년 12월 난징(南京) 비행장에 도착한 소형 비행기에 학계의 거물 호적(胡適·후스)과 함께 타고 있던 진인각은 끝내 대만으로 가지 않고 광저우(廣州)의 링난(嶺南) 대학에 남는다. 그의 운명이 완전히 바뀌는 이 순간부터 '최후의 20년'은 시작됐다.
끊임없는 정치적 파란이 몰아치는 가운데서도 그는 어디까지나 학자이고자 했다. 1953년 중고사(中古史) 연구소의 소장을 맡으라는 상부의 명령을 그는 거부했다. 당국이 설득에 나서자, 그는 참으로 믿을 수 없는 조건을 내세운다. "연구소가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신봉하지 않고 정치학습을 하지 않는 것을 허락해 주시오." 그의 원칙은 '단지 학문을 물을 뿐 정치는 묻지 않는다(只問學問, 不問政治)'는 것이었다.
1957년부터 대대적인 '반(反)우파 투쟁'이 전개됐다. '영향력을 반드시 쓸어내야 할 부르주아 전문가 측의 대표'라는 섬뜩한 구호들이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심지어 이런 일까지 있었다. 전국 대학에서 '책 한 권 더 읽기' 운동을 벌였는데 그 이유는 "진인각 같은 학자들이 80여 권의 자료를 읽었다면, 100명의 사람들이 한 권씩 읽게 되면 그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는 것이다.
문화혁명의 소용돌이가 본격적으로 닥친 뒤로 그 고초는 극에 달했다. 1969년 그가 세상을 떠날 무렵에는 심력이 쇠진한 데다 장이 경색됐고, 극소수의 지인들이 몰래 방문했을 때 끊임없이 눈물을 흘린 자국이 눈가에 보였다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죽을 때까지 역사 연구의 외길에 매진했다.
그는 그 폭력적인 시대를 겪으며 이렇게 담담하게 말했다고 한다. "무릇 하나의 문화가 쇠락의 길을 걷게 됐을 때, 그 문화에 익숙해진 사람은 반드시 고통을 겪기 마련이다." 극작가이자 명청 시대 중국문화사 저술가인 저자는 때론 감정적이고 주관적인 문체로 몰입을 방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험난한 세월과 정면으로 맞닥뜨린 지식인의 처신을 다시 돌아보게 할 만큼 묘사가 뛰어나다.
조선일보 서평 /유재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