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제발 자기 성씨가 어디어디라는둥,무슨 성씨가 최고라는둥 어쩌구저쩌구 개념없이 댓글다는 머저리가 없기를 바랍니다. 이순신 (1545 : 인종 1~1598 : 선조 31) (1) 가문과 어린시절 이순신의 가문은 주로 문관 벼슬을 이어온 집안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이백록이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들과 뜻을 같이하다가 기묘화사 때 희생된 이후 아버지도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아, 이순신이 태어날 즈음에는가세가 기울어 있었다. 이순신 어머니 변씨는 아들을 사랑하면서도가정 교육을 매우 엄격하게 하여, 어린 시절 그의 성품이 형성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순신은 어려서부터 전쟁놀이를 좋아했으며, 자라면서는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해 무과를 거쳐 이름을 떨치고자 했다.보성군수 방진의 딸과 혼인하여 회(會), 열(悅), 면(冕)의 세 아들과 딸을두었는데, 아들 중 회는 노량해전에 함께 참여했고, 면은 임진왜란 중전사 했다. (2) 무과 급제와 관직생활 22세부터 무예를 익힌 이순신은 28세 되던 1572(선조 5)에 처음으로 무과에 응시했으나, 달리던 말이 넘어져 실격했다. 그 뒤 1576년 무과에 급제하여권지훈련원봉사로 처음 관직에 나갔다. 건원보권관으로 있을 때오랑캐 토벌에 공을 세워 훈련원참군이 되었으며, 1586년에는 사복시 주부가 되었다.그 후 조산보만호 겸 녹도둔전사의가 되어 북방지역의 방어를 담당하면서 군사의 증언을 요청 했으나, 병사 이일이 이를 거절하여 오랑캐의 침입을 막아 내지 못하고후퇴했다. 이 일로 파직당해 첫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다. 그 뒤 전라도조방장, 정읍현감 등을 지내다가 유성룡의 추천으로 고사리첨사로 승진했고,절충장군,진도군수 등을 거쳐 1591년(선조 24)에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가되었다. 부임 후 곧 왜적의 침입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거북선 등전선을 새로 만들고 군비를 확충했으며, 군량 확보하려고 섬에 둔전을 설치할것을 조정에 건의하기도 했다. (3) 임진왜란 중의 활약상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은 전투 태세를 갖추고 출전하여, 원균과 연합함대를 조직해 옥포 앞바다에서 적선 30여척을 격파했다.그다음 이순신은 사천으로 나아가 거북선을 처음으로 사용해서적선 13척을 무찔렀다. 6월에는 당포에서 적선 20여척을 격차, 전라우수사이억기와 군대를 합하여 당항초와 율포 등지에서 적선 100여척을무찔렀다. 이렇게 연전연승을 한 공으로 이순신은 자헌대부에 올랐다.7월에 이순신은 선제공격으로 거제, 가덕 등에 있는 왜군을 물리치려고노량에서 이억기, 원균 등과 연합함대를 조직했다.이 때 왜군은 해전의 패배를 만회하고자 수군을 늘려 견내량에정박하고 있었다. 견내량이 지형이 좁아서 활동이 불편하다고 판단한이순신은, 왜군을 한산도로 유인한 뒤 맹렬한 공격을 가해 적선 70여척을무찔렀다(학익진) 이 한산도대첩의 공으로 다시 정헌대부로 승격했다.이어 적장 가토 요시야키의 수군을 안골포에서 쳐서 적선 40여척을무찔렀다. 해상을 장악한 이순신은 전라좌.우도의 전선을 모두 동원해,왜 수군의 근거지인 부산으로 출동했다. 9월초에 부산에 이르러왜선 500여척이 부산에 정박해 있다는 것을 알고 출동했다.부산으로 출동으로 인해 왜군은 무려 100여척을 잃었다.1593년에 다시 부산과 웅천에 있던 왜군을 무찔러 남해안 일대의적 수군을 완전히 제거하고 한산도로 본영을 옮겼다. 이 때 조정에서는이순신을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여 수군의 모든 지휘권을맡겼다. 1594년 명의 수군이 원병으로 오자 죽도로 진을 옮기고 장문포에서왜군을 격파했다. 또한 적의 후방을 교란하여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왜군을 차단해왜군 작전에 큰 타격을 주었다. 특히 10월의 영등포해전에서는 곽재우, 김덕령 등과 약속하여 왜군을 바다와 육지에서 협공했다. 이후 명과 일본 간의 휴전회담이 진행 되었다. (4) 백의종군 이후의 행적 3년에 걸친 휴전회담이 깨지자 일본은 다시 1597년에 일본군 15만 대군이쳐올라 왔다(정유재란) 이순신은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으나,원균의 모함과 일본의 모락으로 원균이 삼도수군 통제사가 되어칠천량에서 싸웠으나 대패 하여 아군120명에 전선 12척 밖에 없었다.조정에서는 다시 이순신을 삼도수군 통제사로 임명했다.이순신은 절망하지 않고 울돌목에서 적선 133척과 싸워31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웠다. 이 명량대첩은 이순신이다시 통제사로 올라와 첫 번째 싸움 이면서 전세를 역전 시키는 싸움이 되었다.또한 수군을 재기하게 되었다.1598년 2월에 고금도로 병영을 옮겨 군사를 모집하고 백성들을 모아 둔전을경작하는 등 전투에 만전을 기해, 수군의 위력은 한산도 본영에있을 때 보다 규모가 10배나 커지게 되었다.11월에 이순신은 노량에 본국으로 토실려고 하는 적선 500여척이있다는 보고를 받고 명의 제독 진린을 설득해서 노량으로 나아가적선 200여척을 격파 했다. 돌아가는 전선은 단 50여척 그러나 이순신은 여기서 적이 쏜 총알이 어깨에 맞아 전선했다.이순신은 죽기 전에"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마라"라는 말을 조카에게 이런 말을 하고 전사했다. 임진왜란 주요 해전 1592.5.7. 옥포 이순신.원균 왜선 26척 격파1592.5.29 사천 이순신.원균 왜선 13척 격파1592.6.2 당포 이순신.원균 왜선 21척 격파1592.6.5 당항포 이순신.원균.이억기 왜선 26척 격파1592.7.8 한산도 이순신.원균.이억기 왜선 47척 격파 12척 나포1592.9.1 부산포 이순신.이억기.원균 왜선 100여척 격파1594.3.4 당항포 이순신.이억기.원균 왜선 30여척 격파1597.7.14~16 칠천량 이억기.원균 패전(이억기.원균 전사)1597.9.16 명량 이순신 왜선 31척 격파1598.11.18 노량 이순신 왜선 200여 척 분파(이순신 전사) 도고 曰 "내가 넬슨엔 견줄 수 있을지 모르나,이순신에 비교하면 나 자신은 하사관만큼도 못한 존재입니다" 이순신!그는 진정 백성을 사랑한 군자요,온갖 고난 속에서도,비록 나라가 그를 버리는 상황에서도 한시도 애국심을 잃지 않은 충신이요,무패신화에 빛나는,세계 최고의 명장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만고의 성웅이시다!!2
★무패신화,불세출의 명장,구국의 성웅 이순신★
이순신 (1545 : 인종 1~1598 : 선조 31)
(1) 가문과 어린시절
이순신의 가문은 주로 문관 벼슬을 이어온 집안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
이백록이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들과 뜻을 같이하다가 기묘화사 때
희생된 이후 아버지도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아, 이순신이 태어날 즈음에는
가세가 기울어 있었다. 이순신 어머니 변씨는 아들을 사랑하면서도
가정 교육을 매우 엄격하게 하여, 어린 시절 그의 성품이 형성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순신은 어려서부터 전쟁놀이를 좋아했으며, 자라면서는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해 무과를 거쳐 이름을 떨치고자 했다.
보성군수 방진의 딸과 혼인하여 회(會), 열(悅), 면(冕)의 세 아들과 딸을
두었는데, 아들 중 회는 노량해전에 함께 참여했고, 면은 임진왜란 중
전사 했다.
(2) 무과 급제와 관직생활
22세부터 무예를 익힌 이순신은 28세 되던 1572(선조 5)에 처음으로 무과에 응시
했으나, 달리던 말이 넘어져 실격했다. 그 뒤 1576년 무과에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로 처음 관직에 나갔다. 건원보권관으로 있을 때
오랑캐 토벌에 공을 세워 훈련원참군이 되었으며, 1586년에는 사복시 주부가 되었다.
그 후 조산보만호 겸 녹도둔전사의가 되어 북방지역의 방어를 담당하면서 군사의 증언
을 요청 했으나, 병사 이일이 이를 거절하여 오랑캐의 침입을 막아 내지 못하고
후퇴했다. 이 일로 파직당해 첫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다. 그 뒤 전라도
조방장, 정읍현감 등을 지내다가 유성룡의 추천으로 고사리첨사로 승진했고,
절충장군,진도군수 등을 거쳐 1591년(선조 24)에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가
되었다. 부임 후 곧 왜적의 침입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거북선 등
전선을 새로 만들고 군비를 확충했으며, 군량 확보하려고 섬에 둔전을 설치할
것을 조정에 건의하기도 했다.
(3) 임진왜란 중의 활약상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은 전투 태세를 갖추고 출전하여, 원균
과 연합함대를 조직해 옥포 앞바다에서 적선 30여척을 격파했다.
그다음 이순신은 사천으로 나아가 거북선을 처음으로 사용해서
적선 13척을 무찔렀다. 6월에는 당포에서 적선 20여척을 격차,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군대를 합하여 당항초와 율포 등지에서 적선 100여척을
무찔렀다. 이렇게 연전연승을 한 공으로 이순신은 자헌대부에 올랐다.
7월에 이순신은 선제공격으로 거제, 가덕 등에 있는 왜군을 물리치려고
노량에서 이억기, 원균 등과 연합함대를 조직했다.
이 때 왜군은 해전의 패배를 만회하고자 수군을 늘려 견내량에
정박하고 있었다. 견내량이 지형이 좁아서 활동이 불편하다고 판단한
이순신은, 왜군을 한산도로 유인한 뒤 맹렬한 공격을 가해 적선 70여척을
무찔렀다(학익진) 이 한산도대첩의 공으로 다시 정헌대부로 승격했다.
이어 적장 가토 요시야키의 수군을 안골포에서 쳐서 적선 40여척을
무찔렀다. 해상을 장악한 이순신은 전라좌.우도의 전선을 모두 동원해,
왜 수군의 근거지인 부산으로 출동했다. 9월초에 부산에 이르러
왜선 500여척이 부산에 정박해 있다는 것을 알고 출동했다.
부산으로 출동으로 인해 왜군은 무려 100여척을 잃었다.
1593년에 다시 부산과 웅천에 있던 왜군을 무찔러 남해안 일대의
적 수군을 완전히 제거하고 한산도로 본영을 옮겼다. 이 때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여 수군의 모든 지휘권을
맡겼다. 1594년 명의 수군이 원병으로 오자 죽도로 진을 옮기고 장문포에서
왜군을 격파했다. 또한 적의 후방을 교란하여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왜군을 차단해
왜군 작전에 큰 타격을 주었다. 특히 10월의 영등포해전에서는 곽재우, 김덕령 등과
약속하여 왜군을 바다와 육지에서 협공했다. 이후 명과 일본 간의 휴전회담이 진행
되었다.
(4) 백의종군 이후의 행적
3년에 걸친 휴전회담이 깨지자 일본은 다시 1597년에 일본군 15만 대군이
쳐올라 왔다(정유재란) 이순신은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으나,
원균의 모함과 일본의 모락으로 원균이 삼도수군 통제사가 되어
칠천량에서 싸웠으나 대패 하여 아군120명에 전선 12척 밖에 없었다.
조정에서는 다시 이순신을 삼도수군 통제사로 임명했다.
이순신은 절망하지 않고 울돌목에서 적선 133척과 싸워
31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웠다. 이 명량대첩은 이순신이
다시 통제사로 올라와 첫 번째 싸움 이면서 전세를 역전 시키는
싸움이 되었다.또한 수군을 재기하게 되었다.
1598년 2월에 고금도로 병영을 옮겨 군사를 모집하고 백성들을 모아 둔전을
경작하는 등 전투에 만전을 기해, 수군의 위력은 한산도 본영에
있을 때 보다 규모가 10배나 커지게 되었다.
11월에 이순신은 노량에 본국으로 토실려고 하는 적선 500여척이
있다는 보고를 받고 명의 제독 진린을 설득해서 노량으로 나아가
적선 200여척을 격파 했다. 돌아가는 전선은 단 50여척
그러나 이순신은 여기서 적이 쏜 총알이 어깨에 맞아 전선했다.
이순신은 죽기 전에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마라"
라는 말을 조카에게 이런 말을 하고 전사했다.
임진왜란 주요 해전
1592.5.7. 옥포 이순신.원균 왜선 26척 격파
1592.5.29 사천 이순신.원균 왜선 13척 격파
1592.6.2 당포 이순신.원균 왜선 21척 격파
1592.6.5 당항포 이순신.원균.이억기 왜선 26척 격파
1592.7.8 한산도 이순신.원균.이억기 왜선 47척 격파
12척 나포
1592.9.1 부산포 이순신.이억기.원균 왜선 100여척 격파
1594.3.4 당항포 이순신.이억기.원균 왜선 30여척 격파
1597.7.14~16 칠천량 이억기.원균 패전(이억기.원균 전사)
1597.9.16 명량 이순신 왜선 31척 격파
1598.11.18 노량 이순신 왜선 200여 척 분파(이순신 전사)
도고 曰
"내가 넬슨엔 견줄 수 있을지 모르나,이순신에 비교하면 나 자신은 하사관만큼도 못한 존재입니다"
이순신!
그는 진정 백성을 사랑한 군자요,온갖 고난 속에서도,비록 나라가 그를 버리는 상황에서도 한시도 애국심을 잃지 않은 충신이요,무패신화에 빛나는,세계 최고의 명장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만고의 성웅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