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고독에 의해 파괴되어 가는 세상

최장욱2008.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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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고독에 의해 파괴되어 가는 세상 쫓기는 모스와 그를 바라보는 거대한 쉬거의 얼굴. 이 포스터는 많은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사라져 가는 것들

 

 전직 용접공인 모스는 사막에서 한가로이 사냥이나 하며 살고 있다. 그는 베트남전에 두 번이나 참전했던 군인이었지만, 이제는 아내의 잔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쓸모없는 퇴물이나 마찬가지다. 그가 자신이 가진 능력을 조금이나마 발휘할 수 있는 기회는 사막에서 사냥을 할 때다. 아마도 전장의 경험에서 얻었을 법한 냉철함과 주의력은 고작 사슴을 사냥할 때나 효과적일 뿐이다―그는 그마저도 실패하지만. 그러나 그는 그런 자신의 능력을 본의 아니게 발휘할 수 있을 기묘한 상황을 우연히 발견하게 된다. 사막 한가운데서 벌어진 듯한 총격전의 흔적. 그는 본능적으로 그곳에서 사라진 무언가를 추적한다. 사라진 존재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그는 생존자의 행방을 추리하고 또 멀리서 그의 생사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시계를 보며 기다린다. 그가 보여주는 위험에의 경계는 전장의 그것과 다름없다.

 

 모스라는 캐릭터는 벨 보안관과 함께, 텍사스라는 서부의 모습으로 대표되는 미국에서 이제는 사라져가는 무언가를 은유하는 인물이다. 그가 멕시코의 국경을 넘을 때 검문소 직원은 그의 신분을 믿지 않지만 그의 참전기록을 확인하고는 그를 보내준다. 그 자신은 이제 미국이라는 땅에서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은 존재처럼 퇴색되어 버렸고, 그나마 그의 과거가 그라는 존재를 간신히 지탱해 주고 있는 것이다. 베트남전이라는 기억과 함께 그를 미국의 과거와 기억으로 묶는 방식으로. 범죄조직이 고용한 해결사(이름이 ‘칼슨 웰스’였던가? 그의 등장은 어쩐지 ‘분노의 저격자’의 탐정을 연상케 한다.)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인물이다. 그가 병원에 입원한 모스를 찾아갔을 때 그는 협상을 제안하지만 모스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사실을 들먹이며 그를 설득하려 한다. 또 그가 죽었을 때 보안관은 그를 ‘퇴역장교’라고 부른다. 그는 항상 자신만만한 태도를 지니고 있지만, ‘베트남전에 참전했다’는 과거에 의해서만 사람들에게 인식되는 존재일 뿐이다.

 

 벨 보안관은 어떤가? 그는 은퇴를 고민하는, 본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늙어버린’ 보안관이다. 황폐한 텍사스 사막의 보안관만큼이나 낡은 존재도 없을 것이다. 그는 사막을 순찰할 때 이제는 정부에서 보조도 해주지 않는 말을 타고 가기를 고집한다. 그는 도입부에서 자신이 읊조리던 나레이션에서처럼 의미 없이 목숨을 잃고 싶진 않지만 아직도 자신이 뭔가 할 수 있다고는 믿는 사람이다. 그는 쉬거라는 살인마를 쫓으려 부단히도 노력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무력함에 절망하기만 할 뿐이다.

 

 황폐한 사막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좋았던 시절은 사라져 가는 것만 같고 점차 기존의 것들도 설 자리를 잃어가기만 한다. 모스와 벨 이 두 남자는, 유령처럼 종잡을 수 없는 폭력에 의해 잠식당한 땅에서 그 존재를 잃어가는 미국의 옛 기억을 대변하는 존재인 것이다. 


 황량한 텍사스 사막을 배경으로 우연히 돈 가방을 손에 넣은 남자와 그의 뒤를 쫓는 잔혹한 살인마, 그리고 그 살인마를 쫓는 초로의 보안관. 그들의 쫓고 쫓기는 폭력의 현장.

 십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걸작이라고들 평하는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텍사스를 무대로 한, 어딘지 모르게 그들의 데뷔작 ‘분노의 저격자’를 떠올리게 하는 스릴러영화다. 하지만 ‘분노의 저격자’가 치정과 폭력이 뒤얽힌 무대로서의 텍사스를 선택했다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의 텍사스는 폭력의 절망 속에서 스러져 가는 미국의 옛 모습―흔히들 좋았던 시절이라고 얘기하는 그럼 모습들―을 보여주기 위한 장소다.

 

 일단 이 영화는 재밌다. 정말 재밌다. 데뷔작 ‘분노의 저격자’에서부터 그 재능을 십분 발휘했던 서스펜스에, 코엔 형제 특유의 하이개그, 그리고 ‘파고’에서 보여주었던 폭력에의 성찰까지. 웰메이드 영화계의 가내 수공업자 같았던 코엔 형제가 그 모든, 매력적일만큼 어두운 요소들을 정교하게 흥미롭게 칵테일하여 뽑아낸 걸작 영화가 바로 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다. 하지만 ‘사라지고 무너져 가는 것들을 절망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영화’라는 지배적이고 다소 지성적인 냄새를 포함한 듯한 가식(?)적인―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다―감상평은 잠시 제쳐 두고서라도, 영화적인 쾌감의 측면에서만 볼 때도 이 영화는 정말 훌륭하다. 누가 보더라도 흠이 없어 보일 정도다. 특히, 보는 이를 두근거리게 하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의 제조능력엔 가히 혀를 내두를 만 하다.

 

 그런데 ‘사라져 가는…’운운하는 일색의 감상평에 있어서는 그 미덕의 가치를 평하기가 조금 머쓱해진다. 한번 생각해 보자. 유령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악의 화신으로 묘사되는 악덕들에 의해 미국의 아름다웠던 옛 가치들이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는 현실에 대한 통탄이라고? 미국사람이 아니고서야 서부의 사라져가는 미덕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을 만큼 감정이입이 초월적으로 뛰어난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이런 형태의 지극히 감상적인 향수의 자극과 그에 따른 좌절감은 너무나 미국적인 요소여서 미국 내에서나 통할만한 감상처럼 느껴진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무언가를 성찰한다거나 생각해야 한다거나 할 만큼의 조그만 여유 따위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이 영화는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할 정도로 관객을 휘어잡는 ‘재미’라는 힘이 있다. 이 영화가 대중적이지 못하다고? 천만에. 이 영화는 굉장히 대중적이다. 말초적이라고 할 수 있을, 단순한 영화적 재미가 마구 넘쳐흐르니까. 어떤 이는 이 영화를 보며 ‘메타포 덩어리’라고 까지 말하는 사람도 있던데, 나는 그 의견에 동의할 수 없을 뿐더러―다시 말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다―이 영화가 보여주는 은유가 있다면, 그것은 주제에 대한 성찰 따위가 아니라 영화적 재미를 추가하기 위한 장치로써 작용할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이 영화를 보며 ‘개인적으로’ 느낀 것은 그렇게 거대한 담론이라든가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것들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고독’이다. 모든 비극과 파멸 혹은, 절망을 불러일으키는 그것. 텍사스라는 황무지처럼 황폐한 인간의 심연을 지배하고 있을, 지독한 고독.           


 

 고독한 사람들 

 

 여기 무시무시한 킬러가 한 명 있다. 우스꽝스러운 단발머리―가발처럼 보이지만 진짜 머리라고 한다. 허나 시상식에서 본 하비에르 바르뎀의 외모는 얼마나 출중하던지!―를 한 이 남자는 진지한 눈빛으로, 가지고 다니자면 번거롭기 짝이 없을 법도 한 산소통을 아무렇지도 않게 들고 다닌다. 이 남자의 이름은 ‘안톤 쉬거’다. 그는 산소통을 이용한 신비로운 방법―차마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다―으로 사람을 죽이고, 신발에 피가 묻지 않도록 조심한다. 심지어는 살해 현장에서 태연하게, 더러워진 양말을 갈아 신기까지 한다.

 

 과연 이 남자는 냉혹한 살인마인가? 관객은 그의 추격을 지켜보며 가슴이 설렐 정도의 긴장감을 느끼지만, 그의 사려 깊고―자신에게만 한정지어진―,사소한 행동들을 보면서 피식하고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다. 그를 단순히 싸이코패쓰라 보기엔 어떤 막연한 아쉬움이 남는다. 그에겐 무언가 다른 게 있다. 그러나 그의 공허한 눈동자와 변화 없는 표정은 관객에게 그가 어떠한 캐릭터인지를 쉽사리 말해 주지 않는다. 그의 내면은 어딘가 부조리해 보이는, 그의 행동을 통해서만 아주 은밀하게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이 킬러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그는 사실 고독한 남자다. 아니, 이 영화에 나오는 세 명의 남자는 사실 모두 고독하다. 이 영화에서 중심인물이라 할 수 있는, 모스와 벨(영화에서 그의 이름이 나왔던가?), 그리고 안톤 쉬거가 모두 그렇다.

 

 

 소통의 문제

 

 코엔 형제가 이미 ‘파고’에서 그들 특유의 엇박자 유머에 대한 매개체로써 보여주었던 그것처럼, 등장인물의 무심한 말투와 건조한 태도―시신을 보며 커피를 마시던 임산부 경관처럼―는 관객에게 그들의 고독―마치 하드보일드소설처럼―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웃음이 좀 첨가되긴 하지만.

 모스가 돈가방을 발견했을 때를 상기시켜보자. 그는 마치 이 과분한 행운이 가져올 불행을 어슴푸레하게나마 예감하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이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무심한 태도를 유지한다―심지어는 쫓기는 와중에도. 쉬거도, 벨 보안관도 모든 행동에서 이런 냉소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들은 말이 많은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모스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살아있던 멕시코 인에게 물을 가져다주고자 결심할 때, 그는 아내에게 위험을 이미 느끼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 많은 것을 말해 주지 않는다. 단지 그녀가 해야 할 행동에 대해서만 말할 뿐, 그 이외엔 아무 것도 설명해 주지 않는다.

 보안관 벨도 마찬가지다. 그는 도망자와 추적자의 뒤를 쫓으면서 자신이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을 아무에게도 얘기해 주지 않는다. 모스의 아내를 설득할 때도 그는 직접적인 이야기를 피하고, 조잡하게 지어낸 이야기 따위를 빌려 그녀가 마음을 바꾸도록 노력한다.

 

 말을 많이 하거나 적게 한다는 건 이 영화에서 캐릭터들의 성격을 가르는 중요한 요소다. 모스는 자신에의 보호를 제안하는 칼슨 웰스에게 ‘말이 많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칼슨 웰스는 허무하게―쉬거의 등장은 몹시 소름끼쳤지만. 초반의 부보안관을 살해할 때도 비슷한 장면이 나오는데, 사람을 식겁하게 만드는 재주가 정말 놀랍다―죽어 버린다. 시종일관 과묵하던 모스 또한 모텔에서 아내를 기다리며 여자와 시시덕거리다가―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그가 수다(?)를 떠는 장면이 아닐까?―최후를 맞게 된다. 사실 결정적으로 모쓰의 비극을 초래한 것은 역시나 장모의 ‘수다’였지만.

 

 그들은 세상과의 소통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에 일체의 모든 도움을 거부한다. 철저히 혼자서 행동하는 안톤 쉬거는 물론이거니와, 보호를 제안한 칼슨 웰스나, 벨 보안관의 도움을 거절한 모스, 그리고 마약단속국과의 협조를 무시하는 벨 보안관 모두가 그렇다.

 

 그들은 세상과 원활히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자신들에게 부재(不在) 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마치 그것을 체념해 버린 듯 하다. 벨 보안관은 앞서 말했듯이 모스의 부인을 설득할 때 지어낸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것은 칼슨 웰스가 구사했던 재미없는 농담―그 역시 고독한 존재인 것처럼―과 같이, 세상과의 소통을 위해 꾸며진 자신들만의 방법―노하우라고 표현할 수 는 없다. 효과가 없었으므로―인 것처럼 보이지만 몹시 어설프게 느껴질 뿐이다. 그는 꼭 필요한 말만 하고, 가끔 신문 기사의 낭독이나 꿈 얘기 따위를 통해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것을 듣는 사람은 부보안관처럼 그저 웃어 버리기 일쑤다. 그래도 그들은 그것을 바로 잡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이 어떻게 알아듣던지 간에 그냥 무시해 버릴 뿐이다. 어차피 자신이 고독한 존재라는 사실과, 세상과의 소통이 어렵다는 사실을 그들은 누구보다 스스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벨 보안관은 내내 쉬거의 뒤를 뒤쫓지만 늙어 버린 자신의 무기력함에 좌절하고는, 한때 부보안관이었던 삼촌을 찾아가서 이러한 점을 토로한다. 삼촌은 그가 속내를 말하는 유일한 소통가능의 대상이다. 그런데 그가 찾아간 삼촌 또한 총에 맞아 불구가 된 채, 세상과 단절되어 고양이들과 지내는 또 다른 고독한 존재일 뿐이다.

 

 안톤 쉬거의 경우는 두 사람과는 조금 다르다. 그는 극 중에서 언급되듯이 자신만의 철저한 원칙과 행동이 있는 남자다. 누군가가 말을 걸어오면, 그는 자신만의 화법으로 그들을 가두어 혼란 속에 빠뜨린다. 그리고 상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목숨을 건 강제적이고 일방적인 게임을 제안하곤 한다. 쉬거가 모스나 벨 보안관과 차별되는 점은 바로 그것이다. 칼슨 웰스는 쉬거에게 ‘말이 통하지가 않는다’고 한다. 쉬거는 소통불가의 상황을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대신, 자신만의 원칙 속으로 세상을 끌고 들어온다. 그것은 살인, 그리고 그가 제안하는 게임이다. 동전을 튕겨서 사느냐 죽느냐를 결정하는 게임 혹은, 죽음을 대상으로 한 협상. 모스와 벨이 그나마 사회와 필요한 최소한의 소통을 하고 그것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것과 달리, 그는 자신의 관점과 인식의 방법으로 세계를 결정짓는 다소 이기적인 방법을 택한 것이다.

 

 

 고독의 동질감

 

 벨 보안관은 쉬거에게서 일종의 동질감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모스의 트레일러에서다. 모스가 달아난 뒤, 쉬거는 태연히 소파에 앉아 우유를 마신다. 그리고 꺼진 티비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본다. 뒤를 이어 나타난 벨 보안관도 우유를 마신다. 그리고 티비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본다. 그는 그곳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었을 쉬거의 존재를 느끼고는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가 자신과 같이 고독한 존재라는 것을. 벨 보안관이 모스가 죽은 모텔을 찾아갔을 때, 그는 뭔가를 느끼고는 잠시 주춤하다가 안으로 들어간다. 그곳에는 쉬거가 있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던―‘분노의 저격자’에서의 유명한 그 장면처럼―그들은 비록 마주치지는 않았으나 어떤 동질감에 의해 서로의 존재를 느꼈던 것 같다. 쉬거가 떠난 자리에는 동전이 남아 있을 뿐이다(라고 한다. 나는 사실 이 장면은 보지 못했다.). 과연 쉬거는 자신의 게임으로 그의 목숨을 점쳤던 것일까? 그것은 알 수 없다. 어떤 다른 이유 때문에 그를 살려준 것일지도 모른다고 한다면 너무 과잉된 논리에 의한 오독인 것일까?  

 

 모스와 쉬거가 세상과 원활히 소통할 줄 아는 유일하고 공통적인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돈이다. 모스는 돈을 주며 모텔 직원과 택시기사를 회유하며 설득하고, 청년에게서 자켓을 산다. 돈을 이용하는 그의 소통법은 전혀 서툴지가 않다. 돈은 소통의 유용한 도구가 되고, 돈을 이용한 소통은 그들이 가진 유일하고 손쉬운 소통법이다. 쉬거 또한 그렇다. 세상과의 소통에 있어 자신의 원칙만을 고수하는 쉬거조차 돈을 이용한 소통 방법―너무도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인 걸까?―엔 서툴지가 않다. 그도 소년들에게서 셔츠를 사고 함구를 부탁한다.

 

 모든 도움을 거부한 것처럼 그들은 혼자서 모든 것을 준비한다. 쉬거가 자신만의 독특한 무기를 마련하는 것처럼(그가 그 독특한 무기를 손에 넣기(?)까지의 과정을 상상해보라. 필시 그는 고독했을 것이다.) 모스 또한 방구석에서 혼자 총을 자르고 손질한다.

 상처를 치료할 때도 그렇다. 쉬거가 총상 입은 자신의 다리를 치료할 때 그것은 마치 혼자서 오래도록 그래왔던 것 같은 익숙함을 보여준다. 자신의 다리를 소독하고, 주사를 놓고, 스스로 꿰맨다. 이 모든 과정은 치밀하며, 마치 늘 그래왔던 것 같은 기시감을 느끼게 해준다. 장 피에르 멜빌의 ‘사무라이’에서 보았듯이 킬러의 자가치료는 극명한 고독을 느끼게 해주는 일종의 회화적인 요소와도 같다―나체의 쉬거가 다리를 꼬아 중요부위를 절묘하게 가리고 상처를 치료하는 장면은 조금 다른 걸 노린 것 같지만.

 

 

 공허함의 공포

 

 단 일말의 양심도 없이―그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새를 쏜다―자신이 혼자 결정한 자신만의 게임으로 타인의 목숨을 희롱하는 그의 태도는, 마치 생명에 대한 그 어떤 숭고함도 느끼지 못하는 악마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의 공허한 눈동자가 보여주는 것은 그러한 악마적인 영역으로 치닫게 된 고독과 황폐의 그림자다. 그의 우스꽝스런 외모와 행동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에게서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끼는 것은, 관객이 영화를 보면서 점층적으로 그의 공허함을 느끼게 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엘파소의 보안관이 하는 말처럼 ‘아무런 동기도 없고, 이유도 없이 살인을 하는 존재’다. 그의 황폐한 영혼은 마치 텍사스의 황무지를 보는 듯 하다.

 코엔 형제가 정말로 이 영화에서 ‘무너지고 사라져가는 미국의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다면, 감정이 말소되어 폭력의 화신처럼 행동하는 쉬거를 통해 보여주려 했던 것은 아마도 텍사스의 황폐한 사막일 터다. 데이빗 크로넨버그가 ‘폭력의 역사’에서 전직 킬러였던 한 가장을 통해 ‘육화한 폭력의 계보’를 직접 느끼게 하려 했던 것처럼, 코엔 형제 또한 그것을 좀 더 효과적으로 병치하고, 은유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를 위한 나라는 없다

 

 쉬거가 모스의 아내를 죽이러 그녀를 찾아갔을 때, 그는 어떤 동요를 느낀다. 그는 모스의 결정―자신과의 협상을 거부했던―이 불러온 결과를 이유로 그녀에게 게임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은 당신이 결정해야 할 일이다.’라며 거부한다. 여기서 쉬거는 잠깐이지만 살짝 동요하는 빛을 보인다. 그는 세상과의 원활치 못한 소통을, 자신이 지배하는 게임―그의 궤변도 마찬가지다―의 형식으로 치환하려 하는 버릇이 있다. 그는 영화에서 보여준 것처럼 내내 그것을 자신의 소통방법이라 굳게 믿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녀가 그것을 거부하고 이 모든 것을 쉬거 자신이 만들어낸, 파멸을 피하기 위한 방어기제로써 만들어낸, 일종의 자구책이었을 뿐임을 환기시키자 그는 자신의 원칙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그의 그런 동요는 모스와의 통화에서도 잠깐 엿볼 수 있다. 그는 모스에게 불리한 제안을 하고 모스는 그것을 거부한다. 쉬거는 여기서 당황한 듯한 표정을 보인다. 여태까지 쉬거가 고수했던 소통의 방식이, 혹시 모스에 의해 조금이나마 균열이 생긴 것은 아닐까? 그가 칼슨 웰스와 대화하던 때를 돌아보자. 칼슨 웰스는 자신만만했지만 쉬거의 앞에서는 스스로 비굴한 협상을 제안해 온다. 그렇게 자신의 원칙을, 공포가 만들어준 상대의 암묵적 동의에 의해 유지해 오던 쉬거가, 굳이 시간이 흐른 후―그렇게 암시된다―에까지 다시 모스의 아내를 찾아온 것은 모스에 의해 생겨난 그러한 균열을 스스로 느꼈고 또 그것에 의문을 가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모스의 아내가 ‘이럴 필요까지는 없지 않으냐’고 하자, 쉬거는 ‘어째서 다들 그렇게 말하는가’하고 묻는다. 항상 자신의 원칙에 의해서만 소통하고 일방적인 대화만을 고집하던 그가 그녀에게 궁금하다는 듯 질문하는 모습은 상당히 생경하게까지 느껴지는데, 그에게서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음을 우리가 느끼게 해준다. 마찬가지로 그가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에 잠시 비쳐진, 영화의 전체적인 맥락으로 볼 때 생소하게 보이는 평화로운 풍광 또한 그런 마음의 동요를 보여준 것은 아닐까?

 

 쉬거는 결국 그녀를 죽이지만―구두를 확인하는 그의 모습에서 암시된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가 동요했음을 눈치 챌 수 있다. 그는 평소에 신발에 피가 묻지 않도록 주의하는데, 이 장면에서는 밖에 나와서야 비로소 그것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집을 떠난 지 얼마 안 가 교통사고를 당한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고 살아서 유유히 도망친다. 이미 이 사회에 유령처럼 만연한 악이라는 존재의 끈질긴 자생력을 보여주는 것처럼.

 어쩌면 이 영화에서 말하는 ‘사라져가는 존재’란, 고독이 만연한 사회에서 그래도 무언가 소통하며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던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그것들은 은밀하고 위험조차 느낄 수 없는, 공허하고 황폐한 고독이 만들어낸 또 다른 존재에 의한, 폭력으로 세상에서 파괴되고 무너져 간다.

 

 ‘옛날이 좋았지’하며 상념에 빠진 노인을 위한 나라는 더 이상 없다. 그러나 어디 노인을 위한 나라만 없겠는가? 영화에서 쉬거로 그려지는, 세상을 무너뜨리고 노인의 자리를 앗아가는 존재를 위한 나라도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것들은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이 세계를 인식하고 활보한다. 마치 유령처럼.

 그것들을 막을 방법은 무엇일까? 무너져 가는 세계를 회복할 방법은 무엇일까? 벨 보안관은 삼촌에게 말한다. “예전에는 신께서 돌봐주시리라 생각했죠.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달았어요. 저라도 저 같은 놈을 돌봐주진 않겠죠.”

 모두를 위한 나라는 없다. 누구를 위한 나라도 없다. 황폐한 텍사스의 사막처럼 모든 것은 그저 허무할 뿐이다.

 

 

덧붙임1. 이 영화가 이 땅의 정서에 맞게 리메이크되려면, 그 제목은 ‘솔로를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Lonely Men)'가 되어야 마땅하다. 대한민국에서 솔로가 설 자리는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덧붙임2. 칼슨 웰스는 자신의 고용주 즉, 조직의 보스에게 ‘건물의 한 층이 빈다’고 한다. 그러자 보스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확인해 보겠다’고 한다. 그런데 그에 관련된 내용은 영화에서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다. ‘맥거핀’이었던 걸까?  아니면 그의 허풍스런 성격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