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증이 교차하는 그 이름, 정민태

정백현2008.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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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증이 교차하는 그 이름, 정민태

▲ 1996년 현대유니콘스 창단 당시 팬북에 게재된 정민태

#20. 정 민 태

 

* 1970년 3월 1일, 인천광역시 출생

* 숭의초등학교 - 동산중학교 - 동산고등학교 - 한양대학교 졸업

* '92 태평양 - '96 현대 - '00 일본 요미우리 - '03 현대

* 태평양돌핀스 연고지 출신 선수 1차 지명 신인으로 프로 데뷔

* '98 한국시리즈, '00 플레이오프, '03 한국시리즈 MVP

* 다승왕, 승률왕 (2000) 골든글러브 (1998, 1999, 2003)

* '98 방콕아시안게임 금메달, '00 시드니올림픽 동메달 획득

* 2008년 3월, 신생 "우리히어로즈" 로부터 방출 통보

수많은 애증이 교차하는 그 이름, 정민태

 

내가 그를 처음 본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인 1994년.

태평양돌핀스가 가져온 프로야구계 일대 돌풍으로

야구도시 인천 전역이 야구 열기로 들썩이던 때였다.

 

당시 인천야구장은 태평양돌핀스의 승승장구와 함께

역대 최다 관중 동원 신기록을 세우며

잠 자던 인천야구팬들의 심장을 다시 깨웠다.

1994년 페넌트레이스의 인천 홈 관중 동원 기록은 476,277명.

63번의 홈경기 중 74%인 47경기 정도는

만원 사례였다고 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1만명 남짓이었던 초미니 인천야구장의 수용 규모를 생각하면

실로 대단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그 해 나는 야구장에 갈 때마다 정민태의 피칭과 만났다.

간혹 최창호와 최상덕이 선발로 나오는 날이 있었지만

10번 야구장을 가면 5~6번은 정민태가 선발이었다.

당시는 내가 자세하게 야구를 몰랐던 터라

그의 볼이 위력적이었는지는 잘 몰랐다.

다만, 내가 갈 때마다 팀이 승리를 거둔 것만큼은 똑똑히 기억한다.

 

오동통한 덩치에 뒤뚱거리는 투구폼,

그리고 매번 승리를 안겨주는 모습에 나는 정민태의 팬이 되었다.

 

내가 본격적으로 야구에 빠져들기 시작한 1996년.

인천에는 부자구단 현대유니콘스가 창단되었고,

정민태는 동산고 후배 위재영과 함께

팀의 에이스로서 인천구장 마운드에 서 있었다.

 

현대유니콘스는 창단 첫 시즌 초반부터 선두를 질주했다.

선두권을 위협하며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던

2년 전 태평양돌핀스의 돌풍과는 차원이 다른 핵폭풍이었다.

인천야구장에는 여지없이 인파로 가득 찼고,

연안부두 노랫소리는 야구장 옆 광성고 운동장까지 메아리쳤다.

그 승승장구의 중심에 정민태가 있었다.

물론, 그 해 현대유니콘스는 한국시리즈에서

막강 해태타이거즈의 벽에 가로막혀 준우승을 거뒀고,

에이스 정민태는 한국시리즈에서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했다.

 

하지만, 준우승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싸워준 그의 모습에

나는 무한한 박수를 보내주었다.

 

준우승을 거둔 지 며칠 후,

현대유니콘스는 부평 현대백화점에서 팬 사인회를 가졌다.

어린 내가 "싸인해주세요. 정민태 아저씨~" 라고 했더니

옆에 앉은 정명원에게 "형, 얘가 나보고 아저씨래." 라고 말하며

내게 씨익 웃어주는 모습을 난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보기에 스물 일곱 청년은 그저 아저씨일 뿐이다.

 

그리고 1998년...

시국은 IMF라는 경제 한파가 거세게 몰아치기 시작했고,

동시에 현대유니콘스는 2년 전의 돌풍과는 또 다른

슈퍼 사이클론급 핵폭풍을 한국프로야구계에 몰고 왔다.

 

현대유니콘스는 당시 페넌트레이스 최다승 타이기록인

81승을 거두면서 인천팀 사상 처음으로 한국시리즈에 직행한다.

 

정민태는 2년 전과 마찬가지로 그 슈퍼 핵폭풍의 중심에 있었다.

팀 에이스 답게, 팀 내 투수 중에서 당당히 다승 1위였고

매 경기에 등판할 때마다 많은 팬들에게 믿음을 심어주었다.

 

LG트윈스와의 한국시리즈.

4년 전 영패의 모진 시련을 던져주었던... 너무도 얄밉던 그 LG...

현대는 4년 전 전신 태평양이 당했던 준우승의 눈물을 설욕했다.

 

4승 2패, 현대유니콘스의 한국시리즈 우승...

1982년 원년 꼴찌로 시작한 시련의 인천야구 역사에

드디어 한 줄기 빛이 찬란하게 작성된 순간이었다.

 

그 순간에도 정민태는 당당하게 마운드에 서 있었다.

한국시리즈 6차전 마지막 타자였던 LG 유지현을 상대한 것도

현대유니콘스 아니 인천야구의 에이스 정민태였다.

 

유지현의 타구가 중견수 뜬공으로 잡히던 순간.

정민태는 포수 박경완에게 와락 안겼고,

모든 선수들이 그들을 에워싸며 기쁨을 나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민태가 눈물을 펑펑 쏟기 시작했다.

신인 시절부터 호흡을 맞춰온 선배 정명원과 포옹하던 순간

정민태의 눈물은 대성통곡이 되어버렸다.

그간 산전수전, 꼴찌의 시련을 함께 겪어온 사이였기에...

인천야구의 쓴 맛과 단 맛을 함께 본 사이였기에

그 눈물은 너무도 진한 것이었다.

 

디펜딩 챔피언을 주창하며 나선 이듬해...

팀은 우승 후유증을 겪으며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지만

정민태만큼은 1998년의 피칭보다 더 위력적이었다.

날이면 날마다 연전연승을 거듭했고,

결국 초특급 투수의 판단지표인 20승에 도달한다.

1997년 김현욱에 이은 2년 만의 기록이었고,

인천 연고팀 투수로는 1983년 장명부 이후 16년만의 기록이었다.

 

정민태는 명실상부 인천야구의 에이스이자

한국프로야구로서 그 이름을 높여갔다.

나는 "누구 팬이냐?" 라는 질문에 너무도 거침없이

김경기, 박재홍과 더불어 정민태의 이름을 거론했다.

그 정도로 나는 정민태를 응원했고, 정민태에게 신뢰를 보냈다.

 

하지만, 정민태에 대한 나의 좋은 감정은

1999년 가을, 20승 기원 엽서를 야구장에 던지던 날로 끝이었다.

 

지금도 상상하기 싫은... 꿈에 나타나도 두려운...

또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난다면 정말 자살할 지도 모르는

천인공노할 일이 2000년 봄, 인천야구계를 강타하고 만다.

 

우승까지 차지하면서, 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현대유니콘스가 인천을 떠나기에 이른다.

인천은 시장성이 부족하고, 경기장도 낙후해서 싫다는 이유였다.

내가 그렇게도 맹신하던 팀이 하루 아침에 떠난 것이다.

 

유니콘스 팀과 더불어 내가 그렇게 사랑했던

그 선수들도 하루 아침에 남의 팀 선수가 되고 말았다.

인천야구의 상징이었던 김경기는 7월에 인천으로 돌아왔지만,

리틀쿠바 박재홍과 정민태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물론, 박재홍은 6년 후인 2005년 봄에 인천으로 돌아온다.

 

그 중 정민태는 내가 보냈던 신뢰에 반하는 행동을 보였다.

인천을 떠난 구단의 행동에 옹호했기 때문이다.

"어느 곳에서 야구를 하던 상관은 없다." 라는 발언까지 해서

성난 인천팬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기까지 했다.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고, 특히나 야구 명문으로 이름난

동산고등학교의 학생이 되었다.

 

학교의 홍보 책자 한 페이지에는

50년간 인천야구의 대표 주자로 뛰어온

동산야구의 자랑거리들을 모아 놓는 부분이 있었는데

동산 출신 스타 동문 중 앞자리를 차지하던 이름은

"아시아의 철인" 박현식 선생과... 청룡기 3연패의 주역 신인식 옹,

군산상고의 역전 우승 신화를 창조한 최관수 前 군산상고 감독,

그리고... 정민태였다.

 

예전 야구 사진과 자료들을 통해 익히 들은

박현식 선생과 신인식 옹, 최관수 전 감독에 대해서는

무한한 자부심을 느끼며 행복했다.

하지만, 정민태를 보며 이를 박박 갈았다.

아무리 먼 선배라지만 선배로 보기 싫었다.

학교에 억만금을 후원해도 정말 싫었다.

고향을 버리고 떠나면서 번 돈을 고향 모교에 갖다준다니...

정말 더럽고 얼굴 두꺼운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 와중에 정민태는 2년만에 다시 팀을 정상에 올려놓는다.

다승왕에 승률왕까지 거머쥐면서 에이스 자리를 확고히 한다.

그리고 홀연히 일본프로야구 무대로 자리를 옮긴다.

 

난 솔직히 정민태의 일본 무대 실패를 바라고 있었다.

고향 버리고 떠난 사람, 잘 되는 꼴 바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 바람이 통했는지 정민태는 일본에서 죽을 쒔다.

하지만 일본에서 쑨 그 죽이 정민태에게는 무기가 되고 있었다.

 

일본 진출 두 시즌만에 다시 돌아온 2003년...

정민태는 다시 현대의 에이스로 섰다.

선발 연승기록을 세우며 다시금 승승장구 했지만

이미 떠나간 정은 참을 수 없는 분노로 변했다.

 

2003년 한국시리즈.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던 속담처럼

내 가슴에 피눈물이 나도록 큰 대못을 박았던 현대유니콘스는

SK와이번스의 한국시리즈 맞상대가 되었고,

현대는 4승 3패로 SK를 누르고 우승을 차지한다.

 

우승의 그 순간...

마운드에는 역시나 정민태가 있었다.

한국시리즈 3승... '98년 이후 두번째 한국시리즈 MVP였다.

트로피를 들고 환하게 웃는 그의 모습이 너무 싫었다.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면서 나는 한 마디 말을 되뇌었다.

"정민태 이 개xx... 죽여버릴거야..."

 

그는 연봉 협상 기간이 되면 언론에 자주 오르내렸다.

고액 연봉자로서 이름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년 그 협상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

사람들은 그가 돈을 밝힌다고 했다. "돈민태" 라고도 불렀다.

나도 그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2003년 이후 정민태의 모습은

너무도 얄밉게 잘하던 그 정민태가 아니었다.

2004년부터 하향세를 그리던 그의 피칭은

부상으로 인해 삐걱거리기 시작했고,

급기야 2005년부터는 3년간 1승도 없이 6패만 올렸다.

마운드를 호령하던 정민태는 더이상 없었다.

 

그리고 2008년... 정민태가 부상에서 돌아왔다고 했다.

믿지 않았다. "그러다 또 다치겠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 와중에 현대는 해체되었다.

한 때는 너무도 사랑했고, 한 때는 너무도 미워했지만

그래도 사랑이 깃들었던 팀이 영영 못 올 길로 떠난다니

조금은 가슴이 찡했다.

 

부상에 신음하던 정민태의 모습이 떠올랐다.

너무 미안했다. 매일 욕만 한 것 같아 조금은 안타까웠다.

그리고 조금씩 그에 대한 증오를 녹이기 시작했다.

한 때는 우상이었던 고교 선배의 재기를 슬그머니 바라고 있었다.

 

현대의 빈 자리에는 우리히어로즈라는 낯선 팀이 등장했고,

프로야구의 흑자 경영론을 내세우며, 연봉 거품 빼기에 들어갔다.

투수 중에서 최상위 연봉 계층 쯤에 해당하던 정민태가

빠지는 연봉 거품의 중심이었다.

 

정민태는 결국 우리히어로즈를 제 발로 나왔다.

그리고 조심스레 인천팀으로의 복귀 의사를 내비쳤다.

 

지금의 정민태가 있게끔 만든 고향 인천...

아직도 정민태를 사랑하는 팬들이 많은 인천...

야구를 사랑하는 시민들이 많은 인천이 그리운 것이다.

 

난 그의 복귀를 환영한다.

과거의 그가 신의를 저버린 사람이었지만,

지금이라도 과거를 잊고 새로운 모습으로 고향 팬들에게 와준다면,

그리고 지위고하, 연봉고저를 막론하고 토의종군 해준다면

난 다시 그의 열렬한 후원자가 되려 한다.

 

부디 그가 고향에서 마지막 선수 생활을 잘 마무리 하길 빈다.

 

야구라는 내 삶의 한 페이지에 애증의 큰 단락을 심어준

정민태 선배님...

부디 힘 내시고 인천으로 돌아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