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광 채굴자인 ‘다니엘 플레인뷰’(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우연한 사고로 석유 매립지를 발견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석유가 날만한 곳의 땅을 헐값에 사들여 그 곳에서 나는 석유를 통해 부를 축적하는 석유 시추업자로 변신한 그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철한 사업가가 된다. 사람을 믿지 못하는 그의 곁에는 천진하고 똑똑한 아들 ‘H.W’.가 있고 덕분에 ‘가족애’를 내세운 그의 사업 설명회는 힘을 받는다. 그러던 중, 엄청난 석유 매립지라는 정보를 사서 찾아가게 된 캘리포니아의 리틀 보스턴. 그 곳에서 땅을 사들인 대가로 다니엘은 석유와 부를 얻고, 교회를 만들고 싶어했던 ‘일라이’(폴 다노)는 땅을 판 돈으로 ‘제3계시교(the Third Revelation)’를 열어 목회자가 된다. 그러나 이 둘은 신과 사업에 대한 믿음과 그에 대한 대가를 두고 팽팽하게 맞선다. 시추 작업 중 불의의 사고로 H.W.가 청력을 잃게 된 것은 다니엘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고 그럴수록 일라이와의 갈등은 커진다. 부가 쌓여갈수록 ‘피의 저주’를 함께 얻어가는 다니엘과 끊임없이 기부금을 대가로 요구하는 일라이는 그 갈등의 끝을 맞게 된다.
영화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렵지 않게 탄생할 수 있는 광기어린 인물의 30여년 간의 삶을 통해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피비린내 나는 풍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는 다시 자본주의의 대표 국가임을 자임하는 미국에 대한 강렬한 비판의 메시지로 보여진다. 하지만 비단 미국만이 이 비판의 대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지금 이 대한민국에서도 충분히 벌어질 수 있고 벌어지고 있는 피를 부르는 행태들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깊은 생각에 빠지게 하는 영화임에 틀림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버는 방법을 터득한 사람은 자본의 흐름을 이용해 누구보다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다. 축적된 부는 다시 부를 불러온다. 부가 부를 만들어 빈부의 격차가 생기고 부가 권력이 되는 것은 자본주의의 특성이다. 이런 자본주의의 특성은 ‘부의 평등’을 이루지 못하는 면에서 이상이 되지 못하고 그것이 부작용을 낳는다. 다니엘은 석유 사업을 통해 큰 부를 얻지만 본래 그 땅의 소유주에게 그 땅에 묻힌 석유의 가치만한 대가를 지불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깔고 앉아있던 땅이 금싸라기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현재의 빈곤함을 극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다니엘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만다. 일부는 그런 칼날같이 냉철한 자본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고 자신의 몫을 주장하지만 자본주의의 룰을 등에 업은 다니엘에게도 그 사회의 ‘정보’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책임은 없다. 영화 속에서 목회자 일라이는 숱한 굴욕을 당하면서도 종국에는 스스로의 믿음까지 부정하면서 자본을 지닌 다니엘에게 매달리지만 자본주의의 열쇠를 쥐고 있는 다니엘에게는 판정패를 당할 뿐이다. 그렇다고 다니엘을 자본주의의 수혜자라고 볼 수는 없다. 누군가의 저주 때문인지, 신의 노여움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다니엘은 사업을 통해 수없이 많은 피를 재물로 바치게 된다. 결국 그의 아들까지 떠나 보내게 되는 그에게 남은 것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들에 대한 불신과 불안 뿐이다. 불신과 불안에 빠진 그는 과잉 방어와 폭력으로 자신과 부를 지켜내려고 몸부림 친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을 보호하기는커녕 그의 울타리마저 위태롭게 만든다. 다니엘의 모습은 국제 사회에서 스스로가 강력한 테러리스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과잉 방어하고 피해자로 위장하고 폭력을 정당화하며 피를 부르는 행태를 보이는 현실의 거울이며 거울 속에 투영된 모습은 소름 끼치도록 적나라하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 ‘There will be blood’는 이런 현실에 대한 경고 문구로 들린다.
영화는 자본주의와 함께 종교도 공격한다. (물론 전부의 모습은 아니지만) 근본이 무엇인지 헛갈릴 정도로 다양한 형태로 제 맘대로 가지치기를 해대고 자기 체면에 빠져 광기를 종교적 믿음의 깊이로 착각하는 모습이 영화 속 ‘제3계시교(the Third Revelation)’의 모습이다. 종교 갈등이 국가간 대립을 부르기도 하지만 이 영화는 이보다 자본주의 사업가와 목회자의 부정한 ‘공생관계’를 비판한다. 다니엘이 파이프라인 설치를 위한 땅을 얻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일라이에게 세례를 받는 장면과 다니엘의 돈을 얻기 위해 일라이가 자신의 믿음을 부정하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이는 서로 팽팽하게 대립하지만 각자의 이익(주로 자본)을 위해 무릎을 꿇는 자본과 종교의 역겨운 모습이다. 성스러운 종교의 근본을 자본주의의 생리에 팔아버리고 자본과 결탁하고 그것에 빌붙은 뒤틀린 종교는 역시나 피를 부를 뿐이다.
는 음악과 연기, 연출 등 형식적인 면에서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여 영화에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초반부에 특별한 대사를 들려주지 않고 마치 경고음처럼 들리는 음악으로 관객을 맞이하고 중반에 이르러서야 관객에게 익숙한 형태의 스코어를 들려준다. 초반부의 이러한 음악적 장치는 영화를 논픽션이 아니라 픽션으로 착각하게 만들어 장장 2시간 40여분에 달하는 영화에 지루할 틈 없이 관객을 몰입하게 만드는 색다른 약품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헐리우드 영화 5분의 법칙’대로 초반에 뭔가 터지는 장면을 넣는 방법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관객을 몰입할 수 있게 만들 수 있음을 감독인 폴 토마스 앤더슨과 음악을 담당한 조니 그린우드(라디오헤드의 멤버)는 입증한다.
모노드라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지 않는 장면 없이 자신의 모습으로 영화를 채워내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카리스마는 그가 수많은 남우주연상의 주인공일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알게 한다. ‘다니엘 플레인뷰’라는 인물로 스크린 속에서 한치의 오점도 없는 완벽한 연기를 보여주는 그의 모습은 캐릭터 자체만으로 영화의 메시지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특히 갈수록 불신과 불안에 휩싸이는 인물이 뿜어내는 힘이 곧 영화를 지탱하는 힘이 된다는 면을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제대로 알고 실천한다. 시상식 장면에서 보여주는 그의 부드러운 면모와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스크린을 장악하는 그는 진정 연기의 맛을 아는 배우라는 생각이 든다. .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다니엘 데이 루이스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써내려 갔고, 시나리오가 완성되기도 전에 그에게 시나리오를 보냈다고 한다. 맞춤형 시나리오와 철저한 배우 정신이 조화를 이뤘기에 이 연기는 더욱 폭발적이지 않았을까.
한 장면도 버릴 것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영화를 만든 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의 역량은 이 영화가 지닌 최고의 보물이다. 를 통해 스스로의 가치를 높여온 감독의 이번 선택은 의 캐릭터 활용법과 의 독특한 형식미에 의 드라마의 힘이 모두 합쳐지고 더욱 강력해진 최고의 작품이라는 생각이다. 장대한 플롯을 간결하고 맛나게 담아내는 재능은 최고가 아닐까 싶다.
* 폴 토마스 앤더슨은 자신이 이 영화를 편집하고 있던 2006년 당시 사망한 감독 ‘로버트 알트만’에게 이 영화를 헌정한다는 메시지를 영화의 엔드 크레딧에 담았다.
[데어윌비블러드]피를 보게 되리라는 소름끼치는 경고
피를 부르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소름끼치도록 적나라한 경고
은광 채굴자인 ‘다니엘 플레인뷰’(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우연한 사고로 석유 매립지를 발견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석유가 날만한 곳의 땅을 헐값에 사들여 그 곳에서 나는 석유를 통해 부를 축적하는 석유 시추업자로 변신한 그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철한 사업가가 된다. 사람을 믿지 못하는 그의 곁에는 천진하고 똑똑한 아들 ‘H.W’.가 있고 덕분에 ‘가족애’를 내세운 그의 사업 설명회는 힘을 받는다. 그러던 중, 엄청난 석유 매립지라는 정보를 사서 찾아가게 된 캘리포니아의 리틀 보스턴. 그 곳에서 땅을 사들인 대가로 다니엘은 석유와 부를 얻고, 교회를 만들고 싶어했던 ‘일라이’(폴 다노)는 땅을 판 돈으로 ‘제3계시교(the Third Revelation)’를 열어 목회자가 된다. 그러나 이 둘은 신과 사업에 대한 믿음과 그에 대한 대가를 두고 팽팽하게 맞선다. 시추 작업 중 불의의 사고로 H.W.가 청력을 잃게 된 것은 다니엘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고 그럴수록 일라이와의 갈등은 커진다. 부가 쌓여갈수록 ‘피의 저주’를 함께 얻어가는 다니엘과 끊임없이 기부금을 대가로 요구하는 일라이는 그 갈등의 끝을 맞게 된다.
영화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렵지 않게 탄생할 수 있는 광기어린 인물의 30여년 간의 삶을 통해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피비린내 나는 풍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는 다시 자본주의의 대표 국가임을 자임하는 미국에 대한 강렬한 비판의 메시지로 보여진다. 하지만 비단 미국만이 이 비판의 대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지금 이 대한민국에서도 충분히 벌어질 수 있고 벌어지고 있는 피를 부르는 행태들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깊은 생각에 빠지게 하는 영화임에 틀림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버는 방법을 터득한 사람은 자본의 흐름을 이용해 누구보다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다. 축적된 부는 다시 부를 불러온다. 부가 부를 만들어 빈부의 격차가 생기고 부가 권력이 되는 것은 자본주의의 특성이다. 이런 자본주의의 특성은 ‘부의 평등’을 이루지 못하는 면에서 이상이 되지 못하고 그것이 부작용을 낳는다. 다니엘은 석유 사업을 통해 큰 부를 얻지만 본래 그 땅의 소유주에게 그 땅에 묻힌 석유의 가치만한 대가를 지불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깔고 앉아있던 땅이 금싸라기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현재의 빈곤함을 극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다니엘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만다. 일부는 그런 칼날같이 냉철한 자본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고 자신의 몫을 주장하지만 자본주의의 룰을 등에 업은 다니엘에게도 그 사회의 ‘정보’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책임은 없다. 영화 속에서 목회자 일라이는 숱한 굴욕을 당하면서도 종국에는 스스로의 믿음까지 부정하면서 자본을 지닌 다니엘에게 매달리지만 자본주의의 열쇠를 쥐고 있는 다니엘에게는 판정패를 당할 뿐이다. 그렇다고 다니엘을 자본주의의 수혜자라고 볼 수는 없다. 누군가의 저주 때문인지, 신의 노여움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다니엘은 사업을 통해 수없이 많은 피를 재물로 바치게 된다. 결국 그의 아들까지 떠나 보내게 되는 그에게 남은 것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들에 대한 불신과 불안 뿐이다. 불신과 불안에 빠진 그는 과잉 방어와 폭력으로 자신과 부를 지켜내려고 몸부림 친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을 보호하기는커녕 그의 울타리마저 위태롭게 만든다. 다니엘의 모습은 국제 사회에서 스스로가 강력한 테러리스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과잉 방어하고 피해자로 위장하고 폭력을 정당화하며 피를 부르는 행태를 보이는 현실의 거울이며 거울 속에 투영된 모습은 소름 끼치도록 적나라하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 ‘There will be blood’는 이런 현실에 대한 경고 문구로 들린다.
![[데어윌비블러드]피를 보게 되리라는 소름끼치는 경고](https://cyimg21.cyworld.com/common/file_down.asp?redirect=%2F210021%2F2008%2F3%2F10%2F45%2FF6034%2D33%287700%29%2Ejpg)
는 음악과 연기, 연출 등 형식적인 면에서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여 영화에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초반부에 특별한 대사를 들려주지 않고 마치 경고음처럼 들리는 음악으로 관객을 맞이하고 중반에 이르러서야 관객에게 익숙한 형태의 스코어를 들려준다. 초반부의 이러한 음악적 장치는 영화를 논픽션이 아니라 픽션으로 착각하게 만들어 장장 2시간 40여분에 달하는 영화에 지루할 틈 없이 관객을 몰입하게 만드는 색다른 약품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헐리우드 영화 5분의 법칙’대로 초반에 뭔가 터지는 장면을 넣는 방법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관객을 몰입할 수 있게 만들 수 있음을 감독인 폴 토마스 앤더슨과 음악을 담당한 조니 그린우드(라디오헤드의 멤버)는 입증한다. 모노드라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지 않는 장면 없이 자신의 모습으로 영화를 채워내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카리스마는 그가 수많은 남우주연상의 주인공일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알게 한다. ‘다니엘 플레인뷰’라는 인물로 스크린 속에서 한치의 오점도 없는 완벽한 연기를 보여주는 그의 모습은 캐릭터 자체만으로 영화의 메시지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특히 갈수록 불신과 불안에 휩싸이는 인물이 뿜어내는 힘이 곧 영화를 지탱하는 힘이 된다는 면을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제대로 알고 실천한다. 시상식 장면에서 보여주는 그의 부드러운 면모와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스크린을 장악하는 그는 진정 연기의 맛을 아는 배우라는 생각이 든다. .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다니엘 데이 루이스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써내려 갔고, 시나리오가 완성되기도 전에 그에게 시나리오를 보냈다고 한다. 맞춤형 시나리오와 철저한 배우 정신이 조화를 이뤘기에 이 연기는 더욱 폭발적이지 않았을까.한 장면도 버릴 것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영화를 만든 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의 역량은 이 영화가 지닌 최고의 보물이다. 를 통해 스스로의 가치를 높여온 감독의 이번 선택은 의 캐릭터 활용법과 의 독특한 형식미에 의 드라마의 힘이 모두 합쳐지고 더욱 강력해진 최고의 작품이라는 생각이다. 장대한 플롯을 간결하고 맛나게 담아내는 재능은 최고가 아닐까 싶다.
* 폴 토마스 앤더슨은 자신이 이 영화를 편집하고 있던 2006년 당시 사망한 감독 ‘로버트 알트만’에게 이 영화를 헌정한다는 메시지를 영화의 엔드 크레딧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