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완주의 목수와 석수 등 인부 6800명은 당시 영문도 모른 채 동원됐다. 8월에 시작한 공사는 이듬해 5월까지 이어졌다.
집에도 못가고 끌려온 7000여 조선 민중은 한 겨울을 차지에서 보내야 했다. 세종은 이때 절대왕권을 과시하기 위해 대규모 토목공사로 땅을 돋워 숭례문을 들어설 때 오르막길을 오르게 했다. 이후 성종10년과 고종 때도 크게 보수공사했다.정사는 아니지만 임진왜란 때는 현판을 잃었고, 몇 년 뒤 광해군 때 청파동 한 고랑에서 찾았다고 한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숭례문은 한일 양군의 첫 전장이었다.1907년 8월 우리 군대가 강제해산 당하자 조선 군인들은 무기를 탈취해 일본군을 공격했다.
이때 일본군은 숭례문 벽 위에 긴관총2문을 설치하여 조선군을 사살했다. 두 달 뒤 일본은 황태자의 서울 방문을 빌미로 철거를 시도했다가 조선 민중의 반발로 실패했다.
대신 숭례문을 잇는 성곽을 부숴 인천항 축조에 사용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숭례문의 보호석축은 지면과 수직으로 쌓아 올리는 우리의 전통석축법과는 달리 안쪽으로 완만한 곡선인 일본식이다. 한국전쟁 때도 위층의 일부가 포화에 날아갔다.
이쯤되면 숭례문이 560년 넘게 웅장한 모습을 지탱해온 한국인의 자존심이라는 언론의 미사여구는 엉터리다.
현판 글을 쓴 사람도 학자마다 의견이 다르다.태종의 장남 양녕대군부터 태종 때 명필로 공조판서를 지낸 암헌 신색이라는 이도 있고 중종때 공조판서였던 죽당 유진동,세종의 셋째아들 안평대군이 썼다는 설도 있다.
그런 현판을 화마에서 건졌다고 몸통을 잃었지만 심장은 그나마 지켜냈다고 떠들어대는 언론의 허풍앞에선 말문이 막힌가.
숭례문은 1956년과 1962년 두 차례 크게 보수했다.한국사는 1969년에서 1973년 사이에 복원됐다.
이번 불이 아니어도 숭례문은 이미 옛 것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지 오래됐다.일조한 이에는 350억 원을 들여 숭례문 아래로 시멘트 길을 만든 이명박 전 서울시장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지난 1990년 고건 서울시장때는 밤마다 숭례문에다 색 조명을 비춰놓고 제17회 서울시 건축상 야간경관조명 부문 동상을 주기도했다.
굳이 이번 불이 아니어도 숭례문은 이미 조선 민중의 손으로 만들어진 전통 건축의 묘미도,아픈 역사의 흔적도 찾을 수 없을 흉물로 태평로2가 빌딩 숲에서 섬처럼 찌그러져 있었다.
◆숭례문의 진실.
숭례문 건축은 1395년 태조 때다.반세기 뒤 세종 29년 크게 새로지었다.
전라도 완주의 목수와 석수 등 인부 6800명은 당시 영문도 모른 채 동원됐다. 8월에 시작한 공사는 이듬해 5월까지 이어졌다.
집에도 못가고 끌려온 7000여 조선 민중은 한 겨울을 차지에서 보내야 했다. 세종은 이때 절대왕권을 과시하기 위해 대규모 토목공사로 땅을 돋워 숭례문을 들어설 때 오르막길을 오르게 했다. 이후 성종10년과 고종 때도 크게 보수공사했다.정사는 아니지만 임진왜란 때는 현판을 잃었고, 몇 년 뒤 광해군 때 청파동 한 고랑에서 찾았다고 한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숭례문은 한일 양군의 첫 전장이었다.1907년 8월 우리 군대가 강제해산 당하자 조선 군인들은 무기를 탈취해 일본군을 공격했다.
이때 일본군은 숭례문 벽 위에 긴관총2문을 설치하여 조선군을 사살했다. 두 달 뒤 일본은 황태자의 서울 방문을 빌미로 철거를 시도했다가 조선 민중의 반발로 실패했다.
대신 숭례문을 잇는 성곽을 부숴 인천항 축조에 사용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숭례문의 보호석축은 지면과 수직으로 쌓아 올리는 우리의 전통석축법과는 달리 안쪽으로 완만한 곡선인 일본식이다. 한국전쟁 때도 위층의 일부가 포화에 날아갔다.
이쯤되면 숭례문이 560년 넘게 웅장한 모습을 지탱해온 한국인의 자존심이라는 언론의 미사여구는 엉터리다.
현판 글을 쓴 사람도 학자마다 의견이 다르다.태종의 장남 양녕대군부터 태종 때 명필로 공조판서를 지낸 암헌 신색이라는 이도 있고 중종때 공조판서였던 죽당 유진동,세종의 셋째아들 안평대군이 썼다는 설도 있다.
그런 현판을 화마에서 건졌다고 몸통을 잃었지만 심장은 그나마 지켜냈다고 떠들어대는 언론의 허풍앞에선 말문이 막힌가.
숭례문은 1956년과 1962년 두 차례 크게 보수했다.한국사는 1969년에서 1973년 사이에 복원됐다.
이번 불이 아니어도 숭례문은 이미 옛 것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지 오래됐다.일조한 이에는 350억 원을 들여 숭례문 아래로 시멘트 길을 만든 이명박 전 서울시장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지난 1990년 고건 서울시장때는 밤마다 숭례문에다 색 조명을 비춰놓고 제17회 서울시 건축상 야간경관조명 부문 동상을 주기도했다.
굳이 이번 불이 아니어도 숭례문은 이미 조선 민중의 손으로 만들어진 전통 건축의 묘미도,아픈 역사의 흔적도 찾을 수 없을 흉물로 태평로2가 빌딩 숲에서 섬처럼 찌그러져 있었다.
얼마나 언론이 민중을 바보로 만드는가를 또 한번 여실히 느끼게 하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한국민의 냄비근성을 다시한번 확인하는 사건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