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사랑한다고 외치다

박민진2008.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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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사랑한고 외치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롬1:20~25)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방법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로 인해 타락한 본성에도 불구하고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추구하는 모습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하나님을 아는 방법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을 정리해야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그 이유는 첫째, 생각보다 이 시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리 없이 신앙을 세우기 때문이요 둘째, 우리의 신앙이 성경이 제시하는 교리에 입각하지 않으면 유행이나 비 진리의 영역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모습으로 빠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의 이 견해는 김태한 목사님의 말과도 그 맥락을 같이 합니다.

 

“그들의 신앙에선 어떠한 종류의 싸움도 볼 수 없다. 지켜야 할 진리와 신앙에선 어떠한 종류의 싸움도 볼 수 없다. 지켜야 할 진리와 믿어야 할 교리가 없기 때문이다.”[영화는 어떻게 죽는가](김태한)

 

그리고 지금부터 말씀드릴 교리적 부분은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교리강좌 시리즈에 입각한다는 것을 미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그 분류는 크게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나뉩니다. 그렇다면 이 둘을 알아보기 전에 계시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생각보다 쉽게 이 말을 사용합니다. 계시란 말 그대로 ‘열어서 보여주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계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그분 자신, 그분의 성품, 사역, 뜻 혹은 목적에 대한 진리를 전달하는 행동이며, 우리가 진리를 볼 수 있도록 진리를 감추는 모든 베일을 벗기는 것입니다.”[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로이드 존스 교리 강좌 시리즈1)]

 

그렇다면 첫째로 일반계시에 대해서 간단히 알아보겠습니다. 일반계시는 인간의 노력과 추구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방법에 속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연을 관참함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오늘 바울이 말하는 로마서 1장의 말씀은 하나님이 만물을 통해 이미 계시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1:20)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기 위해 추구했던 방법이 철학이나 종교, 혹은 사상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이렇게 일반계시에 연연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는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두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눈이 죄로 인해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말을 계속 들어봅시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1~23)

 

하나님이 이미 자연을 통해 계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한 일은 스스로 지혜있다 말하고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일반계시가 인간에게 죄로 인해 가려졌다는 사실은 로마서뿐 아니라 이미 역사가 너무나도 극명하게 이 사실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증거는 바로 로마 가톨릭입니다.

 

“오늘날에도 로마 가톨릭 교회가 우리를 난처하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성경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난처하게 만듭니까? 그것은 그들이 성경에 관한 신앙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보탰고, 궁극적으로 성경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잣대로 해석한다는데 있습니다. 그것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의 큰 특징입니다. 이렇게 된 원인은 참된 복음이 완전히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루터가 이 문제를 그토록 강하게 비판해야 했던 것은 전혀 뜻밖의 일이 아니었습니다.”[복음주의란 무엇인가](마틴 로이드 존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인간의 추구에 있지 않다는 결론에 쉽게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일반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인격적인 교제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계시를 통해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인도하시며 안아주시는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예, 일반계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 칼빈이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는 어떠한 선을 행할 동기조차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절망적인 존재이며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글을 쓰는 저의 마음 역시 절망적입니다. 글 쓰는 것을 잠시 멈추고 마음 한 곳에 아파오는 것을 느낍니다. 그렇다면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일반계시에 대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창조에 나타난 증거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설 때 그리고 잘못을 행할 때 핑계치 못하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이끌기에는 충분치 못합니다. 사람들이 죄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연 소망은 있는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이성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으로는, 아무리 잘되어 봐야 창조주로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만 도달할 수 있을 뿐이라고 바울은 주장합니다.”[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로이드 존스 교리 강좌 시리즈1)]

 

그렇다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인 특별계시는 무엇일까요? 바로 성경입니다. 그런데 성경 속에는 여러 가지 특별계시의 방법들이 명시되어있습니다. 첫째는 신적 현현인데 모세 앞에 나타나신 하나님이 그 예입니다. 둘째는 언약의 사자인데 구약에 등장하는 언약의 사자는 성자 하나님인 예수님이라는 견해가 맞습니다.[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로이드 존스 교리 강좌 시리즈1)p.41] 셋째는 직접적인 말씀인데 예수님이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았을 때 하늘에서 직접적인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넷째는 기적과 표적인데 이것은 구약의 전반에 걸쳐 매우 광범위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보이고 있습니다. 다섯째는 꿈과 환상입니다. 이러한 예는 구약의 에스겔 선지자가 대표적일 것입니다. 여섯째는 영감(inspiration)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주신 영감으로 기록된 것임을 우리는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조금은 급하게 결론에 도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 결론을 통해 우리가 얻게 될 유익이 너무도 크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오직 성경에만 이 계시가 있을 뿐 다른 곳에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시지 않는다면 나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로이드 존스 교리 강좌 시리즈1)]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성경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그렇게도 우리에게 일관되게 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인간의 전적 타락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으며 예배할 수도 없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스스로를 드러내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기 전까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다시 말해 그냥 이 땅에 태어났다가 지옥으로 가서 심판의 징벌과 저주 속에 있어야 할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찌된 일인지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감히 나아갈 수 없는 예배의 자리로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지성소 안으로 우리를 부르시기까지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이 일을 하나님께서 완벽한 계획을 가지고 성취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통해 이 사실을 더욱 명확히 알 수 있으며 우리의 영원으로 가는 발걸음이 어떤 모습일지를 선명하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은혜인 것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에 가려진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내가 바로 하나님이다.”라고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구원의 계시 중심에 계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창세기를 보나 요한계시록을 보나 너무 명확하기에 이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을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는가를 알려주는 책이 아닙니다. 물론 저는 성경이 이 세상에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책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에베소서 3장 10절의 말씀을 확실히 믿습니다.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엡3:10)


그러나 성경을 하나님의 크신 계획 속에서 관통하는 주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읽게 되면 흐트러진 퍼즐 몇 조각을 보며 그림을 연상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혀 원래의 그림과는 다른 그림을 연상케 만드는 위험성이 있는 것입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때, 즉 하나님의 계획을 알리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거대한 대궐이 아닌 장막에 거했다는 것은 그가 방랑벽이 있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단순한 문화차이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히11:8~10)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얼마나 뚜렷한 믿음이 있었는지를 말해줍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계시의 목적에 대해 그 시작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그 끝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끝의 중심에 누가 있는지 보십시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하더라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7:9~14)


마지막 때의 구원받은 성도들이 경배하는 대상은 누구십니까? 어린양, 즉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14절의 말씀과 같이 그 모든 죄와 허물을 깨끗이 어린양의 피에 씻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성경의 시작과 끝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말해 예수님이 성경의 주제이며 핵심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역 중심에 있다는 것을 의미입니다.

 

여러분, 저는 지금까지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자신을 계시하시는지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일반계시는 인간의 추구에 그 초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을 통해 드러난 일반계시는 인간의 죄로 인해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특별계시 즉, 성경뿐입니다. 우리는 죄로 가려져서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 하나님을 추구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 안에는 어떤 선을 행할만한 동기조차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와주셨습니다. 먼저 다가와 주셔서 자신을 드러내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는 길이 주어졌습니다. 그 길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었고 그래서 그는 대궐이 아닌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끝 날에 우리는 어린 양의 피로 씻음 받은 사실을 통해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경배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한 가지 질문만이 남았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죄 씻음을 받으셨습니까? 우리는 친히 우리에게 오셔서 그분을 드러내신 은혜에 올바른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랑이 여러분 안에 단단히 박힌 못과 같이 흔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고 어린양께 예배할 그 날을 기대하며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