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막14:71,72)
고난주간, 우리의 묵상은 주로 우울한 밤을 연상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 참 다양한 사건이 펼쳐졌다는 것이 우리의 이러한 묵상 분위기를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통해 어두운 밤 시간을 계획하신 하나님의 섬세한 손길을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베드로는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합니다. 그리고 그는 심지어 예수님을 저주합니다. 마가복음에는 그저 그가 생각하고 울었다고 표현하고 있지만 누가복음은 이 사건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상황 하나를 더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방금 말할 때에 닭이 곧 울더라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눅22:60~62)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가 예수님과 눈빛이 마주친 장면입니다. 베드로는 마음이 메어왔습니다. 그리고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습니다. 슬피 운 것이 아니라 아예 통곡한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대조되는 제자 하나가 있습니다. 그는 바로 사도 요한입니다. 요한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한 요한복음은 그가 예수님의 고난 길에 동참하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심지어 십자가에서 그는 예수님의 어머니를 모시는 명령을 예수님으로부터 받게 됩니다.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19:26,27)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에 비하면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끝까지 지킨 인물로 보여집니다. 실제로 그는 성경의 마지막 책을 완성하는 은혜를 누렸으며 예수님이 사랑하신 수제자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발견해야 할 메시지는 “누가 더 수제자였는가?”와 같은 질문의 답이 아닙니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메시지는 바로 요한복음 2장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요21:1~6)
디베랴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친히 베드로가 153마리의 물고기를 잡게 하시는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이 때 베드로의 눈이 열립니다. 예수님을 볼 수 없었던 그가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계시의 은혜를 맛 볼 수 있습니다. 계시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베일에 싸인 진리를 보이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리워진 눈의 베드로에게 친히 찾아오셔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이 때 우리는 베드로와 요한의 반응을 주의 깊게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내리더라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올라 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요21:7~9)
베드로는 예수님을 발견하자마자 정신없이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내립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 거리가 얼마 되지 않음을 보고 배를 타고 예수님께 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두 제자의 행동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그 주인을 더 사랑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이렇게 신실하게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어떤 자격이나 하나님을 위하는 행위가 하나님께 용납되는 부가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자신의 환경과 자랑꺼리들을 보며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실 수밖에 없어!”
라고 말하는 오류(물론 드러내지 않는 노련함을 보여가며)에 빠집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런 사람은 은혜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은혜란 비교할 수 없이 좋은 것을 받을 수 없는 자에게 거저 주는 것입니다. 내 자랑이나 행위가 은혜를 가져오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하나님께로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원인은 오직 예수님의 피 뭍은 십자가가 증거 하는 사랑뿐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아무런 자랑꺼리가 없었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며칠 전 밤의 사건에 대해 아직 예수님께 번번한 사과도 드리지 못한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을 위해 음식을 마련하시고 함께 식사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의미있는 이야기를 나누십니다.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요21:15~17)
이 본문의 사랑이란 단어가 각각 다르게 쓰였다는 사실을 여러분 대부분은 아마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 각각의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보다는 조금 더 단순하게 이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왜 그때 나를 부인했느냐?”, “그것 봐라, 내가 부인할 거라고 얘기했잖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그저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베드로야,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입니다. 예수님은 아시면서도 베드로의 자신을 향한 사랑을 확인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념 이상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허물을 덮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인간의 모든 공로를 아무 것도 아니게 만드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을 그저 그분의 한이 없는 사랑 앞에 반응하는 몸짓으로 만드는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어떤 공로가 있어서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분의 전적인 사랑과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의 표현인 십자가가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에게 찾아온 십자가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 뭍은 십자가 앞에 나아가 내 죄를 씻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에 대답하면 되는 것입니다.
죄가 큰 곳에 은혜도 큰 법입니다. 그 차이가 요한은 배를 타고 예수님께 오게 만들었고 베드로는 물에 뛰어들게 만든 것입니다.(물론 누가 더 낫고 못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저는 베드로가 바다에 뛰어든 이 장면이야말로 성경에서 가장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거나 죽은 자가 살아나거나 병 든 자가 낫는 기적이 있는 장면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사랑 앞에 단순하고 조금은 막무가내로 반응하는 베드로의 모습이 진심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고난주간, 우리는 베드로를 보며 우리의 액세서리와 같은 공로와 인간의 의라는 누더기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바다로 뛰어들어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 앞에 그저 반응하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사랑이 어찌나 크신지 저의 사랑한다는 고백은 그저 주님의 사랑 앞에 반응이 될 뿐입니다.”
[고난주간 특별판] 사랑의 반응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막14:71,72)
고난주간, 우리의 묵상은 주로 우울한 밤을 연상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 참 다양한 사건이 펼쳐졌다는 것이 우리의 이러한 묵상 분위기를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통해 어두운 밤 시간을 계획하신 하나님의 섬세한 손길을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베드로는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합니다. 그리고 그는 심지어 예수님을 저주합니다. 마가복음에는 그저 그가 생각하고 울었다고 표현하고 있지만 누가복음은 이 사건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상황 하나를 더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방금 말할 때에 닭이 곧 울더라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눅22:60~62)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가 예수님과 눈빛이 마주친 장면입니다. 베드로는 마음이 메어왔습니다. 그리고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습니다. 슬피 운 것이 아니라 아예 통곡한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대조되는 제자 하나가 있습니다. 그는 바로 사도 요한입니다. 요한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한 요한복음은 그가 예수님의 고난 길에 동참하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심지어 십자가에서 그는 예수님의 어머니를 모시는 명령을 예수님으로부터 받게 됩니다.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19:26,27)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에 비하면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끝까지 지킨 인물로 보여집니다. 실제로 그는 성경의 마지막 책을 완성하는 은혜를 누렸으며 예수님이 사랑하신 수제자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발견해야 할 메시지는 “누가 더 수제자였는가?”와 같은 질문의 답이 아닙니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메시지는 바로 요한복음 2장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요21:1~6)
디베랴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친히 베드로가 153마리의 물고기를 잡게 하시는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이 때 베드로의 눈이 열립니다. 예수님을 볼 수 없었던 그가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계시의 은혜를 맛 볼 수 있습니다. 계시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베일에 싸인 진리를 보이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리워진 눈의 베드로에게 친히 찾아오셔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이 때 우리는 베드로와 요한의 반응을 주의 깊게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내리더라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올라 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요21:7~9)
베드로는 예수님을 발견하자마자 정신없이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내립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 거리가 얼마 되지 않음을 보고 배를 타고 예수님께 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두 제자의 행동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그 주인을 더 사랑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이렇게 신실하게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어떤 자격이나 하나님을 위하는 행위가 하나님께 용납되는 부가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자신의 환경과 자랑꺼리들을 보며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실 수밖에 없어!”
라고 말하는 오류(물론 드러내지 않는 노련함을 보여가며)에 빠집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런 사람은 은혜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은혜란 비교할 수 없이 좋은 것을 받을 수 없는 자에게 거저 주는 것입니다. 내 자랑이나 행위가 은혜를 가져오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하나님께로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원인은 오직 예수님의 피 뭍은 십자가가 증거 하는 사랑뿐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아무런 자랑꺼리가 없었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며칠 전 밤의 사건에 대해 아직 예수님께 번번한 사과도 드리지 못한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을 위해 음식을 마련하시고 함께 식사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의미있는 이야기를 나누십니다.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요21:15~17)
이 본문의 사랑이란 단어가 각각 다르게 쓰였다는 사실을 여러분 대부분은 아마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 각각의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보다는 조금 더 단순하게 이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왜 그때 나를 부인했느냐?”, “그것 봐라, 내가 부인할 거라고 얘기했잖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그저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베드로야,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입니다. 예수님은 아시면서도 베드로의 자신을 향한 사랑을 확인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념 이상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허물을 덮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인간의 모든 공로를 아무 것도 아니게 만드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을 그저 그분의 한이 없는 사랑 앞에 반응하는 몸짓으로 만드는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어떤 공로가 있어서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분의 전적인 사랑과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의 표현인 십자가가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에게 찾아온 십자가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 뭍은 십자가 앞에 나아가 내 죄를 씻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에 대답하면 되는 것입니다.
죄가 큰 곳에 은혜도 큰 법입니다. 그 차이가 요한은 배를 타고 예수님께 오게 만들었고 베드로는 물에 뛰어들게 만든 것입니다.(물론 누가 더 낫고 못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저는 베드로가 바다에 뛰어든 이 장면이야말로 성경에서 가장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거나 죽은 자가 살아나거나 병 든 자가 낫는 기적이 있는 장면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사랑 앞에 단순하고 조금은 막무가내로 반응하는 베드로의 모습이 진심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고난주간, 우리는 베드로를 보며 우리의 액세서리와 같은 공로와 인간의 의라는 누더기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바다로 뛰어들어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 앞에 그저 반응하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사랑이 어찌나 크신지 저의 사랑한다는 고백은 그저 주님의 사랑 앞에 반응이 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