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양장계 ; 책소개

이양자2008.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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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질 소현세자의 '청나라 첩보 보고서'

 

                      심양장계: 심양에서 온 편지


          소현세자 시강원 지음 | 정하영 외 옮김 | 창비 | 1047쪽 | 5만원

 

                                     ▲청나라에 간 조선 사신들의 모습을 그린

                                        1760년의‘연행도’ 동국대 출판부 제공  

 

 병자호란 이듬해인 1637년(인조 15년) 2월 6일, 조선의 왕세자인 스물여섯 살의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청나라 수도 심양(瀋陽)으로 먼 길을 떠났다. 동생 봉림대군(鳳林大君·훗날의 효종)과 3정승 6판서의 자제와 함께였다.

몇 달 전, 임금은 삼전도에서 청 황제에게 항복했다. 화의 조건에는 왕세자를 인질로 잡아 간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인조가 고양의 창릉(昌陵) 서쪽까지 나가 전송하자, 세자는 부왕에게 하직인사를 했다. 신하들이 옷자락을 붙잡고 통곡하니 세자는 눈물을 삼키며 이렇게 말했다. "주상이 여기 계신데 어찌 감히 이렇게들 하오…. 각자 진중하도록 하시오." 그것은 그로부터 8년이나 이어질 기나긴 볼모 생활의 시작이었다.

우리 역사상 유례없이 참혹한 상황이었던 '심양에서의 8년'에 대해서는 무척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 '심양일기(瀋陽日記)' 10책과, 바로 이 책, '심양장계(瀋陽狀啓)'다. '심양장계'는 심양에서 세자를 수행했던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신하들이 임금의 비서실격인 승정원으로 보낸 방대한 분량의 보고서다. 17세기 조선과 청나라의 정치·경제·외교는 물론, 언어·문학·민속과 관련된 내용이 매우 풍부하게 담긴 사료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마지막 8년째의 장계는 누락돼 있다.

그러나 소현세자가 귀국 직후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로 이 기록은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했다. 이번에 출간된 번역본은 이강로 단국대 명예교수가 감수하고 정하영 이화여대 교수와 박재금·김경미 등 연구자 6명이 함께 옮긴 것으로, 서남재단이 지원하는 '서남동양학총서' 중 한 권이다. 지난 2000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의 '국역 심양장계'가 첫 완역본으로 나온 적이 있지만 서점에서 쉽게 구할 수는 없었다.

시급한 현안을 올리기 위해 쓴 것이기 때문에 문장을 채 다듬지도 못한 글들이지만, 그만큼 긴박감 속에서 당시의 처절했던 상황을 소상히 전하고 있다. 1637년 4월 19일, 청나라 장수 용골대는 심양으로 끌려 온 척화파 대신 윤집과 오달제를 죽이려고 한다. 가족을 데리고 돌아오라는 요구를 거절했다는 이유였다. 일행은 "임금과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이 간절해서 이런 망발을 한 것이다"며 살려주기를 청하지만 형장으로 끌려가는 것을 막지 못한다. 이들은 이렇게 기록한다. "그들이 당한 참혹한 모습은 차마 볼 수 없었습니다."

청나라에 저항했다는 죄목으로 끌려 온 척화파 대신 김상헌에 대한 묘사도 비감하기 짝이 없다. 1641년 1월 10일자는 이렇게 기록한다. '김상헌 등 네 사람을 목에는 쇠사슬을 걸고 양 소매를 묶은 채 먼저 형부 문밖 길가에 두었다.' 세자는 이 모습을 모두 지켜봐야 했으니, 그 심정이 어땠을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청나라 관원으로부터 심문 받는 김상헌은 조금도 굽히는 기색이 없었다. "수군을 징발할 때 사리에 어긋난 의견을 상소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청 관원) "군신 사이는 부자 사이와 같으니 무릇 품은 생각이 있으면 말하지 않을 수 없다."(김상헌) "늙고 병들어 벼슬살이도 못 한다면서 상소는 어떻게 할 수 있었는가?"(청 관원) "벼슬살이에야 근력이 미치지 못하지만 마음 속의 생각이야 어찌 말하지 못하겠는가?"(김상헌)

심양장계 ; 책소개 

 

세자는 기개가 있는 인물이었고, 그 혹독한 현실 속에서도 최소한의 자존심은 잃지 않았다. 1642년 11월 12일, 강화를 주도했던 영의정 최명길이 명나라와 몰래 교류했다는 이유로 심양으로 끌려오자 청나라는 그를 심문하는 자리에 세자가 참석하기를 요구한다. 그러자 세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영의정은 곧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으로 또한 내가 배움을 받은 분이시니, 그 어찌 감히 앉아서 심문하겠는가? …부왕의 대신에 대하여 자식 된 도리로서 단연코 심문할 수 없으니, 이것이 비록 황제의 명이라 해도 어찌 죽고 사는 것을 근심하겠는가!"

1643년 4월 3일, 김상헌과 최명길은 우여곡절 끝에 사면된다. 이 때의 묘사 역시 자세하다. 세자가 용골대에게 거듭 청 황제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니, 용골대는 두 신하에게 "서쪽을 향해 황제의 명에 감사를 표하라"고 한다. 최명길이 일어나 김상헌의 겨드랑이를 끼어 부축해 함께 절하려 했지만 김상헌은 "허리가 아프다"며 예를 행하지 않는다. 최명길이 서쪽을 향해 사배(四拜)의 예를 올리는 동안 용골대가 김상헌을 억지로 절하게 하려 했지만 김상헌은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뜰에 드러누워 있는 김상헌을, 용골대는 오랫동안 노려보고 갈 수 밖에 없었다.

타국에 볼모로 잡혀 간 세자의 처지는 무척 험난했다. '군량을 보내라'는 요구에서부터 '황제가 내린 매를 팔에 앉혀 가라'는 명령까지, 청나라는 끊임없는 요구와 트집으로 그를 압박했다. 세자는 국본(國本)으로서 차마 상상하기 힘든 꼴을 감내해야 했다. 반대편에서 부왕 인조는 세자가 청나라와 결탁해 자신을 몰아내려는 것이 아닌가 끝없이 의심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무척 놀라운 것은 끝없이 스스로의 위엄을 유지하면서도 모든 일들을 지혜롭게 처리하려 애쓰는 세자의 모습이다. 인질로 잡혀오긴 했지만 사실상의 '주청(駐淸) 조선대사'로서 양국 관계를 최대한 매끄럽게 재정립하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읽히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조선인 포로들을 풀어 주기 위해 굴욕을 감수하는가 하면, 청나라의 핵심 군사제도인 팔기군(八旗軍)을 자세히 분석하게 하고, 사냥터와 전쟁터를 따라다니면서도 청나라의 습속에 대한 기록을 놓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굴욕적인 역사에 대한 비장한 기록인 동시에, 험난한 시대에 나라의 재기를 꿈꾸는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타국의 기밀을 탐지했던 첩보 기록이었던 것이다.

 

유석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