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사건 보도에 피해자 인권은 없다

전성준2008.03.20
조회19,342

이것이 국민이 알아야 할 진실인가?

 

가능하다면 신문기사나 뉴스를 보지 않고 살고 싶다. 너무도 참담한 사건이 연일 지면과 화면에 오르내리기 때문이다. 보고 싶지 않아도 인터넷 포털사이트를 이용하려면 어느새 화면 정중앙을 차지한 "토막 시신 야산에서...", "잔혹 변사체 발견..." 따위의 자극적인 기사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사례 1. ▲ 보고 싶지 않아도 보게 되는 기사 제목 인터넷 포털사이트를 이용하려면 어느새 자극적인 기사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제목 뿐만이 아니다. 보도내용도 철저히 자극적이다. 피해자의 시신이 몇 토막이 났는가, 분리된 부위는 어떻게 되는가와 같은 끔찍한 내용이 아무렇지 않게 실린다. 그와 같은 내용이 과연 국민이 알아야 할 진실인가?


 

 


 

사례 2.
살인사건 보도에 피해자 인권은 없다




  ▲ 사실관계에 투철한 보도가 언제나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 위와 같은 내용이 과연 국민이 알아야 할 진실일까?



 


 
 

사례 3.

▲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보도인가 기자들에게 과연 제정신인가 묻고 싶다. "토막난 시신... 왼팔과 왼다리, 몸통, 오른다리 부위가 잇따라 발견", "10토막난 채 암매장돼 발견", "일부 부위에서는 톱 자국이 발견되기도" 등의 참담한 내용과 표현이 정말 국민에게 꼭 알려야 할 진실인가? 지도까지 제공하며 전달하는 저 내용에 과연 어떠한 공익성이라도 있는 것인가? 정말 밝히지 않으면 안될 것이어서 어쩔 수 없이 저렇게 밝혔어야 한 것인가?

 

사례 4.

살인사건 보도에 피해자 인권은 없다
사례 5.
 


 

 

기자들은 밝혀야 할 내용이었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민에게는 "시신이 발견되었다" 정도만 밝혔어도 충분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참혹하고 비통한 내용이다.

 

또, 기자들은 육하원칙과 사실관계에 맞춰 썼는데 뭐가 문제냐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관계에 투철한 보도가 언제나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 그 원칙이라는 것이 왜, 무엇을 위해 생겼나? 인간과 공익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언론과 언론이 제공하는 서비스라는 것도 결국 인간을 위하고 공익에 복무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기자는 단지 기사 제조기, 특종 쓰는 기계가 아니라 가슴을 지닌 인간이어야 하고, 기사를 쓸 때 공익성이라는 부분에 대하여도 생각해야만 한다. 그런데 저 기사의 어디에 인간의 가슴이 있고 공익이 있나.

 

저런 보도내용은 이미 만신창이가 된 피해자 유족과 친지들의 가슴을 다시 한번 난도질하고, 시민들의 정서와 인성에 고통과 부정적 영향만 미칠 뿐이다. 또한 포털사이트의 기사란을 통해 청소년과 아동들에게까지 무차별로 전달됨도 잊어서는 안된다.

 

시민이 그런 기사를 요구하니 어쩔 수 없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변명 역시 맞지 않는 얘기이다. 한국의 시민들이 저런 식의 참혹한 보도를 바랐으리라 생각되지도 않을 뿐더러, 만일 정말 시민이 그런 기사를 요구했다고 가정해 보더라도 그렇다. 언론이 오피니언 리더로 바로서지 못하고 사람들의 비위 맞추기에 급급해 조금의 유익도 없는, 심지어는 해롭기까지한 내용의 보도를 한다면 그런 언론은 이미 언론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다.

 

위와 같은 보도 내용이 과연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것인지 돌아보아야 한다.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호기심을 자극하며 이를 충족시키려는 목적은 아니었나 냉정히 또 정직하게 돌아보고 반성해야 한다.

  
 

사례 6.


살인사건 보도에 피해자 인권은 없다





  ▲ 피해자 얼굴을 공개하는 경우 참혹한 해를 입은 피해자 가족 사진이 모중앙일간지 전면에 커다랗게 실린 것을 보고 경악했다. 위 사진은 피해자 얼굴이 그대로 노출된 인터넷기사로, 화면 캡쳐 후 모자이크 처리한 것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 실종된 언론 보도

 

희생된 피해자의 얼굴이 신문 첫면을 장식하기도 한다. 네 모녀가 참혹한 해를 입은 사건 이후 그들 모녀의 가족 사진이 모중앙일간지 전면에 커다랗게 실린 것을 보고 경악했다.
 

누구나 길을 걷다 미끄러져 넘어져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려 보면, 넘어진 그 순간 아픔 보다, 다른 이들에게 미끄러진 모습을 보인데 따른 부끄러움과 수치감을 먼저 느꼈을 것이다. 수치를 당하고 싶지 않고 그런 모습을 내어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 사람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중범죄자 조차 그 인권이 보호를 받는데, 어째서 피해자의 인권에 이렇게나 무관심한가. 범인은 앞으로도 더 살며 사회생활을 할 것이기 때문에 보호해야 하고, 고인의 경우는 그렇지 않기 때문인가? 죽으면 인간이 아니고 인권이 없는 것인가? 고인에게라도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져야 한다.
 

피해자의 유족들을 위해서도, 부득이하게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닌 이상 기사에 피해자 얼굴을 싣는 것은 피해야 할 선택이다.


 

 


 

사례 7. ▲ 미디어가 피해자 유족의 고통을 이용하는 경우 오늘 한국의 미디어는 피해자 어머니의 비통에 찬 얼굴을 향해 플레시를 터트린다. 위 사진은 화면 캡쳐 후 모자이크 처리한 것이다.





피해자와 그 유족의 인권 보호되어야

  

그런데 오늘 한국의 미디어는 피해자 유족의 고통 마저 이용하고 있다. 피해자 어머니의 비통에 찬 얼굴을 향해 플레시를 터트린다. 이와 같은 보도가 꼭 필요한 것인지를 다시 한번 묻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의 알권리와 호기심 충족이라는 것이 피해자 개인과 그 유족의 인권보다 앞서서는 안된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피해자 및 그 남겨진 가족의 상처를 들춰보는 일은 다시 없어야 한다.
 

사건 자체의 참혹성으로 말미암아, 사건에 대한 보도의 수위나 표현의 문제가 가리워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결코 그냥 지나쳐서는 안된다. 인권 그리고 인간에 대한 예의가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보고 있기 때문이다.
 

옛말에 군자는 푸줏간과 부엌을 멀리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남자는 가사를 하지 말라는 그런 의미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이 말이 나왔을 적에는 집집마다 부엌에서 닭을 잡고 가축을 도살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그런 것을 보거나 행하는 것이 사람의 심성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 멀리 하게끔 해야 한다는 것이다. 참혹함이라는 것에 대해 무뎌질 수 있음을 우려한 것이다. 토머스 모어도 그의 저작 '유토피아'에서 유토피아에는 도축장이 시민들과 멀리 떨어진 시 외곽에 있으며, 시민들은 도살을 하거나 보는 일이 없게 되어 있다고 말한다. 역시, 참혹한 광경을 보거나 행하는 것이 인간의 자애로운 정을 매마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강력범죄 보도에서 표현의 수위를 조절하고 피해자 인권을 보호하며,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것은 피해자 및 그 유족을 위함일 뿐 아니라 이후로도 살아갈 모두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강력범죄 보도에 있어 그 표현을 어디까지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또 피해자 및 그 유족의 인권 보호라는 부분에 대해 사회적 관심과 약속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