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김영민2008.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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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권세

요20:19-23

 

 

일주일간 평안하셨습니까? 즐거운 휴가를 잘 보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분명히 기억할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수 있는 최대의 명절이 이 과테말라의 세마나 산타가 아닌가 합니다. 어쩌면 성탄절보다도 더 즐거운 날이 부활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이란, 그냥 살아났음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권세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권세는 참으로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위대한 권세입니다. 이 권세는 죄를 사하는 권세입니다. 죄악으로 쓸모 없는 인간을 아름답고, 거룩한 사람으로 만드는 권세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담겨있는 권세입니다. 십자가의 희생에 의해서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깨끗하게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죽음이라는 저주가 우리를 붙들 수가 없음의 그 증표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오늘 저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위대한 부활의 권세가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하에 놓이게 했는지를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부활의 권세는 죄 용서입니다.

21-23절의 말씀을 보면 21절에서는 평강이 있을 지어다 하시고 그리고 22절에서는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23절에는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 질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즉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성령을 우리가 원한다고 받고, 안 받고, 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성령은 주권자요, 절대자이십니다.

이 성령이 우리에게 오실 때만 우리는 받을 수 있고, 오시지 않는다면 인간은 어떤 수단으로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그냥 성령 받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숨을 내 쉬면서 성령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성령 받음은 예수님께 있는 것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있는 것을 죄인 된 우리가 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성령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은 부활로 나타났습니다. 부활은 권세로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이 권세는 죄 사함으로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죄 사함과 더불어 우리에게 나타난 능력은 성령이 우리에게 부어졌다는 것입니다. 육체에 불과한 죄인들은 이 성령의 부어짐으로 영의 사람이 되고, 거룩한 영의 백성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영에 의해서만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가 있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있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가 있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살아 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부활하셔서 주신 위대한 선물은 성령이었습니다. 이 성령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23절에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라는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나라 헌법에 대통령에게 사면권이 있습니다. 죄 있는 자를 사면해 줄 권한이 대통령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통령의 사면권은 죄를 지은 자가 치러야 할 형량을 사해준다는 것이지 그가 죄 없이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말하는 죄 사함은 죄 값으로 치러야할 형량을 없이 해준다는 뜻이 아니라 죄 없는 자가 되게 한다는 뜻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그러한 권세가 있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의해야합니다. 우리도 성령을 받으면 누구의 죄라도 사해 줄 수 있다고 잘못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성령을 받았다해도 여전히 죄인일 뿐입니다. 다만 성령을 받음으로 죄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예수님에 대하여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거룩한 성령의 옷을 입고 성령 충만하여도 우리는 죄된 본성을 버리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넘어집니다. 목사도 넘어지고, 장로도 넘어지고, 집사도 넘어집니다. 예수 잘 믿는다고 아무리 떠들고 40일을 금식기도하여도 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에 대해 우리는 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의 연약함을 고백하게 됩니다. 나의 부족함을 알게되는 것입니다.

죄 씻음을 받고, 용서받을 수 있는 유일한 단 한가지의 능력은 예수님의 피밖에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피만이 나의 죄를 사하여 없이하는 유일한 능력이 됨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이 우리에게 오신 후에 깨닫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 피만을 신뢰하며 그 피만이 우리의 죄를 사하는 권세임을 전파하며 사는 삶을 살게 되어 평강이 있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도 할 수 없는 죄를 사하는 권세가 십자가의 피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죄에 상응하는 죄 값을 온전히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성 밖에 저주받은 골고다에서 십자가 즉 저주의 나무에서 버림의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해가 빛을 잃고 캄캄함 속에 하나님에 의해서 버려졌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어 마침내 죽으실 때는 철저한 외면 속에 버림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에게 가장 큰 고통이었습니다.

이러한 형벌을 받으시면서 흘리신 피로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죄를 없게 하셨습니다. 죄를 깨끗케 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성령이 오셨고, 성령이 오셔서 지금까지 죄 중에 살아온 우리의 죄가 무엇인가를 알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 죄는 우리가 훈련받고, 노력하고, 참회해서, 없어질 수 있는 그러한 죄가 아닙니다. 표범의 반점이 변할 수 없듯이 우리의 죄는 이미 우리의 사상이고, 정신이며, 뼈 속 깊이 틀어박혀있는 우리의 인격입니다. 그리고 죄는 우리의 본성의 자체입니다. 자체가 없어지지 않고는 우리의 죄가 없어 질 수도 없고, 누구도 이 죄를 사해 줄 수도 없는 죄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인간은 자기가 중심이고, 자기의 기분과, 욕망을 위해서 살아가는 자요, 자기의 생각과, 판단이, 무엇이 자기에게 유익이냐에 따라 선악의 기준이고,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자기의 경험이나, 상식에 의해서, 세상을 사는 세상의 주인입니다.  

이러한 죄를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라는 그 희생이 이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성령에 의해서 살아가는 영의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가치를 두는 인간 중심의 삶이 아니라, 영에 의해서 예수님을 왕으로, 주인으로 알고 그분과 교통하며 살아갑니다. 그분과 사귀며 그분이 기뻐하는 뜻을 깨달아 갑니다. 예수님의 그 가치에 날마다 매료 되어가는 영의 사람이 되어 평강을 누립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의 권세가 만들어 낸 일입니다.


 

2. 부활의 권세는 새로운 눈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도마라는 이들은 지금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불안에 떨고 있는 이들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하십니다. 평강이 있을 지어다 한다고 평강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시작된 평강입니다. 부활의 권세를 깨닫는 자에게 주시는 평강입니다.

사람들은 이 땅에서 평강할 줄 모릅니다. 누군가에 항상 좇깁니다. 누군가에 항상 경쟁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안하여 잠을 못 이루기도 합니다. 술이 없으면 살 수 없다고, 친구가 없으면 살 수가 없다고, 돈이 없으면 살 수가 없다고, 뭔가를 꼭 붙들고 싶은 마음에 수많은 것에 마음을 주고, 돈을 내어줍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말씀하신 것은 평강이 있을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평강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아 갈 수 있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는 얼마나 위대한 권세인지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얼마나 대단한 보배요, 권세인지 모릅니다. 이 권세는 진정한 평강을 주는 능력입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에,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세상을 살아온 자기의 경험과, 상식이라는 눈으로 보았습니다. 의지할 만한 것을 좇아 이리저리 해메입니다. 이민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의지할 것을 꼭 하나씩은 가지고 있습니다. 통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동차도 됩니다. 보험이 될 수도 있습니다. 술로, 친구로, 도박으로... 적어도 뭔가를 평강을 위한 인생을 위한 그 무언가를 꼭 붙들고 있을 것입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불안하였습니다. 두려웠습니다. 그렇게 의지했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이젠 아무 것도 의지할 것이 없어졌습니다. 의지할 만한 아무것도 가질 수 없었습니다. 도마의 눈에 예수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도마의 눈에는 그럴듯한 의지할 대상은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새로운 삶을 살도록 도마에게 힘을 주십니다. 그것은 평강이 있을찌어다입니다.

부활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인간의 눈은 잘못 되었고, 이 눈에 보이는 것은, 사단의 유혹물이고, 거짓이요, 가짜며, 허상일 뿐입니다. 인간은 지금까지 욕심에 의한 상식이라는 눈을 가지고 세상 사물을 보았기 때문에 사단에게 속은 것이고 실패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육신의 눈을 가지고 판단하려고 합니다.

성령에 의해서 사는 영의 사람으로서 성도는 말씀을 따라, 말씀으로 사물을 보고, 말씀으로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자를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이 있는 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2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고 하십니다. 세상의 눈, 세상의 판단, 육신의 안목, 육신의 생각으로는 믿을 수 없는 것을 성령의 눈으로 성령의 판단력으로 성령의 힘으로 하는 자는 복된 자가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영의 사람으로서 믿음으로 사는 것이지 인간의 상식의 눈으로 사는 자가 아닙니다. 말씀으로 사는 자이지, 내 경험이라는 눈이 보는 대로 사는 자가 아닙니다. 지금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부활의 권세에 의해서 다른 제자들과 도마라는 제자를 눈으로 보고 알고자 하는 인간의 상식에서 돌아 서서 말씀을 따라 판단하고 말씀에 의해서 믿는 자가 되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부활이란 단순히 죽은 자가 살아났다, 이제 나도 죽은 후에 살 것이다라는 미래의 소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는 영의 사람으로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살게 하는 것, 이것이 부활의 권세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에게 평강이 있고, 피의 권세를 증거 하는 사명이 있고, 인간의 상식이라는 눈이 가르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 사는 복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담임목사글을 통해서 저는 자신있게 여러분에게 강조하고 싶은 저의 결단이자 마음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적어도 하비스트교회 성도들에게는 성경을 종교로 가르치지말자! 성경을 신앙으로 가르치자입니다. 목사의 양심으로 교회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 땅의 부와 영예와 이 땅에서 잘 살고 부해지는 것이 최고의 목표라고 가르치지 말자! 만약 그것을 강조하고 최고의 가치인양 말하는 목사가 있다면 그 목사는 차라리 무당을 하는 것이 훨씬 낳다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는 부흥회를 다니면서 교회건축하게 해줄까라고 담임목사에게 묻습니다. 담임목사가 그 뜻에 동의하면 부흥회 강사 목사는 감동적이고, 실제와 같은 예화들을 써가면서 부자가 되는 방법을 설교합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것도 없는 중에 하나님께 드렸더니 부자가 되었더라! 십일조를 철저하게 했더니 큰 기업이 되었더라! 교회 목사에게 차를 사주고 집을 사주었더니 엄청난 갑부가 되었더라!

이 모든 말은 무당이 하는 말이나 별반 틀릴게 없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런 설교하는 목사는 인기가 좋습니다. 그런 설교하는 목사는 강사로 불리는 데도 참 많습니다. 교회 건축하기 전에는 그 목사를 불러야한다는 족보까지 생길 정도로 능수능란한 말솜씨는 성도들의 주머니를 터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분도 계십니다.

성도가 할 일은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입니다. 성도가 할 일은 성경에 있는 바른 윤리와 직업관, 시간관, 경제관을 가지고 이 땅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는 먼저 돈을 벌어라! 돈을 많이 벌어라! 그러기위해서는 교회를 위해서 뭔가를 투자해야한다는 식은 절대로 잘못되어진 논리인 것입니다.

인간의 상식의 눈은 경제적 논리가 자본주의 논리가 민주주의 논리가 합리적이라 생각합니다. 크고 화려하고 웅장한 것만이 최고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부활의 권세를 경험하는 자는 새로운 눈을 가지게 됩니다. 눈 앞에 말씀이 보입니다. 눈 앞에 진리가 보입니다. 눈 앞에 정의와 공의가 보입니다. 부정과 부패의 연류된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아직도 그의 눈 앞에 부활의 권세가 나타나지 않은 까닭입니다. 부활의 권세로 세상을 바라보아야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시듯이 본 고로 믿는 사람이 아니라 보지 않아도 말씀으로 정의롭게 살며, 보지 않아도 믿음의 굳건한 자가 되는 것이 부활의 권세를 힘입은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하비스트교회 성도여러분! 이제 우리는 부활의 권세로 사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의 피의 권세로 죄악에서 해결함 받았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권세를 주시고, 새로운 눈을 허락하셨습니다. 그것은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심으로 시작된 일입니다.

이 성령에 의해서 우리의 죄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피의 권세를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거룩은 예수님의 보혈인 그 피에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예수님의 보혈에 있습니다. 이 피는 사망이라는 저주에서 벗어나 새로운 영의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부활의 권세가 없다면 예수님의 부활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는 인간의 상식의 눈으로 보는 대로 판단하고, 결정해서 살려고 하지 마시고 영의 사람으로서 말씀을 따라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영의 사람으로 죄를 알고, 내 죄를 사하고, 거룩한 자, 의로운 자로 만드시는 피만이 새로운 인생의 참 비결임을 깨닫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