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삶처럼 계속된다 (Revised Version)

김태원2008.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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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구글러의 편지 책에 '사랑, 최고의 선물'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었다. 이건 그 내용을 조금 다른 느낌으로 업데이트 한 것이라고 할까. 아주 예전... 오래된 추억을 다시 더듬이 쓴 글을 살짝 공개해본다. 좋은 추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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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사랑은 삶처럼 계속된다.

 

문자로 사랑하고 이메일로 이별하는 디지털 시대에 애타는 짝사랑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에게도 짝사랑은 삶처럼 계속되었다. 좋으면 일단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랑, 첫눈에 반해버리고 사귀거나 아님 말고 식의 사랑은 진실함과 애태움이 없다고 생각했다. 말할까 말까 수십 번 고민하고 앞에 섰다가 다시 뒤돌아서는 망설임의 시간이 사랑의 깊이를 말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나는 그날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아니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중국 여행 전 날, 신촌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셨다. 이제 곧 4학년 2학기가 되는 취업 준비생들. 현실의 각박함을 잠시 잊으려 젊은 열정들은 연애이야기를 시작했다. 대학교 때 여자친구를 만나야 좀 더 ‘순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순진한 믿음은 대화를 더욱 진지하게 했다. 여행 준비를 해야 했기에, 10시쯤 술자리를 정리하고 지하철을 기다리면서 나는 ‘최고의 선물’이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특히 책 내용 중에 한 시가 무척 가슴에 와 닿았다.


내가 누군가의 손을 잡기 위해서는 내 손이 빈손이어야 한다. / 내 손에 다른 무엇이 가득 들어 있는 한 남의 손을 잡을 수는 없다. / 소유의 손은 반드시 상처를 입으나 텅 빈 손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한다. 정호승 '인생은 나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 中


취업전쟁을 앞둔 대학생은 남의 손을 잡아줄 마음의 여유가 없다. 그래서 취업준비생은 사랑이 지독한 사치처럼 느껴지지만 동시에 가혹 할 만큼 따뜻한 사랑이 그립기도하다. 외면할 수 없는 ‘불편한 진실’을 느끼는 달콤한 외도. 나는 다시 현실로 얼른 돌아가야 했다. ‘그래 지금은 사랑타령을 할 때가 아니야.’


지하철이 신림역을 지나고 있을 때 책을 다 읽고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앞을 봤다. 이럴 수가! 내 앞에는 눈을 뗄 수가 없을 만큼 마음에 드는 한 여자가 앉아있었다. 사랑은 사치라고 생각했던 조금 전의 나를 비웃듯 심장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지하철에서 처음 본 여자에게 말을 거는 일은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심장박동 소리를 속일 수는 없었다. ‘나와 같은 역에서 그녀가 내리면 정말 말을 걸어야지!’ 일어나지 않을 법한 우연을 가정해 애써 비겁한 자신을 숨기려했다. 마침내 내가 내려야 하는 역에 정차하려고 지하철은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지만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역시 인연이 아니야.’ 바보처럼 자기합리화를 해버렸다. 그런데 지하철이 멈추자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저 우연일 수도 있는 일이 마치 운명처럼 다가왔다. ‘이렇게까지 됐는데도 말을 안 걸면 나는 남자도 아니다’ 자신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서 몇 번을 되새겼다. 행여 들킬까 조심조심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뒤돌아보면 난 마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그녀를 지나칠지도 모른다. 그녀가 발걸음을 멈췄을 때, 내 심장도 마치 먿는 것만 같았다. ‘최고의 선물’이라는 책에 내 연락처를 끼운 후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아... 안녕하세요. 이 책 지하철타고 오다가 다 읽었는데 정말 괜찮더라고요. 한 번 읽어보세요.” 조금 당황한 그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책을 받았다. “안에 제 연락처가 있어요. 근데 제가 내일 외국에 나가야해서 혹시 저에게 연락을 주셔도 못 받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연락을 주실 거면 오늘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출국 준비를 하는 둥 마는 둥, 핸드폰만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왔다. 그렇게 기다리던 연락이었는데, 어찌나 확인하기가 망설여지고 떨렸는지 모른다.

“안녕하세요. 주신 책 잘 읽을게요. 저에게 정말 최고의 선물이네요^^”
날아갈 것 같았다. 교회도 다니지 않는 내가 처음으로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소리쳤다.


일주일 동안의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짐도 풀지 않은 채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 며칠 후 만나자는 약속을 잡았다. 처음 그녀를 만난 날은 내 생일을 한 달 앞둔 시점이었다. 그녀와 함께하는 생일을 상상할 때마다 마음이 두근거렸다. 나는 빨리 그녀의 마음을 얻고 싶었다. 그래서 너무 솔직하게 그녀에 대한 나의 감정을 이야기했다. 그것이 그녀에게는 큰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미처 모르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녀는 매우 오랫동안 사귄 남자친구와 헤어진 지 얼마 안 된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4학년이 되는 시기라 다른 이의 손을 잡아줄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었다. 그것을 알지 못한 채 너무 빠르게 다가가려고 하는 내가 그녀에게는 부담이 돼버렸고, 결국 처음 만난 날이 마지막으로 만난 날이 되어버렸다. 사랑은 서로가 다가서는 속도를 맞추는 일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아니 알면서도 지키지 못한 벌이었다. 그냥 좋은 추억으로 남겨 두고 다시 취업이라는 현실로 돌아가는 것이 서로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최고의 선물’처럼 다가온 그녀와의 추억은 긴장을 놓아버린 취업준비생이 겪은 ‘가벼운 외도’ 쯤으로 생각하려고 매일매일 노력했다.


그리고 얼마 후, 지하철 1호선이라는 연극을 보는데 연극이 지하철에서 벌어지는 스토리라는 이유로 머릿속은 그녀 생각으로 가득했다. 썼다 지웠다 썼다 지웠다 몇 번을 망설이다가 메일을 보냈다. 연극을 보다가 생각이 났다고, 성급했던 나로 인해 소중한 인연을 잃게 됐다는 사실이 쉽게 잊혀 지지가 않는다고. 그녀에게 답장이 왔고, 4학년이 되니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누군가를 새로 만나는 것 자체가 부담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렇게 그녀와 다시 연락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조금씩 다가서기 위해서 노력했다. 취업과 사랑. 결코 아름다울 수 없을 법한 두 단어에 예쁜 고리를 만들고 싶었다. 어느 날 그녀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내가 그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니! 모든 것을 뒤로하고 그녀를 도와준 답례로 그녀는 고맙다며 저녁을 사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녀와 저녁을 먹기로 한 날은 그녀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날이기도 했다. 6시에 만나기로 하고 나는 여느 날처럼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가슴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와의 약속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수업 중간에 빠져나와 병원으로 갔다. 의사는 지금 당장 입원하란다. 더 심각해지면 큰 일이 날 수도 있다는 경고와 함께. 하지만 나는 고민에 잠겼다. 몇 시간 후면 그녀와의 저녁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기다리던 시간이었는데. 내일 입원하면 안되겠냐며 떼를 쓰고, 의사를 설득해 봤지만, 의사는 고민할 시간조차 없다고 했다. 미웠다. 나의 건강을 생각해주는 그가 정말 미웠다. 나는 조용한 벤치에 앉아 그녀에게 오늘 약속을 못 지킬 것 같다는 말을 전했다. ‘어떤 케익을 살까, 카드에는 뭐라고 쓸까’ 고민하던 내 모습이 자꾸 떠올라 가슴이 뜨거워졌다.


퇴원하고 나서 다시 그녀를 만났다. 비록 늦었지만 케익의 촛불도 껐다. 만남의 횟수는 점점 많아지고, 그렇게 나도 그녀와 점점 가까워졌다. 하지만, 그녀는 취업을 할 때까지 누구와 사귄다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고, 자신이 취업이 돼서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 우리가 잘 될 거라는 말도 했다. 그녀를 위해서라도 내가 먼저 멋지게 취업해야한다. 그녀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 덕분인지 지원하는 회사마다 척척 합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구글에 가고 싶었다. 나는 이미 여러 회사에 입사가 결정됐기 때문에,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구글의 인터뷰를 진행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꿈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에게 좀 더 자랑스러운 존재가 되고 싶은 마음은 같았을 테니까. 내가 3개월 동안 구글의 그 긴 인터뷰를 보는 동안, 그녀는 옆에서 많은 힘이 되어 주었다. 안정된 선택보다는 조금 모험이 되더라도 나의 열정에 맞는 회사를 찾아가라고, 그 회사가 바로 구글인 것 같다며 곁에서 참 많은 격려를 해주었다. 인터뷰가 하나하나 진행될 때마다 나와 그녀는 기쁨을 함께 공유했다. 그리고 드디어 구글에서 합격통보를 받은 날, 나는 제일 먼저 그녀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다.


구글 입사를 한 주 앞두고 그녀 앞에서 구글 입사서류에 서명했다. 혼자 서명할 수도 있었지만, 그녀와 기쁨을 함께 하고 싶었다. 함께 가고 싶어서 메모해두었던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고, 커피도 마시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날 이후 그녀에게 연락이 되지 않았다. 전화도 받지 않고, 문자에 답장도 없었다. 그리고 4일이 지난 후 그녀에게서 문자가 왔다.

“사람에게 마음을 여는 것이 정말 쉽지 않네요.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죄송합니다.”

결승점을 앞에 두고 쓰러져버린 선수처럼 처절한 마음으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지금 나에게 벌어지는 일들이 소설의 일부라면, 아마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너무도 단조롭고 허망하게 끝나버린 이별에 어리둥절 했을 것이다. 나도 그런 허망함이 싫었다. 그래서 나는 그 문자 한 줄에 담긴 의미를 열심히 해석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부족해서일까? 내가 실수를 했나? 다른 남자가 생겼나? 갑자기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해진 것 같아 위로도 해본다. 하지만 이건 인연이 아닌거야...라고 말해버렸을 때, 내 마음은 조금 편해진 것 같았다. 그렇게 회의적인 체념은 우리 삶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녀가 마음을 열 수 없었던 이유를 아는 것이 두려웠다는 것을. 그냥 인연이 아니었다는 체념 속에서 내 자신을 방어하고 싶었다는 것을. 구차하게 이유를 묻지않고, 매달리지 않는게 쿨한 남자라는 자기 위안을 하면서.


문자로 사랑하고 이메일로 이별하는 세상에 애타는 짝사랑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나. 하지만 결국 나의 짝사랑도 마치 파일을 삭제하듯 문자 하나에 끝나고 말았다. 그녀의 마지막 문자를 핸드폰에서 지우면 그녀도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랑은 끈질기게 ‘삭제’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녀를 만났던 시기에 나는 취업을 앞두고 참 힘들고 고독한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런 시기에 그녀를 만나서 마치 ‘최고의 선물’을 얻은 것 같았다. 내가 당신에게 선물로 드린 책의 제목도 어떻게 ‘최고의 선물’일 수 있는지, 세상에 어떻게 이런 절묘한 우연이 나에게 생길 수 있는지, 운명을 잘 믿지 않는 내가 운명을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그녀를 잃고 나의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해주는 회사, 구글을 얻었다. 매일아침 내가 사랑하는 구글을 향하는 출근길은 설레기만 한다. 그런데 가끔 그녀 생각이 나서 슬프기도 하다. 출근을 위해 만원 지하철을 기다리는 그곳이 그녀에게 처음으로 말을 건 바로 그 지하철역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 삶에서 사랑은 정말 ‘삶’처럼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