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3월 26일 뤼순감옥 교수대 형장에서 안중근 의사는 마지막 순간 이렇게 유언했다. 정확히 98년 전 오늘의 일이다.
그러나 안 의사의 꿈은 대한민국이 일제에서 해방되고 63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올해 건국 60주년을 맞이한 대한민국의 국민 중에서 그가 삭풍의 중국 땅 감옥 묘역에 묻혀있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 같다. 부끄럽지만 현실이다.
국권 침탈의 주역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포살(砲殺)한 혐의로 32세의 젊은 나이에 교수대 형장에서 생을 마감한 안 의사. 그의 유해는 조국 대한민국에 봉환되었어도 진즉 됐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싸늘한 이국 땅에 묻혀있다.
나와 안 의사와의 '만남'은 수원농고 5학년 때인 1948년 이뤄졌다. 나는 '의사 안중근'이란 연극에서 안 의사의 역할을 맡게 됐다. 그 인연 때문에 나는 그의 유해발굴과 봉환을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 왔다. 뤼순 묘역을 7차례 찾아가 유해가 묻혀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탐사했다.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벌금을 물고 풀려난 적도 있다.
그러나 역대 정부는 안 의사 유해발굴을 수수방관해오다 4년 전 통일부가 광복6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중국, 북한과 유해발굴 공동 작업에 합의했다. 그 후 서너 차례 모임이 뤼순에서 있었으나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가보훈처가 25일부터 발굴 작업에 착수한 것은 뒤늦긴 했으나 다행스런 일이다.
지금 뤼순 묘역은 도시개발로 나날이 침식되고 있다. 더 이상 발굴을 미룬다면 "조국 땅에 묻히고 싶다"는 안 의사의 꿈은 영원히 물거품이 될지 모를 일이다. 안 의사는 뤼순감옥의 저명인사 묘역에 묻혀 있다. 안 의사 서거 후 이 묘역을 참배했던 한국인 2명의 증언이 있으며, 한 사람은 생존해 있다.
우리는 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안 의사는 테러리스트로 매도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위대한 정치사상가일 뿐만 아니라 이를 행동으로 옮긴 독립운동가였다. 안 의사는 옥중에서 그 유명한 '동양평화론'을 제창했다. 일본이 조선의 국권을 되돌려주고 만주와 중국에 대한 야욕을 버려, 한중일 3국이 각각 독립을 유지하는 가운데 협력해야만 동양평화가 실현될 수 있다는 이론이다.
요즘 활발히 논의되는 동북아시아 공동체론의 모태이고 유럽연합보다 100년이나 앞선 제안이다. 그가 인도의 간디, 중국의 쑨원, 마오쩌둥과 함께 근대 아시아가 배출한 4대 정치사상가로 거론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오늘, 안 의사의 기개를 다시 회고해 본다. 그는 재판에서 "나는 사람을 죽인 살인자가 아니다. 대한제국의 의병 중장 자격으로 일본군과 전쟁을 벌이다가 잡힌 포로이니 만국공판에 회부하라"고 외쳤다. 방청 중이던 러시아, 중국, 일본인은 물론 재판부까지 그 당당한 기개에 감탄했다.
그의 어머니 조아려 여사는 안 의사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지자 아들 정근, 공근을 뤼순으로 보내 "나라를 위해 그토록 큰일을 하고서도 상고(上告)한다면 남들이 살기 위해 몸부림친다고 비웃을 것이니 당당하게 처신하라"는 뜻을 전했다.
안 의사는 옥중에서 200여 점의 유묵(遺墨)을 남긴다. 견리사의견위수명(見利思義見危授命·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던져라). 이 글귀대로 조국독립을 위해 목숨을 던졌다.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돌파하고, 세계 무역 12위 국가로 성장한 오늘날까지 우리가 안 의사의 소원을 들어주지 못한다면 후손의 역할을 다한다고 볼 수 없다. 국민적 관심 속에 안 의사 유해발굴과 봉환으로 그의 영혼을 달래주는 일은 99년 전 국권이 외세에 침탈 당하자 온몸을 던져 나라를 구하려 한 '순국(殉國)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는 길이기도 하다.
김영광 안중근의사숭모회 부이사장
이토 저격한 이유 묻자 "15가지 죄"
의병때 '일'포로 풀어준 평화주의자 안중근 의사는…
'탕! 탕! 탕!'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중국 하얼빈(哈爾濱)역 하늘에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일본 초대 내각총리대신과 초대 조선통감을 지낸 68세 노회한 정객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역사(驛舍) 안에 크게 울려 퍼지던 러시아 의장대의 군악 소리, 환영인파의 함성도 일순 사라졌다. 을사늑약을 강제체결하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이토는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초프와의 회담을 위해 특별열차를 타고 도착한 길이었다.
거사의 주인공은 '대한국인(大韓國人)' 안중근(安重根)! 그의 총탄 첫 세 발에 이토는 가슴과 옆구리, 그리고 배에 관통상을 입고 30분 후 사망했다. 안중근은 이어 이토를 수행하던 가와카미(川上) 하얼빈총영사 등 일본인 일행을 향해 4발을 더 발사했다. 모두 7발이었다. 그리고 권총을 머리 위로 내던진 뒤 러시아 말로 '코레아 우라(대한국 만세)!'를 세 번 힘차게 외쳤다.
현장에서 스스로 체포된 서른 살 청년 안중근은 자신의 거사는 개인 자격으로 한 일이 아니라 '대한국 의병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적장(敵將)을 포살(砲殺)한 것이라고 밝혔다. 따라서 자신은 일본 법정에서 일본 법에 따라 재판을 받을 수 없으며, 만국공법(萬國公法·국제법)에 따라 전쟁포로로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 뤼순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의 안중근 의사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이유를 묻는 일본 검찰관에게 그의 15가지 죄를 조목조목 말했다. '한국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 등이다.
안중근이 높이 평가되는 이유는 한국 강점의 원흉 이토를 저격한 의사(義士)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는 궁극적으로 평화주의자였다. 1908년 독립군 '대한의군'을 조직한 안중근은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일본군인 4명을 사로잡았다. 안중근은 "만국공법에 사로잡은 적병을 죽이라는 법이 없다"면서 이들을 석방했다. 그는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물리치고, 어진 것으로 악한 것을 물리친다"는 자신의 신념을 밝혔다.
안중근의 사상은 뤼순(旅順) 옥중에서 집필한 두 종류의 저술에 잘 나타나 있다. 자서전 '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와 자신의 사상을 집약한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이다. 이 중 '동양평화론'은 거사 다섯 달 만에 서둘러 진행된 사형집행으로 미완의 저작이 되고 말았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에서 "일본이 동양 평화를 실현하고 자존하는 길은 한국의 국권을 되돌려 주고 만주와 중국에 대한 야욕을 버리는 것"이라고 했다. 한중일 삼국이 독립을 유지하는 가운데 협력해야만 동양 평화가 실현된다는 그의 사상은 최근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동아시아공동체론'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뤼순 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안중근은 형장으로 가기 직전 큰 붓을 들어 '爲國獻身 軍人本分(위국헌신 군인본분·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이라고 썼다. "나는 동양평화를 위해 한 일이니 내가 죽은 뒤에라도 한·일 양국은 동양평화를 위하여 서로 협력해주기를 바란다." 만 31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달리한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허동현 경희대 교수(한국근대사)는 "그는 민족국가의 탄생을 꿈꾼 인물이면서 한편으로 동양 평화를 주창한 탈(脫)민족주의의 선구자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대한국인'' 안중근의 꿈
'대한국인' 안중근의 꿈
"조국에 묻어다오" 아직 못이뤄
유해 발굴에 국민적 관심을…
"내가 죽거든 하얼빈 공원에 묻어두었다가 국권이 회복되거든
조국 땅에 반장(返葬)해다오."1910년 3월 26일 뤼순감옥 교수대 형장에서 안중근 의사는 마지막 순간 이렇게 유언했다. 정확히 98년 전 오늘의 일이다.
그러나 안 의사의 꿈은 대한민국이 일제에서 해방되고 63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올해 건국 60주년을 맞이한 대한민국의 국민 중에서 그가 삭풍의 중국 땅 감옥 묘역에 묻혀있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 같다. 부끄럽지만 현실이다.
국권 침탈의 주역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포살(砲殺)한 혐의로 32세의 젊은 나이에 교수대 형장에서 생을 마감한 안 의사. 그의 유해는 조국 대한민국에 봉환되었어도 진즉 됐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싸늘한 이국 땅에 묻혀있다.
나와 안 의사와의 '만남'은 수원농고 5학년 때인 1948년 이뤄졌다. 나는 '의사 안중근'이란 연극에서 안 의사의 역할을 맡게 됐다. 그 인연 때문에 나는 그의 유해발굴과 봉환을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 왔다. 뤼순 묘역을 7차례 찾아가 유해가 묻혀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탐사했다.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벌금을 물고 풀려난 적도 있다.
그러나 역대 정부는 안 의사 유해발굴을 수수방관해오다 4년 전 통일부가 광복6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중국, 북한과 유해발굴 공동 작업에 합의했다. 그 후 서너 차례 모임이 뤼순에서 있었으나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가보훈처가 25일부터 발굴 작업에 착수한 것은 뒤늦긴 했으나 다행스런 일이다.
지금 뤼순 묘역은 도시개발로 나날이 침식되고 있다. 더 이상 발굴을 미룬다면 "조국 땅에 묻히고 싶다"는 안 의사의 꿈은 영원히 물거품이 될지 모를 일이다. 안 의사는 뤼순감옥의 저명인사 묘역에 묻혀 있다. 안 의사 서거 후 이 묘역을 참배했던 한국인 2명의 증언이 있으며, 한 사람은 생존해 있다.
우리는 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안 의사는 테러리스트로 매도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위대한 정치사상가일 뿐만 아니라 이를 행동으로 옮긴 독립운동가였다. 안 의사는 옥중에서 그 유명한 '동양평화론'을 제창했다. 일본이 조선의 국권을 되돌려주고 만주와 중국에 대한 야욕을 버려, 한중일 3국이 각각 독립을 유지하는 가운데 협력해야만 동양평화가 실현될 수 있다는 이론이다.
요즘 활발히 논의되는 동북아시아 공동체론의 모태이고 유럽연합보다 100년이나 앞선 제안이다. 그가 인도의 간디, 중국의 쑨원, 마오쩌둥과 함께 근대 아시아가 배출한 4대 정치사상가로 거론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오늘, 안 의사의 기개를 다시 회고해 본다. 그는 재판에서 "나는 사람을 죽인 살인자가 아니다. 대한제국의 의병 중장 자격으로 일본군과 전쟁을 벌이다가 잡힌 포로이니 만국공판에 회부하라"고 외쳤다. 방청 중이던 러시아, 중국, 일본인은 물론 재판부까지 그 당당한 기개에 감탄했다.
그의 어머니 조아려 여사는 안 의사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지자 아들 정근, 공근을 뤼순으로 보내 "나라를 위해 그토록 큰일을 하고서도 상고(上告)한다면 남들이 살기 위해 몸부림친다고 비웃을 것이니 당당하게 처신하라"는 뜻을 전했다.
안 의사는 옥중에서 200여 점의 유묵(遺墨)을 남긴다. 견리사의견위수명(見利思義見危授命·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던져라). 이 글귀대로 조국독립을 위해 목숨을 던졌다.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돌파하고, 세계 무역 12위 국가로 성장한 오늘날까지 우리가 안 의사의 소원을 들어주지 못한다면 후손의 역할을 다한다고 볼 수 없다. 국민적 관심 속에 안 의사 유해발굴과 봉환으로 그의 영혼을 달래주는 일은 99년 전 국권이 외세에 침탈 당하자 온몸을 던져 나라를 구하려 한 '순국(殉國)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는 길이기도 하다.
김영광 안중근의사숭모회 부이사장
이토 저격한 이유 묻자 "15가지 죄"
의병때 '일'포로 풀어준 평화주의자안중근 의사는…
'탕! 탕! 탕!'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중국 하얼빈(哈爾濱)역 하늘에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일본 초대 내각총리대신과 초대 조선통감을 지낸 68세 노회한 정객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역사(驛舍) 안에 크게 울려 퍼지던 러시아 의장대의 군악 소리, 환영인파의 함성도 일순 사라졌다. 을사늑약을 강제체결하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이토는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초프와의 회담을 위해 특별열차를 타고 도착한 길이었다.
거사의 주인공은 '대한국인(大韓國人)' 안중근(安重根)! 그의 총탄 첫 세 발에 이토는 가슴과 옆구리, 그리고 배에 관통상을 입고 30분 후 사망했다. 안중근은 이어 이토를 수행하던 가와카미(川上) 하얼빈총영사 등 일본인 일행을 향해 4발을 더 발사했다. 모두 7발이었다. 그리고 권총을 머리 위로 내던진 뒤 러시아 말로 '코레아 우라(대한국 만세)!'를 세 번 힘차게 외쳤다.
현장에서 스스로 체포된 서른 살 청년 안중근은 자신의 거사는 개인 자격으로 한 일이 아니라 '대한국 의병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적장(敵將)을 포살(砲殺)한 것이라고 밝혔다. 따라서 자신은 일본 법정에서 일본 법에 따라 재판을 받을 수 없으며, 만국공법(萬國公法·국제법)에 따라 전쟁포로로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 뤼순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의 안중근 의사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이유를 묻는 일본 검찰관에게 그의 15가지 죄를 조목조목 말했다. '한국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 등이다.
안중근이 높이 평가되는 이유는 한국 강점의 원흉 이토를 저격한 의사(義士)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는 궁극적으로 평화주의자였다. 1908년 독립군 '대한의군'을 조직한 안중근은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일본군인 4명을 사로잡았다. 안중근은 "만국공법에 사로잡은 적병을 죽이라는 법이 없다"면서 이들을 석방했다. 그는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물리치고, 어진 것으로 악한 것을 물리친다"는 자신의 신념을 밝혔다.
안중근의 사상은 뤼순(旅順) 옥중에서 집필한 두 종류의 저술에 잘 나타나 있다. 자서전 '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와 자신의 사상을 집약한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이다. 이 중 '동양평화론'은 거사 다섯 달 만에 서둘러 진행된 사형집행으로 미완의 저작이 되고 말았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에서 "일본이 동양 평화를 실현하고 자존하는 길은 한국의 국권을 되돌려 주고 만주와 중국에 대한 야욕을 버리는 것"이라고 했다. 한중일 삼국이 독립을 유지하는 가운데 협력해야만 동양 평화가 실현된다는 그의 사상은 최근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동아시아공동체론'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뤼순 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안중근은 형장으로 가기 직전 큰 붓을 들어 '爲國獻身 軍人本分(위국헌신 군인본분·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이라고 썼다. "나는 동양평화를 위해 한 일이니 내가 죽은 뒤에라도 한·일 양국은 동양평화를 위하여 서로 협력해주기를 바란다."
만 31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달리한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허동현 경희대 교수(한국근대사)는 "그는 민족국가의 탄생을 꿈꾼 인물이면서 한편으로 동양 평화를 주창한 탈(脫)민족주의의 선구자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한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