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적 강간, 대체 언제까지?

윤수정2008.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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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산 여자아이 납치미수 사건 범인 이모씨(이모씨는 무슨 이모씨냐. 실명을 밝혀야지.) '역시' 이번 범행이 처음이 아니라고 한다.

무려 13년 전에도 5~9살 사이 여자아이 5명을 구타, 폭행, 성추행, 강간했다고 한다. 10년 감방서 살고 나와선 41살이란 나이에(하기사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냐마는. 머리에 똥내나는 쓰레기만 들어있는데.)또 그 짓을 한 것이다. 커터칼로 아이들을 위협하여 스스로 옷을 벗게 만들고 겁에 질린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파괴한 이모씨는 울며 버둥거리는 그 아이들의 모습이 즐거웠겠지.

 

더 어처구니 없는 건 이모씨의 재판을 맡았던 판사의 결정이다. 아이 5명의 인생을 지옥으로 만들어버린 이모씨에게 1심에서 12년형이 주어졌는데, '별다른 전과가 없어서' 무거운 형량을 덜어주고자 10년형으로 바꿨다고 한다. 잠시 생각해본다. 판사는 여자였을까, 남자였을까. 답이 나온다. 여자였어도, 남자였어도 이모씨랑 함께 지옥행으로 당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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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1:1로 나에게 직접적인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가할 수 있는 사람과 한 공간내에 단 둘이 있을 때 그 느낌이 어떤지.

나는 살려달라고 울부짖는데, 이 공간 밖에서는 여느날과 같이 세상은 멀쩡히 잘 돌아가고 있을 때 그 피 말리는 고독함이 어떤지.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신체적인 특징이 가해자에게 미끼가 되어 순식간에 신체적인 결함으로 둔갑할 때 자기혐오가 얼마나 큰지.

본능적인 그 무엇과 지나온 과거 동안 고스란히 내면화 되어버린 세습 때문에 죽기보다 싫은 그것이 내 안으로 들어올까봐 몸부림을 칠 때 그 공포와 인생에 대한 허망함이 어떤지.

 

나도 당하기 전까지는 몰랐다.

그리고 지금도, 실제로 그것이 내 안을 뚫고 들어왔을 때의 그 끔찍함은 알지 못한다. '운 좋게' 삽입만은 모면하고 상황을 종결시킨 자로써 짐작만 할 뿐이다.

그럼에도 택배가 왔다고 딩동거리는 벨소리를 들을 때 항상 엄습하는 두려움은 평생 가져가야 하는 것이다.

 

난 그 때 23살이었다.

 

이 아이들은 초등학생이었다.

그 중 하나는 '너무 어려 강간은 불가능했던' 5살이었다.

 

아직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느껴보기도 전에

엄마를 불러도, 아빠를 불러도 눈 앞에 있는 건 자길 죽일지도 모르는 커터칼과 둘째, 셋째 손가락 사이에 엄지손가락을 끼운 행위의 의미가 뭔지 모른다고 때리는 아저씨 뿐이라면,

그 공포는 얼마나 컸을까.

평생 지워지지 않는 생살 깎아내리는 그 상처는 또 얼마나 클까.

 

'고통'이 함축하는 의미의 범위가 덧없이 작게 느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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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더 중요한 건, 이런 끔찍한 사건들이 줄어들기는 커녕 증가한다는 것이다. 강간이 얼마나 다각화된 지점에서 한 인간의 인생을 괴롭힐 수 있는지 알지 못하는 자들이 만들어 놓은 무용지물의 법을 신나게 이용해 먹으려는, 발톱에 낀 때만도 못한 인간들이 줄을 선 것이다. 

 

도대체 왜 그렇지?

 

강간이나 성추행과 같은 범죄형은 일시적인 게 아니라 중독성 다분한 것으로 대다수의 범죄자들은 형을 받고 난 후에 다시 범행을 저지른다는 연구결과도 나왔다고 하는데, 왜 그럴까.

엄청난 수의 피해자들이 무분별하게 속출함에도 법은 왜 바뀌지 않을까. 한 사람이 적게는 5명, 많게는 50~60명까지도 강간을 하고 또 할만큼, 그 빌어먹을 도구가 닳아없어질 때까지 할 생각인 그 사람들을 왜 15년형 이상 주지 않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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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반은 남자다.

세상의 반은 여자다.

 

세상의 반은 언젠가 나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최소 한번쯤은 갖고 산다. 내가 '잘못' 행동해서 혹여나 '자극'시킬만한 행동을 했다는 얘기를 들을까, 세상 이목 생각에 조심조심 행동한다. 그러다 혹여나 당하게 되면 숨기고 산다. 손가락질 받을지 모르니깐. 난 잘못한게 없어도 사람들이 잘못했다고 할지 모르니깐. 내가 사랑하는 가족, 연인, 친구, 동료가 날 외면할지도 모르니깐. 

그리고 그렇게 살기 싫다고 과감한 결정 내린 소수는 더러운 취급을 받는다. 당해도 '그렇게 하고 다니니깐 당하지.'란 차가운 시선 뿐.

 

세상의 다른 반은 언젠가 내 어머니, 내 부인, 내 딸, 내 여동생이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최소 한번쯤 갖고 산다. 동족임이에도 내가 소중히 여기는 여자들에겐 항상 동족에 대해 주의시키는 걸 잊지 않는다. 사랑하는 여자들이 짧은 치마를 입거나 늦은 밤 다니면 혹여나 무슨 일 있을까 걱정한다.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면 분노한다. 지켜주지 못한, 보호해주지 못한 자신에게 화를 내며 자책한다. 물론, 대다수의 경우 자신과 긍정적인 인연을 맺고 있는 여자들에 한해서. 나머지 여자들은 관할범위 밖이다. 우리 가족, 우리 종족, 우리 국가 여자들이 아니라면 상황 봐서 입장을 바꿀 때도 종종 있다. 

 

 

그리고 그렇게 이야기함으로써 여자와 달리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일생에 있어서 스스로를 잠재적 피해자가 아닌 잠재적 가해자로 명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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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의 다른 사고방식, 다른 대처법은 단순한 흑백 논리로 옳고 그름을 판별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편가르기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진실이야 어찌되었든 결과적으로 성별간에 접근방식의 차이가 있는 건 사실일 뿐이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특히 한국의 경우) 대부분 남자들이 영향력 있는 사회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일 뿐이다.

 

그렇다면 말이다.

남자들에게도 자신을 잠재적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로써의 가능성을 생각하게 압박하는 세상이라면, 성과 강간에 대한 법률적 변화가 이렇게 더딜까 질문해 본다.

 

내 딸, 내 부인, 내 여동생이 아니라

 

내가 당할 수 있겠다 란 생각이 떠오른다면

이렇게 이성적으로, 계산적으로 서류 처리하듯 처리할 수 있을까 질문해 본다.

내가 누군가의 밑에 깔려 아둥바둥하고 있는 모습을 한번쯤 상상해 보면 그리도 가볍게 타인을 범할 수 있을까 질문해 본다.

내가 밤에 다니다 누군가에게 폭행 당할까봐 간담이 서늘해지는게 아니라 멀쩡하게 바지입고 귀가하는 와중 폭행은 당연지사, 그 후 두어명에게 항문삽입을 당할까봐 간담이 서늘해진다면 이리도 가벼운 형벌에 만족할 수 있을까 질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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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이 원하는 건 날 지켜준다고 이야기하는 남자가 아니다.

내가 울고 있는 동안 가해자를 가만놔두지 않겠다고 분통 터뜨리는 남자가 아니다. 결코 내 옆에 꼭 있겠다 이야기 해놓고는 어느 새 강간 당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괴로워하다 멀어져 가는 남자가 아니다.

 

여자들이 진정 원하는 건 내가 날 스스로 지켜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법률적 제도와 환경이다.

여자들이 진정 원하는 건 복수도, 은폐도, 혹은 너도 똑같이 당해봐라 하는 저주가 아니다. 남자도, 본능조절에 실패하여 언젠가 내게 위협을 가할 수 있는 동물적인 존재가 아니라, 인격체를 가진 사람으로 볼 수 있는 세상을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자들이 진정 원하는 건 최소한 내가 갖고 태어난 몸이 내 인생을 망가뜨린걸까라고 의심하며 자기혐오를 만들어내지 않아도 되는 세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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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전 그 아이들과 이번에 가까스로 도망친 그 여자아이를 비롯한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강간과 성추행으로 인한 상처를 안고 살 것이다. 그나마 잘 극복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꽤 있을테지만,

그 누구한테도 말하지 못한 채 자기 자신의 영혼을, 또는 신체까지도 죽이는 것으로 끝을 맺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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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비록 여기선 끊임없이 올라오는 강간관련 여성피해사건들을 비롯하여, 결정적으로는 이번 납치미수 사건 덕분에 성별의 차이를 지적하며 여성 피해자들만 언급하였지만, 우리가 궁극적 목표로 생각해야할 것은 모든 사회적 약자의 성적 인권보호임을 이야기 하고 싶다. 어딘가에서 동네 어른의 너저분한 손길을 꾹 다문 입으로 참아야하는 성별불문의 청소년들이 있을테니. 권력의 먹이사슬에 힘입어 두 손을 마구 놀리는 상사에게 당하고만 있어야하는 남성 직원들이 있을테니. 그리고 그 외에도 우리가 감히 상상도 못하는 악질의 성범죄들이 세상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을테니.

 

 

제발, 앞으로는 세상에 긍정적인 변화가 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