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 소실과 금오신화

김윤호2008.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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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신화(金鰲神話)」란 책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조선 전기에 김시습(金時習)이 지은 한문 소설집. 한국 전기체 소설(傳奇體小說)의 효시. 명나라 구유가 지은 『전등신화』를 모방해 지었으며 현존하는 조선시대 최초의 한문소설 등등....

 

요즈음 전 국민의 포켓사전이 된 인터넷 검색창에 금오신화를 쳐봐도 대충 이러한 모범답안이 나온다. 우리가 고등학교 국문학사 시간에도 대충 그런 정도를 배웠다. 아마도 더 자세히 가르치고 싶은 선생님들은 금오신화에 포함된 5편의 단편의 제목을 한자로 써주거나 읽어 주리라. 그 5편은 바로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이생규장전(李生窺牆傳)〉,〈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등인데 한문의 뜻을 제대로 모르던 고등학교 시절에는 뜻을 제대로 모르니 띄어 읽기도 제대로 안되고 엉망진창이었다.

 

<만복사의 윷놀이>,<이생, 담을 넘어 엿보다>, <취해서 부벽정을 노닐다>, <용궁에서 잔치를 받다>,<남쪽의 염라국 이야기> 등으로 번역해서 가르쳐주면 잘 알아들었을 것인데, 그냥 한자로만 가르고 읽어주니 그 뜻을 제대로 알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그저 최초의 한문소설이자 사실상 우리 문학사상 최초의 소설이라는 것, 김시습이 불교와 유교, 도교를 넘나들면서 인생의 가치관을 논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소설집이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것이 아니었다. 김시습이 「금오신화(金鰲神話)」를 썼다는 사실은 그의 문집인 「매월당집」은 물론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는 여러 책들, 즉, 이숙권의「패관잡기」나 김안로의 「용천담적기」등에서 확인이 되고, 16세기의 백과사전인 권문해(1534-1591)의「대동운부군옥」에도 그가 저술한 책으로는“「매월당집」,「역대연기」,「금오신화」가 있는데 모두 세상에 전하고 있다고”라고 하여 세상에 전해온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될 수 있으나, 처음 학계에 그 내용이 정식으로 알려진 것은 1927년 육당 최남선이 「계명(啓明)」이라는 잡지 제19호에 소개하면서부터였다. 말하자면 최남선이 이 소설을 찾아내지 못했다면 「금오신화」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은 역사에서 사라져 있었을 운명이라는 것이다.

  

최남선이 발견한 판본은 목판본으로, 1884년(고종 21) 동경에서 간행된 것이며, 상ㆍ하 2책으로 되어 있었다. 이 목판본 <금오신화>는 1653년(효종 4)에 일본에서 초간되었던 것을 재간한 것이며, 그 바탕이 된 초간본은 오츠카(大塚彦太郎)의 가문에 오랫동안 전하여 오던 자료였다고 한다. 말하자면 한국에서는 정식으로 인쇄된 기록이 없으므로 민간에 의해 필사본으로 전해지던 것을 일본에서 입수해 이를 목판으로 찍어내었다는 것인데. 아마도 그 내용이 재미있어서 이렇게 남의 나라의 한문소설을 일찍이 출판한 것이다. 연구자들에 의하면 「금오신화」는 5편의 소설 이외에도 더 많은 단편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 전하는 것은 5편이고 그나마 일본이라는 나라가 없었다면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은 보존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52년에 정병욱(鄭炳昱)에 의하여 필사본으로 된 <만복사저포기>와 <이생규장전> 두 편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일본에서 전해진 「금오신화」가 세상에 알려진 데 따른 뒷 현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 이렇게 「금오신화」이야기를 장황하게 하는가? 그것은, 우리 사회가 서적이 됐든, 물품이 됐든 보존이라는 것을 거의 할 줄 모르는 한심한 사람들이란 점을 우리들이 자각했으면 해서다. 또 하나는 최근 숭례문의 방화사건도 이러한 우리의 사회풍조와 결코 무관할 수 없다는 점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우리가 세계에 자랑하는 고려청자도 조선시대에는 그 존재조차 모르지 않았던가? 그릇을 만드는 법을 누군가가 기록을 했더라면, 그 기록을 누군가가 지켰더라면 우리들은 그 존재를 알았겠지만 불행히도 아무도 그것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일본인들이 이 땅에 들어와 개성과 강화도 근처의 고려무덤을 도굴하기 전까지 아무도 고려시대에 그처럼 아름다운 그릇을 만들어 썼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고려의 자기가 그렇게 보물이라는 것은 더더욱 몰랐다. 고려불화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세상에 자랑하는 고려불화가 제대로 된 것이 단 한 점도 우리나라에 없었고 일본에만 전해오다가 경매 등을 통해서 겨우 몇 점이 돌아온 것임에랴. 유명한 추사의 <세한도(歲寒圖)>도 일본인이 수집해 갖고 있다가 우리에게 돌아온 것이다. 그런 것이 어디 그림 몇 점 도자기 몇 점에 끝날 일인가?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현상을 잦은 외침과 전란에 갖다 붙이는 경우가 많지만 이웃 일본이나 중국은 전란이 없어서 그렇게 기록이 많이 남아있는가? 그것은 그들이 과거의 기록이나 유물을 보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저 유명한 돈황 막고굴의 불경들은 어떻게 시대를 살아남았는가? 모든 종이로 된 기록은 불에 약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기에 그들은 중요한 기록들을 동굴에 감추고 겉을 밀봉한 것이다. 기록이 불에 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은 돌에다 글을 새기고 그것도 깊은 동굴 속에 감추어 놓는다. 우리나라는 기록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왜 이렇게 깊이 보관하는 방법을 생각하지 않고 기껏 여러 곳에 사고(史庫)를 세우는 것에서 멈추어야 했을까? 우리 조선시대의 그 방대한 실록도 임진왜란 때 목숨을 건 수송작전으로 겨우 살아남았으면 산 속 깊은 데나 혹은 지하에 굴을 파고 깊이 묻고 이를 엄중히 지켰어야 하지 않는가?

  

그처럼 모든 문화재는 불에 약하다는 것이 당연한 상식인데도 우리는 불에 대한 대비는 전혀 하지 않는다. 세계에 자랑하는 인쇄물인 팔만대장경도 화재에 취약한 상황임을 우리들은 알고 있다. 2년 전 화마에 소실된 낙산사도 서둘러 건물을 복원은 했지만 새로 복원된 건물이 어떻게 화재에 다시 소실되지 않도록 어떤 방재시설을 갖추었다는 보도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그것은 아무런 시설도 안했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동안 중요한 사찰의 전각들이 불에 탔지만 사찰의 중요 건물에 스프링클러를 설치한 것은 아마도 한 군데도 없을 것이다. 모두 다 눈 앞에서 아무 일 없기만을 빌 뿐, 미리 철저하게 대비하는 곳은 한군데도 없다.

  

우리가 유구한 역사 5천 년을 자랑하면서도 실제로 자랑할 무엇이 있단 말인가? 우리의 역사가 5천년이라고 하는데, 그 역사를 전해주는 책은 겨우 6~7백년 전에 쓴 책이 고작이고 그 긴 역사를 전해주는 당대의 기록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으므로 우리들은 중국이나 일본 책을 뒤지면서 다 흩어진 우리 역사를 짜맞추기 위해 온갖 생고생을 하고 있다. 세계 최초라고 자랑하는 거북선, 금속활자는 어떻게 만든 것인지도 알 수 없고 실물이나 관련된 유물도 하나도 없다. 도대체 배가 어떻게 나갔고 노는 어떻게 저었고 대포는 어디서 어떻게 쏘았는지를 좀 적어놓으면 안되는가?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 그 많은 화가들이 그린 그림들이 왜 다 타버렸는가? 왜 우리의 좋은 그림이나 글씨, 도자기는 일본에 가야만 있는가? 왜 우리는 이처럼 기록이 없고 남겨진 문화재도 없는가? 세상에 무슨 이런 나라가 있고 이런 민족이 있는가? 그러면서도 우리들은 문화민족이고 문화와 예술을 사랑한 평화민족인가?

  

멀리 갈 것도 없다. 방송 80년을 자랑하지만 그 역사를 증명해 줄 기록이나 사진, 유물, 유품 등이 얼마나 있는가? 우리나라 기업들이 갖고 있는 자료관이나 막물관이 그리 많은데 왜 우리 KBS는 아직 방송박물관이 없는가? 당장 우리들이 몇 십 년전에 쓰던 원고지나 녹음기는 남아있는가? 모두 폐품처리하기에 바쁘다 보니 당장 10년 전 것도 남은 것이 없다. 내가 있는 부산방송총국도 개국 73년을 맞고 있지만 역사관도 자료관도 없다. 이미 상당한 자료가 흩어진 상황이다.

  

이처럼 기록을 중시하지 않고 보존문제도 별달리 신경을 쓰지 않는 우리 사회의 풍조가 국보 1호인 숭례문을 불 속에 날려보냈다고 하겠다. 수도를 정하고 도성을 건설한 다음 문(門)마다 온갖 아름다운 말을 다 갖다붙여도 보호하고 보존하려는 마음이 없으면 아무 의미도 없다. 숭례문에서 강조하던 예(禮)의 숭상도, 흥인지문이 강조하던 인(仁)의 일어섬도 기본이 없으면 되지를 않는다.

 

방화로 인한 숭례문의 소실을 지켜보면서 왜 나는 「금오신화(金鰲神話)」를 생각해 낸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금오신화를 배우되, 그 자료가 남아있지 않음을 배우지 못했고, 그 자료가 일본에 전해져, 일제시대에 겨우 찾아낸 것임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금오신화를 배울 때 중국의 전등신화를 모방했다는 말을 너무 앞세워, 시험볼 때마다 그 점은 열심히 외우고 대비했지만, 우리의 소중한 기록을 보존하고 지키는 법에 대해서는 전혀 가르침을 받지 못했기에, 바로 그런 것들이 우리의 전통이나 문화의 기록 혹은 보존에 대해 무관심하게 만들엇다고 생각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사회, 우리 민족의 기본인 기록을 하고 보존을 하는 문제를 다시금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기본으로 돌아가서 새로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런 문화재도 우리 곁에 있을 수 없다. 또 다시 다른 문화재를 잃지 않으려면, 시간이 걸리기는 하지만, 우리 사회가 기록하고 보존하는 것의 중요성을 다함께 몸에 밸 정도로 알고 잇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기록이건 문화재건 다 같이 지키려는 마음이 일어날 것이다. 지금처럼 모든 관련부서가 다 내 것이 아니라며 최소한의 조치도 거부하는 한, 어떤 법령, 어떤 조치가 있어도 문화재의 소실은 또 일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