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개 머리의 악몽 의 컬트영화감독에서 로 주류로 진입한 감독, 기괴한 비주류의 상상력을 주류에 유행시킬 수 있을만큼의 영민함을 발휘한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이다. 1946년 1월 20일 '몬타나 주 마줄라'에서 출생한 그는 전근이 잦은 농무성 소속 연구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중서부의 보와즈, 아이다호, 워싱턴, 남부의 더램, 노스캐롤라이나 등 미국 대륙을 횡단하며 미국의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버지니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어린 시절부터 꿈이었던 화가가 되기로 마음먹고 '보스턴예술학교'에 입학하지만 낙제를 당하여 1년만에 중퇴한다. 그리고 '표현주의 미술'의 발생지인 '독일'로 떠나는데 그곳이 자신이 상상했던 분위기와 다르자 '파리'와 '아테네' 등 유럽을 돌아다니다 열흘만에 미국으로 돌아온다. 그후 이 직업 저 직업을 전전하다 1965년말 '필라델피아'의 '펜실바니아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잭슨 폴록', '프란츠 클라인', '잭 트윌코프', '프란시스 베이컨'에 매혹된 그는 화가들이 16미리 영화작업을 하곤 했던 당시 미술계의 경향에 따라 2백불의 제작비로 1분짜리 단편 애니메이션 을 만들고, 여기에 사이렌과 음향을 덧붙여 실험회화/조각전에 출품한다. 애니메이션과 실사화면이 혼합된 4분짜리 두번째 단편 과 '미국영화연구소(AFI)' 장학금으로 얻은 7천 2백불의 제작비로 만든 30여분짜리 세번째 단편 는 '데이비드 린치'최초의 '활동회화' 과 함께 전설적인 미드나이트 컬트가 될 의 전조를 알린다. 1970년 '미국영화연구소(AFI)'의 고등 영화 연구센터에서의 수학을 목적으로 '캘리포니아'로 간 '데이비드 린치'는 시나리오 을 쓰지만 영화화되지 못하고, 이때부터 그의 장편 데뷰작이 될 시나리오를 쓴다. '필라델피아'의 폐허가 된 공장지대를 배경으로 누군가의 머리가 지우개로 사용된다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는 촬영을 시작한 지 7년만인 1977년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다. 는 무자비한 비평과 냉담한 관객들의 반응 속에서 완전히 흥행에 참패하지만 '컬트' 배급자 '벤 바렌홀츠'에 의해 심야극장용 영화로 기사회생하여 소수 컬트팬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는다. 그리고 의 감독을 물색중이던 '멜 브룩스'는 를 보는 순간 감격하여 '데이빗 린치'와 계약을 체결한다. 은 '할리우드'와 '데이비드 린치' 사이의 절반의 양보이다. 은 19세기에 실존했던 끔찍한 기형의 외모를 지닌 '존 머릭'이라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로 그는 흉칙한 외모를 지녔지만 그 어떤 사람보다 순수한 마음을 지녔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의 잔인한 취급으로 죽어간다. 전반부에서는 '데이빗 린치'의 취향이 압도적이고, 후반부에서는 '빅토리아 왕조시대'의 계몽영화가 되었다. 이 영화는 흥행에서도 크게 성공했고 아카데미상에서 작품상을 비롯한 8개 부문에 노미네이션되었다. (그러나, 전부문 수상탈락!) 의 성공으로 '데이비드 린치'는 디노 디 로랜티스 제작의 70미리 대작 SF 영화 만들게 되었다. 그는 내러티브의 요구에 부응하지 않고 자신의 꿈대로 이미지로 일관하는 비주얼 스타일에 치중하여 찍어냄으로써 다시 원래의 스타일로 복귀한다. 하지만 고통스럽고 기나긴 촬영으로 얻어진 SF '대서사시' 개봉도 되기 전에 제작자에 의해 50분 남짓 절단당하고, 흥행에서 완전히 참패한다. 낙담한 '데이빗 린치'는 잘라진 50분가량의 필름을 이어붙여 TV용으로 재편집하여 크레딧에 그 유명한 '알란 스미스' 이름을 집어넣는다. 그 과정 속에서 절망을 극복한 (감독판 는 그의 최고 걸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데이비드 린치' 을 통해 그의 그로테스크한 악취미를 교묘히 영화 속에 숨겨놓는 방법을 터득함으로써 의 진부함으로 추락하지 않으면서도 보수적인 아카데미 회원들로부터 환영받는다. 은 1980년대 컬트영화의 신전에 올랐으며, '아카데미 작품상'을 비롯하여 여러 부문에서 노미네이션 되었으며, 흥행에서도 성공하였다. 이 영화로 '데니스 호퍼'는 새로운 아이콘이 되었다. 4년간의 침묵 뒤에 만든 '깐느영화제'에서 이례적으로 '황금종려상'을 받았으며, 그의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알렸다. '데이비드 린치'는 'ABC방송국'의 제안으로 30부작 를 총지휘하여 그 해의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그는 끝까지 사건의 결말을 알려주지 않으면서, 1992년 엉뚱하게도 드라마의 시작에서 일년 전으로 되돌아간 이야기에 관한 극장판 영화 를 내놓았다. 의 음악을 맡았던 '안젤로 바달라멘티'와 를 작곡하여 MTV로 찍어 뉴욕에서 상영하기도 하였다. 그 후 1990년대에 다시 침묵하다가 불현듯 를 만들어서 그의 21세기 컬트 비전을 제시하였다.
데이빗 린치(David Lynch )
지우개 머리의 악몽 의 컬트영화감독에서 로 주류로 진입한 감독, 기괴한 비주류의 상상력을 주류에 유행시킬 수 있을만큼의 영민함을 발휘한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이다.
1946년 1월 20일 '몬타나 주 마줄라'에서 출생한 그는 전근이 잦은 농무성 소속 연구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중서부의 보와즈, 아이다호, 워싱턴, 남부의 더램, 노스캐롤라이나 등 미국 대륙을 횡단하며 미국의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버지니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어린 시절부터 꿈이었던 화가가 되기로 마음먹고 '보스턴예술학교'에 입학하지만 낙제를 당하여 1년만에 중퇴한다. 그리고 '표현주의 미술'의 발생지인 '독일'로 떠나는데 그곳이 자신이 상상했던 분위기와 다르자 '파리'와 '아테네' 등 유럽을 돌아다니다 열흘만에 미국으로 돌아온다.
그후 이 직업 저 직업을 전전하다 1965년말 '필라델피아'의 '펜실바니아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잭슨 폴록', '프란츠 클라인', '잭 트윌코프', '프란시스 베이컨'에 매혹된 그는 화가들이 16미리 영화작업을 하곤 했던 당시 미술계의 경향에 따라 2백불의 제작비로 1분짜리 단편 애니메이션 을 만들고, 여기에 사이렌과 음향을 덧붙여 실험회화/조각전에 출품한다. 애니메이션과 실사화면이 혼합된 4분짜리 두번째 단편 과 '미국영화연구소(AFI)' 장학금으로 얻은 7천 2백불의 제작비로 만든 30여분짜리 세번째 단편 는 '데이비드 린치'최초의 '활동회화' 과 함께 전설적인 미드나이트 컬트가 될 의 전조를 알린다.
1970년 '미국영화연구소(AFI)'의 고등 영화 연구센터에서의 수학을 목적으로 '캘리포니아'로 간 '데이비드 린치'는 시나리오 을 쓰지만 영화화되지 못하고, 이때부터 그의 장편 데뷰작이 될 시나리오를 쓴다. '필라델피아'의 폐허가 된 공장지대를 배경으로 누군가의 머리가 지우개로 사용된다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는 촬영을 시작한 지 7년만인 1977년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다. 는 무자비한 비평과 냉담한 관객들의 반응 속에서 완전히 흥행에 참패하지만 '컬트' 배급자 '벤 바렌홀츠'에 의해 심야극장용 영화로 기사회생하여 소수 컬트팬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는다. 그리고 의 감독을 물색중이던 '멜 브룩스'는 를 보는 순간 감격하여 '데이빗 린치'와 계약을 체결한다.
은 '할리우드'와 '데이비드 린치' 사이의 절반의 양보이다. 은 19세기에 실존했던 끔찍한 기형의 외모를 지닌 '존 머릭'이라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로 그는 흉칙한 외모를 지녔지만 그 어떤 사람보다 순수한 마음을 지녔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의 잔인한 취급으로 죽어간다. 전반부에서는 '데이빗 린치'의 취향이 압도적이고, 후반부에서는 '빅토리아 왕조시대'의 계몽영화가 되었다. 이 영화는 흥행에서도 크게 성공했고 아카데미상에서 작품상을 비롯한 8개 부문에 노미네이션되었다. (그러나, 전부문 수상탈락!) 의 성공으로 '데이비드 린치'는 디노 디 로랜티스 제작의 70미리 대작 SF 영화 만들게 되었다. 그는 내러티브의 요구에 부응하지 않고 자신의 꿈대로 이미지로 일관하는 비주얼 스타일에 치중하여 찍어냄으로써 다시 원래의 스타일로 복귀한다.
하지만 고통스럽고 기나긴 촬영으로 얻어진 SF '대서사시' 개봉도 되기 전에 제작자에 의해 50분 남짓 절단당하고, 흥행에서 완전히 참패한다. 낙담한 '데이빗 린치'는 잘라진 50분가량의 필름을 이어붙여 TV용으로 재편집하여 크레딧에 그 유명한 '알란 스미스' 이름을 집어넣는다. 그 과정 속에서 절망을 극복한 (감독판 는 그의 최고 걸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데이비드 린치' 을 통해 그의 그로테스크한 악취미를 교묘히 영화 속에 숨겨놓는 방법을 터득함으로써 의 진부함으로 추락하지 않으면서도 보수적인 아카데미 회원들로부터 환영받는다.
은 1980년대 컬트영화의 신전에 올랐으며, '아카데미 작품상'을 비롯하여 여러 부문에서 노미네이션 되었으며, 흥행에서도 성공하였다. 이 영화로 '데니스 호퍼'는 새로운 아이콘이 되었다. 4년간의 침묵 뒤에 만든 '깐느영화제'에서 이례적으로 '황금종려상'을 받았으며, 그의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알렸다. '데이비드 린치'는 'ABC방송국'의 제안으로 30부작 를 총지휘하여 그 해의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그는 끝까지 사건의 결말을 알려주지 않으면서, 1992년 엉뚱하게도 드라마의 시작에서 일년 전으로 되돌아간 이야기에 관한 극장판 영화 를 내놓았다. 의 음악을 맡았던 '안젤로 바달라멘티'와 를 작곡하여 MTV로 찍어 뉴욕에서 상영하기도 하였다. 그 후 1990년대에 다시 침묵하다가 불현듯 를 만들어서 그의 21세기 컬트 비전을 제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