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ind, 2007

신정수2008.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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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의 취지와는 너무도 맞지 않아서 캐 당황스러웠지만

영화 블라인드는 꽤 좋았다.

사실 난 아름답게 잘 포장되어 있다면 낭만의 과잉도 싫지 않은 것 같아. 이터널 선샤인과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 이어 내 사랑 멜로영화 넘버3 등극이다ㅠ_ㅠ

희곡론에서 배운 '멜로드라마'의 구성이 어떻고 저떻고, 서구의 목가시적 정서가 어떻고 저떻고 먹물깔린 소리를 실컷 퍼부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감정의 폭발로 영화를 봤으니 감정의 폭발로 리뷰를 쓸테다.

 

겨울은 낭만적인 계절이다.

어느 계절이나 운치가 있지마는, 겨울은 유독 낭만적인 계절이다.

그 순백의 투명한 색감이 그러하고 차가운 세상에 그대와 나는 따뜻한 체온으로 존재할 수 있어서 그러하다.

 

'블라인드'는 안데르센 원작의 동화 '눈의 여왕'을 모티브로 하여 거의 벗어남 없이 '눈의 여왕'의 플롯을 따라간다.

성장함에 따라 점차 시력을 잃고 촉각으로 세상을 느끼는 괴팍한 소년 루벤과 학대받은 유년시절의 기억으로 자기혐오에 가득 차서 얼굴에 흉터자국이 가득한 마리.

루벤은 자신은 가지지 못한 '시각'을 통해 타인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싫어하고 마리는 못난(못났다고 믿는) 스스로의 모습을 보는 것을 거부한다. 그들은 커튼을 치고, 거울을 가리고, 문을 닫으며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완벽히 환상적인 공간속으로 도피한다.

눈으로 뒤덮힌 허허벌판속에 외롭게 서있는 고택_ 이보다도 더 환상적인 공간이 있을까.

'눈의 여왕'의 이야기가 오버랩되어 진행되는 동안 소년과 소녀는 서로에 대한 적개심을 서서히 무너뜨려가며 이미 정해진 순리대로 사랑에 빠진다.

창백한 블루톤의 저택은 약간의 그로테스크함 마저 느껴지는 적막이 감돌고, 우윳빛 하늘과 눈덮인 숲을 지나 희고 긴 두건을 쓴 마리의 머리칼은 이 세상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흰빛의 금발이다. 꽁꽁 얼은 호수에서 가만 가만 얼음을 쓰다듬는 손길은 이내 깊어지는 밤에선 서로의 따스한 육신을 더듬어 확인한다.

수술을 통해 시력을 찾을 수 있게 될 루벤이 아름답지 않은 자신을 받아드릴 수 없을 거라고 절망한 마리는 루벤과 이별하고 떠날 것을 결심한다.

반투명한 쉬폰 커텐 너머로의 키스는 아찔할 정도로 애잔한데, 영상이라는 시각의 예술에 그토록 절절한 촉각을 담아낼 수 있는 것일까. 나는 보고 있음에도 보고 있음을 망각하고 그들의 입맞춤을 내것인양 느낀다. 손에 닿은 눈꽃이 녹아지듯이 어느샌가 마리는 사라져버리고 텅빈 저택의 소년은 눈보다도 하얗다.

거울앞에선 루벤이 면도를 하는데 익숙치 않은 시력은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다. 두건을 둘둘 감아서 눈을 가린 루벤이 면도를 하다가 문뜩 떠오른 것은 마리의 감촉_ 나의 얼굴에 와 닿던 그 섬세한 손가락이 따뜻해서 고통스럽다.

봄이 오고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었다가 다시 겨울이 돌아온다. 도서관에서 필연적인 재회를 갖은 두사람이지만 루벤은 마리를 알아보지 못한다. 가까스로 쥐어짠 용기는 순식간에 바닥나고 마리는 루벤의 곁을 스쳐지나가려 하지만 여기서 루벤이 마리를 영영 못 알아보면 멜로 드라마가 아니지. 눈을 뜨게 된 루벤에게 자신은 충분히 아름다울 수 없다며 마리는 다시 떠나버리지만 영화는 낭만적 달콤함을 놓지 않고 극한까지 끌어당긴다.


 

이 얼마나 달달한 영화야.

너무 달아서 혀가 얼얼할 지경이지만, 극중에서 '너는 얼어버린 꽃송이같아'라는 대사가 나온다. 나는 그 말을 이 영화에 그대로 돌려주고 싶다. 뭐가 어떻든, 차디찬 장미처럼 아름답다고.

 

아, 달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