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간은 어느 누구의 사정도 봐주지 않는다. 나이를 한살 더 먹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전사로서 내 미래에 대해 깊이 성찰한다. 그러나 당장은 "타협하지 않겠다"라고 결심한다. (1967)
2. 수단이 비열하다면 결코 목적은 정당화 될 수 없다 (농림부 장관 재직시절)
3. 우리 시대가 당면한 문제는, 기층민중을 헐벗게 만드는 자본주의와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할지 몰라도 자유를 억압하는 공산주의 중에서 택일해댜 한다는 점이다. (1959년 초)
자본주의는 인간을 제물로 삼는다.
한편 공산국가는 자율에 관한 한 전체적인 개념 때문에 인간의 권리를 희생시킨다.
우리가 그 어느 것도 일률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의 혁명은 쿠바만의 주체적인 혁명이어야 한다
4. 이 곳은 전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격전지다. 나는 우리가 콩고에서 제국주의자들에게 일격을 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레방아를 향해 질주하는 돈키호테처럼 나는 녹슬지 않는 창을 가슴에 지닌 채, 자유를 얻는 그날까지 앞으로만 앞으로만 달려갈 것이다.” (콩고로 떠나기 전)
5.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인민들의 단 하나의 해결책은 무장투쟁이라고 굳게 믿고 이 신념에 따라 행동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모험주의자라고 손가락질하지만, 저는 단지 제가 옳다고 믿는 것을 온몸으로 표시하기에 주저하지 않는 한 인간이라는 점에서 모험주의자라는 공격을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편지 중에서)
7. 나는 결코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유 의지에 따른 신념의 소산이었다. 나는 68년 혁명을 함께 한 내 또래를 ‘메시아를 기대한 마지막 세대’로 본다.
6. 당신과 우리 민중에게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것은 불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에게 바라는 것을 말로써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피델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7. 우리는 이론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오직 행동이다 (인터뷰 중에서)
10. 무릎을 꿇느니 서서 죽는 것을 택하겠다. (인터뷰 중에서)
11. 피델에게는 아메리카에서 영광스러운 혁명 성공의 그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전해주게. 내 아내에게는 재혼해서 행복하게 살라고 전해주게나 -체가 죽기직전에 남긴 말 즉 유언.-
쿠바 혁명(1956~59)에서 이름을 날린 공산주의자로 후에 남아메리카의 게릴라 지도자가 되었다.
좌익 성향이 있는 스페인-아일랜드 혈통의 중류 가정에서 5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천식을 앓았으나 운동선수와 학자로서의 재능이 뛰어났으며 1953년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여가가 생기면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서민들의 가난한 생활을 몸소 체험했으며, 빈곤에 대한 해결책은 폭력혁명밖에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라틴아메리카를 각각 독립된 여러 국가의 집합체로 보지 않고 하나의 문화적·경제적 실체로 보았다. 또한 라틴아메리카 해방을 위해 전대륙적 전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953년 그는 과테말라로 갔다. 그곳에는 하코보 아르벤스가 진보적인 정권을 이끌고 사회주의 혁명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때 게바라에게 '체'라는 별칭이 붙었는데 그것은 아르헨티나인들이 말할 때 흔히 붙이는 감탄사의 하나임). 1954년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후원한 쿠데타로 아르벤스 정권이 무너지자 그는 미국이 진보적인 좌익정부에 반대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확신이 전세계적인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를 건설하려는 그의 계획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는 과테말라를 떠나 멕시코로 갔고, 그곳에서 쿠바인인 카스트로 형제(피델·라울)를 만났다. 카스트로 형제는 그때 정치적 망명생활을 하며 쿠바의 풀겐시오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전복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카스트로의 군대에 합류해 1956년 11월말에 쿠바의 오리엔테 주(州)에 상륙했다. 그 군대는 상륙 즉시 바티스타 정부군에게 발각되어 거의 전멸했다. 그러나 부상당한 그를 포함한 몇몇 생존자들은 마에스트라 산맥에 이르렀는데, 그후 그곳이 게릴라군의 중심지가 되었다. 반란군은 바티스타 정부군으로부터 무기를 빼앗고, 주민들의 지지 속에 신병을 모집해 차츰 세력을 키워나갔다. 그는 카스트로가 가장 신임하는 보좌관이 되었고 바티스타 정권을 전복하는 싸움에 2년이나 참여했는데, 〈쿠바 혁명전쟁 회고록 Pasajes de la guerra revolucionaria〉(1963)
1959년 1월 2일, 승리한 카스트로 군대가 수도 아바나에 들어가 마르크스주의 정부를 세운 후, 쿠바 시민이 되었다. 그는 혁명군에 가담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정부에서도 유능한 인사였으며 쿠바를 대표하는 산업대표단을 이끌고 해외에도 나갔다. 또한 모든 종류의 제국주의, 식민지주의, 미국의 외교정책에 반대하는 인물로 서방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국가 농업개혁연구소의 산업부장, 쿠바 국립은행 총재, 공업장관을 역임했다.
1960년대 초반, 쿠바의 정책과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많은 연설과 저술을 했는데, 그때의 저술 가운데 특히 유명한 것이 쿠바식의 공산주의를 논한 〈 El socialismo yel hombre en Cuba〉(1965) 〈게릴라전 La guerra de guerrillas〉(1960)이다. 1965년 4월 이후 공적인 생활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그후 2년간 그의 활동과 거처는 비밀에 붙여졌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다른 쿠바의 전사들과 함께 콩고로 가서 내전에 참전하고 있는 파트리스 루뭄바 부대의 조직을 도왔다고 한다.
1966년 가을, 볼리비아로 잠입해 산타크루스 지역에서 게릴라 부대를 조직·통솔했다. 1967년 10월 8일 이 부대는 볼리비아 육군 특별파견대에 의하여 전멸되었고, 그는 부상을 입고 사로잡힌 후에 총살당했다.
Ernesto Guevara de la Serna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1. 시간은 어느 누구의 사정도 봐주지 않는다.
나이를 한살 더 먹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전사로서
내 미래에 대해 깊이 성찰한다.
그러나 당장은 "타협하지 않겠다"라고 결심한다.
(1967)
2. 수단이 비열하다면 결코 목적은 정당화 될 수 없다
(농림부 장관 재직시절)
3. 우리 시대가 당면한 문제는,
기층민중을 헐벗게 만드는 자본주의와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할지 몰라도
자유를 억압하는 공산주의 중에서 택일해댜 한다는 점이다.
(1959년 초)
자본주의는 인간을 제물로 삼는다.
한편 공산국가는 자율에 관한 한 전체적인 개념 때문에
인간의 권리를 희생시킨다.
우리가 그 어느 것도 일률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의 혁명은 쿠바만의 주체적인 혁명이어야 한다
4. 이 곳은 전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격전지다.
나는 우리가 콩고에서 제국주의자들에게 일격을 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레방아를 향해 질주하는 돈키호테처럼
나는 녹슬지 않는 창을 가슴에 지닌 채,
자유를 얻는 그날까지 앞으로만 앞으로만 달려갈 것이다.”
(콩고로 떠나기 전)
5.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인민들의 단 하나의 해결책은 무장투쟁이라고
굳게 믿고 이 신념에 따라 행동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모험주의자라고 손가락질하지만,
저는 단지 제가 옳다고 믿는 것을 온몸으로 표시하기에 주저하지 않는
한 인간이라는 점에서 모험주의자라는 공격을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편지 중에서)
7. 나는 결코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유 의지에 따른 신념의 소산이었다.
나는 68년 혁명을 함께 한 내 또래를
‘메시아를 기대한 마지막 세대’로 본다.
6. 당신과 우리 민중에게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것은 불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에게 바라는 것을 말로써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피델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7. 우리는 이론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오직 행동이다
(인터뷰 중에서)
10. 무릎을 꿇느니 서서 죽는 것을 택하겠다.
(인터뷰 중에서)
11. 피델에게는 아메리카에서 영광스러운 혁명 성공의 그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전해주게.
내 아내에게는 재혼해서 행복하게 살라고 전해주게나
-체가 죽기직전에 남긴 말 즉 유언.-
쿠바 혁명(1956~59)에서 이름을 날린 공산주의자로 후에
남아메리카의 게릴라 지도자가 되었다.
좌익 성향이 있는 스페인-아일랜드 혈통의 중류 가정에서
5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천식을 앓았으나
운동선수와 학자로서의 재능이 뛰어났으며
1953년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여가가 생기면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서민들의 가난한 생활을 몸소 체험했으며,
빈곤에 대한 해결책은 폭력혁명밖에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라틴아메리카를 각각 독립된 여러 국가의 집합체로 보지 않고
하나의 문화적·경제적 실체로 보았다.
또한 라틴아메리카 해방을 위해 전대륙적 전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953년 그는 과테말라로 갔다.
그곳에는 하코보 아르벤스가 진보적인 정권을 이끌고
사회주의 혁명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때 게바라에게 '체'라는 별칭이 붙었는데
그것은 아르헨티나인들이 말할 때 흔히 붙이는 감탄사의 하나임). 1954년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후원한 쿠데타로
아르벤스 정권이 무너지자 그는 미국이 진보적인 좌익정부에
반대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확신이 전세계적인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를 건설하려는 그의 계획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는 과테말라를 떠나 멕시코로 갔고,
그곳에서 쿠바인인 카스트로 형제(피델·라울)를 만났다.
카스트로 형제는 그때 정치적 망명생활을 하며
쿠바의 풀겐시오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전복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카스트로의 군대에 합류해 1956년 11월말에
쿠바의 오리엔테 주(州)에 상륙했다.
그 군대는 상륙 즉시 바티스타 정부군에게 발각되어 거의 전멸했다. 그러나 부상당한 그를 포함한 몇몇 생존자들은 마에스트라 산맥에 이르렀는데, 그후 그곳이 게릴라군의 중심지가 되었다.
반란군은 바티스타 정부군으로부터 무기를 빼앗고,
주민들의 지지 속에 신병을 모집해 차츰 세력을 키워나갔다.
그는 카스트로가 가장 신임하는 보좌관이 되었고 바티스타 정권을 전복하는 싸움에 2년이나 참여했는데,
〈쿠바 혁명전쟁 회고록 Pasajes de la guerra revolucionaria〉(1963)
1959년 1월 2일, 승리한 카스트로 군대가 수도 아바나에
들어가 마르크스주의 정부를 세운 후, 쿠바 시민이 되었다.
그는 혁명군에 가담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정부에서도
유능한 인사였으며 쿠바를 대표하는 산업대표단을 이끌고
해외에도 나갔다. 또한 모든 종류의 제국주의, 식민지주의,
미국의 외교정책에 반대하는 인물로 서방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국가 농업개혁연구소의 산업부장, 쿠바 국립은행 총재,
공업장관을 역임했다.
1960년대 초반, 쿠바의 정책과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많은 연설과 저술을 했는데, 그때의 저술 가운데 특히 유명한 것이
쿠바식의 공산주의를 논한
〈 El socialismo yel hombre en Cuba〉(1965)
〈게릴라전 La guerra de guerrillas〉(1960)이다.
1965년 4월 이후 공적인 생활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그후 2년간 그의 활동과 거처는 비밀에 붙여졌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다른 쿠바의 전사들과 함께
콩고로 가서 내전에 참전하고 있는 파트리스
루뭄바 부대의 조직을 도왔다고 한다.
1966년 가을, 볼리비아로 잠입해 산타크루스 지역에서
게릴라 부대를 조직·통솔했다.
1967년 10월 8일 이 부대는 볼리비아 육군 특별파견대에 의하여
전멸되었고, 그는 부상을 입고 사로잡힌 후에 총살당했다.
체게바라의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 아들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진실에 대한 광적인 애정"
체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
뜨거운 동지애로 묶인 이 둘의 운명.
39세의 나이로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체 게바라.
독재정권을 타도하면서
1959년 총리에 취임하고 . 공산주의 이념 아래
49년간 쿠바의 독재자로 군림한 피델카스트로 .
.어떤 삶이 훨씬 행복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