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1시 영화부터 오후 9시 영화까지 무려 10시간 동안 쉼 없이 영화를 보려니 뒷목이 땡기고 허리가 아팠다. 그래도 어쩌랴, 아시아 단편경선은 모두 보아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고 수요일의 마지막 타임, 아시아 단편경선 3을 보기 위해 다시 아트레온 1관으로 들어갔다. 분명히 상영하고 싶은 영화를 건질 수 있을 거야, 분명히... 주문을 외우면서.
아시아 단편경선 3
친구니까 말할게 | Because You're My Friend
다이크 온 포커스
한국
2007
16'
DV
color
다큐멘터리
레즈비언 친구의 솔직한 심경고백
★★★
작년인가 만들어진 레즈비언 영상집단 다이포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레즈비언 감독 세 명이 커밍아웃을 할 만큼 절친한 친구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댄다.
친구로부터 처음 커밍아웃을 들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그리고 레즈비언의 친구로 지내면서 무엇이 달라졌는지, 주변의 호모포비아를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는지, 레즈비언의 친구로서 레즈비언 인권문제에 더 적극적으로 나설 생각은 없는지... 어쩌면 미리 생각하고 정리하지 않은 채로는 대답하기 힘든 질문을 쏟아놓는 감독들, 그리고 그 질문에 때로는 웃음으로 때로는 불편함으로 대답하는 친구들.
비록 카메라는 감독의 친구들을 향해 있고 친구들의 인터뷰 내용으로 영화는 채워지지만, 정작 이 다큐멘터리는 인터뷰에 응한 친구들에게 하고 싶었던, 그러나 지금까지 여러가지 이유로 하지 못했던 감독, 즉 레즈비언들의 솔직한 심경을 고백하고 있다.
레즈비언 친구가 커밍아웃했을 때 전혀 낯설지도 꺼림칙하지도 않았다던 친구들이 레즈비언 즉 동성애자를 일컬어 습관적으로 무심결에 '그런 사람들'이라고 지칭할 때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동성애자"라고 교정해 주고, 레즈비언 친구의 성정체성을 인정하고 레즈비언의 인권이 옹호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면 퀴어퍼레이드에 함께 가자고 부추긴다.
카메라 앞에서는 대다수의 친구들이 퀴어퍼레이드에 참여하겠다고 답했지만, 정작 퍼레이드 당일 그 자리에 온 친구는 한 사람뿐이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레즈비언 감독들은 지금까지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어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친구와의 관계에서 솔직한 심경을 털어놓았을 경우, 그나마 자신을 이해해주던 친구가 등을 돌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런 점에서 이 다큐는 영화 자체에 대한 평가를 넘어서 감독들의 용기에 우선 박수를 보내고 싶은 작품이다. 물론, 이 다큐 이후 레즈비언 감독들과 인터뷰에 응했던 친구들의 관계가 어찌되었을까 걱정은 되지만서도.
인어를 찾아서 | Search for Mermaid in Desert
리 구앙
중국
2007
11'
Digi-beta
color/b&w
드라마
살해된 여아, 판타지로 울다
★★
1982년 중국공산당이 강력한 법 집행으로 산아제한 정책을 펴면서, 가부장적 질서와 남아선호사상이 굳건하던 중국 전역에는 살해된 여아들의 시체가 떠올랐다.
당시 살해된 소녀 '요'의 이야기로부터 이 영화는 시작된다. 자신을 죽일 듯 달려드는 부모 때문에 두려움에 떨던 소녀는 결국 강 위의 시체로 떠오르고 소녀가 실종된 지 7개월 만에 소녀의 집에는 아들이 태어난다. 아이는 자라서 소년이 되었어야 마땅하지만 자신이 되고 싶은 모습으로 세상에 나온다. 자신이 소녀라 믿었던 모양이다. 빨간 스웨터, 초록 원피스를 입은 긴 머리의 소녀. 아마도 죽은 누나 '요'의 억울한 혼령이 소년과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바로 그 소년인지 소녀인지 모를, 혹은 소년이기도 하고 소녀이기도 한 그 아이가 끝도 없이 걸어가는 여정을 따라가는 나름 로드무비. 소녀는 사막으로 가는 길이다. 사막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만난 꼬마는 아무래도 죽은 누이 '요'임이 분명해 보이고, 소녀가 걸어가는 길은 실제인지 환상인지 모를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이상한 기류에 휩싸여 있다.
영화가 끝난 뒤 감독과의 대화 시간에 리 구앙 감독은 사막같은 현실에서 희망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리고 싶었다고 제작의도를 밝혔다. 그래서 제목이 라고.
그러나 많은 설명이 생략되고 몽환적인 분위기만이 영화 전체를 압도하고 있어서, 감독의 그 의도가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되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역시나 감독과의 대화 시간에 관객 중 한명이 그 질문을 했고, 관객들은 이 영화가 이렇게 불친절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유는 '돈이 없어서'. 그러니까 이 영화는 원래 장편영화로 기획되었고 촬영이 시작됐지만, 중간에 자금이 없어서 촬영을 중단해야 했다는 것이다. 원래 장편이 의도치 않게 단편으로 압축되면서 이렇게 불편한 영화가 탄생하게 되었던 것. 이 어찌 슬프지 않다 하리요. ㅠㅠ
단편 에게는 별 두개밖에 줄 수 없지만, 만약 감독이 다시 장편 촬영을 재개해서 영화를 완성한다면, 꽤 그럴 듯한 작품이 나올 것 같다는 기대와 안타까움을 가지게 했던 작품.
11 | 11
정주리
한국
2008
25'
Digi-beta
color
스릴러
살인, 그리고 진심
★★★★★
그렇다 할 사건사고 없는 무료한 시골 파출소(아직 지구대보다는 파출소가 입에 익어서 말이지) 소장 고유진. 그녀는 경찰이라는 직함이 그닥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선한 눈매와 여린 심성을 지녔다.
평범한 일상을 지내던 그녀가 순찰을 돌다 만난 오명숙. 핏자국이 어려있는 스커트, 창백한 얼굴, 경찰 일행을 보자마자 혼절해 버리는 시츄에이션까지, 뭔가 무난했던 유경의 일상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킬 것이 분명해 보인다.
자기 앞에서 혼절한 여자, 병약해 보이는 여자에 대한 연민으로 유경은 소장 방에 명숙을 뉘이고, 깨어난 명숙의 쓸쓸한 모습에 연민은 더욱 커진다. 명숙의 어린시절 어머니로부터 받은 상처를 들으며 그녀에 대한 유경의 연민이 극대화될 때즈음, 파출소로 날아온 팩스 한 장. 살인용의자 오명숙이 그쪽으로 도주했다는 제보와 오명숙의 사진이다. 아, 그 오명숙이 바로 그 오명숙이다.
아무리 살인용의자라지만 명숙에 대한 연민이 가시지 않은 유경은 명숙을 도우려 애쓰지만 유경이 애를 쓰면 애를 쓸수록, 명숙의 살인사건은 더욱 명백해진다. 살인이 그냥 살인이 아니라 존속살인, 즉 어머니를 죽인 살인이다. 그냥 죽인 것도 아니고 칼로 십수차례 찔러죽인 잔악무도한 살인이다.
평범한 인간에게 들이닥친 커다란 사건을 그려보고 싶었다는 감독의 변대로, 이 영화는 한 여성에게 가졌던 유경의 연민과 동질감, 연대감이 진실이 하나하나 드러날수록 낭패감으로 변해가는 과정이 리듬감 있게 전개된다.
강화 지구대. 옛 이름 강화 파출소.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국가경찰제도의 최말단 조직인 이곳에서 두 명의 여성이 만난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자 부하직원들에게 은근히 멸시받는 여성 소장 고유진과 친모를 살해하고 고향의 바닷가를 헤매다 지구대에 발견된 오명숙. 그녀의 침묵과 더듬거림은 친모를 살해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처지를 고통스럽게 증언하지만 형식논리와 실적중심의 남성논리 속에서 그 몸짓은 외면당한다. 오직 두 여성만이 영혼의 상처를 나누는 대화를 시도할 뿐이다. (맹수진)
영화제 브로셔에 실린 이 영화에 대한 설명이다. 경찰이라는 남성사회에서 소외된 진심어린 대화를 보여주고 있다는 이 영화에 대한 영화제 측의 해석에 나 역시 일정 동의하며 영화를 보았다. 남자 경찰밖에 없는 파출소에서 남성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여성소장 고유진의 오롯한 존재는 무척이나 인상적이었고, 그에 반해 살인자 오명숙과 살인사건을 수사해야 하는 고유진의 소통은 무척이나 진실되게 그려졌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독과의 대화 시간에 정주리 감독은 그건 자신이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고 했다. 단지 평범한 일상에 일어난 뜻밖의 커다란 사건에 주목했을 뿐이라고, 그래서 오히려 영화제 측에 자신의 영화를 왜 이렇게 읽었는지 질문하고 싶었다고. 사실 이번 아시아 단편경선에서 최고로 웃긴 헤프닝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영화는 관객에게 상영되는 순간, 감독이 아닌 관객의 몫이 된다. 이 영화에 대한 감독의 의도가 어떻든 간에 관객이 그렇게 읽었다면 그런 영화인 것이지. ^^;;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이번 영화제에서 수상하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쉽다. 내가 가장 후한 점수를 줬던 영화였는데... 여우주연상이 있다면 고유진을 분한 최희진이 수상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경미 감독의 단편 에서도 매우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줘서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 영화에서 보니 무진장 반갑더라.) 흑... ㅠㅠ
김미자 헤어살롱 | Mi-ja's Beauty Parlor
이윤영
한국
2007
34'
DV
color
드라마
미자씨, 당신 덕에 행복해요
★★★★★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는 관객을 매우 행복하게 만드는 영화다. 행복할래야 행복할 일이 없어 뵈는 두 여자가 만나 추는 왈츠에 나도 모르게 어깨를 들썩이게 되는 그런 영화. 이번 영화제 관객상을 수상할 만하다.
서울에 근사한 미용실을 차렸다 말아먹고 사채업자에게 빚 대신 미용실 넘겨주고 시골의 허름한 미용실에 정착하게 된 삼십대 싱글 미자씨. 남편 죽고 시골에서 딸과 함께 살아가는 하지장애여성 은주씨. 돈도 없고 애인도 없고 자식도 없고 심지어 미용실 손님도 없는 지지리 궁상인 일상에 밤이면 홀로 담배를 피우며 눈물을 훔치는 미자씨이지만, 씩씩하고 싹싹한 미자씨는 세상을 향해 두터운 벽을 치고 우울하게 살고 있는 은주씨를 향해 손을 내민다. 지지리 궁상이던 두 여성이 손을 잡았을 때 내 마음엔 어느새 따스한 온기가 퍼진다.
왼쪽부터 의 정주리 감독, 의 세 감독 중 모기 감독, 의 리 구앙 감독. 감독과의 대화 시간에 질문이 집중되었던 것은 역시 관객에게 불친절했던 영화다. 리 구앙 감독은 꽤 많은 질문 세례를 받아야 했는데 돈이 없어서 장편에서 단편으로 압축할 수밖에 없었다는 상황 설명에 관객들 대략 끄덕끄덕. 감독보다는 배우처럼 생겼는데, 영화에 대한 열정과 풍부한 감성이 느껴져서 참 좋았다. 리 구앙 감독이 가장 인상깊게 본 작품이었다는 의 정주리 감독은 마치 영화 속 강화지구대의 고유경 소장처럼 순하디 순한 인상이다. 모기 감독은 저런 발언은 오히려 영화에 해가 되지 않을까 우려될 정도의 과감한 대답으로 듣는 사람 오금을 저리게 했다는. ㅋㅋ
친구니까 말할게 / 인어를 찾아서 / 11 / 김미자 헤어살롱
오후 1시 영화부터 오후 9시 영화까지 무려 10시간 동안 쉼 없이 영화를 보려니 뒷목이 땡기고 허리가 아팠다. 그래도 어쩌랴, 아시아 단편경선은 모두 보아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고 수요일의 마지막 타임, 아시아 단편경선 3을 보기 위해 다시 아트레온 1관으로 들어갔다. 분명히 상영하고 싶은 영화를 건질 수 있을 거야, 분명히... 주문을 외우면서.
아시아 단편경선 3
레즈비언 친구의 솔직한 심경고백
★★★
작년인가 만들어진 레즈비언 영상집단 다이포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레즈비언 감독 세 명이 커밍아웃을 할 만큼 절친한 친구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댄다.
친구로부터 처음 커밍아웃을 들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그리고 레즈비언의 친구로 지내면서 무엇이 달라졌는지, 주변의 호모포비아를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는지, 레즈비언의 친구로서 레즈비언 인권문제에 더 적극적으로 나설 생각은 없는지... 어쩌면 미리 생각하고 정리하지 않은 채로는 대답하기 힘든 질문을 쏟아놓는 감독들, 그리고 그 질문에 때로는 웃음으로 때로는 불편함으로 대답하는 친구들.
비록 카메라는 감독의 친구들을 향해 있고 친구들의 인터뷰 내용으로 영화는 채워지지만, 정작 이 다큐멘터리는 인터뷰에 응한 친구들에게 하고 싶었던, 그러나 지금까지 여러가지 이유로 하지 못했던 감독, 즉 레즈비언들의 솔직한 심경을 고백하고 있다.
레즈비언 친구가 커밍아웃했을 때 전혀 낯설지도 꺼림칙하지도 않았다던 친구들이 레즈비언 즉 동성애자를 일컬어 습관적으로 무심결에 '그런 사람들'이라고 지칭할 때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동성애자"라고 교정해 주고, 레즈비언 친구의 성정체성을 인정하고 레즈비언의 인권이 옹호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면 퀴어퍼레이드에 함께 가자고 부추긴다.
카메라 앞에서는 대다수의 친구들이 퀴어퍼레이드에 참여하겠다고 답했지만, 정작 퍼레이드 당일 그 자리에 온 친구는 한 사람뿐이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레즈비언 감독들은 지금까지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어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친구와의 관계에서 솔직한 심경을 털어놓았을 경우, 그나마 자신을 이해해주던 친구가 등을 돌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런 점에서 이 다큐는 영화 자체에 대한 평가를 넘어서 감독들의 용기에 우선 박수를 보내고 싶은 작품이다. 물론, 이 다큐 이후 레즈비언 감독들과 인터뷰에 응했던 친구들의 관계가 어찌되었을까 걱정은 되지만서도.
살해된 여아, 판타지로 울다
★★
1982년 중국공산당이 강력한 법 집행으로 산아제한 정책을 펴면서, 가부장적 질서와 남아선호사상이 굳건하던 중국 전역에는 살해된 여아들의 시체가 떠올랐다.
당시 살해된 소녀 '요'의 이야기로부터 이 영화는 시작된다. 자신을 죽일 듯 달려드는 부모 때문에 두려움에 떨던 소녀는 결국 강 위의 시체로 떠오르고 소녀가 실종된 지 7개월 만에 소녀의 집에는 아들이 태어난다. 아이는 자라서 소년이 되었어야 마땅하지만 자신이 되고 싶은 모습으로 세상에 나온다. 자신이 소녀라 믿었던 모양이다. 빨간 스웨터, 초록 원피스를 입은 긴 머리의 소녀. 아마도 죽은 누나 '요'의 억울한 혼령이 소년과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바로 그 소년인지 소녀인지 모를, 혹은 소년이기도 하고 소녀이기도 한 그 아이가 끝도 없이 걸어가는 여정을 따라가는 나름 로드무비. 소녀는 사막으로 가는 길이다. 사막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만난 꼬마는 아무래도 죽은 누이 '요'임이 분명해 보이고, 소녀가 걸어가는 길은 실제인지 환상인지 모를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이상한 기류에 휩싸여 있다.
영화가 끝난 뒤 감독과의 대화 시간에 리 구앙 감독은 사막같은 현실에서 희망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리고 싶었다고 제작의도를 밝혔다. 그래서 제목이 라고.
그러나 많은 설명이 생략되고 몽환적인 분위기만이 영화 전체를 압도하고 있어서, 감독의 그 의도가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되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역시나 감독과의 대화 시간에 관객 중 한명이 그 질문을 했고, 관객들은 이 영화가 이렇게 불친절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유는 '돈이 없어서'. 그러니까 이 영화는 원래 장편영화로 기획되었고 촬영이 시작됐지만, 중간에 자금이 없어서 촬영을 중단해야 했다는 것이다. 원래 장편이 의도치 않게 단편으로 압축되면서 이렇게 불편한 영화가 탄생하게 되었던 것. 이 어찌 슬프지 않다 하리요. ㅠㅠ
단편 에게는 별 두개밖에 줄 수 없지만, 만약 감독이 다시 장편 촬영을 재개해서 영화를 완성한다면, 꽤 그럴 듯한 작품이 나올 것 같다는 기대와 안타까움을 가지게 했던 작품.
살인, 그리고 진심
★★★★★
그렇다 할 사건사고 없는 무료한 시골 파출소(아직 지구대보다는 파출소가 입에 익어서 말이지) 소장 고유진. 그녀는 경찰이라는 직함이 그닥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선한 눈매와 여린 심성을 지녔다.
평범한 일상을 지내던 그녀가 순찰을 돌다 만난 오명숙. 핏자국이 어려있는 스커트, 창백한 얼굴, 경찰 일행을 보자마자 혼절해 버리는 시츄에이션까지, 뭔가 무난했던 유경의 일상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킬 것이 분명해 보인다.
자기 앞에서 혼절한 여자, 병약해 보이는 여자에 대한 연민으로 유경은 소장 방에 명숙을 뉘이고, 깨어난 명숙의 쓸쓸한 모습에 연민은 더욱 커진다. 명숙의 어린시절 어머니로부터 받은 상처를 들으며 그녀에 대한 유경의 연민이 극대화될 때즈음, 파출소로 날아온 팩스 한 장. 살인용의자 오명숙이 그쪽으로 도주했다는 제보와 오명숙의 사진이다. 아, 그 오명숙이 바로 그 오명숙이다.
아무리 살인용의자라지만 명숙에 대한 연민이 가시지 않은 유경은 명숙을 도우려 애쓰지만 유경이 애를 쓰면 애를 쓸수록, 명숙의 살인사건은 더욱 명백해진다. 살인이 그냥 살인이 아니라 존속살인, 즉 어머니를 죽인 살인이다. 그냥 죽인 것도 아니고 칼로 십수차례 찔러죽인 잔악무도한 살인이다.
평범한 인간에게 들이닥친 커다란 사건을 그려보고 싶었다는 감독의 변대로, 이 영화는 한 여성에게 가졌던 유경의 연민과 동질감, 연대감이 진실이 하나하나 드러날수록 낭패감으로 변해가는 과정이 리듬감 있게 전개된다.
강화 지구대. 옛 이름 강화 파출소.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국가경찰제도의 최말단 조직인 이곳에서 두 명의 여성이 만난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자 부하직원들에게 은근히 멸시받는 여성 소장 고유진과 친모를 살해하고 고향의 바닷가를 헤매다 지구대에 발견된 오명숙. 그녀의 침묵과 더듬거림은 친모를 살해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처지를 고통스럽게 증언하지만 형식논리와 실적중심의 남성논리 속에서 그 몸짓은 외면당한다. 오직 두 여성만이 영혼의 상처를 나누는 대화를 시도할 뿐이다. (맹수진)
영화제 브로셔에 실린 이 영화에 대한 설명이다. 경찰이라는 남성사회에서 소외된 진심어린 대화를 보여주고 있다는 이 영화에 대한 영화제 측의 해석에 나 역시 일정 동의하며 영화를 보았다. 남자 경찰밖에 없는 파출소에서 남성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여성소장 고유진의 오롯한 존재는 무척이나 인상적이었고, 그에 반해 살인자 오명숙과 살인사건을 수사해야 하는 고유진의 소통은 무척이나 진실되게 그려졌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독과의 대화 시간에 정주리 감독은 그건 자신이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고 했다. 단지 평범한 일상에 일어난 뜻밖의 커다란 사건에 주목했을 뿐이라고, 그래서 오히려 영화제 측에 자신의 영화를 왜 이렇게 읽었는지 질문하고 싶었다고. 사실 이번 아시아 단편경선에서 최고로 웃긴 헤프닝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영화는 관객에게 상영되는 순간, 감독이 아닌 관객의 몫이 된다. 이 영화에 대한 감독의 의도가 어떻든 간에 관객이 그렇게 읽었다면 그런 영화인 것이지. ^^;;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이번 영화제에서 수상하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쉽다. 내가 가장 후한 점수를 줬던 영화였는데... 여우주연상이 있다면 고유진을 분한 최희진이 수상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경미 감독의 단편 에서도 매우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줘서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 영화에서 보니 무진장 반갑더라.) 흑... ㅠㅠ
미자씨, 당신 덕에 행복해요
★★★★★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는 관객을 매우 행복하게 만드는 영화다. 행복할래야 행복할 일이 없어 뵈는 두 여자가 만나 추는 왈츠에 나도 모르게 어깨를 들썩이게 되는 그런 영화. 이번 영화제 관객상을 수상할 만하다.
서울에 근사한 미용실을 차렸다 말아먹고 사채업자에게 빚 대신 미용실 넘겨주고 시골의 허름한 미용실에 정착하게 된 삼십대 싱글 미자씨. 남편 죽고 시골에서 딸과 함께 살아가는 하지장애여성 은주씨. 돈도 없고 애인도 없고 자식도 없고 심지어 미용실 손님도 없는 지지리 궁상인 일상에 밤이면 홀로 담배를 피우며 눈물을 훔치는 미자씨이지만, 씩씩하고 싹싹한 미자씨는 세상을 향해 두터운 벽을 치고 우울하게 살고 있는 은주씨를 향해 손을 내민다. 지지리 궁상이던 두 여성이 손을 잡았을 때 내 마음엔 어느새 따스한 온기가 퍼진다.
왼쪽부터 의 정주리 감독, 의 세 감독 중 모기 감독, 의 리 구앙 감독. 감독과의 대화 시간에 질문이 집중되었던 것은 역시 관객에게 불친절했던 영화다. 리 구앙 감독은 꽤 많은 질문 세례를 받아야 했는데 돈이 없어서 장편에서 단편으로 압축할 수밖에 없었다는 상황 설명에 관객들 대략 끄덕끄덕. 감독보다는 배우처럼 생겼는데, 영화에 대한 열정과 풍부한 감성이 느껴져서 참 좋았다. 리 구앙 감독이 가장 인상깊게 본 작품이었다는 의 정주리 감독은 마치 영화 속 강화지구대의 고유경 소장처럼 순하디 순한 인상이다. 모기 감독은 저런 발언은 오히려 영화에 해가 되지 않을까 우려될 정도의 과감한 대답으로 듣는 사람 오금을 저리게 했다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