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선 - 동네에 단골 술집이 생긴다는 것은 일상생활에는 재앙일지 몰라도 기억에 대해서는 한없는 충복이다. 빈대떡에 막걸리, 찌개에 소주, 몇 가지 나물들과 김치를 늘어놓고 혼자 술을 마시면서 하는 생각이란, 맞아 그때 그런 얘길 했었지라든가 왜 그랬을까 그녀는, 하는 식의 소소한 과거사이다. 이 집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나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라든가 당장 해결해야 할 시급한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곳은 내게 오로지 기억, 기억, 그렇게 속삭이는 장소가 되었다. 현실의 시간은 밤이지만 이곳에서 나는 기억의 한낮을 산다. 기억이란 오지 않는 상대를 기다리는 방식이며 포즈이기도 하다는 걸 나는 이곳에서 배운다. - 동네에 단골 술집이 생겼다는 건 기억에 대해서는 한없는 축복이지만 청춘에 대해서는 만종과 같다. 사랑을 믿던 한 시기가 끝났으며, 뒤를 돌아보아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지금 서른다섯이라는 인생의 한낮을 지나고 있다. 내 생애의 조도는 여기가 최대치다. 이보다 더 밝은 날은 내게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내 인생이 연령의 절반을 꼭짓점으로 하여 직각으로 꺾이는 형태라면, 그녀의 인생은 앞쪽이 다소 높은 산의 능선처럼 삼분의 일 지점에서 봉우리를 이룬 후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형태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개인적인 멜로디가 있다. 이십대 후반 무렵 나만큼이나 겁이 많고 감정에 인색했던 그녀가 내게 보내온 노래는 매우 낮은 음역의, 들릴 듯 말 듯한 작고 희미한 멜로디였으리라. 나는 그것을 나와 무관한, 그녀의 희한한 개성으로 간주했다. 스물아홉의 봉우리에서 그녀는 너무 일찍 철들었고 다가올 어둠에 너무 일찍 눈이 익어버렸다. 삼 년 전 그녀는 이미 오후를 사는 사람의 나른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지금의 내 대낮같은 기다림을 알아보지 못한다. 괜찮지? 괜찮아. 그러면서 나는 정말 괜찮아졌다. 이제 모든 것은 소소한 과거사가 되었다. 나는 기차간 모양의 술집 분위기를 내는 이 단골 술집에 혼자 앉아, 맞아 그때 그런 얘길 했었지라든가 왜 그랬을까 그녀는, 하고 생각한다. ---------------------------- 다가올 어둠을 알고 있었던 철든 그가, 완만한 하강을 하고 있을 때, 철없는 나는, 여전히 수직상승 중이었다. 그는, 기억의 한낮을 찾고 싶은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나는, 그에게 있어 현실의 시간이란 언제나 밤이라는 것을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겹칠 수 없는 구조와, 좁힐 수 없는 시차. 이제는 안다, 어째서 엇갈려야만 했는지를. "사랑을 잃는 것이 모든 것을 잃는 것은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안다. 괜찮지? 괜찮아. 그러면서 나는 정말 괜찮아졌다. 이 단골 술집에 혼자 앉아, 맞아 그때 그런 얘길 했었지라든가 왜 그랬을까 그녀는, 하고 생각한다. 그녀의 이름, 그녀가 했던 얘기들, 그녀의 피식 웃던 표정. 그녀의 단정한 인중선과 윗입술을 떠올린다. 그녀는 오지 않고, 나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어른이 되고, 현실의 밤을 맞이한다. "내 생애의 조도는 여기가 최대치다. 이보다 더 밝은 날은 내게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어른이 될 것이다. 이제 곧. 2
사랑을 믿다
권여선
- 동네에 단골 술집이 생긴다는 것은
일상생활에는 재앙일지 몰라도
기억에 대해서는 한없는 충복이다.
빈대떡에 막걸리,
찌개에 소주,
몇 가지 나물들과 김치를 늘어놓고
혼자 술을 마시면서 하는 생각이란,
맞아 그때 그런 얘길 했었지라든가
왜 그랬을까 그녀는, 하는 식의
소소한 과거사이다.
이 집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나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라든가
당장 해결해야 할 시급한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곳은 내게 오로지 기억, 기억,
그렇게 속삭이는 장소가 되었다.
현실의 시간은 밤이지만
이곳에서 나는 기억의 한낮을 산다.
기억이란 오지 않는 상대를 기다리는 방식이며
포즈이기도 하다는 걸
나는 이곳에서 배운다.
- 동네에 단골 술집이 생겼다는 건
기억에 대해서는 한없는 축복이지만
청춘에 대해서는 만종과 같다.
사랑을 믿던 한 시기가 끝났으며,
뒤를 돌아보아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지금 서른다섯이라는 인생의 한낮을 지나고 있다.
내 생애의 조도는 여기가 최대치다.
이보다 더 밝은 날은
내게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내 인생이 연령의 절반을 꼭짓점으로 하여
직각으로 꺾이는 형태라면,
그녀의 인생은 앞쪽이 다소 높은 산의 능선처럼
삼분의 일 지점에서 봉우리를 이룬 후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형태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개인적인 멜로디가 있다.
이십대 후반 무렵 나만큼이나 겁이 많고
감정에 인색했던 그녀가 내게 보내온 노래는
매우 낮은 음역의,
들릴 듯 말 듯한 작고 희미한 멜로디였으리라.
나는 그것을 나와 무관한,
그녀의 희한한 개성으로 간주했다.
스물아홉의 봉우리에서
그녀는 너무 일찍 철들었고
다가올 어둠에 너무 일찍 눈이 익어버렸다.
삼 년 전 그녀는
이미 오후를 사는 사람의 나른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지금의 내 대낮같은 기다림을 알아보지 못한다.
괜찮지? 괜찮아.
그러면서 나는 정말 괜찮아졌다.
이제 모든 것은 소소한 과거사가 되었다.
나는 기차간 모양의 술집 분위기를 내는
이 단골 술집에 혼자 앉아,
맞아 그때 그런 얘길 했었지라든가
왜 그랬을까 그녀는, 하고 생각한다.
----------------------------
다가올 어둠을 알고 있었던 철든 그가,
완만한 하강을 하고 있을 때,
철없는 나는,
여전히 수직상승 중이었다.
그는,
기억의 한낮을 찾고 싶은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나는,
그에게 있어 현실의 시간이란 언제나 밤이라는 것을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겹칠 수 없는 구조와,
좁힐 수 없는 시차.
이제는 안다,
어째서 엇갈려야만 했는지를.
"사랑을 잃는 것이
모든 것을 잃는 것은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안다.
괜찮지? 괜찮아.
그러면서 나는 정말 괜찮아졌다.
이 단골 술집에 혼자 앉아,
맞아 그때 그런 얘길 했었지라든가
왜 그랬을까 그녀는, 하고 생각한다.
그녀의 이름,
그녀가 했던 얘기들,
그녀의 피식 웃던 표정.
그녀의 단정한 인중선과 윗입술을 떠올린다.
그녀는 오지 않고,
나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어른이 되고,
현실의 밤을 맞이한다.
"내 생애의 조도는 여기가 최대치다.
이보다 더 밝은 날은
내게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어른이 될 것이다. 이제 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