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이유 - 여러분은 꿈이 있습니까?

서민호2008.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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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이유 

 

Prudence

 

기본적인 욕구는 무조건 충족되어야 한다. '밥은 먹어야 한다.' 생존의 추구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좋다. 3일 이상 굶은 사람이 나를 찌르고 식비를 빼앗아 간다면, 나는 찌르는 행위를(그냥 때리지T^T) 슬퍼할 뿐 강도 행위를 규탄하지는 않을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좋다, 생존의 추구를 위해서만. 그것이 적정한 수단을 통한다면 더 좋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굶지 않는다. 그래서 많이 먹는다. 엄청나게 먹는다. 마음의 양식도 먹어야 하고, 문화의 양식도 먹어야 하고, 관계의 양식도 먹어야 하고, 사치의 양식도 먹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소화할 수 없는 과시욕의 충족이며 개인적 잉여의 과잉 축적이다.

   

노력의 결과에 따라 기본적인 욕구 충족의 수준을 넓힐 수 있다.

삶에 대한 아무 의욕도 없는 비렁뱅이와 피나는 노력으로 높은 지위와 경제력을 가진 부자가 동일한 수준의 소비 행위를 추구하도록 종용할 수는 없다. 욕구 충족의 권리에 있어서 무차별적 평균을 강조해서는 안 된다.

   

허나, 무엇을 위한 노력이었는가, 의문이 따른다.

 

그저 자신의 추가적 욕구 충족 수준을 넓히기 위한 의도였다면, 그 의도는 악한 것이다. 

 

세상의 자원이 모든 인류와 생명체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을 만큼 많은지 알 수는 없다. 다만 자원은 언제나 희소하다는 가정을 내려 보면, 어딘가 에서는 희소한 자원을 소비하지 못해 기본적인 욕구조차 충족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생명이 있을 것이다. 이들이 약육강식의 자연적 원칙에 따라 죽었다면, 나는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허나 이들 중에는 자연의 약육강식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강자의 배부름을 넘어선, ‘그 이상의 잉여’를 추구하기 위한 노력으로 인한 희소한 자원의 고갈로 고사했다면, 이는 전 세계인이 애도해야 할 자연법칙의 붕괴와 합리적 이성의 마비의 기록적인 사건으로 남아야 할 것이다 - 이러한 사건들이 하루 평균 6만여 건 일어나고 있다. 

 

따라서 단순히 자신의 욕구 충족 수준의 확장을 위해서만 이루어진 노력은 다른 이의 기본적 권리를 빼앗는 악한 것이다. 

 

그렇다면 개개인의 노력을 통한 발전은 무의미하고 부정되어야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다만 노력의 의도가 중요한 것이다. 개개인의 노력은 모든 인류와 생명체가 공존하는, - ‘잘 사는’ 수준의 형용사도 붙이기 어렵다 - 그저 살아남기만이라도 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되어야 한다. 진정 세계의 자원이 희소하다면,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고, 세계의 자원이 풍족함에도 위에서 언급한 규탄할 만한 사태가 일어난다면, 자원의 합리적인 배분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노력의 수단은 스스로의 자율성에 따라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을 기울이기 위해 필요한 자원으로서 추가적인 잉여를 쥐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다. 

 

비교적 발전된 사회에서, 추가적인 잉여를 얼마나 소비해야 하는지 가늠해 보자.

 

교육의 지적 자원을 생산해 내기 위한 교사는, 의식주의 해결 이외에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필요한 추가적 잉여를 가져야 한다. 교육에 필요한 도구, 추가적인 교사 재교육, 교육열의 보장을 위한 충분한 여가, 여가를 즐길 취미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 비용 등 금전적, 시간적 잉여를 보장받을 필요가 있다. 학생들에게 깨끗한 이미지를 심어주어 교육 효율을 높이기 위한 깔끔한 정장 대여섯 벌 정도는 추가적 잉여로 축적할 수 있다. 사치재라도 노력의 과정에 필요한 것이라면 추가적 잉여로서 인정해 줄 수 있다.(공산주의도 아니고, 흰 쌀 밥에 고깃국만 먹으면 끝나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현재 비교적 사회적 약자로 그려지는 계층인 임노동자의 예를 들어보자. 기본적인 의식주 이외에 힘을 많이 쓰는 직업임을 고려한 추가적 식비, 육체 휴식 시간, 여가, 여가를 즐길 비용 등을 얻을 수 있다.

국회의원이나 대통령과 같이 어려운 회의에 자주 참석하며 중요한 국사를 논의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동수단의 고도화(고급일 필요는 없다), 각종 자료의 분석 비용 등과, 격식을 갖춘 자리를 위한 양복 몇 벌 정도의 사치재를 추가적으로 소비할 잉여를 갖추어도 좋다.

사람들의 다양한 욕구 충족을 위해 다양한 재화를 공급하고, 기술 발전의 핵심을 이루는 기업가들 역시 그들의 노력을 위한 추가적 잉여를 가질 수 있다. 이렇게 추가적 잉여의 크기가 지위마다 다른 것은 절대 비난할 수 없다.

가정에서 기술한 것 외에도 지위마다 각기 다른 구체적 필요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이 각기 다른 잉여의 크기를 객관적으로 재고 그 종합적인 분배에 일괄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존재는 없으므로, 결국 스스로가 합리성을 통해 이러한 필요한 노력의 크기와 그 필요를 가늠하고, 절제 가능한 범위 내에서 자신의 추가적 잉여를 설정해야 한다.(만약 이 추가적 잉여의 크기를 나서서 재고 분배를 총괄하겠다고 어느 한 집단이라도 나서면 이는 공산주의 같은 실패의 전철을 밟는 일과 같으리라.)

 

민주주의적 사회, 자본주의적 경제 체제는 다양한 선택의 기회를 통해 다양한 직업을 얻고 스스로가 원하는 바대로 살아갈 수 있는 발전된 사회( 및 체제)이다. 그러나 여기에 인류의 모든 타인을 위하는 노력은 빠져 있다. 있을 지도 모르나, 개인의 욕구 충족보다는 덜떨어진 것으로, 때론 숭고하기는 하나 기피되는 것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이 노력은 타당한 것이고, 절대적인 것이다. 동물과 동일한 생리적 욕구를 채우고, 인간으로서 필요한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욕구를 채운 이후에, 합리적 공동 생존과 번영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심어져야 하는 가치이고, 기호에 따라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당연한 욕구 충족 이후의 잉여 가치를 재투자해서 사회 전체의 잉여를 증진시키고자 하는 합리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가치 추구 속에서, 여전히 사람들은 자신이 선호하는 취미를 갖고, 직업을 갖고, 여가를 활용하고 인생을 살아갈 수 있기에, 다원화된 사회를 거스르는 획일적이고 부정적인 가치로 폄하될 수 없다.

 

자신의 기본적 욕구가 충족된 후에도 합리적 공동 생존과 번영을 위해 노력하지 않을 의도로 경쟁에 뛰어들어 상대방을 물리치거나, 꼭 필요하지 않은 추가적 잉여를 소유한 자들은 자연에 살아가는 생물체로서의 당연한 법칙을 위배한 ‘괴물’이 아닐까.

 

자신의 세상이 끼니조차 때우기 어려운 공간이라면, 자신의 생존을 위해 권모술수를 쓰고 피 튀기는 경쟁에서 이겨라.

그러나 충분한 생존 가능성이 확보되고, 여유로운 문화적 잉여를 향유함에도 자신의 부를 더 남기려고 기를 쓰고 남의 피, 혹은 꼭 남에게 소유된 것이 아니더라도 세계 공동의 자원으로서의 잉여를 빨아먹는 자들은 지금 즉시 인류에 용서를 구하고 회개하여야 한다.

 

 

 

재산을 수십조 원씩 쌓아 놓고도 착취의 구조에 뛰어들어 경쟁하는 자들만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불필요한 과시욕과 소유욕으로 시대를 살며, 직업이 꿈이고 꿈이 직업이며, 지위와 부에 대한 의미 없는 욕심으로 점철된 마음을 안고 밤을 지새우며 공부하는 젊은이들이 우선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를 이야기 한 것이다.

 

 

성공으로 얻은 부와 권력에서 일회적인 만족을 얻고 나면, 또 무엇을 추구하겠는가?

 

 

 

 

 

“나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식욕과 허기를 달래기 간원하는 부교감계를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요, 탐욕의 침을 굴리고 아름다운 맛을 ‘한정 없이’ 갈망하는 미각을 부끄러워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