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을 열고 거실 쪽으로 나와 먼저 냉장고를 보던 중 어렴풋이 휴대전화의 작은 불빛 신호와 함께 약한 떨림이 나를 원망이나 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제 오후 생경한 한국어 표현으로 부천에 있는 S병원 수술실 밖에서, 맥 빠진 목소리로 ‘수술결과가 좋지 않아 내일이 고비다’라며 그쪽 분위기를 몽골인 ‘자야’씨가 하였던 말이 떠올랐다.
휴대전화를 열어보니 새벽 5시 15분에 이미 문자가 찍혀져 있었다. [애가 갔어요], 부재중 전화도 두 번이나 걸려와 있었다.
17세에 희귀병 ‘타카야수 혈관염’등을 앓고 있는 몽골소녀 ‘밤바’의 얘기다.
가장 참기 힘들었을 수술 시험대에 마지막이 될 줄도 모른 채 3시간의 긴박한 수술시간 동안 함께 해 주지 못했던 내가 빚쟁이처럼 부담이 밀려온다. 그 이유는 그들이 나를 한국에 있는 유일한 친척처럼 생각했고, 가장 힘들 때 그리고 중요한 일에 나와 상의했고 십년이상 믿는 마음으로 대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
병원으로 달려간 나는 담당 의사를 만났다. 대부분 종합병원의 3분도 되지 않는 짧은 검진 시간처럼, 명함을 건넨 나에게 자기는 “명함은 없다” 하였다. 심장 차트를 벽에 걸어 놓은 상태로 서둘러 ‘죽음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는 논리를 애써 나에게 주입시키려 했다. 그때의 나의 느낌은 사람을 살리는 인술보다도 사후 처리 방법이 훨씬 앞서 보였다. 한국주재 대사관에 사망사실을 알리고, 본국의 집안에 연락하여 자기네 풍습대로 발인과 화장일을 확정짓다보니 기다림의 ‘닷새 장례’가 되고 말았다.
벽제 화장장으로 가는 이른 아침, 서둘러 지하 영안실에 가보니 몽골에서 온 조카 그리고 한국에 와서 목수 일을 한다는 밤바양의 작은 아버지 내외가 영정 앞에 앉아 흐느끼고 있었다. 아버지 ‘푸제’는 옆방의 희미한 불빛 아래서 손으로 천천히 그리고 애절한 모습으로 딸에게 보내는 마지막 이승의 편지를 쓰고 있었다. 세 시간 후 그 편지를 출관예절하기 전 딸이 보이는 면전에서 읽기 시작했다. 살아생전 애뜻한 사랑의 추억을 눈물로 접어 두고, 고별식을 하기 시작했다.“너는 우리 가족에게 17년 동안 행복을 가져다주었다..”며 부모의 마지막 입맞춤이 이어졌다. 나머지 친지들 모두는 순서대로 경배를 끝으로 함께 그가 잠자고 있는 주위를 침묵 속에 세 바퀴를 돌아주고 성급히 이동채비를 했다.
그들의 풍습대로 물보다, 우유로 영구차 네 바퀴에 뿌렸다. 선두차량인 내차가 출발하고, 뒷좌석에서 아버지는 차창을 열어 놓은 상태로 쌀알을 몇개씩 집어 밖으로 날려 보내며 흐느끼고 있었다.
파란 견사 천으로 감싸인 영정사진을 화구 앞에 놓고 마지막 순서라 느낀 부모는 다른 집 상주들이 목 놓아 우는 모습에 어찌 할 바를 모르며 “낮선 타국에서 마음 놓고 울지도 못했다”며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의 웹사이트에는 영어와 러시아어로 그의 친구들과 만나 또래 또래의 즐거움과 만남이 이루어지기도 하였고, 부모 앞에서 자랑도 하며 즐거워했다.
3개월 전 신병치료차 한국에 왔으며 수술 얼마 전에는 아버지가 준 용돈을 모아서 오빠와 친구들에게 줄 선물을 준비 했단다. 완쾌 후 몽골 초원을 달리겠다며, 선물받은 성인용 새 자전거를 타보지도 못하고 떠나가 버렸다.
우리 친구일행이 작년‘나담축제’때 ‘울란바타르’에 갔을땐 통역안내자의 옆에 따라 다니며 고운 미소와 함께 그 사람이 미처 설명하지 못했다 싶으면 나에게 한국어나 영어로 보충 설명도 해주었다.
유골을 받아든 가족들은 치료하기 위하여 몇 개월 지내던 동대문 쪽에는 유골을 가져가지 않고 인천공항이 가까운 숙소에서 가족 친지와 마지막 밤을 지내야 한다며 부평에 잠자리를 구하게 되었다. 밤바의 영혼이 행여나 잠시 정든 서울의 동대문 쪽에 착각하여 안주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정처 없이 한국에서 떠돌지 않는다’는 것이다.
잠시의 인연은 이곳에 두고 고향의 하늘로 이어지는 천상낙원의 창으로 가기 위함이란다. 그래야, 세월이 흐른 후 부모와 친구와 다함께 만날 수 있다고 얘기한다.
영정 앞에 놓았던 그가 생전에 즐겨했던 몽골산 초콜릿 3개를 그의 어머니 ‘미가’씨가 내 검정양복 호주머니에 넣어준다.
며칠 후 그 초콜릿 중 하나를 손녀 손에 쥐어 주었더니 뜻 모르는 얼굴로 겉 종이를 펼치며 활짝 웃는다.
“밤바야 고통 없는 고향 하늘에서 잘 지내 거라!” 그리고 발 앞에서 초원 길끝 구름이 만나는 그곳 고향하늘을 날아라..그리고 친구들과 놀던 고향뜰에 내려앉아 쉬거라.
누가 돌보지 않아도 스스로 자라는 수많은 보랏빛 꽃 야생허브 뜰위 향가득한 그곳에, 노랑나비 한 마리 되어 일 년에 한번만 아빠의 눈물을 닦아 주거라. ES041808RODKK
고향 하늘로 날아라
고향 하늘로 날아라
김 동 곤
목이 말라 여느 때보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났다.
방문을 열고 거실 쪽으로 나와 먼저 냉장고를 보던 중 어렴풋이 휴대전화의 작은 불빛 신호와 함께 약한 떨림이 나를 원망이나 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제 오후 생경한 한국어 표현으로 부천에 있는 S병원 수술실 밖에서, 맥 빠진 목소리로 ‘수술결과가 좋지 않아 내일이 고비다’라며 그쪽 분위기를 몽골인 ‘자야’씨가 하였던 말이 떠올랐다.
휴대전화를 열어보니 새벽 5시 15분에 이미 문자가 찍혀져 있었다. [애가 갔어요], 부재중 전화도 두 번이나 걸려와 있었다.
17세에 희귀병 ‘타카야수 혈관염’등을 앓고 있는 몽골소녀 ‘밤바’의 얘기다.
가장 참기 힘들었을 수술 시험대에 마지막이 될 줄도 모른 채 3시간의 긴박한 수술시간 동안 함께 해 주지 못했던 내가 빚쟁이처럼 부담이 밀려온다. 그 이유는 그들이 나를 한국에 있는 유일한 친척처럼 생각했고, 가장 힘들 때 그리고 중요한 일에 나와 상의했고 십년이상 믿는 마음으로 대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
병원으로 달려간 나는 담당 의사를 만났다. 대부분 종합병원의 3분도 되지 않는 짧은 검진 시간처럼, 명함을 건넨 나에게 자기는 “명함은 없다” 하였다. 심장 차트를 벽에 걸어 놓은 상태로 서둘러 ‘죽음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는 논리를 애써 나에게 주입시키려 했다. 그때의 나의 느낌은 사람을 살리는 인술보다도 사후 처리 방법이 훨씬 앞서 보였다. 한국주재 대사관에 사망사실을 알리고, 본국의 집안에 연락하여 자기네 풍습대로 발인과 화장일을 확정짓다보니 기다림의 ‘닷새 장례’가 되고 말았다.
벽제 화장장으로 가는 이른 아침, 서둘러 지하 영안실에 가보니 몽골에서 온 조카 그리고 한국에 와서 목수 일을 한다는 밤바양의 작은 아버지 내외가 영정 앞에 앉아 흐느끼고 있었다. 아버지 ‘푸제’는 옆방의 희미한 불빛 아래서 손으로 천천히 그리고 애절한 모습으로 딸에게 보내는 마지막 이승의 편지를 쓰고 있었다. 세 시간 후 그 편지를 출관예절하기 전 딸이 보이는 면전에서 읽기 시작했다. 살아생전 애뜻한 사랑의 추억을 눈물로 접어 두고, 고별식을 하기 시작했다.“너는 우리 가족에게 17년 동안 행복을 가져다주었다..”며 부모의 마지막 입맞춤이 이어졌다. 나머지 친지들 모두는 순서대로 경배를 끝으로 함께 그가 잠자고 있는 주위를 침묵 속에 세 바퀴를 돌아주고 성급히 이동채비를 했다.
그들의 풍습대로 물보다, 우유로 영구차 네 바퀴에 뿌렸다. 선두차량인 내차가 출발하고, 뒷좌석에서 아버지는 차창을 열어 놓은 상태로 쌀알을 몇개씩 집어 밖으로 날려 보내며 흐느끼고 있었다.
파란 견사 천으로 감싸인 영정사진을 화구 앞에 놓고 마지막 순서라 느낀 부모는 다른 집 상주들이 목 놓아 우는 모습에 어찌 할 바를 모르며 “낮선 타국에서 마음 놓고 울지도 못했다”며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의 웹사이트에는 영어와 러시아어로 그의 친구들과 만나 또래 또래의 즐거움과 만남이 이루어지기도 하였고, 부모 앞에서 자랑도 하며 즐거워했다.
3개월 전 신병치료차 한국에 왔으며 수술 얼마 전에는 아버지가 준 용돈을 모아서 오빠와 친구들에게 줄 선물을 준비 했단다. 완쾌 후 몽골 초원을 달리겠다며, 선물받은 성인용 새 자전거를 타보지도 못하고 떠나가 버렸다.
우리 친구일행이 작년‘나담축제’때 ‘울란바타르’에 갔을땐 통역안내자의 옆에 따라 다니며 고운 미소와 함께 그 사람이 미처 설명하지 못했다 싶으면 나에게 한국어나 영어로 보충 설명도 해주었다.
유골을 받아든 가족들은 치료하기 위하여 몇 개월 지내던 동대문 쪽에는 유골을 가져가지 않고 인천공항이 가까운 숙소에서 가족 친지와 마지막 밤을 지내야 한다며 부평에 잠자리를 구하게 되었다. 밤바의 영혼이 행여나 잠시 정든 서울의 동대문 쪽에 착각하여 안주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정처 없이 한국에서 떠돌지 않는다’는 것이다.
잠시의 인연은 이곳에 두고 고향의 하늘로 이어지는 천상낙원의 창으로 가기 위함이란다. 그래야, 세월이 흐른 후 부모와 친구와 다함께 만날 수 있다고 얘기한다.
영정 앞에 놓았던 그가 생전에 즐겨했던 몽골산 초콜릿 3개를 그의 어머니 ‘미가’씨가 내 검정양복 호주머니에 넣어준다.
며칠 후 그 초콜릿 중 하나를 손녀 손에 쥐어 주었더니 뜻 모르는 얼굴로 겉 종이를 펼치며 활짝 웃는다.
“밤바야 고통 없는 고향 하늘에서 잘 지내 거라!” 그리고 발 앞에서 초원 길끝 구름이 만나는 그곳 고향하늘을 날아라..그리고 친구들과 놀던 고향뜰에 내려앉아 쉬거라.
누가 돌보지 않아도 스스로 자라는 수많은 보랏빛 꽃 야생허브 뜰위 향가득한 그곳에, 노랑나비 한 마리 되어 일 년에 한번만 아빠의 눈물을 닦아 주거라. ES041808ROD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