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times in April

강재현2008.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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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마음에 든나머지

매일밤 쉬기위해 왔다고 했다

 

처음부터 정복조차 유감스런 오해였다

유럽은 그 땅을 정복자에게 주었다

 

그리고 왕은 그것을 전혀 몰랐다

그것을 결코 문명에 관한것이 아니었다

 

결코 부족이나 인종에 관한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만과 탐욕 권력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공포를 이해했을때

 

이미 너무 늦었다

 

매년 4월이면 우기가시작된다

그리고 매년 4월이면 날마다

잊혀지지 않는 공허함이

우리가슴 위로 내려 앉는다

 

매년 4월이면

난 기억한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빨리 끝나는지를

 

매년 4얼 난 기억한다

살아있음을 느낀다는게 얼마나 행운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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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ethimes in April 

영화를 보는 내내 울었어

 

 

아프리카 국가중  

기독교 인구 99%의 나라

 

이렇게 이야기 한다면

기독교인들이라면 환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나라가 르완다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침묵하며 놀랄것이다

 

아니 그 이유도 모를수도 있어

그만큼. 관심이 없을테니까

 

&#-9;호텔르완다&#-9;라는 영화를 통해서 알려진게

전부니까...

 

르완다에서 94년 4얼부터 6월에 이르는 사이에

백만명 가량의 사람들이 인종청소를 당했다

 

그걸 아는 이들이 많을까?

적어도 식민지배를 당해본 경험이 있는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관심있게 알아야할 역사라고 생각해

 

르완다의 다수부족은 &#-9;후투(Hutus)&#-9;족


기원전설에 의하면 소수부족인 &#-9;투치(Tutsis)&#-9;족은

소를 방목하면서 남쪽으로 이주해온 함계의 가라족이거나 아니면
에티오피아인들 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수 백 년 전 르완다에 나타나서

원주민인 반투계의 후투족을 정벌하여 왕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언어는 후투족에게 동화되어 반투어를 구사하게 되었는데,

왕국시대에 투치족이 후투족을 다스렸다

하지만 실제로는 투치족 가운데서 왕과 그 밑에 있는 수많은 수장들이
평민의 투치족과 후투족을 통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종현, 아프리카의 부족과 문화, 서울: 도서출판 금광, 2000).


르완다는 1899년 부룬디와 함께 공식적인 독일의 식민지가 되는데 1차세계대전을 계기로

1919년부터 벨기에의 신탁통치령으로 바뀐다.

벨기에는 르완다와 부룬디를 ‘루안다-우룬디’라는 지명으로 부르며
옆 나라인 벨기에령 콩고의 지방쯤으로 간주하며 통치했다.

통치기간 동안 벨기에는 통치정책의 하나로 일종의 카스트제도를 도입하여
부유하고 엘리트층인 투치족과 그렇지 않은 후투족을 차별했다.


1946년에는 벨기에의 신탁 통치령이 되었는데 아프리카 식민지 나라들의 독립 분위기가 무르익을 1950년대 말
어느 정도의 세력을 가지고 있던 투치족에서 벨기에에 대한 독립의 움직임이 일어난다.


1956년에는 선거제도가 도입되어 지방 평의회가 설치되었지만
1959년 투치족의 왕이 죽자 투치족의 한 부족이 정권을 잡으면서
후투족 지도자들을 집단적으로 살해했다.

 (계간 황해 문화 2002년 봄호 특집-20세기 세계의 국지전 그 뿌리와 결과-

제2차 세계대전 이후를 중심으로. 아프리카, 서구가 이식한 인종주의 갈등과 UN의 침묵, 르완다 내전(1963~1994))


이에 반발한 후투족의 반란으로 수많은 투치족이 살해되거나 이웃나라로 떠났고 후투족이 권좌에 앉았다.
1961년 6월 UN 신탁통치 이사회의 감시하에 실시된 주민투표와 총선거에서 후투족 정당인 공화민주운동당이 승리,
자치정부를 수립했고 같은 해 10월 벨기에가 이를 승인했으며 1962년 르완다와 부룬디는 각각 독립을 이루었다.

 

그러나 1963년 강제 추방되었던 부룬디의 투치족이 르완다를 기습 공격하기 시작하며 종족간의 악순환은 계속된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후투족은 투치족 수천 명을 죽이고 다시 1만 명을 우간다와 부룬디로 추방했는데
1973년 후투족 출신 하비아리마나(Habyarimana)의 무혈 쿠데타로 군사정권이 들어서며 인종차별 정책이 다시 도입되었다.


1당 독재로 최고 권력을 가진 하비아리마나는 1988년 3선에 당선된다.
그런 와중에 투치 게릴라 운동단체이자 군사 정치단체인

 

르완다애국전선(FPR)이 1987년 이웃나라 우간다에서 정식으로 창립되었으며
1990년 5,000명의 투치족 FPR이 국경에서 공격을 개시한다.
이때부터 내전은 격화되며 1993년 8월에는 정부군과 반란군 사이에

UN 주도 하의 평화협정(아루샤 평화협정(Arusha accords))이 이루어지나
이것을 내전의 끝이라 믿은 것은 국제기구의 환상에 불과했다.

 

1994년 4월 6일 후투족 출신의 르완다 대통령

 하비아리마나가 탄 비행기가 의문의 폭격을 당하자
다음날 바로 인종학살이 벌어졌다.


르완다 정부 방송은 대통령 암살 배후로 투치족 게릴라들을 지목했고,
후투족 주민들에게 투치족에 대한 보복 공격을 선동했다.


르완다의 정규군을 비롯, 무장 군인들이 4월 한 달이 가기 전 약 25만 명의 투치족을 학살했다.
대량학살 이전의 투치족은 약 65만으로 추정되었는데 학살 이후 생존 투치족은 15만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Ibid.)

7월 4일 투치족이 수도 키갈리를 함락하기까지 약 90~100만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UN은 80만명으로 추정.)

이에 수도에 갇힌 6만여 명의 후투족 민간인들은 필사적으로 탈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수도인 키갈리를 벗어나 서남쪽으로 약 30km 떨어진

 임시정부의 잠정 수도 기타라마시로 가거나


서북부 국경을 넘어 인근 자이레 등지로 피난했고,
이 와중에 다시 2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극심한 식량 부족과 콜레라 등의 전염병으로 또다시 많은 난민이 죽어갔다. (Ibid.)

 

그러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1995년 4월 22일 또다시 르완다 난민 수용소에서

르완다 정부군이 난민 약 8천 명을 학살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고

1995년 8월에는 수도 키갈리의 감옥에는

재판을 기다리는 3만여 명의 후투족이 갇혀 있었다.
난민 캠프에서 귀향하였으나 정부군에 의해 민족 반역죄로 투옥된 사람들이었다.

또 95년 3월말 이웃 부룬디에서도 투치족 급진 무장세력이 후투족 주거지를 급습하여 150명을 학살했으며
4월초에는 700명을 학살하는 내란이 시작되었다. (유종현, Op. cit.)

 

 

3개월에 걸쳐 100만명이 ‘청소’당했다.

하루에 만 명 꼴이다. 더 끔찍한 것은 군인이나 무력단체 뿐만 아니라 이웃, 선생, 학생, 신부 등이
하루 아침에 살인자로 돌변하여 마치 출근하듯이 나가 아침 저녁으로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이선주, Op. cit.)

 

‘도대체 왜?’라고 묻지 않을 수가 없다.
결코 칼로 무 자르듯, 수학 문제를 풀 듯 명료한 대답을 얻을 수는 없는 문제다.

그러나 그 배후에 있는 거대한 힘, 서구 열강을 큰 이유 중 하나로 들 수밖에 없다.

오랜 기간 르완다를 식민 통치했던 벨기에나

1990년 FPR과 후투족의 전쟁에 있어 후투족쪽에

가담하여 벨기에와 함께 군사개입을 했던 프랑스, 자이르,

이를 지켜본 미국을 위시한 UN.
이들은 매우 교묘한 형태로 르완다 내전을 조장했으며, 이 비극의 잠재적 시나리오를 썼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벨기에의 식민통치

 

한 투치족 지식인은 후투족과 투치족 간의 생김새의 구분은 지극히 어렵다고 말했다.

(이삼성, 20세기의 문명과 야만 -전쟁과 평화, 인간의 비극에 관한 정치적 성찰, 서울: 한길사, 1998)

 

식민통치 이전까지 투치족이 왕족을 형성하고 있긴 했어도 역사상 공존하며 같은 문화와 같은 언어를 사용해온 종족들이라,
이들을 구별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게 역사가들의 견해이기도 하다. (이선주, Op. cit.)

 

이러한 상황에서 벨기에는 인종 차별을 극대화하는 정책을 사용하였다.
신분증에 종족까지 써넣어가며 (Ibid.)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후투족을 냉대하고
숫자가 적은 투치족을 집중적으로 교육시켜 이들을 식민지배체제의 말단 관료집단으로 삼았다.


벨기에는 르완다 사회의 인종적 모순을 이용해 효과적으로 통제하려 했던 것이다.

 

벨기에의 한 역사학자는 후투족과 투치족의 싸움을 두고
 

“이것은 좋은 녀석들(good guys)과 나쁜 녀석들(bad guys) 사이의 싸움이 아니다.
그것은 다같이 나쁜 녀석들 간의 싸움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삼성, Op. cit.)

 

그는 그 ‘나쁜 녀석들’ 속에 정작 중요한

벨기에 식민주의 세력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저 후투족과 투치족이 서로를 학살한 경험이 있는 만큼
그 어느 쪽도 정당할 수 없다는 兩非론적 이야기를 하며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미국과 국제기구의 방관

 

또 흥미로운 점은 1993년 휴전협정이 맺어졌을 무렵
르완다의 수도 키갈리와 북부 군사분계선쪽에는 약 2,500면의 UN 평화유지군이 파견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을 비롯한 모든 국제사회는

르완다 제노사이드에 대해 침묵과 방관, 무능으로 일관했다.


당시 르완다 평화 유지군 사령관이었던 로미오 달래어(Romeo Dallaire)소장은

제노사이드가 시작되기 3개월 전 UN 안전보장이사회에 경고 메시지를 보내며

 실질적인 지원요청을 했다고 한다. (이삼성, 세계와 미국, 서울: 도서출판 한길사, 2001)

문제는 UN을 이끌고 있는 5개의 상임이사국들

특히 미국이 자신들의 국익과 직접 관련 없는 문제들에 대해
인적/물적 투자를 꺼리는 태도였다.

(미국은 자신의 국익이 걸리지 않는 곳은 개입하지 않는다는 대통령직 수행원칙 25(Presidential Proposition 25))

 

 

 

 

 

1998년 클린턴 행정부는 인종학살을 방치한 책임을 인정했으며,
2000년 벨기에 총리는 6돌 추모식에서 식민통치와 인종학살을 외면한데 대해 공식적으로 사죄했다.
같은 해 UN도 학살을 막지 못한 잘못을 반성했다(프랑스는 아직까지 공식적인 사과를 하지 않았다). (이선주, Op. cit.)

 

그러나 이들이 르완다에 남긴 것은 한 마디 말로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사과를 하며 구호물자를 보내준다 하여도 이들이 남긴 ‘기억의 흔적’,
아직 10년 전의 공포에 떨며 가족들을 잃은 아픔과 폭행의 상처로 앓고 있는 르완다 국민에게 남긴 그 흔적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사라지기 힘들 것이다.

 

 

 

학살 10주년 추모식에서 연설하고 있는 카가메 대통령. 르완다 학살은 제국주의의 산물이었다.(사진/ GAMMA, 출처/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