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 와트를 다녀와서

이양자2008.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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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유적답사         앙코르 와트를 다녀와서


 

 

 

앙코르 와트를 다녀와서

      앙코르 와트를 다녀와서

 


앙코르 와트를 다녀와서



신문에서 방송에서 너무나 많이 들어온 도시 사이공의 탄손누트 공항에 도착하였을 때, 많은 환영(?)인파의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 애절한 눈빛 속에서 베트남의 아픔을 이미 감지할 수 있었다.

 사이공의 마지막 탈출의 급박한 상황을 TV에서 본지 어언 20여년, 그리고 수없이 많은 Boat People의 불행을 가슴 아파한 기억이 엊그제 같이 생생한데, 어느덧 우리가 오토바이 인파로 날이 새고 밤이 지며, 사이공강의 뱃놀이가 흥겨운 오늘의 활기찬 베트남에 도착한 그 감회는 크고도 묘한 것이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옛말의 뜻깊음을 다시 한 번 실감하였다.
전쟁박물관에서 본 미군의 고문장면, 이념이 다른 동족간의 고문장면, 총포류의 전시물, 고엽제로 인한 기형아들의 모습, 그리고 구찌터널의 땅굴을 보며 베트남의 아픈 역사를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과연 베트남민족의 고통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며 민족의 각성과 지도자의 올바른 각성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절감하게 된다.
구찌터널에서 시내로 들어오던 두시간 여의 여유 시간에 못난 사회 때문에 죄송하였지만, 그래도 C.C.C대원들의 면면을 처음으로 알 수 있게 되어 즐거웠다. 이정우 선생님, 최연순 선생님, 장수영 선생님, 이숙진 선생님, 김용선 선생님의 노래를 듣지 못하였음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Rex 호텔에서의 베트남식 만찬을 위해 Main Street를 통해 Bus로 이동하면서, 20년간 황폐해졌지만 그래도 옛날 로 명명되었던 호치민시티의 화려한 옛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늦은 밤 아베크족과 폭주족의 오토바이 물결이 홍수를 이루는 광경에서, 사회주의가 막을 내리고 이제 막 다시 시작된 자본주의의 공기를 깊이 숨쉬려는 듯한 그들을 느끼며, 역시 사회주의는 빈곤의 평등만을 남겨 놓은 채 이제 이 지구상에서 사라져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김정일이 이끄는 북한이 과연 이 세계의 대세 앞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며, 우리의 통일도 머지 않았음을 선뜻 느끼게 하였다.
어느 날 갑자기 그들이 무너져 올 때를 대비하기 위해, 만 달러 시대의 환상에만 젖어있을 것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실질적인 통일 준비가 필요함을 가슴속에 되새겼다.

 

 

앙코르 와트를 다녀와서
 
1월 25일 오후 황폐한 캄보디아의 프놈펜공항에 도착한 후 처음에 가본 시아누크 부모의 사리탑이 있는 실버 파고다에서는, 킬링필드로만 기억되는 희미하고 컴컴한 캄보디아의 모습을 샛별이 빛나듯 새롭게 인식하게끔 해 주었다.

그 넓은 사찰 안에 깔려 있는 은으로 된 바닥과 섬세하고 아름답게 조각된 사리탑의 모습은 내일이면 보게 될 앙코르 와트 사원의 모습을 미리 짐작케 해주고도 남았다.
베트남인과 크메르 인의 예술적 재능의 차이는 이미 확연해 보였다.
그러나 초엥 엑의 학살현장인 킬링필드에서 본 그 수많은 해골의 모습들은 우리 모두를 참담한 심정으로 몰아갔으며 인간의 악랄함에 치가 떨렸다. 인간은 과연 얼마만큼까지 악해질 수 있는 것일까? ...


가로등도 없이 깜깜한 거리를 지나 자칭 애국자 가이드 '오골계'의 안내로 한국인 식당에서 다시 한식저녁을 먹고 한국인이 경영하는 호텔에 드니 왠지 마음은 자꾸만 크메르인의 피부색처럼 컴컴하게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크라이막스인 내일의 여행을 위해 우리는 잠을 청해야 했다.
26일, 새벽같이 프놈펜 공항에서 프로펠라비행기를 타고, 大湖 톤레삽을 내려다보면서 시엠립에 도착하였다.

 

 

 호텔에 짐을 맡긴 후 드디어 대망의 앙코르 답사를 위해 떠났다. 처음 발을 들여놓은 타프롬(Taprohm)사원에서는 인간이 만든 유적에 도전하는 자연의 거대한 위력 앞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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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프롬사원

 

 

 거대한 나무 뿌리가 마치 큰 뱀처럼 건물을 감고 올라간 그 모양은 천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자연과 인간의 소리없는 투쟁의 흔적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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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코끼리 테라스를 지날 즈음, 이보형 선생님의 갑작스러운 낙상으로 우리 모두는 정신이 쑥 빠져 버린 듯 하였다. 제발 별일 없으시기를 빌었다.
무거운 마음과 발걸음으로 나머지 일행은 앙코르 톰으로 향했다. 라는 앙코르 톰은 정말 정방형의 都城이었다. 성문 위에 세워진 四方을 향한 수호신의 위엄 있는 얼굴은 이미 우리를 압도하기에 충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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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앙코르 톰 한가운데 있는 중심 사원 바욘사원을 돌아 보면서는, 모나리자의 미소 같은 묘한 미소를 띈 거대한 바위 얼굴들을 헤아려 보며, 무중력 상태인 양 붕뜨는 느낌을 맛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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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나 규모가 크고 그 숫자가 많으며 사실적이고 또한 관세음보살의 미소같은 '크메르의 미소'에 감동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수학적인 건축술과 기막힌 예술성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특히 이 신전 바깥회랑에 있는, 서민 생활을 조각한 relief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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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는 그래도 다소 안정된 기분으로 드디어 앙코르 와트 사원으로 갔다.
Bus에서 내려 垓字를 건너 3개의 탑이 보이는 정면 돌길을 걸어 들어가면서 그 웅장한 아름다움에 압도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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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화랑을 돌면서, 760m의 긴 벽면에 요철문양의 다양하고 상세하고 부드럽고 사실적인 릴리프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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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압살라 춤

 

 

고대인도의 서사시 , 힌두신화, 帝王의 戰功 이야기, 석가모니 이야기 그리고 구석구석 곳곳에 새겨진 아프사라의 릴리프는 너무나 훌륭하고 감동적이었다. 정년 육감적이고 황홀한 조각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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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압살라 릴리프
 

 

 그러나 제2회랑에서 급경사로 높이 쌓아 올린, 최고의 신을 모신 탑이 있는 마지막 회랑까지 올라가 보지 못한 아쉬움은 지금도 남는다. 비디오에 담겨져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정글을 깎아 평지에, 만여개의 돌덩이를 쌓아서 만든 이 거대한 돌의 전당은 필설로는 다할 수 없는 그야말로 사람을 압도하는 大役事였다. 어떻게 이같은 대 건축물이 이루어질 수있었을까? 생각할수록 不可思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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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그것은 거대한 왕권과 크메르인의 강렬한 신앙심과 열광적인 창조력이 혼연일체가 되어 만들어 낸 걸작품이라 여겨진다. 또한 그것은 국왕을 유일의 통치권자로 하기 위해, 9C 크메르 왕국을 건설하고 새로운 신앙을 만들어 낸 자야바르만(Jayavarman) 2세의 神王崇拜思想에서 비롯된 것으로, 바로 이 신왕숭배신앙은 크메르왕조의 권위의 기초가 되었으며 또한 이것이 이 거대한 役事를 가능케 한 힘이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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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를 만든 이집트의 파라오, 쿠스코를 지은 잉카왕, 마리장성을 만든 중국의 天子, 보로부두르 사원을 지은 인도네시아왕 등, 이 모두는 신과 동일시 되는 통치권자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大役事가 가능했다고 생각된다.
반나절만에 후딱 보아 버린 앙코르 와트 유적 답사는 못내 아쉬움으로 남으면서, "일생동안 여기 머물며 이 아름다움에 도취되고 싶다"고 격찬한 토인비의 말이 정말 절실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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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비록 도처에서 벌거숭이 애들이 구걸을 하는 가난이 그들을 짓누르고 있고, 폴포트의 잔학상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지만, 천진하고 끈질긴 어린이들을 보면서, 언젠가는 그들의 국민정신과 재능을 살려 제2의 앙코르를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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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캄보디아 여행은 찬란한 문화와 참혹한 역사상이 극단적으로 대조를 이루는 인간 역사의 본보기임을 느끼게 한 것이었다. 양국간의 수교가 이루어지고, 오골계 같은 가이드가 사라진 몇 년후, 잘 보수된 앙코르와트 유적을 다시 한 번 볼 기회를 가질 것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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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날이 발전해 가고 있는 따뜻한 남국, 태국에서의 휴식 후 코끝이 싸늘한 한겨울의 우리 나라에 도착하자 정신이 퍼뜩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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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톤레샵호수의 수상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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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무어의 앙코르와트 발견

인간의 삶의 흔적은 역사와 문화, 문명으로 남는다. 인간은 때때로 스스로도 놀랄만한 문명의 자취를 남기곤 했다. 이럴 때 불가사의란 말이 사용된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 이후 그리스인들은 세계 7대 불가사의를 전정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 바빌론의 공중정원, 올림피아의 제우스상 등이 그것이다. 중세에는 로마의 콜로세움, 영국의 스톤헨지, 피사의 사탑, 하기아 소피아 성당, 만리장성이 불가사의로 꼽혔다. 그리스인이나 중세인들이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를 알았다면 당연히 불가사의에 포함시켰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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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여년 동안 밀림 속에서 잠을 자던 앙코르와트는 1861년 프랑스의 탐험가이자 생물학자인 앙리 무어에 의해 세계에 알려졌다. 그는 톤레샵 호수를 건넌 뒤 밀림을 헤매다가 거대한 돌의 도시와 만났다.

 

 

 

앙코르 와트를 다녀와서


 

 

당시 그가 느꼈을 놀라움과 경이로움이 쉽게 짐작된다. 앙리 무어보다 10년 전 앙코르와트를 본 프랑스 신부가 있었으나 당시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앙코르 와트를 다녀와서


 


인류의 문화유산인 앙코르와트는 1,000년 전쯤 크메르인들이 세운 힌두교신전이다. 앙코르는 왕도(王都) · 도성, 와트는 사원을 뜻한다. 크메르왕국은 전성기 때 인도차이나를 아우르며 번성했던 문명국이었다.

 12세기에 수리아바르만 2세에 의해 세워진 앙코르와트는 동서 1,500m 남북 1,300m 규모이고, 7t짜리 돌기둥이 1,800개에 높이가 60m를 넘는 거대한 석조건축물이다. 세계의 중심이자 신들의 거처인 수미산을 형상화했다.

 앙코르와트는 크메르왕조의 정신적 물질적 에너지를 집대성한 앙코르 문명의 상징이 아닐 수 없다.


‘앙코르와트 보물전’이 어제부터 9월 12일까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자야바르만 7세의 두상, 비슈누입상 등 앙코르와트의 대표적 유물 100점이 국내에서 처음 선보이는 것이다. 오랜 세월의 신비를 간직한 메콩강 인도차이나 문명의 유물들이 인류문명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넓혀줄 수 있을 것 같다.


 

***앙코르와트에는 두번이나 갔다왔다. 첫번째는1996년이고,  두번째는 2005년이다. 위의 글은 페이퍼 발행인의 글이고,  아래글은 이미 고인이 된 멋진 내과 의사 문한규박사의 글이다***

 

 

 


 

 

잃어버린 왕도(王都)  -앙코르 와트



유적(遺跡)을 찾아가는 것은 내 마음을 찾아 길을 떠나는 것이다.
이제 나는 잠시 내가 살아온 문화와는 동떨어진 세계 속으로 마치 ‘타임터널’을 빠져나가듯, 천년 전 이교도(異敎徒)의 신전을 찾아 길을 나선다.
가벼운 전율이 오랜 세월 만남의 시간을 기다려온 나의 가슴을 스치고, 마침내 그때가 왔음을 황토물로 가득 찬 ‘통래 샵’ 호수의 상공을 나는 작은 비행기의 창밖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실감했다.

 


캄보디아는 테이블 천위에 물을 한 컵 쏟아 놓은 것과 같다. 아직도 고여 있는 곳은 ‘통래 샵’이고 그 나머지 젖어 있는 곳은 대부분의 국토, 즉 벼논이 된다.
‘시엠 리앞’ 공항에 내리면 바로 거기가 잃어버린 위대한 왕도의 옛터 ‘앙코르 와트’를 비롯한 세계적인 신비의 유적들이 넓은 벌판에 널려져 있다.
앙코르로 가는 길은 그렇게 우거진 밀림은 아니지만 무성한 나무사이로 넓고 곧은 길이 똑바로 뚫어져 있다. 한없이 포근한 공기 속에는 감미로운 풀냄새가 스며 있고,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남국의 감각이 아련하게 상기된 나의 마음을 감싸주고 있었다.
‘앙콜 톰’은 위대한 왕성이란 뜻이다.
거대한 못을 만들어 넓은 왕도를 둘러싸고 거기에는 5개의 문을 만들었다. 못을 건너는 다리 너머 우뚝 선 사면불(四面佛) 바이욘의 신상(神像) 밑에 아취형의 문이 똟려 있는데, 이 문이 ‘메인 케이트’ ‘승리의 문’ 이라고 한다.
문으로 들어가자면 바로 이 다리를 건너야 되는다. 다리 양측에는 54개의 둥근 눈이 우락부락하고 머리털이 곱슬한 무서운 얼굴의 아수라(阿修羅)와 콧날이 우뚝한 ‘데바’신들이 도열하여 양팔로 한아름이나 되는 굵고 긴 구렁이를 껴안고 한사코 빠져나가려는 구렁이를 줄 당기기를 하듯 꽉 잡고 놓치지 않으려는 듯 힘을 겨루는 생동감 넘치는 석상(石像)이 이 다리의 난간을 구성하고 있다. 그 난간의 앞부분은 7개의 머리를 하늘로 치켜든 구렁이의 머리가 조각되어 있었다.
입구를 통과하면서 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더위 속에 시달리던 간담이 서늘해지고 마치 ‘인디아나 존스’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진지하고 흥미진진한 기대와 호기심에 가득찬 가슴으로 이 문을 통과했다.
다시 넓은 밀림 속의 길은 사원으로 연결되고, 이윽고 멀리 바이욘 사원이 시야에 들어온다. 멀리서 보면 하늘로 우뚝 솟은 수많은 탑들이 마치 동양의 산수화(山水畵) 봉우리처럼 아련히 솟아 있고, 소들이 한가하게 풀을 뜯고 있는 목가적인 풍경 너머, 이윽고 검은 돌은 쌓아올린 거대한 ‘앙코르 톰’ 사원이 나타난다.
기원 889년 크메르 왕국을 걸립한 ‘야소바르만’이 건립하고, 힌두의 신 ‘비쉬느’에게 바쳐진 사원의 바면불(바이욘) 머리 높이만 10m가 넘는 거대한 관음보살의 얼굴, 그것도 단 한 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54개나 되는 얼굴들이 거대한 탑을 만들면서 중심부를 하늘로 밀어올리고 있었다. 대부분의 얼굴은 완벽하고 사원 변두리에 회랑(回廊)은 허물어져 버린 것이 아쉽지만, 전체적으로는 단지 경이(驚異)라는 말 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원래 건립시에는 힌두 사원이었던 것을 ‘자야바르만 7세’에 의하여 불고 사원으로 개축하여 관음보살의 얼굴 ‘바이욘 신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범신교는 아니지만 힌두교는 모든 신을 수영하고 석가모니도 힌두교의 아홉 번째 신이라고 한다. 기독교나 회교처럼 배타적이 아닌 것이 인도에서 연유한 동양적인 아량이고 관용인 것 같다.
우리나라처럼 대승불교(大乘佛敎) 사원임이 분명하다고 하는데 그것이 세워지는 환경의 문화적 풍토에 따라 사원이나 건축, 조각 등이 이렇게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사원 속의 건축물은 너무나 복잡하고, 한개에 수톤이 될 것 같은 쌓아올린 거석(巨石)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것 같았다.
간간이 돌틈 사이에서 비집고 뿌리내린 나무들이 보이고 넓은 사원의 모퉁이에 쌓아둔 허물어진 돌더미는 ‘바이욘 사원’의 폐허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의 깊숙이 빠져들어감을 느낄 수가 있었다.
힌두의 불교의 신불(神佛)조화, 인간을 위압하는 거대한 얼굴, 얼굴, 얼굴....
깊은 동양적 명상에 잠긴 야릇한 미소, 분명한 감동이지만 그것은 쾌감, 경이, 장엄, 신비, 영원 등이 뒤범벅이 된 ‘엑스터시’가 되어 밀려오고, 천년을 넘어 이곳에서 기다려온 만남에 시간은 정지되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돌더미에서 뿜어내는 열기, 내려 쪼이는 열대의 태양 아래 전신은 땀 속에 젖어버리고, 극심한 갈증에 시달리면서 사원에서 내려왔을 때에는 많은 시간이 지나고 있었고, 또 몸은 너무나 지쳐 있었다.
거기다 나는 언제나 몸무게 25kg이 되는 사진 촬영용 장비를 가지고 다녀야 하기 때문에 운신(運身)에 늘 부담이 되는 상태였다.
호텔에 돌아와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활력을 되찾은 후 오후에는 이제 이 왕도의 중심, 유적의 꽃인 ‘앙코르 와트’로 향발했다.
광대한 앙코르 지역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유적에 대한 관광료는 1일 20$, 2일 이상은 40$이고 내국인에게는 무료다.
일단 도로 한쪽 편에 있는 조그마한 판매소에서 표를 끊으면 그 뒤에는 언제 어느 곳으로 출입하더라도 입장권을 보자는 사람도 없고, 또 유적을 보살피는 사람도 없는 완전히 방치된 상태였다.
입장할 때마다 꼬박꼬박 자기 나라 국민에게도 비싼 입장료를 받아 챙기고, 큰돈 모아 시끄러운 우리나라 사찰하고는 너무나 달라 어리둥절해진다.
‘앙코르 와트’는 11세기에 창건된 힌두사원이다.
한 변의 길이가 1,500m인 넓은 인공호수로 둘러싸인 사원을 멀리 정문에서 보면 우선 세 개의 탑이 눈에 들어온다.
‘앙코르 톰’의 다리 난간처럼 머리가 7개 달린 구렁이가 다리 난간을 장식하고, 넓은 돌다리는 반은 침하되어 있고, 반쪽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많은 걸인, 특히 다리를 잃은 걸인들이 길가에 앉아 앵금(一絃琴)을 키면서 구걸을 하고 있는 것이 지난날의 번성했던 크메르 왕국의 빛과 그림자처럼 서글프게 대조되고 있었다. 오백년 의 방치 속에서도 사원의 대체적인 구조는 아직도 변함없었고, 어떤 곳은 마치 이제 바로 완성한 것처럼 새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우선 이 터무니없는 웅대한 규모, 크기뿐만 아니라 막대한 양에 놀라고 다시 그 속에 간직된 섬세함, 즉 질적인 충실성에 또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밭 전(田)자로 된 회랑의 중앙에 우뚝 솟은 65m높이의 포탄형의 중앙탑, 너 모서리에 다시 우뚝 선 4개의 같은 모양의 탑, 다시 그것을 연결하는 회랑, 그것은 천상의 세상을 표현했고, 그것을 둘러싼 정방형의 제2회랑, 다시 그 회랑을 둘러싸는 한 변의 길이가 760m의 바깥 회랑은 입구에 들어서면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벽면을 가득 채운 섬세한 부조(浮彫), 완벽한 기교, 방대한 면을 똑같이 빈틈없이 가득 채운 충실성, 그 인내와 끈기는 인간의 일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천년 전, 그 어떤 기술이 있었기에 이렇게 거대한 건축물을 축조했는지 감탄을 넘어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사원의 계단은 닳아서 마모되고 너무나 가팔라 오를 때는 겨우 오르지만 내려올 때 아득한 아래를 내려다보면 고소공포증이 없는 사람도 현기증을 느낄 정도였다.
회랑에 부조된 풍만한 ‘데바다’ 그리고 날렵한 천녀 ‘압사라’ 등 한량없는 릴리프를 따라 한참을 걸어갔어도 그 끊은 작은 바늘구멍 같을 뿐 끈이 날 것 같지 않았다.
주위에는 나 이외는 아무도 없고, 여기가 이교도의 신전이라는 것이 어떤 원초적인 불안과 가벼운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고, 그 이상의 무모한 탐색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문득 이렇게 웅장한 사원, 저토록 높은 덩치의 탑을 왜? 무엇 때문에 세웠을까 생각해 봤다. 그리고 물어봤다.
이 침묵의 회랑 속에서 대답이 있을 리 없다. 단지 자문자답이 있을 뿐이다. 폐허의 미는 내 안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상상력 없는 인간은 자기 마음도 들여다보지 못한다. 자기와의 대화 없이 잃어버린 시간과의 대화는 물론 바랄 수 없다.
그 시대로 돌아가 그들이 되지 않으면 이 거대한 건조물의 의미를 확인할 수는 없다. 현대의 이성은 때로는 그것을 이해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어느 시대든 그 사람 속에는 인간의 마음을 결합시키고 집단의 안정과 존속, 나아가서는 개인의 생존을 보장하는 강력한 신념 또는 체제가 있었을 것이다.
애국심에는 국기(國旗)가 필요하듯 통치자나 종교가에게 제단과 의식의 장소가 필요했고, 가능하다면 그것은 크면 클수록 효과적이고, 믿는 신도 확고했을 것이다.
마치 거대한 불침선 ‘타이타닉’을 만들고 그것에 타기만 하면 부자이거나 가난하거나 누구든지 신세계로 항해할 수 있다고 믿은 금세기 초의 일처럼.
한때 인도차이나 반도 전지역과 말레이시아 반도까지 지배했던 크메르 왕국은 강력한 왕권의 상징물로써 ‘앙코르 와트’와 ‘바이욘’을 만들어 황토와 뿐인 언덕 위에 거대한 탑을 완성함으로써 통치의 구심점을 찾았다. 이러한 현식의 석조사원을 좁고 긴 ‘마렉카’ 해협을 건너면 금방 ‘수마트라’ ‘자바섬’으로 이어져 있는 것을 저 ‘프랑바낭’의 힌두사원이나 ‘보로부두르’에서 만난 유적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고, 실제 그들의 역사에서도 교류를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때 이후 이곳에서는 통치의 상징이나 종교센터 또는 복합적 ‘모뉴멘트’로서 이러한 거대 건축물은 만들지 않았다.
14세기 아유타(태국)가 이 지역을 지배하자 이 황토의 들판에서 역사적 정열은 식어버리고, 그 뒤 이 땅에 퍼진 소승불교(小乘佛敎)는 더 이상 큰 종교적 상징물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1860년 불란서인 식물학자 ‘앙리 무어’에 의하여 다시 발견될 때까지 수세기 동안 열대 우림의 대자연 속에 방치되고 잊혀지고 만다.
잊혀진 육백 년의 세월을 ‘타 프롬’ 사원에 갔을 때 시간은 때로는 이러한 형태로 변화된 모습으로 남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앙코르 와트를 다녀와서


 


마치 그들은 신, 대사(大蛇) ‘나다’처럼 꿈틀대는 굵은 나무뿌리가 천년의 사원을 온톤 휘감고 기어올라, 그것도 모자라 하늘을 향하여 높이 치켜 올라간 살아 있는 거목을 볼 때 또 하나의 자연의 성취인 살아 있는 목탑(木塔)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벼논 속에 뻗어 있는 울퉁불퉁한 황톳길을 약 한 시간을 달려 ‘반티아이수레이’에서 마침내 나는 옛 장인들의 극치 예술의 경지와 기교를 만나게 된다.
약간 붉은 빛깔의 사암(砂岩)을 마치 종이로 오려 만들 듯 정확한 조형, 무한한 장식, 풍부한 이야기, 이 극도로 섬세하고 양적으로 너무나 방대한 릴리프의 조각을 대하면서 그들의 재능보다 그것을 감당한 성실과 인내심에 그 민족의 무서운 끈기, 소름 끼치는 집착과 맹목적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맹목적인 끈기를 ‘킬링 필드’에 갔을 때 다시 만날 줄은 이때는 아직 예상하지 못했었다.
천년의 세월이 지난 후 이 평원에서 한때의 통치자 ‘폴 포트’는 200만 명의 동족을 삽시간에 죽이고, 국경에 지뢰로 담을 쌓고 거대한 감옥을 만들어 원시 농경사회로 되돌아가려고 했다. 그 수많은 백골을 남긴 채 그는 살아서 심판을 받는 일 없이 죽음으로써 역사의 심판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내가 ‘킬링 필드’에 갔을 때 그곳에는 백골을 모아둔 탑이 있었다. 역시 여기에도 탑이 아니니 실로 ‘아이러니컬’하다.
안내인은 그때 자기의 부모도 그 평야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하면서 ‘폴 포트’를 미친놈이라고 욕했다. 그러나 ‘폴 포트’가 모든 사람을 다 죽이지 않았다. ‘이데올로기’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최면에 걸린 성실한 실행자, 맹목적 동조자, 용감한 하수자가 문득 생각났다. 순하게 생긴 그들이 천년 전 앙코르의 찬란한 문화를 만든 끈질기고 성실한 실행자의 후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이 백골의 탑을 등지고 나오는 나의 등에서는 뜨거운 열대의 태양 아래서 한 줄기 한기를 느끼고 있었다.
인간의 열정을 때로는 천녀의 세월을 넘어 이렇게도 변할 수가 있는지 묻고 싶어진다.
아침에 비가 내려서 그랬을까.
그날 그 탑 위의 하늘은 한없이 푸르고, 맑고 평화스러웠다.

故문한규 박사 수필집『어떤 5월』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