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는 제목은 마지막 생리일로 부터 계산하는 임신력(姙身曆)상의 '태아의 재태일(在胎日)'을 뜻하는 말이다. 영화는 '차우체스쿠 정권하'에서 낙태시술이 전면 불허된 가운데, 임신 19주가 넘은 여대생이 호텔방에서 불법 낙태시술을 받아 태아의 시신을 유기하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담고 있다. 그런데 영화는 낙태시술을 받는 여학생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전적으로 도와주는 룸메이트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영화를 보다보면 '아무리 친구라도 저렇게까지 도와줄 필요가 있나?'하는 의문을 갖지만, 후반부에 가면 그녀가 친구를 돕는 까닭은 다름아닌 '나에게도 닥칠 수 있는 일이며,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여자를 도울 사람은 처지를 공감하는 친구외엔 아무도 없기 때문'이란 점을 알게된다.
영화는 이런 이야기에서 가장 하일라이트가 될 만한 태아가 나오는 장면이나 적출된 태아를 처리하는 산모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 대신 같은 시간에 호탈방에 혼자 둔 친구를 걱정하면서 유복한 남자친구의 집 파티에 초대받은 여자의 불안하고 착잡한 모습과 남자친구와의 짧은 실랑이를 담는다. 이 장면은 아마도 이런 의문을 유도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녀는 왜 유복한 가정의 남자친구와 안온한 결혼을 꿈꾸는 대신, 친구의 낙태를 돕느라 저토록 큰 위험과 불쾌함과 죄의식을 감수하는 것일까?' 이 질문이 바로 영화의 핵심에 다가서는 열쇠이며, 낙태에 대한 추상적 도덕 논쟁이나 선정성 논란의 자리에 성, 연애, 결혼, 임신을 둘러싼 여성학적 논의가 들어가야만 하는 영화 구성상의 요청을 드러내는 부표이다. 그녀와 혼연일체가 되어 마음을 졸이며 스크린을 응시한 관객은 결국 최악의 일이 일어나지 않음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러나 최악의 일이 일어나지 않고 각자의 마음속에 무거운 돌덩이만 남긴 채 봉인이 되는 결말이, 오히려 우리가 발딛고 있는 현실이 얼마나 많은 사연이 봉인된 무덤일까를 떠올리게 하기에 더욱 묵직하게 느껴진다. 그래도 한 가지 기우를 떨칠 수 없다. 영화가 낙태의 과정을 직접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행여나 낙태가 생각보다 쉽고 그다지 위험한 시술이 아니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지나 않을지 걱정된다.
한국의 영화제 마니아들에게 '크리스티앙 문주'는 낯선 이름이 아니다. '루마니아' 역사상 최대의 흥행작 중 하나인 '문주'의 장편 데뷔작 은 이미 2003년 부천영화제에 공식 초청된 바 있고, 지난 2006년에는 그가 한 단편을 연출한 동유럽 옴니버스 영화 가 부산영화제에 초청된 바 있다. 전작들이 '에밀 쿠스투리차'적인 마술적 리얼리즘에 약간의 빚을 진 작품들이었던데 반해 이 극도로 건조한 리얼리즘의 방법론을 구사하는 것은 꽤 흥미롭다. '문주'의 변화는 애조 어린 투로 내전과 공산주의 체제의 종말을 흐릿하게 돌아보던 지난 20여년간의 동유럽 영화가 새롭게 진화하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지금 젊은 동유럽 작가들은 ‘동유럽적인(혹은 그렇다고 오해되어온) 감수성’을 구시대의 유물함속으로 던져버린 채 서유럽의 작가들과 동일한 방식의 현대영화 만들기를 보여주고 있으며 루마니아는 그 최전선에 서 있다.
4개월, 3주... 그리고 2일 (4months 3weeks and 2days,2007)
루마니아 / 드라마 / 113분 / 감독: 크리스티안 문주
(★★★★☆)
2007년 제 60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2007년 제 20회 유럽영화상 유러피안 작품상, 감독상
2007년 제 33회 LA 비평가 협회상 외국어영화상, 남우조연상
이라는 제목은 마지막 생리일로 부터 계산하는 임신력(姙身曆)상의 '태아의 재태일(在胎日)'을 뜻하는 말이다. 영화는 '차우체스쿠 정권하'에서 낙태시술이 전면 불허된 가운데, 임신 19주가 넘은 여대생이 호텔방에서 불법 낙태시술을 받아 태아의 시신을 유기하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담고 있다. 그런데 영화는 낙태시술을 받는 여학생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전적으로 도와주는 룸메이트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영화를 보다보면 '아무리 친구라도 저렇게까지 도와줄 필요가 있나?'하는 의문을 갖지만, 후반부에 가면 그녀가 친구를 돕는 까닭은 다름아닌 '나에게도 닥칠 수 있는 일이며,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여자를 도울 사람은 처지를 공감하는 친구외엔 아무도 없기 때문'이란 점을 알게된다.
영화는 이런 이야기에서 가장 하일라이트가 될 만한 태아가 나오는 장면이나 적출된 태아를 처리하는 산모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 대신 같은 시간에 호탈방에 혼자 둔 친구를 걱정하면서 유복한 남자친구의 집 파티에 초대받은 여자의 불안하고 착잡한 모습과 남자친구와의 짧은 실랑이를 담는다. 이 장면은 아마도 이런 의문을 유도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녀는 왜 유복한 가정의 남자친구와 안온한 결혼을 꿈꾸는 대신, 친구의 낙태를 돕느라 저토록 큰 위험과 불쾌함과 죄의식을 감수하는 것일까?' 이 질문이 바로 영화의 핵심에 다가서는 열쇠이며, 낙태에 대한 추상적 도덕 논쟁이나 선정성 논란의 자리에 성, 연애, 결혼, 임신을 둘러싼 여성학적 논의가 들어가야만 하는 영화 구성상의 요청을 드러내는 부표이다. 그녀와 혼연일체가 되어 마음을 졸이며 스크린을 응시한 관객은 결국 최악의 일이 일어나지 않음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러나 최악의 일이 일어나지 않고 각자의 마음속에 무거운 돌덩이만 남긴 채 봉인이 되는 결말이, 오히려 우리가 발딛고 있는 현실이 얼마나 많은 사연이 봉인된 무덤일까를 떠올리게 하기에 더욱 묵직하게 느껴진다. 그래도 한 가지 기우를 떨칠 수 없다. 영화가 낙태의 과정을 직접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행여나 낙태가 생각보다 쉽고 그다지 위험한 시술이 아니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지나 않을지 걱정된다.
한국의 영화제 마니아들에게 '크리스티앙 문주'는 낯선 이름이 아니다. '루마니아' 역사상 최대의 흥행작 중 하나인 '문주'의 장편 데뷔작 은 이미 2003년 부천영화제에 공식 초청된 바 있고, 지난 2006년에는 그가 한 단편을 연출한 동유럽 옴니버스 영화 가 부산영화제에 초청된 바 있다. 전작들이 '에밀 쿠스투리차'적인 마술적 리얼리즘에 약간의 빚을 진 작품들이었던데 반해 이 극도로 건조한 리얼리즘의 방법론을 구사하는 것은 꽤 흥미롭다. '문주'의 변화는 애조 어린 투로 내전과 공산주의 체제의 종말을 흐릿하게 돌아보던 지난 20여년간의 동유럽 영화가 새롭게 진화하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지금 젊은 동유럽 작가들은 ‘동유럽적인(혹은 그렇다고 오해되어온) 감수성’을 구시대의 유물함속으로 던져버린 채 서유럽의 작가들과 동일한 방식의 현대영화 만들기를 보여주고 있으며 루마니아는 그 최전선에 서 있다.
미학적인 통제와 윤리적인 문제 제기가 완벽하게 합일을 이룬 은 새로운 대륙을 재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