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기사전송 2008-05-17 18:24 | 최종수정 2008-05-17 19:09
집단행동으로 여론 형성 왕이나 집권세력 압박 때론 단식투쟁도 불사 대개 용서받지만 처벌도 성균관 유생들이 관 내외 문제로 불만이 있을 때 시위를 하느라고 관에서 모두 물러가는 것을 권당(捲堂)이라 했다. 권(捲)은 거두다는 뜻이다. 성균관을 비워버린다고 해서 공관(空館)이라고도 했다. 오늘날의 데모나 시위로 송나라 때 태학에서 시작돼 조선에도 세종 때 처음으로 발생했다.
세종 말년 세종이 궐내에 내불당(內佛堂)을 설치하려 하자 유생들이 성균관 문에 '이단(異端)이 바야흐로 번성하니 오도(吾道-유학)가 장차 쇠하겠구나'라고 써놓고 성균관을 비워버렸다. 인자하기 그지없던 세종도 대로(大怒)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의정 남지(南智)가 눈물로 호소하며 "이런 경망스러운 아이들을 어떻게 벌줄 수 있겠느냐"고 용서를 청하는 바람에 유생들은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 있었다. 또 국시(國是)라 할 수 있는 유교를 지키려는 청년들의 기개로 볼 수도 있었기 때문에 세종은 용서해주었다.
권당이 이처럼 반드시 대의명분을 걸고서만 이뤄진 것은 아니다. 성종 4년(1473년) 7월 5일 성균관 유생 임지(任沚) 등이 스승(師長)에 대항하다가 몇몇 동료들과 함께 권당을 하였다가 가혹한 처벌을 받게 된다. 임지는 장(杖) 60대에 도(徒-징역) 1년의 중형을 받았고 나머지도 거기에 준하는 형벌과 함께 영구히 과거를 칠 수 없게 됐다. 성종 11년(1480년) 5월 28일에는 성균관 생원 김경충을 비롯한 406명이 연명하여 상소를 올렸다. 대비들이 불교를 숭상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문제는 이들이 그 후 권당을 해버린 데 있었다. 진노한 성종은 이들 중 주동자들을 국문토록 조치했다.
사실 권당은 국왕의 힘이 강력했던 조선 초에는 별로 일어나지 않았다. 조선 중기를 넘어가면서, 특히 당쟁이 격화되면서 권당하는 일도 잦아졌다. 임금의 권위가 그만큼 약해진 결과다. 권당에도 단계가 생겼다. 현종 때는 성균관 유생의 학문하는 태도도 소홀하다고 꾸짖어도 권당을 하는 일까지 생겼다. 그러나 이때의 권당은 성균관을 비우는 것은 아니고 식당에 가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일종의 단식(斷食)'투정'이었다. 이를 권식당(捲食堂)이라 했다. 이럴 때는 대신을 보내 설득하면서 별 탈 없이 지나갔다. 어느새 권당이 유생들의 문화로 자리 잡고 있었다.
권당을 가장 잘 활용한 정치인은 노론의 송시열이었다. 숙종이나 영조 때 유난히 권당이 많았던 것도 송시열의 노론 진영이 성균관 유생을 통해 '여론'을 만들어 임금이나 남인 혹은 소론 집권세력을 압박한 때문이었다. 이후에는 소론도 이를 배워서 종종 노론을 압박할 때 권당을 활용했다. '권당에는 권당으로'였다. 그 결과 숙종 때에는 성균관 유생들이 우의정 김석주의 죄상을 논하는,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다. 유생들의 정치개입은 원칙적으로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경종 때는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치인이 유배를 갔다는 이유로 권당했다.
재위 기간이 52년이기도 했지만 빈도로 보더라도 영조 때 수십 차례의 권당이 있었다는 것은 흥미롭다. 영조 6년(1730년) 5월 29일 영조가 원점(圓點)을 점검한 후 유생들의 게으름을 꾸짖었더니 그들은 권당했다. 원점이란 성균관 유생들의 출결상황을 체크하기 위해 식당에 들어갈 때 장부에 점을 찍도록 한 것이다. 전성기의 영조 같았으면 중벌을 내렸겠지만 아직 왕권을 제대로 확립하지 못한 영조는 스스로 물러선다. 무수리 출신 국왕의 정통성이 아직은 약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실은 정조 때도 적지 않은 권당이 있었다. 정조는 유생을 처벌하는 대신 성균관 대사성에게 책임을 물렸다. "조정에서 나이 젊은 유생에 대해 탓할 나위도 못 되는 까닭에 비록 처분은 하지 않지만 지금의 성균관 지사는 대관(大官)인 만큼 처치하도록 하겠다. 대사성을 파직하라!"
권당은 이후에도 계속돼 고종 때까지 일어났다. 권당에 대해 국왕들이 진노하여 처벌을 주장하면 이를 무마하려는 신하들의 논리가 한결같았다. "권당은 쇠세(衰世)의 일이긴 하지만 어린 유생들이 뭘 모르고 한 일이니 용서해줘야 한다." 권당을 용인하는 것은 자기 시대가 망조가 든 쇠세임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조는 유생들은 일단 용서해주는 대신 책임자를 처벌하겠다는 새로운 처벌논리를 들고 나온 것이다.
[이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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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인자한 대통령을 건들지 말아라
'인자한' 세종을 화나게한 성균관 유생의 '집단시위'
조선일보 기사전송 2008-05-17 18:24 | 최종수정 2008-05-17 19:09
집단행동으로 여론 형성 왕이나 집권세력 압박 때론 단식투쟁도 불사 대개 용서받지만 처벌도
성균관 유생들이 관 내외 문제로 불만이 있을 때 시위를 하느라고 관에서 모두 물러가는 것을 권당(捲堂)이라 했다. 권(捲)은 거두다는 뜻이다. 성균관을 비워버린다고 해서 공관(空館)이라고도 했다. 오늘날의 데모나 시위로 송나라 때 태학에서 시작돼 조선에도 세종 때 처음으로 발생했다.
세종 말년 세종이 궐내에 내불당(內佛堂)을 설치하려 하자 유생들이 성균관 문에 '이단(異端)이 바야흐로 번성하니 오도(吾道-유학)가 장차 쇠하겠구나'라고 써놓고 성균관을 비워버렸다. 인자하기 그지없던 세종도 대로(大怒)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의정 남지(南智)가 눈물로 호소하며 "이런 경망스러운 아이들을 어떻게 벌줄 수 있겠느냐"고 용서를 청하는 바람에 유생들은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 있었다. 또 국시(國是)라 할 수 있는 유교를 지키려는 청년들의 기개로 볼 수도 있었기 때문에 세종은 용서해주었다.
권당이 이처럼 반드시 대의명분을 걸고서만 이뤄진 것은 아니다. 성종 4년(1473년) 7월 5일 성균관 유생 임지(任沚) 등이 스승(師長)에 대항하다가 몇몇 동료들과 함께 권당을 하였다가 가혹한 처벌을 받게 된다. 임지는 장(杖) 60대에 도(徒-징역) 1년의 중형을 받았고 나머지도 거기에 준하는 형벌과 함께 영구히 과거를 칠 수 없게 됐다. 성종 11년(1480년) 5월 28일에는 성균관 생원 김경충을 비롯한 406명이 연명하여 상소를 올렸다. 대비들이 불교를 숭상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문제는 이들이 그 후 권당을 해버린 데 있었다. 진노한 성종은 이들 중 주동자들을 국문토록 조치했다.
사실 권당은 국왕의 힘이 강력했던 조선 초에는 별로 일어나지 않았다. 조선 중기를 넘어가면서, 특히 당쟁이 격화되면서 권당하는 일도 잦아졌다. 임금의 권위가 그만큼 약해진 결과다. 권당에도 단계가 생겼다. 현종 때는 성균관 유생의 학문하는 태도도 소홀하다고 꾸짖어도 권당을 하는 일까지 생겼다. 그러나 이때의 권당은 성균관을 비우는 것은 아니고 식당에 가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일종의 단식(斷食)'투정'이었다. 이를 권식당(捲食堂)이라 했다. 이럴 때는 대신을 보내 설득하면서 별 탈 없이 지나갔다. 어느새 권당이 유생들의 문화로 자리 잡고 있었다.
권당을 가장 잘 활용한 정치인은 노론의 송시열이었다. 숙종이나 영조 때 유난히 권당이 많았던 것도 송시열의 노론 진영이 성균관 유생을 통해 '여론'을 만들어 임금이나 남인 혹은 소론 집권세력을 압박한 때문이었다. 이후에는 소론도 이를 배워서 종종 노론을 압박할 때 권당을 활용했다. '권당에는 권당으로'였다. 그 결과 숙종 때에는 성균관 유생들이 우의정 김석주의 죄상을 논하는,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다. 유생들의 정치개입은 원칙적으로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경종 때는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치인이 유배를 갔다는 이유로 권당했다.
재위 기간이 52년이기도 했지만 빈도로 보더라도 영조 때 수십 차례의 권당이 있었다는 것은 흥미롭다. 영조 6년(1730년) 5월 29일 영조가 원점(圓點)을 점검한 후 유생들의 게으름을 꾸짖었더니 그들은 권당했다. 원점이란 성균관 유생들의 출결상황을 체크하기 위해 식당에 들어갈 때 장부에 점을 찍도록 한 것이다. 전성기의 영조 같았으면 중벌을 내렸겠지만 아직 왕권을 제대로 확립하지 못한 영조는 스스로 물러선다. 무수리 출신 국왕의 정통성이 아직은 약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실은 정조 때도 적지 않은 권당이 있었다. 정조는 유생을 처벌하는 대신 성균관 대사성에게 책임을 물렸다. "조정에서 나이 젊은 유생에 대해 탓할 나위도 못 되는 까닭에 비록 처분은 하지 않지만 지금의 성균관 지사는 대관(大官)인 만큼 처치하도록 하겠다. 대사성을 파직하라!"
권당은 이후에도 계속돼 고종 때까지 일어났다. 권당에 대해 국왕들이 진노하여 처벌을 주장하면 이를 무마하려는 신하들의 논리가 한결같았다. "권당은 쇠세(衰世)의 일이긴 하지만 어린 유생들이 뭘 모르고 한 일이니 용서해줘야 한다." 권당을 용인하는 것은 자기 시대가 망조가 든 쇠세임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조는 유생들은 일단 용서해주는 대신 책임자를 처벌하겠다는 새로운 처벌논리를 들고 나온 것이다.
[이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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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게 무슨 개풀뜯어먹는 소리랍니까
쥐새끼 따위를 감히 무려 세종대왕에 비유하고는 훌륭한 정책에
딴지 걸지 말고 닥치고 있으라는거네요
쥐새끼를 세종대왕과 동급으로 보는 조선일보 좀 많이 ㅆ인듯
매국노 찌라시 망하게하는데 동참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