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아빠는 직업이 뭐야?"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 가정환경 조사서를 받은 나는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는 늘 집에 있는 책상에 앉아 책을 읽거나, 이상한 그림을 그리거나, 조그만 장난감들을 만지는 일밖에 하지 않았고 내가 아는 한 그런 직업은 세상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유, 우리 딸... 아빠 직업? 아빠는 공돌이야." "공돌이? 곰돌이가 아니고?" "응. 공돌이." "그게 뭔데?" "음... 먼 미래를 가까운 미래로 만드는 사람." "먼 미래를... 가까운 미래로?" 어린 마음에도 아빠의 그말이 참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당하게 아빠 직업란에 '공돌이'라고 적어서 냈다. 그리고 선생님한테 혼났다. "민아야, 아빠 직업이 공돌이가 뭐니? 공돌이는... 나쁜 말이야. '직업엔 귀천이 없다'는 소리 못 들어봤니? 아빠는 민아를 위해서 열심히 공장에서 일하시는데..." 난데없는 꾸지람에 억울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땐 설움이 복받쳐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책상을 두드려 대며 "민아네 아빠는 공돌이래요~"라고 나를 놀려대는 아이들의 반응에 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어버렸다. 집에 돌아온 난, 곧장 아빠의 방으로 뛰어들어가 소리쳤다. "아빠 나빠! 뭐가 공돌이야! 선생님한테 혼났잖아!" "응? 선생님한테 혼났다니..., 왜?" 난 가방 속에 꼬깃꼬깃 접어온 생활기록부를 아빠 앞에 내밀었다. 그곳엔 굵은 빨간 글씨로 "아이가 아빠 직업에 대해 좋지 않은 편견을 가지게 된 듯합니다. 지도를 부탁드립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어이쿠 이런... 아니 난... 이런데 쓰려는 건 줄은 몰랐지. 이걸 어쩌나? 여보, 잠깐만 이리 와봐요. 내가 또 큰 사고를 쳐버렸네." 잠시후, 엄마가 내게 돌려준 가정환경 조사서에는 '메카드로닉스 제어 및 구현기술 개발자'라는 정말 생소한 직업이 적혀 있었다. 그렇게 사건이 마무리되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몇 달 만에 아빠와 집 앞 공원에 놀러 나간 나는 신이 나서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지난번에 왜 아빠 직업이 공돌이라고 했어? 선생님이 그거 나쁜말이래." "음? 민아도 공돌이란 말이 마음에 안드니?" "아니, 난 좋은 말 같은데, 선생님이 그건 아빠 직업을 굉장히 나쁘게 말하는 거라고..." "그래? 왜 그런가 모르겠구나. 아빠도 공돌이란 말이 참 좋은데. 공돌이, 공돌이... 부르기 쉽고 친근하고 얼마나 좋니?" 아빠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한참을 웃었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 나도 같이 웃었다. 우리 아빠는 누가 뭐래도 공돌이였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어느날, 우리 집에 낯선 손님이 찾아왔다. 엄청 큰 자동차를 타고 검은 양복을 입은 아저씨들과 함께 집으로 들어온 아저씨. 아빠는 그 아저씨를 두 팔 벌려 환영했지만, 날카로운 금테 안경이 왠지 무서워 보였던 난 거실 문 뒤에 숨어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이 친구야, 자게 아직까지 이러고 있나?" "음? 아니 이게 뭐 어때서.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많이 좋아졌어. 사람들도 조금씩 관심을 가지고 투자하기 시작했고..." "그걸 말이라고 하는거야? 외국에선 자네 같은 사람을 혈안이 되어 찾고 있는데...!" "어유, 밖에서 부른다고 다 나가면 집 지킬 사람이 없잖아. 나처럼 부족한 사람이라도 하나 남아 있어야..." 다른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싫어하던 아빠가 저렇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걸로 보아 분명 아빠의 오랜 친구인 듯 했다. "요즘은 또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나?" "아, 한번 보겠나? 제법 반응 좋은 것들도 있는데..." 아빠가 방에서 가져온 두꺼운 종이뭉치들을 한참동안 살펴보던 아저씨는 놀란 눈빛으로 아빠에게 물었다. "이거... 다른 사람한테도 보여준 적 있나?" "아니, 그건 아직 관심을 보이는 회사들이 없어서..." "자네가 해." "응? 무슨 소리야, 그건?" "내가 투자할게. 이거 다른 사람 준다고 될 일 아니야. 자네가 해봐." "에이, 됐어. 자네도 알잖아? 나 사업 수완 엉망인 거. 사람 대하는 것도 서툴고." "헤드헌터들한테 의뢰해서 경영인이고 뭐고 필요한 만큼 구해 다 줄게. 프레젠테이션 때 쓸 자료만 간단하게 뽑아줘. 내가 책임 지고..."
그 아저씨가 다녀간 이후, 아빠는 굉장히 바빠졌다. 하는 일은 평소나 별로 다를 게 없어 보였지만 1분, 1초가 아깝다는 얼굴로 계속 책상 앞에만 앉아 있는 아빠를 보면 정말 뭔가 열심히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 바빠?" "응, 무슨 일이니, 민아야?" "인형놀이 하자." "아... 저기, 아빠가 지금 꼭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안 되겠다. 대신... 아빠가 다음에 민아 사달라던 그, 뭐더라, 주둥이 인형 사줄게." "주둥이가 아니라 주디 인형." 며칠 후 아빠는 정말로 주디 인형을 사다 주었다. 하지만 인형 놀이는 해주지 않았다. "아빠..." "응, 왜?" "산책 가자." "으응? 뭐라고? 과자?" "... 아냐. 아무것도." 책상 앞에만 앉아 있던 아빠는 어느덧 내 얼굴조차 쳐다보지 않게 되었다. 아빠는 바빴다. 내가 학교에 갈 때도, 학교에서 돌아 왔을 때도 아빠는 끊임없이 뭔가를 쓰고 지우는 일을 반복했다. 엄마는 그런 아빠에게 몇 번이나 쉬어가면서 하라고 말했지만, 아빠는 어깨 너머로 손만 흔들어 보일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3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아빠가 변함없이 책상에 앉아 있는 사이 인형들은 늘어만 갔고, 우리 가족은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민아야, 어때? 새집 마음에 들어?" "응, 너무 좋아. 이제 내 방도 생기는 거야?" "그럼. 민아 인형들 자는 방도 따로 있는 것?" 새로 이사한 집은 정원에 발코니가 있는 2층짜리 집이었다. 여덟개나 되는 방은 침실이며, 서재며, 놀이방으로 꾸며졌고 정원엔 갖가지 꽃과 나무가 자라게 되었다. "아빠는? 아빠 방은 어디 있어?" "아빠 방은 지하에 있어. 지금은 일하시니까, 나중에 보러 가자." 아빠의 방은 지하에 있었다. 아빠도 거기 있었다. 이 넓은 집안에서 아빠의 공간은 오직 그 곳뿐이었다. 그리고 그 곳은... 내가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아빠가 지하의 방 밖으로 나오는 것은 손님들이 왔을 때 뿐이었다. 몇달에 한 번씩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올 때면 아빠는 초췌한 모습으로 양복을 차려입고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며칠 뒤엔 더욱 지쳐 보이는 모습으로 돌아와 묵묵히 지하실로 향했다. "여보... 제발... 좀 쉬어요." "외국 기업에서 우리 아이디어랑 같은 걸로 특허를 내버렸어. 이틀만 더 빨리 작업해서 발표했으면 막을 수 있었는데 손도 못 써보고 당했어. 지금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야. 더 앞서 가지 않으면 안돼. 아무도 따라오지 못 할 만큼 기발하고 새로운 혁신적인 시스템을 구축하지 않으면..."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리는 아빠의 얼굴은 너무 무서웠다. 마치 금방이라도 용암이 흘러내릴 것처럼 붉게 충혈된 눈은 어딘지 알 수 없을 만큼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빠가 돌아오면 학교에서 글쓰기로 받은 상장을 자랑하려던 나는 이내 그 생각을 접고 인형들의 방으로 들어갔다. "애들아, 애들아. 나 오늘 학교에서 상 받았다. 무슨 상이냐고? 어버이날 글쓰기 대회 최우수상. 읽어줄까? 들어봐. 우리 아빠는 언제나 바쁘십니다. 메카트로닉스 기술을 개발하시는 아빠는 오늘도 외국기업들보다 앞서 나가는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던 난 집 앞에 서 있는 구급차를 보게 되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집안에 들어선 내가 맞닥뜨린 것은 힘없는 팔을 밖으로 늘어뜨린채 들 것에 실려 나가는 아빠의 모습. 언제나 활활 타오르고 있던 아빠의 눈은 무섭게도 꼭 감겨 있었다. "아...아...아빠! 아빠아아아!" 난 정신없이 달려가 아빠의 손을 붙잡았다. 3년 만에 다시 잡아본 아빠의 손가락은 깜짝 놀랄 만큼 가늘고 차가웠다. 마치 당장이라도 바스러져 버릴 것처럼. "민아야, 민아야. 이리 와, 민아야. 아빠 괜찮으셔. 걱정하지 말고..." 옆에 있던 엄마는 황급히 나를 달래며 아빠로부터 떼어놓으려 했지만, 난 꼭 잡은 손가락을 놓지 않았다. 지금 놓으면 언제 다시 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다시 잡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불안한 직감이 온몸을 엄습했다. 하지만 결국 아빠는 떠났다. 점점 느릿하게 늘어지는 사이렌 소리만을 남긴 채...
사흘 뒤, 난 처음으로 아빠가 입우너한 병실로 문병을 갔다. 파리한 얼굴에 산소호흡기를 쓰고 팔엔 링거를 잔뜩 꽂은 채 잠을 자고 있는 아빠. 난 겨우 유리창 너머로 그 모습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걱정 마, 민아야. 며칠 지나면 돌아오실 거야. 그러니까 집에 가서 기다리자." "정말?" "그래. 아빠 금방 건강해져서... 민아 선물 잔뜩 사 들고 오실거야."
그로부터 일주일이 흘렀다. 여느 때처럼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웬일인지 현관문이 열려 있었다. 엄마는 아직 병원에 계실 시간인데... 고개를 갸우뚱하며 집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ㅡ, 내 귀에 정말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오니, 민아야." 엄마의 말대로, 아빠가 돌아온 것이다. 마치 3년 전 처럼 편안한 얼굴로 나를 향해 두 팔을 벌려 보이는 아빠. "아... 아빠!" 난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신발도 다 벗지 못하고서 아빠의 품 속으로 뛰어들었다. 와락 끌어안은 아빠의 품에선 오랜 시간 잊고 있었던 푸근한 체취가 물씬 느껴졌다. "아빠... 아빠 이제 괜찮은 거야?" "응. 푹 쉬어서... 이제 괜찮아." "그럼, 다시 병원 안 가도 되는 거지?" "그래, 이제 집에 있을 거야." "또 지하실에 갈 거야?" "...아니, 몸 다 나을 때까지 여기서 우리 공주님이랑 놀 거야." "정~말? 아빠, 아빠, 그럼 인형놀이 하자!" 난 곧장 아빠의 손을 잡고 인형의 방으로 뛰어 올라갔다.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아빠가 다시 인형놀이를 하면서 놀아주는 날을... 3년 만에 다시 시작된 아빠와의 인형 놀이. 간만의 복귀가 어색했는지 헛기침을 몇 번 하곤 칼칼한 목소릴 말을 시작했다. "어이쿠, 우리 캔디 왔구나?" "네, 아빠. 엄마는요?" "잠깐 시장에 나갔단다. 학교에선 별일 없었니?" "놀라지 마세요. 짜잔~ 오늘 학교에서 상 받았어요." "오, 장한 우리 딸, 참 잘 했구나! 무슨 상이니?" "어버이날 글쓰기 상이에요." "어버이날 글쓰기? 어디 한번 읽어주지 않으련?" "에헴, 듣고 너무 감동받지 마세요. 너무 감동해서 심장마비가 올지도 모르니까... 그럼 시작할게요. 우리 아빠는 언제나 바쁘십니다. 메카트로닉스 기술을 개발하는 아빠는 오늘도 외국 기업들보다 앞서 나가는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연구를 계속하고..." 말은 인형놀이라고 했지만, 내가 제일 먼저 아빠에게 해주고 싶었던 일은 그 글을 읽어드리는 것이었다. 이런 날을 꿈꾸며 수도 없이 되뇌어서 이미 외우게 된 그 글을... "아빠가 예전처럼 자주 놀아주지 않으시는 건 마음 아프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아빠는 오늘도 보다 많은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 "어때요? 잘 썼죠?" "그래, 정말 잘 썼구나. 아빠는 너무... 감동했단다. 민아야..." "에이 아빠, 민아가 아니라 캔디잖아요." 너무 오랜만에 하는 인형놀이라 그런지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는 아빠. 아빠답지 않은 실수에 난 활짝 웃으며 아빠의 얼굴을 올려다봤지만, 그때 그의 얼굴은 코피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가슴 철렁한 오싹함이 등골을 스치는 순간, 아빠는 힘겹에 손을 뻗어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아...아빠?" "고맙고... 미안하다... 민아야. 부디 행..행복... 사랑한.." "아빠...아, 아빠. 왜 그래? 정말 심장마비 온 거야? 아빠, 아빠!" 그렇게 아빠는 앉은 채 숨을 거두셨다. 곧 병원에서 사라진 아빠를 찾아 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그런 아빠의 모습을 보고 목 놓아 우셨다. 그때까지 멍하게 아빠 옆에 앉아 있던 나는 뒤늦은 후회의 눈물을 쏟아냈다. "내가.. 내가... 내가 인형놀이 하자고 하는 바람에... 아빠 더 쉬어야 하는데... 내가.. 인형놀이 하자고 하는 바람에... 내가... 괜히 글쓰기 한 거 읽어주는 바람에..." 그것이 내가 아는 아빠의 삶이었다. 좁은 책상에 묶여 끊임없이 스스로를 채찍질 하다가 세상의 즐거움 같은 건 하나도 알지 못한 채 떠나버린 아빠, 공돌이 아빠.
아빠의 장례식 날, 3년 전에 아빠를 찾아왔던 아빠의 친구는 아빠의 관을 붙잡고 오열을 금치 못했다. "내가 자네를 죽인 건가? 내가 자네에게 열어준 그 길이... 저승길이 된 건가? 내가... 내가.. 허, 허어... 허어... 어..." 이후 아저씨는 아빠의 장례식과 더불어 아빠가 하던 사업을 정비하는 일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9개월 뒤 엄마와 결혼했다. 말은 결혼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살림을 합친 정도였고, 엄마와 아저씨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적은 별로 없었다. 아마 엄마는 나를 결손가정에서 키우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이후 난 아저씨를 따라 외국 생활을 시작했다. 아저씨는 나에게 수많은 일들을 해보길 권했고, 연극도 그중 하나였다. 아빠가 세상을 떠난 이후 인형놀이라는 유일한 취미를 잃어버렸는데 연극은 그런 나를 마약 같은 중독성으로 사로잡았다. 그렇게 몇 년을 정신없이 보냈다. 하지만 아빠의 마지막 모습은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남아 그림자처럼 떠날 줄을 몰랐다. 친구들과 신나게 떠들다가도 울컥 그 모습이 떠오를 때면 아무도 없는 곳으로 뛰어가 소리 없이 울곤 했으니까. 평소 나에게 눈길 한번 준 적 없으면서 덜컥 그런 상처만 남겨놓고 간 그가 못 견디게 미웠다.
비자 기간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올 때면 난 그런 아빠를 조금이나마 이해해보려고 노력했다. 그의 행동을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으면 그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런 노력 중에도 난 단 한번도 아빠가 지냈던 지하실에 내려가 본 적이 없었다. 지하실로 가는 문 앞에 서 있으면 지금도 아빠가 그 안에 있을 것 같은, 금방이라도 아빠가 문을 열고 걸어 나올 것만 같은 두근거림과 두려움이 먼저 밀려왔기 때문이다. 이 방에 특별한 마력이라도 있는 것처럼 늘 홀린 듯한 표정으로 계단을 내려가던 아빠. 나 또한 그 마력에 취해 빠져나오지 못 할 것만 같다는 두려움에 난 끝내 지하로 향하는 문을 열지 못했다. 결국 1년간의 한국 유학을 결심하고 돌아왔을 때에도 내가 제일 먼저 취한 행동은 문 위에 못질을 하고, 도배지를 발라 문을 가려버린 것이었다. 문에 못을 박는 그 소리가 안에서 문을 두드리는 아빠의 노크 소리만 같아서 망치질을 하는 내내 얼마나 울었는 지 모른다. 그리고 그로부터 10개월 뒤. 아빠를 이해해 보고자 시작했던 나의 한국 생활은 전혀 의외의 결실을 거두게 되었다. "공주님~~" 서툴게, 하지만 너무나 조심스럽게 내게 여린 손을 내밀어줬던 그 사람. 그동안 아빠에게 부리지 못했던 어리광들을 그는 모두 받아주었다. 아빠의 눈은 늘 책상을 향해 있었지만, 그의 눈은 늘 나를 향해 있었다. 아빠의 그림자를 지워주는 것 같은 그 따스함에 취해 나른한 꿈을 꾸고 일어났을 때 그는 내 마음속에 너무나 큰 존재로 자리잡고 있었다. 사랑하고 있다. 그건 몹시도 낯설고 무서운 기분이었다. 두근 거리고, 부끄럽고, 숨기고 싶지만, 어떻게든 말하고 싶은 그 맘을 난 이해할 수 없었다. 참 행복했다.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를 만큼 행복에 취해 살았다. 뒤돌아볼 새도 없이 다가올 내일만 손꼽아 기다리며 지냈다. 물론 가슴 아팠던 적도, 야속했던 날도 있지만... 그조차... 행복했다.
그로부터 다시 2년. 그와의 결혼식을 하루 앞두고 난 지난 일기장을 쭉 읽어보면서 추억에 잠겼다. 주변 사람들은 너무 서두르는 것 아니냐면서 만류했지만 이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었다. "공주님만 바라보고, 공주님만 사랑하는... 공주님의 기사가 되겠습니다." 그의 한마디에 다른 것은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반해버렸으니까. 다시 생각해도 가슴 찡한 그의 모습에 눈시울을 붉히고 있을 때, 노크 소리와 함께 그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기억_늦었는데 안자? 민아_기억아. 나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어. 이제는, 아니 그와 함께라면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기억_정말이네... 이런곳에 문이... 문을 가리고 있던 도배지를 뜯어내고 박혀 있던 못을 장도리로 뽑은 뒤 손잡일르 돌리자 "끼이이이익..." 하고 노곤한 기지개를 켜며 길을 열어주는 문. 곧 묵은 공기 냄새가 물씬 풍기는 어두우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억_이거... 이렇게 보니까 무슨 던전 입구 같은데? 대체 이 안에 뭐가 있는거야? 민아_나도 그게 궁금해서 그래. 기억아, 먼저 들어가서... 좀 봐주지 않을래? 기억_으음, 그러지 뭐. 손전등 같은 거 어디 없나? 무리한 내 부탁에도 싫은 기색 없이 손전등을 켜 들고 계단을 내려가는 그. 잠시 후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계단 밑에서 불빛이 올라왔다. 민아 - 어때? 뭐.... 재밌는 거라도 있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간신히 참으며 그에게 물었을 때, 그는 경외감이 가득한 눈빛으로 방안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_오, 공주, 여기 정말 엄청난데? 빨리 내려와봐. 그냥 빈방일 뿐인데도 어떤 열정 같은 게 뼛속까지 스미는 것 같아. 정말.... 어떤 의지와 노력의 정수 같은 게 느껴진다고 할까? 이미 이 방의 분위기에 심취해버린 듯한 그의 반응에 난 덜컥 겁이 났다. 혹시 기억이도 이 방의 마력에 사로잡혀 버린 걸까? 그때, 그가 책상 앞을 막고 있던 의자를 조금 치우며 나를 불렀다. 기억_공주.... 혹시 이거 본 적 있어? 이 책상에.... 민아_.....어떤 거? 내 물음에 책상 위를 가볍게 손으로 두드려 보이는 그. 가까이 다가가 책상을 내려다본 순간, 가슴에 벅차오른 어떤 감정이 심장을 꽈악 죄어 왔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제일 센 나라가 되게 해주세요."
이젠 기억조차 나지 않는 나의 소원을 적은 도화지 한 장과, 그 주변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내 사진들. 사진 밑에도 정성들여 적은 설명들이 빠짐없이 달려있었다.
난 아빠의 책상을 본 적이 없었다. 어린 시절 이 책상은 나에게 너무 높았고, 내가 이 책상보다 컸을 때에도 늘 아빠가 책상 앞을 지키고 있었기에 그 위에 뭐가 있는지는 본 적이 없었다. 늘 아빠가 바라보고 있던 곳, 그곳엔 내가 있었다. 민아_... 아... 아빠...!! 기억_공주님을... 정말로 사랑하셨나 봐. 민아_기억아~!! 결국 참지 못한 눈물을 쏟아내며 난 그와 함께 이 곳에 들어오길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만약 혼자 이곳에 왔더라면 지금 내게 가슴을 빌려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테니까. 말없이 내 등을 토닥여주는 그의 훔에서 난 다시 한번 확신했다. 이 사람에게라면 정말로 사랑받을 수 있다고. 비록 먼 곳만 바라보는 것 같아도 그 시선의 끝에 내가 있을거라고. 그것이... 공대생의 사랑이라고 아빠는 내게 가르쳐주었다. 민아_... 사랑해. 기억_아, 땡큐. 민아_.... 비록 무드는 없지만.
★공대생의 사랑 이야기
"아빠, 아빠는 직업이 뭐야?"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 가정환경 조사서를 받은 나는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는 늘 집에 있는 책상에 앉아 책을 읽거나, 이상한 그림을 그리거나, 조그만 장난감들을 만지는 일밖에 하지 않았고 내가 아는 한 그런 직업은 세상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유, 우리 딸... 아빠 직업? 아빠는 공돌이야."
"공돌이? 곰돌이가 아니고?"
"응. 공돌이."
"그게 뭔데?"
"음... 먼 미래를 가까운 미래로 만드는 사람."
"먼 미래를... 가까운 미래로?"
어린 마음에도 아빠의 그말이 참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당하게 아빠 직업란에 '공돌이'라고 적어서 냈다. 그리고 선생님한테 혼났다.
"민아야, 아빠 직업이 공돌이가 뭐니? 공돌이는... 나쁜 말이야. '직업엔 귀천이 없다'는 소리 못 들어봤니? 아빠는 민아를 위해서 열심히 공장에서 일하시는데..."
난데없는 꾸지람에 억울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땐 설움이 복받쳐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책상을 두드려 대며 "민아네 아빠는 공돌이래요~"라고 나를 놀려대는 아이들의 반응에 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어버렸다. 집에 돌아온 난, 곧장 아빠의 방으로 뛰어들어가 소리쳤다.
"아빠 나빠! 뭐가 공돌이야! 선생님한테 혼났잖아!"
"응? 선생님한테 혼났다니..., 왜?"
난 가방 속에 꼬깃꼬깃 접어온 생활기록부를 아빠 앞에 내밀었다. 그곳엔 굵은 빨간 글씨로 "아이가 아빠 직업에 대해 좋지 않은 편견을 가지게 된 듯합니다. 지도를 부탁드립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어이쿠 이런... 아니 난... 이런데 쓰려는 건 줄은 몰랐지. 이걸 어쩌나? 여보, 잠깐만 이리 와봐요. 내가 또 큰 사고를 쳐버렸네."
잠시후, 엄마가 내게 돌려준 가정환경 조사서에는 '메카드로닉스 제어 및 구현기술 개발자'라는 정말 생소한 직업이 적혀 있었다. 그렇게 사건이 마무리되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몇 달 만에 아빠와 집 앞 공원에 놀러 나간 나는 신이 나서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지난번에 왜 아빠 직업이 공돌이라고 했어? 선생님이 그거 나쁜말이래."
"음? 민아도 공돌이란 말이 마음에 안드니?"
"아니, 난 좋은 말 같은데, 선생님이 그건 아빠 직업을 굉장히 나쁘게 말하는 거라고..."
"그래? 왜 그런가 모르겠구나. 아빠도 공돌이란 말이 참 좋은데. 공돌이, 공돌이... 부르기 쉽고 친근하고 얼마나 좋니?"
아빠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한참을 웃었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 나도 같이 웃었다. 우리 아빠는 누가 뭐래도 공돌이였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어느날, 우리 집에 낯선 손님이 찾아왔다. 엄청 큰 자동차를 타고 검은 양복을 입은 아저씨들과 함께 집으로 들어온 아저씨. 아빠는 그 아저씨를 두 팔 벌려 환영했지만, 날카로운 금테 안경이 왠지 무서워 보였던 난 거실 문 뒤에 숨어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이 친구야, 자게 아직까지 이러고 있나?"
"음? 아니 이게 뭐 어때서.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많이 좋아졌어. 사람들도 조금씩 관심을 가지고 투자하기 시작했고..."
"그걸 말이라고 하는거야? 외국에선 자네 같은 사람을 혈안이 되어 찾고 있는데...!"
"어유, 밖에서 부른다고 다 나가면 집 지킬 사람이 없잖아. 나처럼 부족한 사람이라도 하나 남아 있어야..."
다른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싫어하던 아빠가 저렇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걸로 보아 분명 아빠의 오랜 친구인 듯 했다.
"요즘은 또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나?"
"아, 한번 보겠나? 제법 반응 좋은 것들도 있는데..."
아빠가 방에서 가져온 두꺼운 종이뭉치들을 한참동안 살펴보던 아저씨는 놀란 눈빛으로 아빠에게 물었다.
"이거... 다른 사람한테도 보여준 적 있나?"
"아니, 그건 아직 관심을 보이는 회사들이 없어서..."
"자네가 해."
"응? 무슨 소리야, 그건?"
"내가 투자할게. 이거 다른 사람 준다고 될 일 아니야. 자네가 해봐."
"에이, 됐어. 자네도 알잖아? 나 사업 수완 엉망인 거. 사람 대하는 것도 서툴고."
"헤드헌터들한테 의뢰해서 경영인이고 뭐고 필요한 만큼 구해 다 줄게. 프레젠테이션 때 쓸 자료만 간단하게 뽑아줘. 내가 책임 지고..."
그 아저씨가 다녀간 이후, 아빠는 굉장히 바빠졌다. 하는 일은 평소나 별로 다를 게 없어 보였지만 1분, 1초가 아깝다는 얼굴로 계속 책상 앞에만 앉아 있는 아빠를 보면 정말 뭔가 열심히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 바빠?"
"응, 무슨 일이니, 민아야?"
"인형놀이 하자."
"아... 저기, 아빠가 지금 꼭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안 되겠다. 대신... 아빠가 다음에 민아 사달라던 그, 뭐더라, 주둥이 인형 사줄게."
"주둥이가 아니라 주디 인형."
며칠 후 아빠는 정말로 주디 인형을 사다 주었다. 하지만 인형 놀이는 해주지 않았다.
"아빠..."
"응, 왜?"
"산책 가자."
"으응? 뭐라고? 과자?"
"... 아냐. 아무것도."
책상 앞에만 앉아 있던 아빠는 어느덧 내 얼굴조차 쳐다보지 않게 되었다. 아빠는 바빴다. 내가 학교에 갈 때도, 학교에서 돌아 왔을 때도 아빠는 끊임없이 뭔가를 쓰고 지우는 일을 반복했다. 엄마는 그런 아빠에게 몇 번이나 쉬어가면서 하라고 말했지만, 아빠는 어깨 너머로 손만 흔들어 보일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3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아빠가 변함없이 책상에 앉아 있는 사이 인형들은 늘어만 갔고, 우리 가족은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민아야, 어때? 새집 마음에 들어?"
"응, 너무 좋아. 이제 내 방도 생기는 거야?"
"그럼. 민아 인형들 자는 방도 따로 있는 것?"
새로 이사한 집은 정원에 발코니가 있는 2층짜리 집이었다. 여덟개나 되는 방은 침실이며, 서재며, 놀이방으로 꾸며졌고 정원엔 갖가지 꽃과 나무가 자라게 되었다.
"아빠는? 아빠 방은 어디 있어?"
"아빠 방은 지하에 있어. 지금은 일하시니까, 나중에 보러 가자."
아빠의 방은 지하에 있었다. 아빠도 거기 있었다. 이 넓은 집안에서 아빠의 공간은 오직 그 곳뿐이었다. 그리고 그 곳은... 내가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아빠가 지하의 방 밖으로 나오는 것은 손님들이 왔을 때 뿐이었다. 몇달에 한 번씩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올 때면 아빠는 초췌한 모습으로 양복을 차려입고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며칠 뒤엔 더욱 지쳐 보이는 모습으로 돌아와 묵묵히 지하실로 향했다.
"여보... 제발... 좀 쉬어요."
"외국 기업에서 우리 아이디어랑 같은 걸로 특허를 내버렸어. 이틀만 더 빨리 작업해서 발표했으면 막을 수 있었는데 손도 못 써보고 당했어. 지금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야. 더 앞서 가지 않으면 안돼. 아무도 따라오지 못 할 만큼 기발하고 새로운 혁신적인 시스템을 구축하지 않으면..."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리는 아빠의 얼굴은 너무 무서웠다. 마치 금방이라도 용암이 흘러내릴 것처럼 붉게 충혈된 눈은 어딘지 알 수 없을 만큼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빠가 돌아오면 학교에서 글쓰기로 받은 상장을 자랑하려던 나는 이내 그 생각을 접고 인형들의 방으로 들어갔다.
"애들아, 애들아. 나 오늘 학교에서 상 받았다. 무슨 상이냐고? 어버이날 글쓰기 대회 최우수상. 읽어줄까? 들어봐. 우리 아빠는 언제나 바쁘십니다. 메카트로닉스 기술을 개발하시는 아빠는 오늘도 외국기업들보다 앞서 나가는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던 난 집 앞에 서 있는 구급차를 보게 되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집안에 들어선 내가 맞닥뜨린 것은 힘없는 팔을 밖으로 늘어뜨린채 들 것에 실려 나가는 아빠의 모습. 언제나 활활 타오르고 있던 아빠의 눈은 무섭게도 꼭 감겨 있었다.
"아...아...아빠! 아빠아아아!"
난 정신없이 달려가 아빠의 손을 붙잡았다. 3년 만에 다시 잡아본 아빠의 손가락은 깜짝 놀랄 만큼 가늘고 차가웠다. 마치 당장이라도 바스러져 버릴 것처럼.
"민아야, 민아야. 이리 와, 민아야. 아빠 괜찮으셔. 걱정하지 말고..."
옆에 있던 엄마는 황급히 나를 달래며 아빠로부터 떼어놓으려 했지만, 난 꼭 잡은 손가락을 놓지 않았다. 지금 놓으면 언제 다시 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다시 잡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불안한 직감이 온몸을 엄습했다. 하지만 결국 아빠는 떠났다. 점점 느릿하게 늘어지는 사이렌 소리만을 남긴 채...
사흘 뒤, 난 처음으로 아빠가 입우너한 병실로 문병을 갔다. 파리한 얼굴에 산소호흡기를 쓰고 팔엔 링거를 잔뜩 꽂은 채 잠을 자고 있는 아빠. 난 겨우 유리창 너머로 그 모습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걱정 마, 민아야. 며칠 지나면 돌아오실 거야. 그러니까 집에 가서 기다리자."
"정말?"
"그래. 아빠 금방 건강해져서... 민아 선물 잔뜩 사 들고 오실거야."
그로부터 일주일이 흘렀다. 여느 때처럼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웬일인지 현관문이 열려 있었다. 엄마는 아직 병원에 계실 시간인데... 고개를 갸우뚱하며 집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ㅡ, 내 귀에 정말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오니, 민아야."
엄마의 말대로, 아빠가 돌아온 것이다. 마치 3년 전 처럼 편안한 얼굴로 나를 향해 두 팔을 벌려 보이는 아빠.
"아... 아빠!"
난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신발도 다 벗지 못하고서 아빠의 품 속으로 뛰어들었다. 와락 끌어안은 아빠의 품에선 오랜 시간 잊고 있었던 푸근한 체취가 물씬 느껴졌다.
"아빠... 아빠 이제 괜찮은 거야?"
"응. 푹 쉬어서... 이제 괜찮아."
"그럼, 다시 병원 안 가도 되는 거지?"
"그래, 이제 집에 있을 거야."
"또 지하실에 갈 거야?"
"...아니, 몸 다 나을 때까지 여기서 우리 공주님이랑 놀 거야."
"정~말? 아빠, 아빠, 그럼 인형놀이 하자!"
난 곧장 아빠의 손을 잡고 인형의 방으로 뛰어 올라갔다.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아빠가 다시 인형놀이를 하면서 놀아주는 날을...
3년 만에 다시 시작된 아빠와의 인형 놀이. 간만의 복귀가 어색했는지 헛기침을 몇 번 하곤 칼칼한 목소릴 말을 시작했다.
"어이쿠, 우리 캔디 왔구나?"
"네, 아빠. 엄마는요?"
"잠깐 시장에 나갔단다. 학교에선 별일 없었니?"
"놀라지 마세요. 짜잔~ 오늘 학교에서 상 받았어요."
"오, 장한 우리 딸, 참 잘 했구나! 무슨 상이니?"
"어버이날 글쓰기 상이에요."
"어버이날 글쓰기? 어디 한번 읽어주지 않으련?"
"에헴, 듣고 너무 감동받지 마세요. 너무 감동해서 심장마비가 올지도 모르니까... 그럼 시작할게요. 우리 아빠는 언제나 바쁘십니다. 메카트로닉스 기술을 개발하는 아빠는 오늘도 외국 기업들보다 앞서 나가는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연구를 계속하고..."
말은 인형놀이라고 했지만, 내가 제일 먼저 아빠에게 해주고 싶었던 일은 그 글을 읽어드리는 것이었다. 이런 날을 꿈꾸며 수도 없이 되뇌어서 이미 외우게 된 그 글을...
"아빠가 예전처럼 자주 놀아주지 않으시는 건 마음 아프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아빠는 오늘도 보다 많은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
"어때요? 잘 썼죠?"
"그래, 정말 잘 썼구나. 아빠는 너무... 감동했단다. 민아야..."
"에이 아빠, 민아가 아니라 캔디잖아요."
너무 오랜만에 하는 인형놀이라 그런지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는 아빠. 아빠답지 않은 실수에 난 활짝 웃으며 아빠의 얼굴을 올려다봤지만, 그때 그의 얼굴은 코피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가슴 철렁한 오싹함이 등골을 스치는 순간, 아빠는 힘겹에 손을 뻗어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아...아빠?"
"고맙고... 미안하다... 민아야. 부디 행..행복... 사랑한.."
"아빠...아, 아빠. 왜 그래? 정말 심장마비 온 거야? 아빠, 아빠!"
그렇게 아빠는 앉은 채 숨을 거두셨다.
곧 병원에서 사라진 아빠를 찾아 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그런 아빠의 모습을 보고 목 놓아 우셨다. 그때까지 멍하게 아빠 옆에 앉아 있던 나는 뒤늦은 후회의 눈물을 쏟아냈다.
"내가.. 내가... 내가 인형놀이 하자고 하는 바람에... 아빠 더 쉬어야 하는데... 내가.. 인형놀이 하자고 하는 바람에... 내가... 괜히 글쓰기 한 거 읽어주는 바람에..."
그것이 내가 아는 아빠의 삶이었다. 좁은 책상에 묶여 끊임없이 스스로를 채찍질 하다가 세상의 즐거움 같은 건 하나도 알지 못한 채 떠나버린 아빠, 공돌이 아빠.
아빠의 장례식 날, 3년 전에 아빠를 찾아왔던 아빠의 친구는 아빠의 관을 붙잡고 오열을 금치 못했다.
"내가 자네를 죽인 건가? 내가 자네에게 열어준 그 길이... 저승길이 된 건가? 내가... 내가.. 허, 허어... 허어... 어..."
이후 아저씨는 아빠의 장례식과 더불어 아빠가 하던 사업을 정비하는 일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9개월 뒤 엄마와 결혼했다. 말은 결혼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살림을 합친 정도였고, 엄마와 아저씨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적은 별로 없었다. 아마 엄마는 나를 결손가정에서 키우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이후 난 아저씨를 따라 외국 생활을 시작했다. 아저씨는 나에게 수많은 일들을 해보길 권했고, 연극도 그중 하나였다. 아빠가 세상을 떠난 이후 인형놀이라는 유일한 취미를 잃어버렸는데 연극은 그런 나를 마약 같은 중독성으로 사로잡았다.
그렇게 몇 년을 정신없이 보냈다. 하지만 아빠의 마지막 모습은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남아 그림자처럼 떠날 줄을 몰랐다. 친구들과 신나게 떠들다가도 울컥 그 모습이 떠오를 때면 아무도 없는 곳으로 뛰어가 소리 없이 울곤 했으니까. 평소 나에게 눈길 한번 준 적 없으면서 덜컥 그런 상처만 남겨놓고 간 그가 못 견디게 미웠다.
비자 기간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올 때면 난 그런 아빠를 조금이나마 이해해보려고 노력했다. 그의 행동을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으면 그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런 노력 중에도 난 단 한번도 아빠가 지냈던 지하실에 내려가 본 적이 없었다. 지하실로 가는 문 앞에 서 있으면 지금도 아빠가 그 안에 있을 것 같은, 금방이라도 아빠가 문을 열고 걸어 나올 것만 같은 두근거림과 두려움이 먼저 밀려왔기 때문이다.
이 방에 특별한 마력이라도 있는 것처럼 늘 홀린 듯한 표정으로 계단을 내려가던 아빠. 나 또한 그 마력에 취해 빠져나오지 못 할 것만 같다는 두려움에 난 끝내 지하로 향하는 문을 열지 못했다. 결국 1년간의 한국 유학을 결심하고 돌아왔을 때에도 내가 제일 먼저 취한 행동은 문 위에 못질을 하고, 도배지를 발라 문을 가려버린 것이었다. 문에 못을 박는 그 소리가 안에서 문을 두드리는 아빠의 노크 소리만 같아서 망치질을 하는 내내 얼마나 울었는 지 모른다.
그리고 그로부터 10개월 뒤. 아빠를 이해해 보고자 시작했던 나의 한국 생활은 전혀 의외의 결실을 거두게 되었다.
"공주님~~"
서툴게, 하지만 너무나 조심스럽게 내게 여린 손을 내밀어줬던 그 사람. 그동안 아빠에게 부리지 못했던 어리광들을 그는 모두 받아주었다. 아빠의 눈은 늘 책상을 향해 있었지만, 그의 눈은 늘 나를 향해 있었다. 아빠의 그림자를 지워주는 것 같은 그 따스함에 취해 나른한 꿈을 꾸고 일어났을 때 그는 내 마음속에 너무나 큰 존재로 자리잡고 있었다.
사랑하고 있다. 그건 몹시도 낯설고 무서운 기분이었다. 두근 거리고, 부끄럽고, 숨기고 싶지만, 어떻게든 말하고 싶은 그 맘을 난 이해할 수 없었다.
참 행복했다.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를 만큼 행복에 취해 살았다. 뒤돌아볼 새도 없이 다가올 내일만 손꼽아 기다리며 지냈다. 물론 가슴 아팠던 적도, 야속했던 날도 있지만... 그조차... 행복했다.
그로부터 다시 2년. 그와의 결혼식을 하루 앞두고 난 지난 일기장을 쭉 읽어보면서 추억에 잠겼다. 주변 사람들은 너무 서두르는 것 아니냐면서 만류했지만 이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었다. "공주님만 바라보고, 공주님만 사랑하는... 공주님의 기사가 되겠습니다." 그의 한마디에 다른 것은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반해버렸으니까.
다시 생각해도 가슴 찡한 그의 모습에 눈시울을 붉히고 있을 때, 노크 소리와 함께 그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기억_늦었는데 안자?
민아_기억아. 나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어.
이제는, 아니 그와 함께라면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기억_정말이네... 이런곳에 문이...
문을 가리고 있던 도배지를 뜯어내고 박혀 있던 못을 장도리로 뽑은 뒤 손잡일르 돌리자 "끼이이이익..." 하고 노곤한 기지개를 켜며 길을 열어주는 문. 곧 묵은 공기 냄새가 물씬 풍기는 어두우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억_이거... 이렇게 보니까 무슨 던전 입구 같은데? 대체 이 안에 뭐가 있는거야?
민아_나도 그게 궁금해서 그래. 기억아, 먼저 들어가서... 좀 봐주지 않을래?
기억_으음, 그러지 뭐. 손전등 같은 거 어디 없나?
무리한 내 부탁에도 싫은 기색 없이 손전등을 켜 들고 계단을 내려가는 그. 잠시 후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계단 밑에서 불빛이 올라왔다.
민아 - 어때? 뭐.... 재밌는 거라도 있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간신히 참으며 그에게 물었을 때, 그는 경외감이 가득한 눈빛으로 방안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_오, 공주, 여기 정말 엄청난데? 빨리 내려와봐. 그냥 빈방일 뿐인데도 어떤 열정 같은 게 뼛속까지 스미는 것 같아. 정말.... 어떤 의지와 노력의 정수 같은 게 느껴진다고 할까?
이미 이 방의 분위기에 심취해버린 듯한 그의 반응에 난 덜컥 겁이 났다. 혹시 기억이도 이 방의 마력에 사로잡혀 버린 걸까? 그때, 그가 책상 앞을 막고 있던 의자를 조금 치우며 나를 불렀다.
기억_공주.... 혹시 이거 본 적 있어? 이 책상에....
민아_.....어떤 거?
내 물음에 책상 위를 가볍게 손으로 두드려 보이는 그. 가까이 다가가 책상을 내려다본 순간, 가슴에 벅차오른 어떤 감정이 심장을 꽈악 죄어 왔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제일 센 나라가 되게 해주세요."
이젠 기억조차 나지 않는 나의 소원을 적은 도화지 한 장과, 그 주변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내 사진들. 사진 밑에도 정성들여 적은 설명들이 빠짐없이 달려있었다.
난 아빠의 책상을 본 적이 없었다. 어린 시절 이 책상은 나에게 너무 높았고, 내가 이 책상보다 컸을 때에도 늘 아빠가 책상 앞을 지키고 있었기에 그 위에 뭐가 있는지는 본 적이 없었다. 늘 아빠가 바라보고 있던 곳, 그곳엔 내가 있었다.
민아_... 아... 아빠...!!
기억_공주님을... 정말로 사랑하셨나 봐.
민아_기억아~!!
결국 참지 못한 눈물을 쏟아내며 난 그와 함께 이 곳에 들어오길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만약 혼자 이곳에 왔더라면 지금 내게 가슴을 빌려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테니까. 말없이 내 등을 토닥여주는 그의 훔에서 난 다시 한번 확신했다. 이 사람에게라면 정말로 사랑받을 수 있다고. 비록 먼 곳만 바라보는 것 같아도 그 시선의 끝에 내가 있을거라고. 그것이... 공대생의 사랑이라고 아빠는 내게 가르쳐주었다.
민아_... 사랑해.
기억_아, 땡큐.
민아_....
비록 무드는 없지만.
"공대생의 사랑 이야기 Vol.2(이대양 장편소설) 'Epilogue'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