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비탕, 백비 다이어트 등 비만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생생한의원 서은경 원장. 작고 가냘픈 몸매에 정겨운 사투리가 묻어나는 그녀의 첫 직장은 초등학교였다. “저희 때만 해도 여자는 교대나 사대에 진학하는 것을 최고로 여겼어요. 게다가 아버지께서 교직에 몸담고 계셔서 다른 길은 생각지 않고 자연스럽게 교대에 진학했어요. 졸업 후에는 정해진 수순대로 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았고요.” 그녀가 발령 받은 학교는 동해안의 조그만 학교. 첫 직장에 대한 설렘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부임하자마자 초등학교 1학년을 맡게 된 그녀는 적잖이 당황했다.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선생님을 바라보는 아이들을 보면서 ‘과연 내가 아이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줄 수 있을까, 혹시 잘못된 가르침으로 아이들의 인생을 망치는 것은 아닐까’ 덜컥 겁이 나고 두려웠기 때문. 이 아이들의 앞길을 이끌어줘야 한다는 사실에 그녀는 밤마다 책임감과 교사로서의 자기 능력에 대한 자괴감에 시달렸다.
아무리 좋은 직업도 내가 괴로우면 소용없다
‘처음이라서 그렇겠지’, ‘시간이 가면 괜찮아질 거야’ 스스로 위로하길 수차. 그래도 그녀의 고민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선배 교사들과의 상담도 별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자 학교에서는 당분간 휴직하며 마음을 추스르도록 배려해주었다. “6개월간 휴직하면서 정말 많은 생각을 했어요. 대학교 때는 잘 몰랐는데 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일에 대해 큰 부담을 느끼는 타입이라는 걸 그제서야 깨달았던 거죠. 교사가 아무리 좋은 평생 직업이라지만 매일매일 괴로워하며 10~20년 다니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더군요. “결국 그녀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교사를 그만뒀다. 교사가 되지 않을 바에는 다시 대학에 가야 했기에 막무가내로 공부를 시작했다. 1년 동안 혼자 학원에 다니고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며 새로운 직업을 찾다가 우연히 TV 프로그램에 등장한, 아이를 낳고 복귀한다는 한의사를 보게 되었다. 기왕 새로운 직업을 찾을 바에는 아이를 낳고서도 오래 할 수 있는 일이면 좋겠다 생각해서인지 한의학과에 새롭게 눈뜨게 되었다. 고민 끝에 문과 출신으로 교차 지원이 가능한 동국대 한의과를 목표로 1년 동안 열심히 공부했고, 마침내 한의대에 진학하면서 그녀는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지금처럼 초절정 인기학과가 되기 전이기는 했지만 그때도 과 특성상 예비역이 많았다. 자신처럼 제2의 인생을 찾아온 사람들과 어울리며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고, 한의학과 관련된 다양한 치료 요법들을 열심히 공부했다. “졸업을 하고 아이를 가진 후에 바로 개원을 했어요. 그런데 또 한 가지 고민이 생기더군요. 남에게 1 : 1로 영향을 주는 일이 싫어서 교사를 포기했는데, 이제는 진료실에서 환자를 대해야 하니 또다시 스트레스를 받게 됐거든요. 그럴 즈음에 ‘한방으로 치료하는 비만’에 눈뜨게 되었죠. 한의학의 특성상 치료 효과가 바로 나타나기 어려운데, 비만은 그나마 가시적인 효과가 금방 나타나서 맘이 편하고 또 뿌듯하더라고요.”
또 한 번 찾아온 인생의 터닝 포인트
그녀는 자신이 배운 학문과 쌓은 경력을 100% 활용할 수 있는 사업을 구상했다. 비만 환자의 경우 원격 진료의 필요성이 절실했던 상황이라 자신의 처방약을 식품으로 만들어 보급하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 그때 그녀의 나이는 30대 후반. 그대로 한의원을 운영해도 무방했지만 사업이라는 또 다른 분야에 과감하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녀가 환자에게 처방해주던 백비탕을 건강기능식품으로 업그레이드해 대량 생산을 추진했고 전국 환자들을 위한 차별화된 인터넷 쇼핑몰도 구축했다. 평범한 한의사에서 CEO 서은경으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저는 한마디로 정면 돌파형이에요. 특별한 능력이나 자신감이 있어서가 아니라 문제를 안고 있다 보면 병이 나거든요.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보다는 힘들어도 새로운 길을 찾아나서는 게 낫더군요.” 지금도 한의사 타이틀을 달고 있기는 하지만 실무는 부원장에게 맡기고 사업에 매진하고 있는 중이다. 남들이 선호하는 ‘한의사’라는 평생 직업을 갖고 있지만 그녀는 그것 때문에 행복한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녀가 준비하는 노후는 ‘궁핍하지 않은 경제력과 행복해지려는 마음가짐’이다. “30대에 준비할 수 있는 노후는 스스로 평생 만족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 아닐까요?” 노후에는 침 한 통을 가방에 넣고 의료 봉사를 다니고 싶다는 서 원장이 후배들에게 보내는 진심 어린 조언이다.
네일 아티스트가 된 은행원, 김진영
부모님의 바람으로 농협에 취직
서른네 살, 아홉 살과 일곱 살 남매를 둔 멋쟁이 엄마이자 서울 한복판에 두 개의 네일 숍을 운영하는 김진영 씨는 여라자면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조건을 갖고 있다. 그러나 5년 전만 해도 그녀는 농협중앙회에서 일하던 평범한 은행원이었다. “원래 미술에 관심이 많았어요. 하지만 예체능은 절대 안 된다며 반대하시던 부모님 뜻에 따라 영문과에 진학했죠. 졸업 후에는 항공사 취직을 소망했지만 역시나 부모님 뜻대로 안정된 직장인 은행을 선택했고요.” 젊은 날의 그녀는 보통의 딸들처럼 부모님의 뜻을 거스를 용기가 없었다. 대학 졸업 직후, 농협중앙회에 입사한 그녀는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면서 열한 살 연상의 상사를 만나 결혼했다. 결혼 후 바로 두 살 터울의 남매를 낳았다. 하루하루 쳇바퀴를 도는 듯한 회사 생활에 익숙해지긴 했지만 해가 가면 갈수록 마음속에서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 시작되고 있었다. ‘아무래도 일이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다며 남편에게 진지하게 의논했지만 “적성에 맞는 일을 하는 사람은 적다. 직업에 적성을 맞추라”는 직장 상사다운 조언이 돌아왔다. 남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평생 직장이었지만, 그녀에게는 미래 없는 우물처럼 여겨질 뿐이었다.
위기를 절호의 찬스로 바꾼 용기
“IMF 이후 농협이 축협과 합병하면서 명퇴 바람이 심하게 불었어요. 저희는 부부가 같은 직장에 다니다 보니, 은근히 부담이 됐죠. 모두들 명퇴 때문에 두려워했지만 저는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어요. 20대에는 결혼과 출산 때문에 정신없었던 데다 ‘그저 편한 게 좋은 거다’라며 살았지만 30대에는 내가 원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맘을 굳혔죠.” 그래서 퇴근 후 메이크업 학원을 다니며 공부를 시작했고 주말에는 웨딩 숍에서 아르바이트하면서 감을 익혔다. 다행히도 아이들은 시댁에서 맡아 키워주셔서 육아에 대한 어려움을 덜 수 있었다. 6개월 후 어느 정도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되자 29세의 나이로 6년을 다닌 회사에 명퇴를 신청하고(당시에 자진 명퇴는 혜택이 많았다) 본격적으로 메이크업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생각처럼 일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 동료들에 비해 너무 나이가 많았고, 방송이나 패션 일과 가정생활을 병행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당시 국내에 막 도입되었던 네일 아트에 대해 알게 되었다. 충분히 성장 가능성이 있는 분야라는 것을 깨닫고, 지인의 도움으로 네일 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일을 배웠다. 그리고 2003년, 마침내 그녀는 인생 최대의 승부수를 던졌다. “남편과 아이들을 두고 저 혼자 미국 유학을 감행했어요. 미국은 실용주의 네일 아트의 본고장이거든요. 그곳에서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한 거죠. 나이 차가 많은 남편과 열린 사고를 가진 시어머니께서는 저를 오히려 격려해주셨죠.” 이미 사회생활을 경험해본 터라 학생들보다 더 악착같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부했다. 그리고 1년 후 달랑 비행기표만 들고 떠났던 유학에서 뉴욕주의 네일 아트 자격증과 일에 대한 자신감 그리고 인생의 새로운 목표를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이름을 단 브랜드를 갖는 것이 꿈
미국에서 돌아와 그녀는 강남구 논현동에 1호점 ‘네일 포 네일’을 오픈했다. 그리고 1년 후인 지난해 12월 광화문 파이낸스 빌딩에 2호점 ‘보보 뷰티 숍’을 오픈했다. 1호점은 주부들에게, 2호점은 인근의 직장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으며 많은 단골 손님을 확보하고 있다. 두 개의 숍을 통해 얻는 수입은 꿈의 억대 연봉 수준. 잘나가던 은행원 수입의 2~3배는 훨씬 넘어서고 있다. 단지 고수익을 보장한다는 것 외에도 그녀는 네일 아트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다. “남의 손과 발을 만지는 직업이다 보니 곱지 않은 시선도 있지만, 저는 이 일이 너무 좋아요. 다른 사람을 예쁘게 변화시키는 것이 좋고 저 자신을 가꾸며 할 수 있는 일이라 더 재미있어요. 흔히 네일 아트의 성공 비결은 뛰어난 기술이라 말하지만, 저는 서비스 정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사업 철학까지 확고하게 세운 그녀의 수첩 안에는 3호점 오픈과 학교 강의에 대한 계획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언젠가는 자신의 이름을 단 네일 숍을 전국 곳곳에 내겠다는 소망도 가지고 있다. “안정적인 직업에 대한 환상을 버리세요. 요즘은 어떤 직장이든 눈에 보이지 않는 정년은 짧아지고 있으니까요. 제2의 직업만큼은 자신이 정말 좋아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겠죠. 그러기 위해선 생각만으로 멈추지 말고 실천에 옮기는 용기가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삼성맨에서 펜션 주인으로, 한규환·김소현 부부
삼성 사내 커플, 펜션 주인이 되다
홍천에 있는 동화 속 집처럼 예쁜 펜션. 오는 6월까지 주말 예약이 꽉 찼을 정도로 인기 있는 이곳(광고가 아니니 펜션 이름은 공개하지 말아달라고 했다)은 30대 초반의 젊고 감각 있는 부부가 운영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서른 살, 서른 한 살의 결혼 4년 차 부부인 한규환·김소현 씨가 그 주인공. 게다가 부부 모두 삼성에 다니던, 한마디로 잘나가던 엘리트 직장인이었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삼성 입사 동기로 만난 부부는 각각 삼성정보통신과 삼성 SDA에서 최고 연봉과 대우를 받으며 직장생활을 했다. 그러다 서로 생각이 비슷해 금세 친해져 연인이 되고 부부가 되었고, 우연한 기회에 시골생활을 꿈꾸게 되었다. “결혼한 해 가을부터 둘이서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어요. 여행을 다니다 보니 막연히 전원생활에 대한 동경이 생기더군요. 봉평 메밀꽃 축제에 갔을 때였나, 물결치던 메밀꽃밭을 바라보며 ‘우리 정말 시골에서 살까?’ 말했던 것이 계기가 되었죠.”
전원생활에 대한 동경을 현실로 이루다
아내 김소현 씨는 꼼꼼하고 싹싹한 타입이라 직장생활에 잘 적응해나갔지만, 남편 한규환 씨는 입사 2년 차가 될 무렵, 막연히 환상을 갖고 있던 직장생활이 ‘별것 없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좋은 상사 덕에 2~3년 동안 정시 퇴근을 할 수 있었고, 그 시간에 ‘나중에 시골에 예쁜 집을 짓고 살자’는 계획을 서서히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부부는 집 짓는 동호회에 가입하여 강의를 들으러 다니고 목공 일도 배우며 인테리어에 대한 공부를 서서히 시작했다. 또 시간이 나면 이곳저곳으로 집터를 보러 다니기도 했다. 처음 계획은 5년 뒤쯤 시골에 예쁜 집을 짓는 것이었지만 우연한 기회에 5천만원으로 홍천에 있는 땅을 사게 되었다. 2004년 아이를 낳고 출산 휴가를 마친 아내가 먼저 회사를 그만뒀다. 뒤이어 남편 한규환 씨도 7개월 동안 육아 휴직을 가진 후 회사에 복귀했는데 마침 새로 온 상사로 인해 지나친 철야와 야근이 반복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틀에 박힌 생활에 염증을 느끼던 이들은 예상보다 빨리 덜컥 일을 벌이게 되었다. 물론 부부 모두 ‘이곳이 아니라도 행복할 수 있다’는 확신과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홍천에 땅을 산 것은 스키를 좋아하는 남편과 겨울 바다를 좋아하는 아내의 취향을 고려한 것이고, ‘시골의 예쁜 집’을 펜션으로 운영하기로 한 건 경제 활동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펜션을 열었지만 홈페이지를 운영하자마자 이들은 금세 유명해졌다.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 진정한 휴식을 위한 배려, 남다른 인생관을 나눌 수 있는 주인장까지, 펜션을 한 번 다녀간 사람들은 누구나 이곳의 단골이 되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해서 3년 안에 빚 갚자’, ‘주말에만 손님을 채우자’던 목표는 무리없이 달성되고 있다. “올해 번 돈으로 두 사람이 똑같이 용돈을 나눠 가졌어요. 저는 갖고 싶었던 오토바이를 샀고, 아내는 아이들 데리고 1개월간 유럽 여행을 떠났죠.” 그래서 소현 씨는 인터뷰할 시점에 뉴욕, 파리, 일본, 도쿄를 경유하는 2달간의 여행길에 올라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자기 자신을 추스르고, 레스토랑 등을 비롯한 새로운 펜션 확장 사업에 필요한 자료도 모아올 예정이라고.
하고 싶은 것, 지금 하라
기사를 위해 인터뷰를 요청하자 아내 소현 씨는 먼 이국 땅에서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다. 소현 씨가 20대 중반일 때 돌아가신 친정아버지는 “나중에 나이가 들면 꼭 이렇게 살자”는 류의 말씀을 많이 하셨단다. 그러나 결국 아버지는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래서 소현 씨는 ‘한 번 사는 인생, 정말 원하는 것을 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슴 깊이 품게 된 것. 이 사건을 계기로 그녀는 잘 먹고 잘사는 노후보다는 원하는 걸 하면서 사는 마음이 풍요로운 노후를 꿈꾸게 되었다. “노후 대책의 다른 말인 ‘멋지게 죽음을 맞이하는 삶’이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대로 사는 것임을 깨달았어요. 남들이 연금이나 부동산, 펀드 상품을 검색해보고 비교해보는 시간에 저는 저 자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자문해보았고, 30대에 시작하는 나만의 노후 대책으로 이 길을 선택한 거죠. 저의 60대가 경제적으로 풍요로울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남은 30년간 키워나갈 우리 가족의 정신적인 풍요로움은 확신할 수 있어요.”
30대에 적성을 찾은 사람들
교사에서 한의사로 변신, 서은경
백비탕, 백비 다이어트 등 비만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생생한의원 서은경 원장. 작고 가냘픈 몸매에 정겨운 사투리가 묻어나는 그녀의 첫 직장은 초등학교였다. “저희 때만 해도 여자는 교대나 사대에 진학하는 것을 최고로 여겼어요. 게다가 아버지께서 교직에 몸담고 계셔서 다른 길은 생각지 않고 자연스럽게 교대에 진학했어요. 졸업 후에는 정해진 수순대로 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았고요.” 그녀가 발령 받은 학교는 동해안의 조그만 학교. 첫 직장에 대한 설렘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부임하자마자 초등학교 1학년을 맡게 된 그녀는 적잖이 당황했다.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선생님을 바라보는 아이들을 보면서 ‘과연 내가 아이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줄 수 있을까, 혹시 잘못된 가르침으로 아이들의 인생을 망치는 것은 아닐까’ 덜컥 겁이 나고 두려웠기 때문. 이 아이들의 앞길을 이끌어줘야 한다는 사실에 그녀는 밤마다 책임감과 교사로서의 자기 능력에 대한 자괴감에 시달렸다.
아무리 좋은 직업도 내가 괴로우면 소용없다
‘처음이라서 그렇겠지’, ‘시간이 가면 괜찮아질 거야’ 스스로 위로하길 수차. 그래도 그녀의 고민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선배 교사들과의 상담도 별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자 학교에서는 당분간 휴직하며 마음을 추스르도록 배려해주었다. “6개월간 휴직하면서 정말 많은 생각을 했어요. 대학교 때는 잘 몰랐는데 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일에 대해 큰 부담을 느끼는 타입이라는 걸 그제서야 깨달았던 거죠. 교사가 아무리 좋은 평생 직업이라지만 매일매일 괴로워하며 10~20년 다니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더군요. “결국 그녀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교사를 그만뒀다. 교사가 되지 않을 바에는 다시 대학에 가야 했기에 막무가내로 공부를 시작했다. 1년 동안 혼자 학원에 다니고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며 새로운 직업을 찾다가 우연히 TV 프로그램에 등장한, 아이를 낳고 복귀한다는 한의사를 보게 되었다. 기왕 새로운 직업을 찾을 바에는 아이를 낳고서도 오래 할 수 있는 일이면 좋겠다 생각해서인지 한의학과에 새롭게 눈뜨게 되었다. 고민 끝에 문과 출신으로 교차 지원이 가능한 동국대 한의과를 목표로 1년 동안 열심히 공부했고, 마침내 한의대에 진학하면서 그녀는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지금처럼 초절정 인기학과가 되기 전이기는 했지만 그때도 과 특성상 예비역이 많았다. 자신처럼 제2의 인생을 찾아온 사람들과 어울리며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고, 한의학과 관련된 다양한 치료 요법들을 열심히 공부했다. “졸업을 하고 아이를 가진 후에 바로 개원을 했어요. 그런데 또 한 가지 고민이 생기더군요. 남에게 1 : 1로 영향을 주는 일이 싫어서 교사를 포기했는데, 이제는 진료실에서 환자를 대해야 하니 또다시 스트레스를 받게 됐거든요. 그럴 즈음에 ‘한방으로 치료하는 비만’에 눈뜨게 되었죠. 한의학의 특성상 치료 효과가 바로 나타나기 어려운데, 비만은 그나마 가시적인 효과가 금방 나타나서 맘이 편하고 또 뿌듯하더라고요.”
또 한 번 찾아온 인생의 터닝 포인트
그녀는 자신이 배운 학문과 쌓은 경력을 100% 활용할 수 있는 사업을 구상했다. 비만 환자의 경우 원격 진료의 필요성이 절실했던 상황이라 자신의 처방약을 식품으로 만들어 보급하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 그때 그녀의 나이는 30대 후반. 그대로 한의원을 운영해도 무방했지만 사업이라는 또 다른 분야에 과감하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녀가 환자에게 처방해주던 백비탕을 건강기능식품으로 업그레이드해 대량 생산을 추진했고 전국 환자들을 위한 차별화된 인터넷 쇼핑몰도 구축했다. 평범한 한의사에서 CEO 서은경으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저는 한마디로 정면 돌파형이에요. 특별한 능력이나 자신감이 있어서가 아니라 문제를 안고 있다 보면 병이 나거든요.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보다는 힘들어도 새로운 길을 찾아나서는 게 낫더군요.” 지금도 한의사 타이틀을 달고 있기는 하지만 실무는 부원장에게 맡기고 사업에 매진하고 있는 중이다.
남들이 선호하는 ‘한의사’라는 평생 직업을 갖고 있지만 그녀는 그것 때문에 행복한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녀가 준비하는 노후는 ‘궁핍하지 않은 경제력과 행복해지려는 마음가짐’이다. “30대에 준비할 수 있는 노후는 스스로 평생 만족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 아닐까요?” 노후에는 침 한 통을 가방에 넣고 의료 봉사를 다니고 싶다는 서 원장이 후배들에게 보내는 진심 어린 조언이다.
네일 아티스트가 된 은행원, 김진영
서른네 살, 아홉 살과 일곱 살 남매를 둔 멋쟁이 엄마이자 서울 한복판에 두 개의 네일 숍을 운영하는 김진영 씨는 여라자면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조건을 갖고 있다. 그러나 5년 전만 해도 그녀는 농협중앙회에서 일하던 평범한 은행원이었다. “원래 미술에 관심이 많았어요. 하지만 예체능은 절대 안 된다며 반대하시던 부모님 뜻에 따라 영문과에 진학했죠. 졸업 후에는 항공사 취직을 소망했지만 역시나 부모님 뜻대로 안정된 직장인 은행을 선택했고요.” 젊은 날의 그녀는 보통의 딸들처럼 부모님의 뜻을 거스를 용기가 없었다. 대학 졸업 직후, 농협중앙회에 입사한 그녀는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면서 열한 살 연상의 상사를 만나 결혼했다. 결혼 후 바로 두 살 터울의 남매를 낳았다. 하루하루 쳇바퀴를 도는 듯한 회사 생활에 익숙해지긴 했지만 해가 가면 갈수록 마음속에서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 시작되고 있었다. ‘아무래도 일이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다며 남편에게 진지하게 의논했지만 “적성에 맞는 일을 하는 사람은 적다. 직업에 적성을 맞추라”는 직장 상사다운 조언이 돌아왔다. 남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평생 직장이었지만, 그녀에게는 미래 없는 우물처럼 여겨질 뿐이었다.
위기를 절호의 찬스로 바꾼 용기
“IMF 이후 농협이 축협과 합병하면서 명퇴 바람이 심하게 불었어요. 저희는 부부가 같은 직장에 다니다 보니, 은근히 부담이 됐죠. 모두들 명퇴 때문에 두려워했지만 저는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어요. 20대에는 결혼과 출산 때문에 정신없었던 데다 ‘그저 편한 게 좋은 거다’라며 살았지만 30대에는 내가 원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맘을 굳혔죠.” 그래서 퇴근 후 메이크업 학원을 다니며 공부를 시작했고 주말에는 웨딩 숍에서 아르바이트하면서 감을 익혔다. 다행히도 아이들은 시댁에서 맡아 키워주셔서 육아에 대한 어려움을 덜 수 있었다. 6개월 후 어느 정도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되자 29세의 나이로 6년을 다닌 회사에 명퇴를 신청하고(당시에 자진 명퇴는 혜택이 많았다) 본격적으로 메이크업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생각처럼 일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 동료들에 비해 너무 나이가 많았고, 방송이나 패션 일과 가정생활을 병행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당시 국내에 막 도입되었던 네일 아트에 대해 알게 되었다. 충분히 성장 가능성이 있는 분야라는 것을 깨닫고, 지인의 도움으로 네일 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일을 배웠다. 그리고 2003년, 마침내 그녀는 인생 최대의 승부수를 던졌다. “남편과 아이들을 두고 저 혼자 미국 유학을 감행했어요. 미국은 실용주의 네일 아트의 본고장이거든요. 그곳에서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한 거죠. 나이 차가 많은 남편과 열린 사고를 가진 시어머니께서는 저를 오히려 격려해주셨죠.” 이미 사회생활을 경험해본 터라 학생들보다 더 악착같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부했다. 그리고 1년 후 달랑 비행기표만 들고 떠났던 유학에서 뉴욕주의 네일 아트 자격증과 일에 대한 자신감 그리고 인생의 새로운 목표를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이름을 단 브랜드를 갖는 것이 꿈
미국에서 돌아와 그녀는 강남구 논현동에 1호점 ‘네일 포 네일’을 오픈했다. 그리고 1년 후인 지난해 12월 광화문 파이낸스 빌딩에 2호점 ‘보보 뷰티 숍’을 오픈했다. 1호점은 주부들에게, 2호점은 인근의 직장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으며 많은 단골 손님을 확보하고 있다. 두 개의 숍을 통해 얻는 수입은 꿈의 억대 연봉 수준. 잘나가던 은행원 수입의 2~3배는 훨씬 넘어서고 있다. 단지 고수익을 보장한다는 것 외에도 그녀는 네일 아트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다. “남의 손과 발을 만지는 직업이다 보니 곱지 않은 시선도 있지만, 저는 이 일이 너무 좋아요. 다른 사람을 예쁘게 변화시키는 것이 좋고 저 자신을 가꾸며 할 수 있는 일이라 더 재미있어요. 흔히 네일 아트의 성공 비결은 뛰어난 기술이라 말하지만, 저는 서비스 정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사업 철학까지 확고하게 세운 그녀의 수첩 안에는 3호점 오픈과 학교 강의에 대한 계획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언젠가는 자신의 이름을 단 네일 숍을 전국 곳곳에 내겠다는 소망도 가지고 있다. “안정적인 직업에 대한 환상을 버리세요. 요즘은 어떤 직장이든 눈에 보이지 않는 정년은 짧아지고 있으니까요. 제2의 직업만큼은 자신이 정말 좋아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겠죠. 그러기 위해선 생각만으로 멈추지 말고 실천에 옮기는 용기가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삼성맨에서 펜션 주인으로, 한규환·김소현 부부
홍천에 있는 동화 속 집처럼 예쁜 펜션. 오는 6월까지 주말 예약이 꽉 찼을 정도로 인기 있는 이곳(광고가 아니니 펜션 이름은 공개하지 말아달라고 했다)은 30대 초반의 젊고 감각 있는 부부가 운영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서른 살, 서른 한 살의 결혼 4년 차 부부인 한규환·김소현 씨가 그 주인공.
게다가 부부 모두 삼성에 다니던, 한마디로 잘나가던 엘리트 직장인이었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삼성 입사 동기로 만난 부부는 각각 삼성정보통신과 삼성 SDA에서 최고 연봉과 대우를 받으며 직장생활을 했다. 그러다 서로 생각이 비슷해 금세 친해져 연인이 되고 부부가 되었고, 우연한 기회에 시골생활을 꿈꾸게 되었다. “결혼한 해 가을부터 둘이서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어요. 여행을 다니다 보니 막연히 전원생활에 대한 동경이 생기더군요. 봉평 메밀꽃 축제에 갔을 때였나, 물결치던 메밀꽃밭을 바라보며 ‘우리 정말 시골에서 살까?’ 말했던 것이 계기가 되었죠.”
전원생활에 대한 동경을 현실로 이루다
아내 김소현 씨는 꼼꼼하고 싹싹한 타입이라 직장생활에 잘 적응해나갔지만, 남편 한규환 씨는 입사 2년 차가 될 무렵, 막연히 환상을 갖고 있던 직장생활이 ‘별것 없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좋은 상사 덕에 2~3년 동안 정시 퇴근을 할 수 있었고, 그 시간에 ‘나중에 시골에 예쁜 집을 짓고 살자’는 계획을 서서히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부부는 집 짓는 동호회에 가입하여 강의를 들으러 다니고 목공 일도 배우며 인테리어에 대한 공부를 서서히 시작했다. 또 시간이 나면 이곳저곳으로 집터를 보러 다니기도 했다. 처음 계획은 5년 뒤쯤 시골에 예쁜 집을 짓는 것이었지만 우연한 기회에 5천만원으로 홍천에 있는 땅을 사게 되었다. 2004년 아이를 낳고 출산 휴가를 마친 아내가 먼저 회사를 그만뒀다. 뒤이어 남편 한규환 씨도 7개월 동안 육아 휴직을 가진 후 회사에 복귀했는데 마침 새로 온 상사로 인해 지나친 철야와 야근이 반복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틀에 박힌 생활에 염증을 느끼던 이들은 예상보다 빨리 덜컥 일을 벌이게 되었다. 물론 부부 모두 ‘이곳이 아니라도 행복할 수 있다’는 확신과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홍천에 땅을 산 것은 스키를 좋아하는 남편과 겨울 바다를 좋아하는 아내의 취향을 고려한 것이고, ‘시골의 예쁜 집’을 펜션으로 운영하기로 한 건 경제 활동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펜션을 열었지만 홈페이지를 운영하자마자 이들은 금세 유명해졌다.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 진정한 휴식을 위한 배려, 남다른 인생관을 나눌 수 있는 주인장까지, 펜션을 한 번 다녀간 사람들은 누구나 이곳의 단골이 되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해서 3년 안에 빚 갚자’, ‘주말에만 손님을 채우자’던 목표는 무리없이 달성되고 있다. “올해 번 돈으로 두 사람이 똑같이 용돈을 나눠 가졌어요. 저는 갖고 싶었던 오토바이를 샀고, 아내는 아이들 데리고 1개월간 유럽 여행을 떠났죠.” 그래서 소현 씨는 인터뷰할 시점에 뉴욕, 파리, 일본, 도쿄를 경유하는 2달간의 여행길에 올라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자기 자신을 추스르고, 레스토랑 등을 비롯한 새로운 펜션 확장 사업에 필요한 자료도 모아올 예정이라고.
하고 싶은 것, 지금 하라
기사를 위해 인터뷰를 요청하자 아내 소현 씨는 먼 이국 땅에서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다. 소현 씨가 20대 중반일 때 돌아가신 친정아버지는 “나중에 나이가 들면 꼭 이렇게 살자”는 류의 말씀을 많이 하셨단다. 그러나 결국 아버지는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래서 소현 씨는 ‘한 번 사는 인생, 정말 원하는 것을 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슴 깊이 품게 된 것. 이 사건을 계기로 그녀는 잘 먹고 잘사는 노후보다는 원하는 걸 하면서 사는 마음이 풍요로운 노후를 꿈꾸게 되었다.
“노후 대책의 다른 말인 ‘멋지게 죽음을 맞이하는 삶’이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대로 사는 것임을 깨달았어요. 남들이 연금이나 부동산, 펀드 상품을 검색해보고 비교해보는 시간에 저는 저 자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자문해보았고, 30대에 시작하는 나만의 노후 대책으로 이 길을 선택한 거죠. 저의 60대가 경제적으로 풍요로울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남은 30년간 키워나갈 우리 가족의 정신적인 풍요로움은 확신할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