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 누구를 위한 자유인가

김성호2008.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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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누구를 위한 자유인가

 

 

열며

 

 

광우병 위험이 있는 미국 소고기의 전면개방으로부터 촉발된 촛불문화제가 연일 도심의 밤을 환히 밝히고 있다. 정부가 신뢰할 수 없는 상대와 옳지 않은 계약을, 그것도 불공정하게 체결하고 왔기에 국민된 도리로써 당연한 항변을 하는 것이지만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은 아닌 세상이기에 무척이나 자랑스럽고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비록 그 과정에서 대중들의 관심이 광우병 문제에 편향된 경향도 없지 않지만 아직은 이명박 정부의 실정과 한미 FTA의 문제점이라는 본질도 완전히 놓치지는 않은 듯하여 조금은 만족스럽다.

 

사실 이슈가 되고 있는 미국 소고기의 전면개방은 한미 FTA의 전제사항으로, 이 조건의 수용 없이는 FTA를 맺지 않겠다는 미국 측의 입장을 이명박 정부가 수용하면서 시작된 협상이다. 다시 말해 이명박 정부가 조속히 FTA를 맺기 위해 방미기간 중 명문화된 이득 없이 내어준 카드라는 이야기다. 이에 대해 정부는 일단 FTA가 발효되기만 하면 경쟁력 없는 분야가 사멸하더라도 비교우위에 있는 분야에서는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있으므로 FTA는 국가 전체로 본다면 이득이 되는 사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한우농가를 파탄으로 이끌고 국민들의 건강을 치명적으로 위협할 수도 있는 협상을, 특별한 조건없이 개방해버릴 만큼이나 FTA가 가져오는 이익이 큰 것일까? 아니 단순히 한미 FTA문제를 넘어 WTO가 주창하는 신자유주의는 과연 올바른 선택이 될 수 있는 것일까?

 

나의 답은 부정적이다.

 

 

 

신자유주의 대세론의 허구성

 

 

21세기에 들어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과 초국적 기업들의 영향력 확대를 통해 자본이 한 국가의 경계에 머무르지 않고 전 세계 어디든 자유롭게 이동하는 시대가 되었다. 바야흐로 뉴욕의 막대한 자본이 클릭 몇 번 만에 브라질과 중국, 러시아와 인도, 아프리카까지 직접 투자되는 세계화 시대인 것이다. 비교우위론을 주창한 데이비드 리카도 이후의 많은 경제학자들과 선진국의 정책담당자들은 이러한 세계화의 추세를 저항할 수 없는 대세임과 동시에 무척 긍정적인 현상으로 이해하고 여러 나라들에 이 흐름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어쩌면 소비에트 패망 이후 유일하게 살아남은 경제이념의 주류로써, 신자유주의는 그 본질을 과대평가받아왔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본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신자유주의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경제의 번영을 담보해 줄 것이라는 환상에 빠져 있었고, 이는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에 의해 자신들의 위상을 강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이용되고 있었던 것은 아닐런지.

 

사실 조금만 들여다보면 신자유주의의 흐름에 반대하는 견해 역시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대개 이는 비교우위의 산업을 갖지 못한 국가들과 비교열위의 산업에 종사하는 이들만의 의견으로 축소되어 알려져 왔지만, 최근에는 비단 이해관계당사자에 한정되지 않고 자유무역에 부정적인 의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들려오고 있다.

 

멕시코의 마르꼬스 부사령관이 이끄는 싸빠띠스따민족해방군과 같이 오랜 시간 미국 주도의 세계화에 맞서 싸워온 상징적인 단체들 뿐 아니라 미국 중심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범세계적인 연대들이 결성되고 있으며 일군의 학자들이 신자유주의 대세론에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제 더이상 신자유주의는 거부할 수 있는 흐름이 아니다. 그것은 강요된 선택이었으며, 우리는 저항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누구를 위한, 누구의 자유인가

 

 

신자유주의의 자유란 자본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인간을 위한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이야말로 신자유주의가 이 시대의 새로운 경제 이데올로기로 마땅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해답일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에 답을 내리기란 정말이지 쉽지 않다.

 

신자유주의가 표방하는 관세 없는 자유로운 재화의 이동은 언뜻 이 시대의 거스를 수 없는 선택이자 언뜻 불공정하게 여겨지는 보호무역의 횡포에 대항하는 바람직한 대안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과연 그러할까.

 

나는 세계자본과 세계기업은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인간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는 땅에 근거를 두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본이나 초국적 기업들처럼 자유롭게 경계를 오갈 수 없고 직접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환경을 벗어나 살 수도 없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설사 지구 반대편에 더 싼 물건이 있다 하여도 집 앞의 마켓에서 더 비싼 물건을 살 수 밖에 없는, 그런..

 

그런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온전한 신자유주의가 들어선다면 사람들은 행복할 수 있을까. 오직 경쟁력만을 외치며 비교열위의 산업과 인간들을 도태시켜 버리는, 그런 신자유주의의 잔혹함 앞에서 경쟁력을 잃어버린 이들은 생존권마저 위협받게 되지는 않을 런지. 한때 공장을 디트로이트와 캐나다에 두고 있던 미국 유수의 자동차 기업들이 인건비를 문제 삼으며 공장들을 전부 멕시코로 옮겨 간 후, 자동차가 기간산업이던 디트로이트는 완전히 몰락하여 영화 <로보캅>의 암울한 배경으로 등장하였고 캐나다는 실업률이 60%를 넘어서는 국가적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불과 20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절의 이야기다.

 

하나의 경제구조에서 대체가 어려운 전문직 종사자들의 수는 생각만큼 많지 않다.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생산직이나 서비스업종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종사하는 직종은 약간의 기술만으로도 쉽게 대체할 수 있기에 이들의 임금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오르게 되면 기업들은 더 싼 임금으로 쓸 수 있는 노동력을 찾아 공장을 옮기는 선택을 하게 마련이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기업엔 국경이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는 사실상 자본주의와 세계화가 결합하여 만들어낸 새로운 노예제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무한경쟁의 자본주의는 경쟁력만 갖추면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환상을 심어주지만, 실상은 평생을 일해도 노예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 자본주의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자본은 세상 어디로도 빠르게 이동할 수 있지만 인간은 그럴 수 없으니까. 초국적 기업과 거대 자본은 그저 사람들의 피만 빨아먹고 더 싼 노동력과 원자재를 찾아 떠나갈 뿐이다.

 

 

 

신자유주의? 신식민주의!

 

 

무엇보다 신자유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근본적으로 선진국과 후진국의 격차를 고착화 시키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데 있다. 자유와 평등, 그리고 공영의 이념이 국제사회의 기치로 내걸리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세계 각지에서 여전히 불평등과 부조리가 존재하며 암묵적으로 묵인되고 있는 지금, 국가 간 FTA를 통해 신자유주의의 기조가 확장된다면 이러한 부조리의 고리는 더욱 강화되고 말 것이 분명하다.

 

중동의 석유와 지하자원들은 서방 선진국의 석유회사들과 해당 국가 지배자들의 밀약에 의해 독점적으로 채취되어 그들의 배를 불려주고 있고 아프리카의 광물자원들은 합법, 비합법으로 채굴권을 갖고 있는 자들과 자원의 유통을 담당하는 몇몇 독점적 기업들에 그 이익이 모두 돌아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광물을 직접적으로 채취하는 인부들은 정부가 지역 주민들을 저임금으로 고용하거나 일부 반군통치 지역의 경우에는 강제로 채취시키는 식으로 충당되어지는 불법이 자행되고 있다.

 

인도의 노동자들은 기본적인 인권마저 보호받지 못하며 뉴욕의 맨홀뚜껑을 만들고 있고, 서아시아의 어린이들은 매일같이 16시간 이상의 시간동안 나이키나 아디다스의 로고가 박힌 축구공을 꿰매고 있다. 남미와 아프리카의 커피 생산국들에선 불합리한 유통구조로 생산자들이 이윤의 단 1%만을 받고 남은 99%의 이윤을 가공, 판매업자와 중간상인들이 차지하게 된다. 이런 불합리한 유통구조는 1차생산자와 유통을 맡는 기업이 정보와 자본의 격차로 인해 정당한 계약을 체결할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하게 된다. 이는 결국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 사이의 경제적 격차를 더욱 공고히 하고 현재의 시스템을 고착화 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맨홀뚜껑 최대 생산국인 인도에는 맨홀뚜껑이 없고, 잠들 때까지 축구공을 꿰매는 서아시아의 아이들은 축구를 해 본적이 없다. 상어잡이로 먹고사는 카리브 해의 어부는 샥스핀을 먹어본 적이 없고, 케냐와 브라질, 인도네시아의 커피농가 사람들은 스타벅스 커피를 마셔본 적이 없다. 콜탄의 주요 생산국인 콩고민주공화국의 주민들은 핸드폰이나 노트북을 사용하지 않고 시에라리온의 연인들은 결혼식에 다이아몬드를 쓰지 못한다.

 

이는 사실상 식민 상태와 다르지 않다. 고질적인 불균형한 무역이 새로운 식민 상태를 만드는 것이다. 선진국은 초국적 기업을 통해 이들 나라에서 저렴한 가격에 상품을 공급받고 비싼 가격에 선진국의 소비자들에게 판매한다. 이 과정에서 1차적인 생산자들은 정당한 이익을 누릴 수 없고 이익의 대부분은 부당하게도 유통구조를 독점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초국가적 기업들에게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런 불균형하고 불공정한 무역으로 막대한 차익을 남긴 초국적 기업들은 생산국과 소비국 정부에 막대한 재정적 지원을 함으로써 이런 부조리를 암묵적으로 허용 받게 되고 결과적으로 이러한 악순환은 계속되게 된다.

 

초국가적 형태의 독점적 기업은 국내에서의 영리활동과는 달리 그 불법을 누구에게도 단속 혹은 제약받지 않으므로 시장에서 압도적인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 부당하게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후진국의 국민들은 자유무역 상태에서 자국의 산업들이 대부분 고사해버렸기에, 부당한 현실에도 노동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된다. 자유라는 이름 아래 부조리한 시스템을 방치하고 심지어 자유무역이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부조리를 더욱 강화하는 것은 후진국 국민들의 노동력을 선진국의 거대 자본이 영속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려는 비겁한 술책이다.

 

더불어, 자유무역의 품목을 단순히 공산품에 한정하지 않고 곡물과 문화부문에도 적용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떨어지는 국가의 산업을 영속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선진국의 횡포이다. 범세계적인 식량위기로 인해 식량자급의 중요성이 날로 높아지는 이 시점에서 우리 국민들의 실직적인 주식인 ‘쌀’시장을 개방하라는 미국의 압력은, 미국 거대 곡물기업의 경쟁력에 당해낼 수 없는 우리 쌀 농가의 현실을 고려할 때 식량안보를 포기하라는 선언과 다르지 않다. 95%의 자급이 이루어지는 쌀을 포함하더라도 전체 26.9%에 불과한 우리나라의 식량자급은 그야말로 극히 불안정한 상태다. 만약 이 상태에서 미국과의 자유무역이 허용되게 된다면 필리핀의 경우와 같이 우리 국민이 미국으로부터 쌀을 배급받아야 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게 될 것이 분명하다. 우리 국민에게 있어 쌀은 단순히 많은 곡물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우리 밥상이고 생명 그 자체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식량으로 장사를 하지 않는다. 치졸한 경제논리 이전에 국민들의 생명과 독립국으로서의 주권을 돌아본다면 결코 미국과 쌀을 완전 개방하는 협정을 맺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스크린쿼터로 대표되는 문화 분야 역시 결코 완전히 개방되어서는 안 되는 분야라 할 수 있다. 문화의 자립 없이 국가의 자립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어느 선현의 말에 나는 깊이 공감한다. 김구 선생님께서는 그 유명한 명문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에서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는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높은 상품가치 때문에 영화산업이라고도 불리지만 영화는 여전히 이 시대의 가장 복합적이고 종합적인 예술이다. 영화 안에는 단순히 영상 뿐 아니라 문학과 미술, 음악 등이 혼합되어 있고 한 나라의 영화의 수준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나라의 문화 수준을 이야기하는 척도로도 이야기되곤 한다. 그러나 영화는 분명 산업으로써의 특성도 가지고 있어서 영화사와 배급사, 그리고 극장들 간에 자본의 논리가 무척이나 중요하게 적용되는 분야이기도 하다.

 

블록버스터와 함께 다른 영화를 끼워 파는 부당한 거래를 강요하는 미국의 거대 영화사들의 횡포가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서 스크린쿼터제도를 완전히 폐지한다면 우리 영화의 미래는 보장될 수 없을 것이다. 스크린쿼터의 보호 아래에서도 외면 받던 우리의 중소 규모 영화들이 완전한 개방 아래에서는 어떻게 될 것인가. 꼭 겪어보아야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문화의 식민화는 국민의 사상도 식민화 할 것이고 궁극적으로 우리나라의 완전한 독립에 심각한 장애요소가 될 것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이유로 나는 보호무역을 완전히 철폐하는 자유무역의 대상에 쌀과 문화상품을 제외하여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문을 열라 강요할 자격이 있는가

 

 

WTO가 주창하는 자유무역은 근본적으로 국가 간 상품의 자유로운 이동을 위해 모든 제한을 철폐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로써 국가들이 비교우위에 있는 상품을 자유롭게 거래하게 되어 국가 에너지의 낭비를 막고 서로가 이득을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엄연히 국력의 차이가 존재하고 서로를 온전히 신뢰할 수 없는 현실에서 자유무역은 본질적으로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국가가 열위에 있는 국가로부터 항구적인 경제적 이득, 나아가 정치, 군사적 이득을 보장받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될 우려가 내재되어 있다.

 

더구나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한미 간 FTA의 경우는 몇몇 조항에 있어 이러한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게 될 가능성이 직접적으로 예견되는 불공정한 협정이다. 한 번 개방에 합의한 수준을 이후 시점에서 원 상태로 돌릴 수 없도록 규정한 ‘래칫 조항’을 비롯하여 미래에도 미국에 최혜국 대우의 보장을 약속한 황당한 조항과 모든 규제의 입증책임을 우리 정부에 무는 조항, 그리고 초국적 기업에 국가의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받게 될 근거가 될 것으로 보이는 ‘투자자국가제소권’까지, 합의문 곳곳에는 당연히 행사해 마땅한 주권을 포기한 것으로 여겨지는 불평등한 조항들이 기록되어 있다. 세부사항에 있어서도 소고기의 검역주권마저 포기하고 이후 수입을 중단할 수 없는 등 협상 당사국으로서 기본적인 권리마저 존중되지 않는 조항들은 과연 이것이 동등한 국가 간의 협정인가 하는 의문마저 불러일으킨다.

 

이쯤 되면 과연 우리 정부는 무엇을 보고 미국을 믿는 것인가에 대한 심각한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이 과연 주권마저 모두 내어주고 신뢰해도 될 만한 국가인가.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세계의 정의수호를 위해 세계경찰을 자임하는 미국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했다는 이유로 이라크를 침공하여 전쟁을 벌인 나라다. 그러나 같은 기간에 그들은 핵실험을 시도하는 등 이라크보다 더욱 핵무기 보유가 의심되는 북한에 대해서 아무런 제재조치도 취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중국의 견제를 위해 인도의 핵무기 보유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등 국제사회에서 특유의 ‘이중잣대’를 들이대는 일이 많아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어디 그 뿐인가. 이스라엘이 하마스와 헤즈볼라 소탕을 명분으로 레바논과 팔레스타인 등 중동국가와 민족들을 부당하게 공격하여 피해를 입히는 사태에 대해서도 미국이 번번이 거부권을 발동하는 바람에 유엔은 제대로 제재조치는커녕 변변한 비난 성명조차 발표하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불과 10년 전, 미국은 지구온난화에 대처하기 위해 192개국이 참여하여 출범시킨 기후변화협약에서 자국 산업의 보호를 명분으로 탈퇴한 전례가 있다. 기후변화협약의 구체적 이행방안을 위해 선진산업국가들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규제하기로 한 교토의정서가 채택되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부터 자국 산업의 보호를 위해 전 지구적 가치를 도외시하는 행태를 보여 왔던 미국은 과연 우리에게 자유무역을 강요할 자격이 있는가.

 

눈앞의 이익을 위해 심심찮게 이중잣대를 들이대던 그들을 믿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선택일까. 내가 보기에 그들에게 우리의 기간산업들을 온전히 내어준다는 것은 자해행위와 다름없는 일이다.

 

비단 미국 뿐 아니라 서방의 선진국들은 역사적으로 보호무역으로 성장한 전례가 있다. 게다가 완전한 자유무역만으로 후진국에서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나라도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화가 선진국과 후진국의 격차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최강대국인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스스로의 독립을 위협하는 우매한 선택이 될 것이다.

 

 

 

닫으며

 

 

"진정한 사랑은 자기애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사랑하고 또 존중하지 않는 인간의 사랑은 자기희생일 뿐이고 그 극단은 자아의 상실과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스스로의 자아를 사랑하는데서 출발해 서서히 자아를 확장시켜 나가는 것만이 근본적이고도 건강한 사랑의 방법이자 한 인간으로서의 성장이겠지요."

 

내가 전에 썼던 글의 일부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지만 비단 사랑만이 아니라 국가의 사업에 있어서도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라 생각한다. 이에 대해서는 김구 선생님과 법정 스님께서도 일찌기 말한바 있거니와 우선 내 척추부터 바로 세운 후에야 나의 번영과 남과의 화합, 그리고 세계적 가치의 실현을 도모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우리의 척추가 바로서는데 치명적인 장해요소가 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국가의 근간인 식량자급과 문화분야에 대해서도 패배가 뻔히 보이는 경쟁을 강요하는데 다른 것들이야 오죽 하겠는가 말이다.

 

돈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나라의 근간도 사람이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는 부조리한 무역사례들을 살펴 볼 때 신자유주의를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본과 거대기업을 위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듯하다.

 

비록 국내외에 몰아닥치는 신자유주의의 조류가 너무나 거세어 이에 저항하기가 어렵다고는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과 저항의식마저 접은채로 그 조류에 승선하기를 선택하는 것은 의식있는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 생각한다.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다고 당당히 말하며 스스로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에서부터 모든 부조리에 저항하는 삶을 살아나가야 겠다. 결코 쉽지는 않겠지만.

 

 

 

written by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