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와 "카프카"가 세상을 보는 방법.

박민진2008.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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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와 카프카는 세상을 보는 방식이 사뭇 다른다. 요즘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과도 다를 바 없으며, 또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시각적 다양성도 보유한 그들이다.

 

 

나는 생각 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가 남긴 이 말은 존재가 없이는 생각이 없고, 그 말이라 함은 물리적인 내가 없이는 그에 합당한 철학이 없다는 뜻이다. 쉽게 말하면, 나 없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 가냐는 말이다. 그가 남긴 한마디에 이 세상이 담겨있다.  

 

 데카르트는 가장 훌륭한 물리학자이자 철학기인데 그도 증명하지 못한 것이 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와 원리다. 훗날 모든 이들이 그를 존경하며, 위대함에 온갖 칭송을 마다하지 않지만, 어느 순간 주저하게 되는 시점이 바로 그가 세상을 다 증명하지 못하고, 불꽃같은 인생 속에 사라져 갔다는 사실이다. 그는 팔방미인으로 불리며, 온갖 세상사의 이론에 심취했다. 수학의 이론을 물리학적인 틀로 사고하게 해 준 것도 그이고, 그 속에서 철학적 근거를 찾은 것도 그이다. 실례로 그가 발견한 좌표기하학을 생각해보자. 당신은 당신이 -2개의 파이를 가졌다면 믿을 수 있는가. 작대기 하나 그어놓고 그것을 이해시킨 것이 데카르트다. 허나, 그 천재성 속에서 그 작대기가 인생에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한다는 생각에 미친 것도 데카르트라는 사람이다. 그는 세상사를 공식으로 풀 수 없었고, 그래서 그의 삶을 불꽃에 비유한다. 연소의 끝은 한줌의 ‘재’일 뿐이다.  

 

 이 세상에 부조리는 거기서 부터이다. 세상을 인간이 가진 이론으로 증명하지 못하자, 하나의 신에 의지한다. 근거 없는 인생에 대한 의구심과 불만으로 가득 찬 인간의 고뇌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것이 데카르트가 철학과 물리학을 병행하며 공부한 이유와도 일맥상통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외로워야 합니다.

 내가 이룩해 놓은 것은 단지 고독의 결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문학과 관계없는 모든 것을 증오합니다.

                                          F.카프카

 

 

 작가 카프카의 소설은 한마디로 희괴하다. 난해한 단어선택은 물론, 뜬금없는 스토리텔링에 차근차근 사고를 하던 머리도 어느새 복잡해 터질 듯 하고, 결국에는 작품에 느낌을 맡기고는 꿈을 꾸듯 작품을 받아들인다. 세상에 의문에 대해 그는 지독히도 반감을 가지고는 데카르트와는 반대로 세상을 부정한다. 하지만 그리 절망적이진 않다.  

 

 그의 작품 중 그가 만족을 표시한 단 두 작품 중 하나인 시골의사는( 나머지 작품은 ‘변신’이다.) 한 의사가 겪게 되는 하루 밤의 기괴한 이야기를 통해 소통이 불가능한 이 시대의 사람들과 잘못된 경로에서 우회로를 찾지 못하는 인간의 고뇌를 보여준다.  


 시골의 의사는 가족으로서 하녀를 구하고 싶었고, 남자로서 마부의 권력에 도전하고 싶었다. 또한, 소년의 정신적 고통과 소년의 가족이 앉고 있는 고통을 직업적 책임감으로 모두 해결해주고 싶었다. 그게 주인의 도리이자 의사의 도리였으며, 인간의 도리이기 때문이다. 허나, 모든 것에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아무런 시도도 심지어 제대로 된 죄의식을 갖지도 못한다.  

 

 작가는 너무도 빠르고 급박하게 전개되는 세상의 흐름에 도무지 적응하지 못하는 시골의 의사를 통해 인간이 삶을 살며 진정한 가치를 창조하지 못함을 비판한다. 정말 소중한 것을 인식하지 못하며, 현재의 문제를 고쳐볼 수 있는 능력도 없다. 이 시골의사는 자신의 직업적 윤리의식 때문에 가족과 같은 하녀를 마구에게 범하게 했다. 그리고 얻은 것은 그가 자신이 가진 의사라는 직업을 행할 수 있는 힘이었다. 그를 움직이게 한 힘은 바로 사람을 움직이는 권력이다. 마구가 가진 권력은 바로 제물(말 두필)이며, 그것이 그를 소년에게 보낼 수 있게 했다. 소년의 경우를 보자, 신체적인 병이 없음에도 죽으려 하는 소년은 정신의 아름다운 상처를 가진다. 소년은 세상에 지쳐 미쳐 꽃 봉우리도 피워보지 못하고 죽어간다. 여기서 아름다운 상처로 표현하는 바는 세상의 모순에 대항하는 소년의 순수성을 의미한다. 직업적 윤리의식으로 하녀까지 버리고 온 의사도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죽음과 바꿀만한 고귀한 상처이기에 그리고 그것까지 생각하기에는 자신이 저지른 하루의 과오를 미쳐 죄의식 속에 씻어내지 못했기에 그렇다.  


 세상의 권력은 돈으로, 신분으로 그것이 다시 현실의 부조리로 이어짐을 카프카는 알고 있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보수적인 유태인 집안에서 이 세상이 규정한 것들에 불신을 가졌고, 법학을 전공하며 불합리한 세상의 법을 공부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신분의 차이로 사랑을 이루는데 실패하자, 세상의 진정한 의미를 탐구하는 글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그가 남긴 단편들은 자신을 벌레로 혹은 쥐새끼로 바꿔버리며 세상이 가진 이치에 반하려 무던히 애를 쓴다. 이 세상을 비꼬고, 비판하는 것이 세상 제일의 선행이자 가치 있는 행동이라는 점을 그가 이해한 까닭이라고 하면 지나친 해석일까? 그의 난해함속에서 얻어내는 기쁨. 질려버린 내 일상에 대한 일탈의 기쁨과 같다. 그것이 예술과가 광대가 되어 내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라 이해한다.  


 

 데카르트는 답을 찾으려 했다면, 카프카는 자신의 글로 세상을 비관한다. 답을 찾으려 했던 데카르트는 세상의 이치에 해답을 찾기란 인간으로서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카프카는 애초부터 세상이란 부조리로 가득하다며 포기해버린다. 두 사람의 서로 다른 태도가 대비되어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세상엔 언제나 두가지의 것이 충돌한다. 진보와 보수 혹은 악과 선. 내가 하려는 것과 대비되는 것이 생겨 빚게 되는 마찰음이 이 세상을 지탱한다고 배워왔다. 그 마찰이란 결국 정답을 골라 잡을 수 없기에 생기는 절충안이라 할 수 있다. 데카르트와 카프카의 대비되는 개념은 지속적인 연구에 의한 고찰(데카르트)이거나, 그저 손놓고 세상을 사는 무관심(카프카)이라 볼 수 있다.  

 

 

 

 요즘 한국에서 돌아가는 나라꼴을 보면 그런 대비되는 개념조차 제대로 성립되지 않음을 느낀다. 절충안조차 내놓지 못하는 정부와 국민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번 FTA의 미국 쇠고기 협상으로 생긴 결과는 국민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그에 항의하기 위해 집단적 행동을 하는 이들이 있고, 인터넷 기사를 검색하듯 스쳐 지나치는 사람이 있다.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둘 여유가 있어 행동하는 자가 있고, 생존권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상반된 견해는 세상사에 어쩔 수가 없는 거다. 반면, 결론을 내는 과정을 보자. 오늘 아침 쇠고기 협상 무효화에 대한 대통령에 대한 탄핵과 항의 집회에서 체포되는 고등학생의 사진을 보았다. 정부는 여론을 무마하느라고 생긴 일이라 변명을 할테지만, 현재의 상황으로선 국민들의 분노만 더욱 가열시켰다. 의견을 제시하는 국민의 의사가 정부의 정책에 반영되지 못하고, 정부는 독단적 행태만 취해내니 오공시절이 다시오지 않았느냐는 비아냥만 듣는다. 허나 이런 의사의 불순환에 대해 정부만 욕할 수도 없는 입장이다. 그건 국민들이 초래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 정당정치가 사라진 그 순간부터 이런 사태는 예견된 것이다. 정당정치라는 것은 두 당파가 상반된 여야를 형성하여 의견을 조율하는 것이다. 국회의원들보고 싸우지들 말라고 하는데, 두 정당이 뜻이 다르면 싸워서라도 그 절충안을 내야 하는 것이 정당의 피비린내나는 원칙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총선에서 예견 됐던대로 한나라당의 압도적 승리가 있었다. 정도가 심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거다. 세계 어느 나라도 대통령의 지지율을 기반으로 집권당은 우세할 수 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전국적으로 당선된 형태를 보면, 보수세력이 압도적으로 그 점유율을 확보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진보와 보수에서의 보수의 압승은 제대로된 정당정치를 방해하는 요소로 밖에 볼 수 없다. 앞서 말했듯 한 나라가 민주주의 정치를 하며 나라를 지탱할 수 있는 기반은 충돌되는 대립의 원리에서 시작한다. 이번 정부의 행태가 국민들과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이유도 바로 여권이 주장했을 때 제대로 된 야권을 행사할 기반이 없다는 것이 문제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의 투표율이 낮기도 낮거니와 문제가 되는 것은 정책을 통한 선거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경제를 살리는 한나라 당. 그리고 땡. 나라를 말아먹은 통합민주당. 그리고 땡. 정책은 온데간데 없고, 한나라 당은 나라 살리기, 통합 민주당은 애걸복걸. 도대체가 이런 선거가 어디있냐는 말이다. 그 결과 이번 정권이 탄생하였고, 그에 맞설 수 있는 진보 세력은 자취를 감춰 버렸다. 여야를 모두 보수세력이 장악한 것이다.

 

 국민의 말은 씹힌다. 그리고 정부는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린다. 집회는 계속될 것이고, 그에 따른 국민들의 분노는 더욱 촉발될 것이다. 훗날 이 사건들을 보면서 어떤 의견들이 오고 갈지는 모르겠으나, 문제는 한국의 진보와 보수를 대하는 국민들의 무관심이 나은 결과로 밖에 볼 수 없다. 데카르트와 카프카가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보았던 것처럼, 우리도 이제 또 다른 시각에서 이 문제를 강구해야 할 때가 온 것이 아닌듯 싶다. 이건 단순히 MB의 문제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아침부터 신문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하는 나는 오죽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