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탱이한테 룸쌀롱 티켓이나 주고, 9시 뉴스에서는 편의점에서 칼질하다 경찰에 잡힌 아버지. 지금 누구 때문에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사는데 딸은 야속하게도 일기장에다 아버지가 죽어줬음 좋겠단다.
“다른 조폭들은 칼 맞아 잘 죽던데, 우리 아빠도 그냥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저려옴을 느낀다. 저 딸의 얼굴에 내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름 바 없는 가정에서 태어난 애들은 다 안다. 돈이 사람을 구질구질하게 한다는 것을. 사는 게 그런 거다. 돈이 없으면 비굴 해진다. 돈이 없어도 행복한 가정이 있다고? 그게 있다고 해도 난 영화에서 밖에 보질 못했다. 돈이라는 것에 제약이 없는 풍요로운 세상.우리는 그런 생활을 꿈꾼다. 그런 걸 우리는 ‘우아한 세계’라고 하겠지.
하지만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다. 그것은 아비의 마음. 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그 마음. 오래된 아파트에서 가족들을 있게 하고 싶지 않다는 그 마음. 딸에게는 자랑스런 아버지가 되고픈 그 마음. 아내에게는 어깨 쫙 펴고, 밥상을 받고픈 그 마음. 가족사진의 웃고있는 가족들을 매일 보고싶은 그 마음. 지갑 속의 사진 속에 숨겨둔 그 열망.
머리에 피가 마르자 현실이 보인다. 내 아버지를 다른 집 아버지와 비교하게 되고, 내 집을 다른 아이들의 집과 비교하게 된 거다. 내 친구의 나이키 신발을 나는 가질 수 없음을 알게 되고, 그러면서 열등감이란 걸 배운다. 돈이란 게 없으면 이렇구나. 그걸 배운다. 그 차이를 알게 되면 그때부터는 골치가 아픈 거다. 그땐 어렸다고? 철들고 지금은 그런 거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고? 그런 소리 하지마라. 세상을 살면서 어쩔 수가 없는 거다. 속일 수가 없는 거다.
<우아한 세계>가 보여주는 절대로 우아하지 못한 세상의 모습은 인구가 발버둥치는 이유와 같다. 넓은 집에서 행복한 가정을 꾸미고픈 한 남자의 목표. 그것은 열등감이라고 정의된다. 나의 열등감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순수한 생각 말이다. 이 시대의 가장을 조명하는 영화 속 한국의 가장인 인구의 발버둥은 친구의 나이키 신발에 열등감을 느끼는 소년과 다를 것이 없다. 나를 답습하지 않고, 내 자식만큼은 그 우아한 세계로 가길 바라는 아비의 마음은 위대하다. 그렇지만 그 위대함을 가족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왜냐는 물음을 던진다면 이유는 간단하다. 마음은 전달하지 못했기에.
누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했던가. 이 말은 한국에서만 유효하다. 가는 길에 무슨 꼴을 당해도 좋다는 말인가? 적어도 자신은 그래도 되겠지.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는 한국의 풍토는 인구에게도 여실히 적용된다. 그렇지만 그것을 동행자에게까지 이해시키기는 힘든 거다. 인구의 가족들은 분명 서울이 아니어도 좋으니 이쯤에서 쉬자고 말했음에도 인구는 서울을 고집했다. 그 위대한 가장의 마음이 목표의식 속에 가족의 마음을 잃고 만 것이다. 너무도 흔해빠진 얘기지만, 가장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고, 돈타령의 자본주의의 부식화도 여기서 부터다. 우리의 위대한 가장께서 우리보다는 그림 같은 2층집을 찾으시는데, 아무리 가족이라 한들 참고는 살지만 정이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본디 가족을 위한 몸부림이라 할 지라도 대화와 호흡이 없는 과정은 동행자들을 질리게 만들어 버렸다. 결국 풍요로운 전원주택에 가족 들을 앉히겠다는 열망은 식어버린 된장국처럼 좀처럼 손이가지 않는다.
힘겨운 조폭생활을 통해 인구가 자신을 희생에서 얻은 가족의 우아한 세계에 인구 본인은 들어가지 못한다. 자신이 홧김에 던져버린 라면을 자기가 치워야 하는 기러기 아빠의 현실. 그게 우아한 세계의 진실이다. 울어본들 무엇할까? TV 속 내 마누라와 자식들은 행복한데 그것이면 된 거지. 자신을 남기고 모두 유학 간 가족들을 테잎으로 보며, 인구는 넋이 빠진 표정으로 자신은 옳은 길을 걸었다고 되뇌일뿐이다. 이미 벌어질 대로 벌어진 아버지와 다른 가족의 관계처럼, 꿈과 현실의 괴리감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비극적이다. 비록 내 마음을 몰라주는 가족들이라 해도 인구는 행복해야 한다. 조폭생활을 끝끝내 포기하지 못했던 것은 인구가 선택한 우아함을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행복을 생각하지 않고, 가족들을 위해 사는 이 시대의 모든 아버지들에게 고한다. 그대들의 위대한 열등감이 되물림 되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또한, 당신이 행복하지 않고서 어떤 목적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보다 직접적인 물음 말이다. 위대한 가장 인구는 우아한 세계에서 라면이나 빨고 있다. 그것도 꽤나 처절하게 혹은 눈물나게.
나와 가족의 행복에 대한 솔직한 물음이 그의 앞에서 춤을 춘다.
한국의 가정에 대한 이 솔직한 보고서에서 조폭은 없다고 보면 된다. 그저, 그가 꿈꾸는 우아한 세상과 반대되는 개념에 적절한 비유대상이었을 뿐이다. 인구를 연기한 송강호의 연기는 과연 구관이 명관이다. 사회의 다양한 소시민을 연기해온 그가 연기하는 조폭은 생활의 냄새가 풀풀 났으며, 느와르 특유의 신랄함까지 적절하게 표현했다. 그를 보면서 내 아버지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면 거짓말일까? 내 유년시절의 완전한 표본이 되어준 그 분 말이다. 어느 순간 머리의 피가 말라가면서 그 분의 현실을 보았다. 어린 나를 위해서 붕어빵 한 봉지를 사오시는 든든한 우리의 버팀목이 아닌, 하나의 인간으로서 그를 본다. 어리석게도 그를 평가하려 한다. 그 냉소적인 느낌을 영화는 아주 적날하게 보여주고, 생각의 공란을 제공한다.
이제 인생의 갓 스무고개를 넘었다. 점점 알게 되는 사회의 현실의 삶을 마주할 때마다 아버지가 생각난다. 츄리닝 바람으로 소주 한 병을 들고 걸어오시는 아버지가 보인다. 코를 시큰하게 자극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느낀다.
“나도 집착하게 될까?”
아버지가 만든 우아한 세계에서 옳고 그름은 따질 수가 없다. 어떠한 선택도 인생의 무게로 다가올 것이기에, 아무런 표정도 없이 오늘도 서울의 그림 같은 빌딩을 찾는 거다. 껍데기뿐인 우아함을 찾는 거다.
<우아한 세계> 내 아버지를 답습한다.
우아한 세계 (The Show Must Go On, 2007)
츄리닝 바람의 아버지. 딸은 한심한 눈으로 쳐다본다.
“아 쪽팔려.”
담탱이한테 룸쌀롱 티켓이나 주고, 9시 뉴스에서는 편의점에서 칼질하다 경찰에 잡힌 아버지. 지금 누구 때문에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사는데 딸은 야속하게도 일기장에다 아버지가 죽어줬음 좋겠단다.
“다른 조폭들은 칼 맞아 잘 죽던데, 우리 아빠도 그냥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저려옴을 느낀다. 저 딸의 얼굴에 내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름 바 없는 가정에서 태어난 애들은 다 안다. 돈이 사람을 구질구질하게 한다는 것을. 사는 게 그런 거다. 돈이 없으면 비굴 해진다. 돈이 없어도 행복한 가정이 있다고? 그게 있다고 해도 난 영화에서 밖에 보질 못했다. 돈이라는 것에 제약이 없는 풍요로운 세상.우리는 그런 생활을 꿈꾼다. 그런 걸 우리는 ‘우아한 세계’라고 하겠지.
하지만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다. 그것은 아비의 마음. 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그 마음. 오래된 아파트에서 가족들을 있게 하고 싶지 않다는 그 마음. 딸에게는 자랑스런 아버지가 되고픈 그 마음. 아내에게는 어깨 쫙 펴고, 밥상을 받고픈 그 마음. 가족사진의 웃고있는 가족들을 매일 보고싶은 그 마음. 지갑 속의 사진 속에 숨겨둔 그 열망.
머리에 피가 마르자 현실이 보인다. 내 아버지를 다른 집 아버지와 비교하게 되고, 내 집을 다른 아이들의 집과 비교하게 된 거다. 내 친구의 나이키 신발을 나는 가질 수 없음을 알게 되고, 그러면서 열등감이란 걸 배운다. 돈이란 게 없으면 이렇구나. 그걸 배운다. 그 차이를 알게 되면 그때부터는 골치가 아픈 거다. 그땐 어렸다고? 철들고 지금은 그런 거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고? 그런 소리 하지마라. 세상을 살면서 어쩔 수가 없는 거다. 속일 수가 없는 거다.
<우아한 세계>가 보여주는 절대로 우아하지 못한 세상의 모습은 인구가 발버둥치는 이유와 같다. 넓은 집에서 행복한 가정을 꾸미고픈 한 남자의 목표. 그것은 열등감이라고 정의된다. 나의 열등감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순수한 생각 말이다. 이 시대의 가장을 조명하는 영화 속 한국의 가장인 인구의 발버둥은 친구의 나이키 신발에 열등감을 느끼는 소년과 다를 것이 없다. 나를 답습하지 않고, 내 자식만큼은 그 우아한 세계로 가길 바라는 아비의 마음은 위대하다. 그렇지만 그 위대함을 가족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왜냐는 물음을 던진다면 이유는 간단하다. 마음은 전달하지 못했기에.
누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했던가. 이 말은 한국에서만 유효하다. 가는 길에 무슨 꼴을 당해도 좋다는 말인가? 적어도 자신은 그래도 되겠지.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는 한국의 풍토는 인구에게도 여실히 적용된다. 그렇지만 그것을 동행자에게까지 이해시키기는 힘든 거다. 인구의 가족들은 분명 서울이 아니어도 좋으니 이쯤에서 쉬자고 말했음에도 인구는 서울을 고집했다. 그 위대한 가장의 마음이 목표의식 속에 가족의 마음을 잃고 만 것이다. 너무도 흔해빠진 얘기지만, 가장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고, 돈타령의 자본주의의 부식화도 여기서 부터다. 우리의 위대한 가장께서 우리보다는 그림 같은 2층집을 찾으시는데, 아무리 가족이라 한들 참고는 살지만 정이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본디 가족을 위한 몸부림이라 할 지라도 대화와 호흡이 없는 과정은 동행자들을 질리게 만들어 버렸다. 결국 풍요로운 전원주택에 가족 들을 앉히겠다는 열망은 식어버린 된장국처럼 좀처럼 손이가지 않는다.
힘겨운 조폭생활을 통해 인구가 자신을 희생에서 얻은 가족의 우아한 세계에 인구 본인은 들어가지 못한다. 자신이 홧김에 던져버린 라면을 자기가 치워야 하는 기러기 아빠의 현실. 그게 우아한 세계의 진실이다. 울어본들 무엇할까? TV 속 내 마누라와 자식들은 행복한데 그것이면 된 거지. 자신을 남기고 모두 유학 간 가족들을 테잎으로 보며, 인구는 넋이 빠진 표정으로 자신은 옳은 길을 걸었다고 되뇌일뿐이다. 이미 벌어질 대로 벌어진 아버지와 다른 가족의 관계처럼, 꿈과 현실의 괴리감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비극적이다. 비록 내 마음을 몰라주는 가족들이라 해도 인구는 행복해야 한다. 조폭생활을 끝끝내 포기하지 못했던 것은 인구가 선택한 우아함을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행복을 생각하지 않고, 가족들을 위해 사는 이 시대의 모든 아버지들에게 고한다. 그대들의 위대한 열등감이 되물림 되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또한, 당신이 행복하지 않고서 어떤 목적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보다 직접적인 물음 말이다. 위대한 가장 인구는 우아한 세계에서 라면이나 빨고 있다. 그것도 꽤나 처절하게 혹은 눈물나게.
나와 가족의 행복에 대한 솔직한 물음이 그의 앞에서 춤을 춘다.
한국의 가정에 대한 이 솔직한 보고서에서 조폭은 없다고 보면 된다. 그저, 그가 꿈꾸는 우아한 세상과 반대되는 개념에 적절한 비유대상이었을 뿐이다. 인구를 연기한 송강호의 연기는 과연 구관이 명관이다. 사회의 다양한 소시민을 연기해온 그가 연기하는 조폭은 생활의 냄새가 풀풀 났으며, 느와르 특유의 신랄함까지 적절하게 표현했다. 그를 보면서 내 아버지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면 거짓말일까? 내 유년시절의 완전한 표본이 되어준 그 분 말이다. 어느 순간 머리의 피가 말라가면서 그 분의 현실을 보았다. 어린 나를 위해서 붕어빵 한 봉지를 사오시는 든든한 우리의 버팀목이 아닌, 하나의 인간으로서 그를 본다. 어리석게도 그를 평가하려 한다. 그 냉소적인 느낌을 영화는 아주 적날하게 보여주고, 생각의 공란을 제공한다.
이제 인생의 갓 스무고개를 넘었다. 점점 알게 되는 사회의 현실의 삶을 마주할 때마다 아버지가 생각난다. 츄리닝 바람으로 소주 한 병을 들고 걸어오시는 아버지가 보인다. 코를 시큰하게 자극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느낀다.
“나도 집착하게 될까?”
아버지가 만든 우아한 세계에서 옳고 그름은 따질 수가 없다. 어떠한 선택도 인생의 무게로 다가올 것이기에, 아무런 표정도 없이 오늘도 서울의 그림 같은 빌딩을 찾는 거다. 껍데기뿐인 우아함을 찾는 거다.
이 세상 모든 아버지처럼, 나도 그를 답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