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한국에서 드디어 희망을 봤어요. 10대들이 그렇게 깨어있는 눈을 하고 거리로 나온 거에요. 아이들에게 희망이 있었어요. (중략) 헌데 나도 폭력에 대한 그 무언가를 느껴요. 여기 이 어린 여자애를, 전경이 때렸단 말야. 그럼 나도(주먹을 쥔다), 폭력을 써요. 어쩔 수 없어요. 그리고 그럴 때 마다 막 갈증 같은 갈망을 느껴요. 내가 이 배낭을 열면 SF에 나올법한 그런 엄청난 무기가 나오는 거야. 그리고 그걸 휘둘러 전경들을 다 쓸어버리고 청와대로 진격하는 거지. 정말 그런 걸 느껴요. 힘을 가지고 싶다. 아주 강한 힘을"
사례 2.
"한국 20대들은, 특히 20대 남성들은 다들 비실비실해요. 안 그래요 여러분? 그렇게 생각 안해요? 다들 맥아리가 없고 기가 죽어있어. 왜 그런 거 같아요? 취직 못해선가? 다 공부해서? 10대들은 안 그렇더라구. 아 아주 좋았어요."
사례 3.
"이대로는 안돼. 대학생들이 다 나오긴 했는데, 얘들이 데모를 안겪어봐서 그런지 어떻게 싸워야할지 모르더라구. 아까 버스 부술 때 보니까 앞장서서 깨부수고 있는 건 다 30대더라(웃음). 밧줄 달아서 버스 전복시키는 거. 그거 애들은 안해봐서 몰라. 이제 이 정권을 끝장내려면 386이 다 나와야돼. 화염병 던져본 사람들이 나와야 돼."
힘이 날뛰고 있다. 아주 센 걸로. 이리저리. 누군가가 기억 속에 아련히 가지고 있던 힘의 향수를 불러냈고, 그것이 공통의 기억, 대중의 기억이든 개인의 기억이든 간에, 힘은 드디어 폭력이 되었다. 비폭력으로 출발했던 위대한 정신은 사그라들었다.
촛불시위대는 초반보다 그 규모가 상당히 커졌다. 1~2만명이면 많이 나왔다며 호들갑 떨던 게 지난 주였는데, 이제(6월6~8일)는 매일 10만이 넘는 인원이 가볍게 모인다. 그렇다면 촛불시위는 그 전성기를 향해 달려가는 가? 아니다. 전성기는 이미 지나갔다. 촛불은 꺼져가는 중이다. 그리고 곧 마지막 빛을 발하고 사그라들 준비를 하고 있다.
사태의 초반 거리로 나온 시민들은 모두 자유인이었다. 그들은 촛불을 들고 자리에 앉아 자신들의 정치적 의견을 피력했다. 그들은 자기가 자기의 의사결정자요, 원하는 대로 자기 소리를 낼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인이었다. 자유로우면서도 동시에 공동의 행동으로 자기를 제약시키는, 부분과 전체의 변증법의 위태로운 선 위에 서서 자신을 정립할 줄 알았다.
그리고 그러한 자유를 보장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촛불이었다. 촛불집회가 처음 태동했던 시기를 기억하는지. 2002년 말, 미군에 의한 여중생 사망사건이 국민의 공분을 자아냈고, 그들은 당년 6월의 기억을 되살려 촛불을 들고 거리로 모이기 시작했다. 촛불은 조의였고, 침묵이었고, 분출되지 않은, 내면으로 응집한 힘이었다. 가장 큰 소리는 침묵의 소리다. 초기에 자유롭게 모인 시민들은 그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배우지 않고도 알았다.
그런데,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손에서 촛불을 놓기 시작했다. 빈 손은 전경의 방패를 빼앗기도 하고, 각목을 들기도 했다. 누구는 밧줄을 들었고, 누구는 그저 주먹을 쥐었다.
역사를 보자. 폭력으로 무언가를 제압하고자 했던 이들도, 폭력을 폭력으로 제압하고자 했던 이들도 모조리 망했다. 실패했다. 폭력에 대항한 반폭력(반폭력은 비폭력과 다르다. 작용에 대한 반작용,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보복률이다)은 결코 그것을 종식시키는 힘이 아니라, 그것에 동조함으로써만 스스로를 유지하는, 기생충이다. 국면을 해결하는 힘은 반폭력이 아니라 비폭력일 뿐이다. 말을 바꾸자면, 폭력초월적인, 한 차원 높은 힘이다.
物極必反. 그 무엇이라도 여기서 벗어날 순 없다. 벗어날 길이 있다면, 物에서 벗어나야할 뿐이다. 상대방을 화해불가능한 적으로 규정하는 순간, 이 유일한 가능성도 사라질테지만.
02년에도 그랬던 것 처럼, 08년의 시위도 이미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폭력에 대한 반폭력의 시작과, 이 새로운 권력. 거리로 나온 10만명어치의 권력을 자기것으로 하기 위한 치열한 인정투쟁이 시작된 이상 이미 이 집회는 끝장났다고 보아야한다. 누군가는 이 지점에서 반발할 것이다. 지금 조중동의 주장처럼 배후를 찾는 거냐고. 아니다. 배후가 아니다. 배후라니? 천만에. 누구도 뒤에 있지 않다. 자유로운 시민들이었던 그들간에 벌어지는 투쟁일 뿐이다. 이 투쟁은 자연발화할 뿐, 누군가가 질러주어서 불붙는 게 아니다.
이 투쟁은 무엇이며 어떤 성격을 띠는가. 개인의 총합을 군중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개인의 총합은 그저 무질서하고 산란하게 흩어진 '떼'일 뿐, 한 목적으로,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군중과는 다르다. 군중은 그러므로 자체적인 움직임을 갖출 만큼의, 최소한의 조직을 필요로 한다. 양'떼'는 양치기 개가 있어야만 통일된 방향을 갖을 수 있다.
최초에, 조직이 아직 건강한 상태에 있을 때에는, 창조력을 가진 소수가 이 조직의 주요 지도자로 등장한다. 이 창조력은, 바람이 풀을 눕히듯, 소리가 소리를 공명시키듯, 놀라운 감화력을 가지고 들불처럼 번져나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 창조력, 감화력과 무관하게, 조직을 장악하는 이가 등장한다. 이들은 선동을 통하여, 폭력을 통하여, 혹은 자기 선배들인 창조적 소수로부터 이어받은 관성으로 권력을 장악하며,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빈약한 창조력으로 조직을 이끈다. 이들은 그저 지배하는 소수일 뿐이다.
진정한 適은, 지배하는 소수는 애초에 그렇게 모였던 시민 가운데서 나온다. 자신의 신념을 건, 목숨을 건 투쟁 끝에 힘을 장악한 소수는(물론 이런 경우 대개는 과격파가 승리한다) 다른 시민들에게 자신들의 신념을 향하도록 주문한다. 이 주문으로 인해, 잠시간은 시위대의 힘이 커진다. 힘의 방향이 통일되고, 폭력의 사용을 정당화할 논리가 유포되니까.
그러나 이 주문이 시민들에게 도달하는 순간, 시민들은 자신들이 더 이상 자유인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 주문된 행동에 응하는 것은 결코 거리로 나올 때 품었던 이상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이 인정투쟁에서 패배한, 더 적은 자유를 누리는(헤겔에 따르면), 주인에 대해 노예가 되었음을 느낀다.
결국 정부가 시민들에게 강요했던 폭력과 피폭력의 관계가 시위대 안에서도 똑같이 드러나게 된다. 어째서 시위대는 정부를 닮게 되어버렸을까. 답은 자명하다. 자신을 정부(N극)의 또 다른 대립극(S극)에 위치시키기를 주저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립극은 결코 창조적인 대안이 아니다. S극은 본질적으로 N극과 다르지 않다. 시위대가 S극이 되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정당한 항의는 정부의 행위를 공격함으로써 자신의 순도를 유지할 수 있으나, 순수함을 잃은 항의는 정부 그 자체에 대한 적개심으로 자신을 움직인다. 그것이 자신을 정부가 보여준 폭력의 구조를 그대로 답습하게끔 만드는, 곧 S극이 되게끔 만드는 것이다.
요컨대, 처음엔 불의에 대한 항거에서 시작했다면, 지금은 불의한 자에대한 적의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다시 요컨대, 죄를 미워하지 못하고 사람만 미워하게 된 셈이다.
스스로 정부(N극)에 대해 닮은 꼴의 대척점(S극)이 되기를 선택한 이상, 역설적으로 정부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 성역이 되어버린다. 설령 강한 힘으로 N극을 잘라내더라도, 반드시 내부에서 새로운 N극이 생긴다. 대립은 해결되지 않는다. 이유야 어찌됐든 반폭력으로 폭력을 제압하겠다는 발상은 실패로 귀결될 운명을 타고난 발상이다.
이론적인 논의를 끝내고, 실천적인 맥락을 보자. 작금의 시위대가 행동하는 대로, 전경을 제압하면(한국에 전경 몇 명 없다. 50만 육군중 일부를 뽑아서 전경으로 복무시키는 것 뿐이다. 지금 광화문 등지에 모여있는 전경이 사실상 대한민국이 끌어다 쓸 수 있는 전경의 전부라고 봐도 된다.) 그 다음엔 무엇이 올 것 같은가? 폭력으로 전경을 무장해제 시킨 시위대는 어디로 가겠나? 아마도 청와대로 가겠지. 과연 청와대 앞에서 농성만 할 것인가? 시위대는 이미 비폭력주의를 표방할 수 없으므로, 지배적 소수는 전경버스에 대해 그랬던 것 처럼 청와대의 철문을 뜯어내고 안으로 진입할 것을 주문할 것이다. 청와대 뜰에 앉아 점령의 기쁨을 누릴 그들의 다음 행동은 '명박아 나와라'일 것이다. 과연 대통령이 그들 앞에 설까? 선다고 치자. 그럼 그 다음은? 극적인 상황이다. 대통령과 시위대 간의 인정투쟁은 자신의 실존을 건 싸움이다. 지는 쪽은 죽는다. 시위대는 다수이고 대통령은 소수인 상황에서 반드시 시위대는 대통령의 항복을 받아낼 것이다. 최소한 받아내려고 할 것이다.
전경의 해체단계에서부터 이미 불법의 단계를 넘어 헌법에 대한 불복종을 시작했다고 봐야할 이 시위대는, 이 단계에 있어 적법절차에 따라 선출된 헌정기관에 대한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헌법에 대한 공격을 이르는 용어가 딱 두 개 있다. 쿠데타 혹은 혁명이다.
이 전개에 있어 어딘가에서부터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면 당신은 자유인이라고 믿고 있던 시민이고, 당연히 저렇게 해서 대통령의 하야를 받아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당신이 곧 지배적 소수이다. 우리는 냉철하게 돌아봐야한다. 청와대로 가자, MB를 끌어내자, 하야하라 기타등등의 주장에 대해 면밀히, 냉정히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한 마디 한 마디의 귀결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잘 살펴야한다. 이 주장들이 사실은 위의 전개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을 자각하고, 그 전개가 내가 원하는 전개인지 아닌지 역시 따져봐야한다. 원하는 것이었다면 원하는 대로 밀고 나가야 할 것이나, 내가 원하던 게 저런 결과가 아니었다면? 내가 시위를 하며 무얼 원했는지 다시 살펴볼 일이다. MB가 시위대 앞에 서서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는 순간 군중들이 그를 용서하며 같이 부둥켜 안고 울고 웃으며 행복하게 끝나는 동화를 꿈꾸기엔 우린 너무 늙었다.
촛불
사례 1.
"난 한국에서 드디어 희망을 봤어요. 10대들이 그렇게 깨어있는 눈을 하고 거리로 나온 거에요. 아이들에게 희망이 있었어요. (중략) 헌데 나도 폭력에 대한 그 무언가를 느껴요. 여기 이 어린 여자애를, 전경이 때렸단 말야. 그럼 나도(주먹을 쥔다), 폭력을 써요. 어쩔 수 없어요. 그리고 그럴 때 마다 막 갈증 같은 갈망을 느껴요. 내가 이 배낭을 열면 SF에 나올법한 그런 엄청난 무기가 나오는 거야. 그리고 그걸 휘둘러 전경들을 다 쓸어버리고 청와대로 진격하는 거지. 정말 그런 걸 느껴요. 힘을 가지고 싶다. 아주 강한 힘을"
사례 2.
"한국 20대들은, 특히 20대 남성들은 다들 비실비실해요. 안 그래요 여러분? 그렇게 생각 안해요? 다들 맥아리가 없고 기가 죽어있어. 왜 그런 거 같아요? 취직 못해선가? 다 공부해서? 10대들은 안 그렇더라구. 아 아주 좋았어요."
사례 3.
"이대로는 안돼. 대학생들이 다 나오긴 했는데, 얘들이 데모를 안겪어봐서 그런지 어떻게 싸워야할지 모르더라구. 아까 버스 부술 때 보니까 앞장서서 깨부수고 있는 건 다 30대더라(웃음). 밧줄 달아서 버스 전복시키는 거. 그거 애들은 안해봐서 몰라. 이제 이 정권을 끝장내려면 386이 다 나와야돼. 화염병 던져본 사람들이 나와야 돼."
힘이 날뛰고 있다. 아주 센 걸로. 이리저리. 누군가가 기억 속에 아련히 가지고 있던 힘의 향수를 불러냈고, 그것이 공통의 기억, 대중의 기억이든 개인의 기억이든 간에, 힘은 드디어 폭력이 되었다. 비폭력으로 출발했던 위대한 정신은 사그라들었다.
촛불시위대는 초반보다 그 규모가 상당히 커졌다. 1~2만명이면 많이 나왔다며 호들갑 떨던 게 지난 주였는데, 이제(6월6~8일)는 매일 10만이 넘는 인원이 가볍게 모인다. 그렇다면 촛불시위는 그 전성기를 향해 달려가는 가? 아니다. 전성기는 이미 지나갔다. 촛불은 꺼져가는 중이다. 그리고 곧 마지막 빛을 발하고 사그라들 준비를 하고 있다.
사태의 초반 거리로 나온 시민들은 모두 자유인이었다. 그들은 촛불을 들고 자리에 앉아 자신들의 정치적 의견을 피력했다. 그들은 자기가 자기의 의사결정자요, 원하는 대로 자기 소리를 낼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인이었다. 자유로우면서도 동시에 공동의 행동으로 자기를 제약시키는, 부분과 전체의 변증법의 위태로운 선 위에 서서 자신을 정립할 줄 알았다.
그리고 그러한 자유를 보장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촛불이었다. 촛불집회가 처음 태동했던 시기를 기억하는지. 2002년 말, 미군에 의한 여중생 사망사건이 국민의 공분을 자아냈고, 그들은 당년 6월의 기억을 되살려 촛불을 들고 거리로 모이기 시작했다. 촛불은 조의였고, 침묵이었고, 분출되지 않은, 내면으로 응집한 힘이었다. 가장 큰 소리는 침묵의 소리다. 초기에 자유롭게 모인 시민들은 그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배우지 않고도 알았다.
그런데,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손에서 촛불을 놓기 시작했다. 빈 손은 전경의 방패를 빼앗기도 하고, 각목을 들기도 했다. 누구는 밧줄을 들었고, 누구는 그저 주먹을 쥐었다.
역사를 보자. 폭력으로 무언가를 제압하고자 했던 이들도, 폭력을 폭력으로 제압하고자 했던 이들도 모조리 망했다. 실패했다. 폭력에 대항한 반폭력(반폭력은 비폭력과 다르다. 작용에 대한 반작용,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보복률이다)은 결코 그것을 종식시키는 힘이 아니라, 그것에 동조함으로써만 스스로를 유지하는, 기생충이다. 국면을 해결하는 힘은 반폭력이 아니라 비폭력일 뿐이다. 말을 바꾸자면, 폭력초월적인, 한 차원 높은 힘이다.
物極必反. 그 무엇이라도 여기서 벗어날 순 없다. 벗어날 길이 있다면, 物에서 벗어나야할 뿐이다. 상대방을 화해불가능한 적으로 규정하는 순간, 이 유일한 가능성도 사라질테지만.
02년에도 그랬던 것 처럼, 08년의 시위도 이미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폭력에 대한 반폭력의 시작과, 이 새로운 권력. 거리로 나온 10만명어치의 권력을 자기것으로 하기 위한 치열한 인정투쟁이 시작된 이상 이미 이 집회는 끝장났다고 보아야한다. 누군가는 이 지점에서 반발할 것이다. 지금 조중동의 주장처럼 배후를 찾는 거냐고. 아니다. 배후가 아니다. 배후라니? 천만에. 누구도 뒤에 있지 않다. 자유로운 시민들이었던 그들간에 벌어지는 투쟁일 뿐이다. 이 투쟁은 자연발화할 뿐, 누군가가 질러주어서 불붙는 게 아니다.
이 투쟁은 무엇이며 어떤 성격을 띠는가. 개인의 총합을 군중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개인의 총합은 그저 무질서하고 산란하게 흩어진 '떼'일 뿐, 한 목적으로,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군중과는 다르다. 군중은 그러므로 자체적인 움직임을 갖출 만큼의, 최소한의 조직을 필요로 한다. 양'떼'는 양치기 개가 있어야만 통일된 방향을 갖을 수 있다.
최초에, 조직이 아직 건강한 상태에 있을 때에는, 창조력을 가진 소수가 이 조직의 주요 지도자로 등장한다. 이 창조력은, 바람이 풀을 눕히듯, 소리가 소리를 공명시키듯, 놀라운 감화력을 가지고 들불처럼 번져나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 창조력, 감화력과 무관하게, 조직을 장악하는 이가 등장한다. 이들은 선동을 통하여, 폭력을 통하여, 혹은 자기 선배들인 창조적 소수로부터 이어받은 관성으로 권력을 장악하며,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빈약한 창조력으로 조직을 이끈다. 이들은 그저 지배하는 소수일 뿐이다.
진정한 適은, 지배하는 소수는 애초에 그렇게 모였던 시민 가운데서 나온다. 자신의 신념을 건, 목숨을 건 투쟁 끝에 힘을 장악한 소수는(물론 이런 경우 대개는 과격파가 승리한다) 다른 시민들에게 자신들의 신념을 향하도록 주문한다. 이 주문으로 인해, 잠시간은 시위대의 힘이 커진다. 힘의 방향이 통일되고, 폭력의 사용을 정당화할 논리가 유포되니까.
그러나 이 주문이 시민들에게 도달하는 순간, 시민들은 자신들이 더 이상 자유인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 주문된 행동에 응하는 것은 결코 거리로 나올 때 품었던 이상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이 인정투쟁에서 패배한, 더 적은 자유를 누리는(헤겔에 따르면), 주인에 대해 노예가 되었음을 느낀다.
결국 정부가 시민들에게 강요했던 폭력과 피폭력의 관계가 시위대 안에서도 똑같이 드러나게 된다. 어째서 시위대는 정부를 닮게 되어버렸을까. 답은 자명하다. 자신을 정부(N극)의 또 다른 대립극(S극)에 위치시키기를 주저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립극은 결코 창조적인 대안이 아니다. S극은 본질적으로 N극과 다르지 않다. 시위대가 S극이 되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정당한 항의는 정부의 행위를 공격함으로써 자신의 순도를 유지할 수 있으나, 순수함을 잃은 항의는 정부 그 자체에 대한 적개심으로 자신을 움직인다. 그것이 자신을 정부가 보여준 폭력의 구조를 그대로 답습하게끔 만드는, 곧 S극이 되게끔 만드는 것이다.
요컨대, 처음엔 불의에 대한 항거에서 시작했다면, 지금은 불의한 자에대한 적의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다시 요컨대, 죄를 미워하지 못하고 사람만 미워하게 된 셈이다.
스스로 정부(N극)에 대해 닮은 꼴의 대척점(S극)이 되기를 선택한 이상, 역설적으로 정부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 성역이 되어버린다. 설령 강한 힘으로 N극을 잘라내더라도, 반드시 내부에서 새로운 N극이 생긴다. 대립은 해결되지 않는다. 이유야 어찌됐든 반폭력으로 폭력을 제압하겠다는 발상은 실패로 귀결될 운명을 타고난 발상이다.
이론적인 논의를 끝내고, 실천적인 맥락을 보자. 작금의 시위대가 행동하는 대로, 전경을 제압하면(한국에 전경 몇 명 없다. 50만 육군중 일부를 뽑아서 전경으로 복무시키는 것 뿐이다. 지금 광화문 등지에 모여있는 전경이 사실상 대한민국이 끌어다 쓸 수 있는 전경의 전부라고 봐도 된다.) 그 다음엔 무엇이 올 것 같은가? 폭력으로 전경을 무장해제 시킨 시위대는 어디로 가겠나? 아마도 청와대로 가겠지. 과연 청와대 앞에서 농성만 할 것인가? 시위대는 이미 비폭력주의를 표방할 수 없으므로, 지배적 소수는 전경버스에 대해 그랬던 것 처럼 청와대의 철문을 뜯어내고 안으로 진입할 것을 주문할 것이다. 청와대 뜰에 앉아 점령의 기쁨을 누릴 그들의 다음 행동은 '명박아 나와라'일 것이다. 과연 대통령이 그들 앞에 설까? 선다고 치자. 그럼 그 다음은? 극적인 상황이다. 대통령과 시위대 간의 인정투쟁은 자신의 실존을 건 싸움이다. 지는 쪽은 죽는다. 시위대는 다수이고 대통령은 소수인 상황에서 반드시 시위대는 대통령의 항복을 받아낼 것이다. 최소한 받아내려고 할 것이다.
전경의 해체단계에서부터 이미 불법의 단계를 넘어 헌법에 대한 불복종을 시작했다고 봐야할 이 시위대는, 이 단계에 있어 적법절차에 따라 선출된 헌정기관에 대한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헌법에 대한 공격을 이르는 용어가 딱 두 개 있다. 쿠데타 혹은 혁명이다.
이 전개에 있어 어딘가에서부터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면 당신은 자유인이라고 믿고 있던 시민이고, 당연히 저렇게 해서 대통령의 하야를 받아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당신이 곧 지배적 소수이다. 우리는 냉철하게 돌아봐야한다. 청와대로 가자, MB를 끌어내자, 하야하라 기타등등의 주장에 대해 면밀히, 냉정히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한 마디 한 마디의 귀결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잘 살펴야한다. 이 주장들이 사실은 위의 전개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을 자각하고, 그 전개가 내가 원하는 전개인지 아닌지 역시 따져봐야한다. 원하는 것이었다면 원하는 대로 밀고 나가야 할 것이나, 내가 원하던 게 저런 결과가 아니었다면? 내가 시위를 하며 무얼 원했는지 다시 살펴볼 일이다. MB가 시위대 앞에 서서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는 순간 군중들이 그를 용서하며 같이 부둥켜 안고 울고 웃으며 행복하게 끝나는 동화를 꿈꾸기엔 우린 너무 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