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털 다음의 토론게시판 ‘아고라’(agora)는 참 잘 지어진 이름이다. 아고라의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된다면.
그리스 전문가인 유재원 한국외대 교수(그리스·발칸학)에 따르면, 그리스 직접민주주의는 참정권이 있는 성인들이 모인 '민회'를 통해 이뤄졌다. 민회는 기원전 6세기부터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건너편의 프닉스 언덕에서 열렸다고 한다. 민회가 가능해진 것은 태곳적부터 그리스인들이 시장이자 저잣거리인 '아고라'에서 쌓은 토론과 의견 교환의 경험 덕분이었다. 정치가들은 아고라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여론을 알았다. 정치가를 꿈꾸고 현인을 쫓던 젊은이들도 이곳에 모였다. 아고라에서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들이 제자들을 만났고,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논쟁했다.
△ 이 캐릭터들은 화장품 카페 '새틴' 회원의 작품을 원용한 것입니다. 새틴은 이 캐릭터의 '펌질'을 허용했습니다
“우리 지치지 말아야 합니다”
2008년 4월, 다음 아고라에서 하나의 촛불이 올랐다. 촛불은 물결을 이뤄 2008년 6월10일 서울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운 50만의 촛불이 되었다. 아고라에서 이뤄진 토론은 ‘오프라인 아고라’인 광화문에서 현실이 됐다. 사람들은 한국형 직접민주주의를 아고라와 광화문에서 경험했다. 지도부는 없었다. 배후도 없었다. 시민들은 스스로 의제를 정했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대표했다. 2008년 아고라와 광화문의 경험은 우리에게 21세기형 직접민주주의의 '원체험'이 됐다.
다음이 아고라 서비스를 시작한 것은 2004년 12월. 이때 이미 2008년 6월의 상황을 예상하기라도 한 걸까. 2008년 한국은 과연 '프닉스 언덕의 민회'를 만들 수 있을까.
<한겨레21>과 다음 아고라는 촛불의 향배를 아고라인들에게 묻는 공동기획을 마련했다. 우리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을 물었다. 청와대가 가야 할 길을 물었다. 2008년 6월9일 아고라에 ‘아고라인들이 청와대에 말한다’라는 게시판을 만들었다. 닷새 만에 1천 건에 가까운 글들이 올라왔다. <한겨레21>은 여기에 올라온 아고라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정리했다. (지면 관계상 글은 발췌했고, 제목과 글쓴이의 아이디는 그대로 공개했다.)
먼저, 아고라인들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감사한다고 했다. 물론 역설이다.
‘대통령님 덕에 저의 가족은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 ID 마빈
“저와 저의 신랑, 저의 아들, 제 부모님과 형제, 어린 조카들까지,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투표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국민이 힘들고 국가가 존폐의 위기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민주화를 의식화해주신 데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대통령, 경찰청, 보수단체, 생각 없는 언론이 국민에게 어떤 위해를 가하는지 똑바로 보여주어서 고맙습니다.”
‘2mb 당신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선구자입니다’ - ID 무늬야
“당신 때문에 제 주위의 많은 10대, 20대가 정치와 언론매체에 관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앞으로 4~5년 후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제2의 르네상스’가 오기를 기다리겠습니다.”
그러나 울음이 난다고 했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내가 왜 나라 경제 걱정하며 울어야 됩니까?’ - ID 신미림
“내가 왜 당신의 정책들 때문에 울어야 하나요? 정치의 ‘정’자도 모르던 내가 왜 정치를 알게 되고 그 정치 때문에 나의 미래를 걱정하면서 울어야 하는 건가요.”
그래도 지치지 말자고 했다.
‘저들은 우리가 지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 ID 가을하늘
“우리는 다수지만 생업에 목매달고 살아야 하는 서민들입니다. 저들은 조상 때부터 축적해온 부와 권력으로 호의호식하며 느긋이 사태를 관망 중입니다. 한마디로 충분한 자산과 권력이 있으니 급할 게 없다 이거죠. 서민들이 생업과 냄비 근성으로 촛불집회가 사그라질 때 터트리기 위해, 그들만의 이익창출을 위한 정책 등을 준비하고 있을 겁니다. 우리가 목적을 달성하기 전에는 절대 촛불을 내려서도, 꺼서도 안 됩니다.”
교과서값까지 자율화?
10대들, 특히 대학입시와 고등학교 진학을 눈앞에 둔 고3과 중3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이들은 자신의 눈높이에서 문제점들을 적었다.
‘고3이 몇 마디 적어봅니다’ - ID 채령후
“학교에서 신문을 보다가 한 기사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교과서값 자율화 추진.’ 교과서 가격이 자율화되면 현재 가격의 3~4배가 된다고 합니다. 지금도 저와 제 친구들은 교과서가 비싸다며 헌 교과서를 얻어오기도 하고, 학교 소각장에 가서 선배들이 버린 교과서, 깨끗한 걸로 골라 주워오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 도서관 민영화를 추진한다는 이야기도 듣고 충격받았습니다. (도서관과 같은) 공공재는 시민들의 편의를 위해 만드는 재화가 아닙니까? 시민의 편의마저 박탈하려는 국가가 무슨 국가입니까.”
‘내 나이 중3, 사회 헛배웠다!’ - ID SHM
“EBS 사회(교재) 29쪽에 보면 ‘정치 과정의 단계’라는 게 있다. ‘이익표출→이익집약→정책결정→정책집행’. 지금 이것이 지켜지고 있을까? MB는 거의 다 안 하고 있다. 최고로 안 하는 것이 ‘이익집약’과 ‘정책결정’ 과정이다. 이익집약은 시민단체나 정당, 언론에 의해 집약되는 것인데, MB는 자기 마음대로 하고 있다. 정책결정은 제대로 하는가? ‘대운하 하겠다’ 해놓고 ‘안 하겠다’ 하고 또다시 ‘하겠다’고 하고. 정치 과정의 단계도 모르는 MB, 대통령 자격이 있나? 중3 학생도 아는 것을.”
이들은 '광화문 세대' '아고라 세대' '행동하는 10대'가 되겠다고 했다.
‘내가 사랑하는 이 나라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여고생입니다’ - ID 차가운비
“MB씨는 대한민국 국민을 너무 우습게 보셨습니다. 우리 국민이 좀 빨리 끓고 빨리 식는다지만, 지금 자라나는 10대들은 절대 안 잊습니다. 지금의 어른들이 4공, 5공을 뼛속까지 기억하고 있듯.”
지지자들도 마지막 단계의 통보를 하고 있었다. 기독교인들 역시.
△ 사진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제발… 우리나라 국민들을 위한 정치를 해주십시오’ - ID 하늘
“다른 나라 대통령은 제 국민 지키기에 여념이 없는데, 이명박 대통령은 국민더러 희생하라고 하네요. 당신이 진정 두려워하는 이가 누군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전 당신을 뽑았습니다. 믿음을 보여주세요.”
‘당신은 바리새인입니다’ - ID 유흥식
“이명박 장로, 당신은 바리새인입니다. 그들 때문에 예수님은 죽었습니다. 지금도 당신 때문에 예수님이 죽습니다. 낮고 천한 곳에 속한 사람을 위한 분이 예수셨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지금 어떤 일을 하고 계시죠? 서민들은 다 죽어갑니다. 지금 당신 눈에는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만 보입니다. 당신은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다윗왕도 선지자가 와서 잘못을 지적했을 때 바로 상황을 회개하고 돌렸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일주일에 10분만 아고라로
이들이 원하는 것은 진정한 '소통'이었다.
‘소통의 의지를 보여라!’ - ID 카라멜모카
“대한민국의 CEO를 자처하신 이명박 대통령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국민이 반대하는 모든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지 않습니까! 왜 길이 아닌 곳으로 모두를 끌고 가려고 하십니까? 길이 아닌 곳을 가는 것은 모험가에게나 어울립니다. 대통령은 모든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이 제일 큰 직무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 ID 준희맘
“이명박 대통령은 왜 존경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국민에게 거짓으로 그리 말을 하시는지요? 지금까지의 행동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에게 하는 짓거리로 보십니까? 우리는 이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 외치지 않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소통입니다.”
물론, 서민과의 소통이다. 재벌이나 종교 지도자와의 한정적 소통이 아닌.
‘이명박 정권은 재벌 기업인들과의 핫라인을 폐쇄하라’ - ID 희망만들기
“유례가 없는 정경유착이 가능한 재벌과의 핫라인을 대놓고 ‘기업 프렌들리’ 정책이라며 내놓고 실행하고 있지만, 국민과의 소통은 안중에도 없는 대통령의 독선에 정신을 차리게 해줍시다. 취임 초에 개설했던 기업인(재벌) 30인과의 상시 직통 전화 연락을 즉시 폐쇄해야 합니다. 진정한 지도자로서 국민을 위한 여러 계층의 소리를 골고루 듣고 진정한 국가 발전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한 줄에 진리를 담기도 했다.
‘★2MB와 정치인들이 꼭 알아야 할 공식★’ - ID 빨간우산1
“民心 = 天心”
‘일주일에 단 10분만 아고라에 와주세요’ - ID 퓨처뮤점
“제가 말하고 싶은 건 대통령님이 아고라를 일주일에 10분 만이라도 봐달라는 겁니다. 집무실 자리에 앉아서 수십만 명이 외치는 목소리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미국과의 쇠고기 재협상이다. 아니면 재신임을 물으란 것이다.
‘재협상 아니면 재신임’ - ID 구로동k
“노무현 정부는 스스로 재신임을 묻는 국민투표를 제안한 바 있다. 만약 당신들이 정말 옳다는 확신이 있고 주권재민을 인정한다면 배짱과 소신을 한번 보여주기 바란다. 그런 것도 없다면 더 이상 우리 국민과 대한민국을 온 세계에 망신시키지 말고 스스로 물러남이 옳지 않은가!”
대규모 공연·행진·전국 투어…
‘청와대는 절대 안전할 겁니다’ - ID 이사야
“설령 시민들 손에 무기가 들린다 할지라도 장갑차와 총으로 무장한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권력이 있기 때문에 청와대만큼은 안전하게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순간 당신은 더 이상 우리나라 대통령이 아니라 그저 ‘청와대에 사는 사람’일 뿐이죠. 대통령이라는 직책에 앉아 있으려면 국민과 소통을 하시길 바랍니다. 당신이 우리의 뜻에 반하는 정책을 계속 한다면 우리는 5년 내내 촛불을 들 수도 있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평화스런 집회에 참석하는 우리와 불안한 마음으로 청와대에 앉아 있는 당신 중 누가 먼저 지치나 내기라도 하실래요? 나경원이라는 사람이 <100분 토론>에 나와서 ‘대통령을 바꾸실 건가요?’ 이러더군요. 그럼 대통령을 바꾸지 ‘국민’을 바꾸시겠습니까?”
아고라인들은 해외 사례까지 들어 이명박 대통령의 결단을 압박했다.
‘타이레놀의 존슨앤존슨과 2MB 정부’ - ID 스트렌졀
“존슨앤존슨의 타이레놀 리콜 사건이 문득 생각납니다. 1980년대 미국에서 몇 사람이 ‘타이레놀’을 복용하고 사망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조사 결과 어떤 정신병자가 ‘일부’ 타이레놀에 청산가리를 넣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때 존슨앤존슨은 시중에 유통되는 타이레놀의 전량 리콜을 결정했습니다. 정신병자 한 명이 청산가리를 넣은 몇 병을 막기 위해 3천만 병이나 되는 제품을 수거하였습니다. 광우병이라는 병이 있답니다. 누구는 먹어도 된다고 하고, 누구는 조금이라도 먹으면 큰일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걸리면 죽는 것은 사실입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냥 괜찮다고 합니다. 리콜할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저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말합니다. 그대들의 대처 방식에 대한민국의 주주이자 소비자인 나는, 실망 이외에 아무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고. 끝까지 이렇게 간다면 나는 주주이기를 거부하든가, 극히 떨어지는 소통 능력을 보여주는 현 대표이사를, 우리나라를 위하여 교체할 수밖에 없다고.”
'명박퇴진'이란 말머리가 아고라의 게시판을 가득 메운 것은 바로 이런 결연함의 표현이었다. 물론, 퇴진이 아닌 현실을 찾아야 한다는 현실론도 상당수다.
‘2008년 6월,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 - ID 늘바라기
“이명박 대통령은 우리나라의 모든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과주의, 강대국 사대주의, 빨리빨리 일처리 방식, 철학 없는 실용 강조, 원칙 없는 정책, 단기간적 안목, 부정직함, 부정부패, 군주주의적 사고방식, 후진국 콤플렉스, 밀실정치.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대단한 국민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드는 촛불이 국민이 하나 되는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명박 정권의 무리한 퇴진보다는 앞으로 국민을 두려워하며 긴장하게 하는 감시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고라인들은 더 많은 영역에서의, 더 많은 공간에서의 촛불을 요구하고 있었다.
‘촛불집회! 물리력보다는 상상력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 ID 북새통선생
“이제 촛불집회의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고민이 생기는 시점입니다. 이제는 다양한 상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나라당 당사 앞으로 행진을 하든지, 아니면 서울의 강남에서 모여 강북으로의 행진을 고려한다든지, 서울광장에서 대규모 공연을 하면서 흥을 돋우든지, 여의도에 모였다가 광화문으로 간다든지, 소규모라도 전국투어를 기획한다든지 일반 국민들도 얼마든지 동참할 수 있고 새로 참가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팽팽한 한계선상에서 누가 참으면서 더 상상력을 발휘하고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국민의 열정을 끌어오느냐의 전쟁이지, 전경과 일진일퇴하면서 혈기를 방출하고 분노를 해소하는 전쟁이 아닙니다.”
열린 공간과 매체를 지켜내라
결국 중요한 것은 모든 정보가 공정하게 오갈 수 있는 공간과 매체를 지켜내는 일이라고 했다.
‘촛불이 계속되길 원한다면, 이 전쟁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 ID bardtale
“주도세력 없는 국민들의 자발적 참여, 너무나도 멋집니다. 그러나 주도세력 없는 자발적인 시민운동은 구심점과 응집력에서 약점을 보이기 때문에 추진력이 상대적으로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운동이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건전한 방향으로 가기 위한 중추적 역할은 진실된 정보 전달이 원활히 이뤄질 때 가능합니다. 결국 촛불이 꺼지지 않기 위해선 거짓언론에 의한 의도적 언론 조작 및 통제를 막는 것이 우선시되어야 합니다. , 는 그들에게 선전포고했습니다. <한겨레>, <경향> 은 말 할 것도 없지요. 그들을 지켜 줘야 하는것이 이 시대의 우리 아고라, 아니 국민의 의무가 아닐까요. 정부는 최시중을 필두로 벌써 장악에 들어갔습니다. 임기로 보장된 정연주 사장입니다. 전초전이 되겠군요.”
물론, 아고라인들이 가장 지키고 싶은 곳은 아고라라는 광장일 것이다. 지금 아고라인들은 그렇게 스스로를 지키는 촛불을 들고 서 있다. (다음 아고라와 <한겨레21>의 공동기획은 촛불이 꺼지는 그날까지 계속된다.)
추신: 이 기사를 마감한 뒤, 6월13일 저녁 일부 보수단체 회원들이 와 난입을 시도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상황을 가장 빨리 전한 것도 아고라였다.
한겨레21 제 715호 ''아고라가 청와대에 말한다''
"언론 통제 중지, 재협상 아니면 재신임"
아고라가 청와대에 말한다…재벌과의 핫라인 철폐부터 촛불의 새로운 상상력까지 그들의 말말말 ▣ 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포털 다음의 토론게시판 ‘아고라’(agora)는 참 잘 지어진 이름이다. 아고라의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된다면.
그리스 전문가인 유재원 한국외대 교수(그리스·발칸학)에 따르면, 그리스 직접민주주의는 참정권이 있는 성인들이 모인 '민회'를 통해 이뤄졌다. 민회는 기원전 6세기부터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건너편의 프닉스 언덕에서 열렸다고 한다. 민회가 가능해진 것은 태곳적부터 그리스인들이 시장이자 저잣거리인 '아고라'에서 쌓은 토론과 의견 교환의 경험 덕분이었다. 정치가들은 아고라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여론을 알았다. 정치가를 꿈꾸고 현인을 쫓던 젊은이들도 이곳에 모였다. 아고라에서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들이 제자들을 만났고,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논쟁했다.
△ 이 캐릭터들은 화장품 카페 '새틴' 회원의 작품을 원용한 것입니다. 새틴은 이 캐릭터의 '펌질'을 허용했습니다
“우리 지치지 말아야 합니다”
2008년 4월, 다음 아고라에서 하나의 촛불이 올랐다. 촛불은 물결을 이뤄 2008년 6월10일 서울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운 50만의 촛불이 되었다. 아고라에서 이뤄진 토론은 ‘오프라인 아고라’인 광화문에서 현실이 됐다. 사람들은 한국형 직접민주주의를 아고라와 광화문에서 경험했다. 지도부는 없었다. 배후도 없었다. 시민들은 스스로 의제를 정했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대표했다. 2008년 아고라와 광화문의 경험은 우리에게 21세기형 직접민주주의의 '원체험'이 됐다.
다음이 아고라 서비스를 시작한 것은 2004년 12월. 이때 이미 2008년 6월의 상황을 예상하기라도 한 걸까. 2008년 한국은 과연 '프닉스 언덕의 민회'를 만들 수 있을까.
<한겨레21>과 다음 아고라는 촛불의 향배를 아고라인들에게 묻는 공동기획을 마련했다. 우리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을 물었다. 청와대가 가야 할 길을 물었다. 2008년 6월9일 아고라에 ‘아고라인들이 청와대에 말한다’라는 게시판을 만들었다. 닷새 만에 1천 건에 가까운 글들이 올라왔다. <한겨레21>은 여기에 올라온 아고라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정리했다. (지면 관계상 글은 발췌했고, 제목과 글쓴이의 아이디는 그대로 공개했다.)
먼저, 아고라인들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감사한다고 했다. 물론 역설이다.
‘대통령님 덕에 저의 가족은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 ID 마빈
“저와 저의 신랑, 저의 아들, 제 부모님과 형제, 어린 조카들까지,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투표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국민이 힘들고 국가가 존폐의 위기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민주화를 의식화해주신 데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대통령, 경찰청, 보수단체, 생각 없는 언론이 국민에게 어떤 위해를 가하는지 똑바로 보여주어서 고맙습니다.”
‘2mb 당신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선구자입니다’ - ID 무늬야
“당신 때문에 제 주위의 많은 10대, 20대가 정치와 언론매체에 관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앞으로 4~5년 후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제2의 르네상스’가 오기를 기다리겠습니다.”
그러나 울음이 난다고 했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내가 왜 나라 경제 걱정하며 울어야 됩니까?’ - ID 신미림
“내가 왜 당신의 정책들 때문에 울어야 하나요? 정치의 ‘정’자도 모르던 내가 왜 정치를 알게 되고 그 정치 때문에 나의 미래를 걱정하면서 울어야 하는 건가요.”
그래도 지치지 말자고 했다.
‘저들은 우리가 지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 ID 가을하늘
“우리는 다수지만 생업에 목매달고 살아야 하는 서민들입니다. 저들은 조상 때부터 축적해온 부와 권력으로 호의호식하며 느긋이 사태를 관망 중입니다. 한마디로 충분한 자산과 권력이 있으니 급할 게 없다 이거죠. 서민들이 생업과 냄비 근성으로 촛불집회가 사그라질 때 터트리기 위해, 그들만의 이익창출을 위한 정책 등을 준비하고 있을 겁니다. 우리가 목적을 달성하기 전에는 절대 촛불을 내려서도, 꺼서도 안 됩니다.”
교과서값까지 자율화?
10대들, 특히 대학입시와 고등학교 진학을 눈앞에 둔 고3과 중3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이들은 자신의 눈높이에서 문제점들을 적었다.
‘고3이 몇 마디 적어봅니다’ - ID 채령후
“학교에서 신문을 보다가 한 기사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교과서값 자율화 추진.’ 교과서 가격이 자율화되면 현재 가격의 3~4배가 된다고 합니다. 지금도 저와 제 친구들은 교과서가 비싸다며 헌 교과서를 얻어오기도 하고, 학교 소각장에 가서 선배들이 버린 교과서, 깨끗한 걸로 골라 주워오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 도서관 민영화를 추진한다는 이야기도 듣고 충격받았습니다. (도서관과 같은) 공공재는 시민들의 편의를 위해 만드는 재화가 아닙니까? 시민의 편의마저 박탈하려는 국가가 무슨 국가입니까.”
‘내 나이 중3, 사회 헛배웠다!’ - ID SHM
“EBS 사회(교재) 29쪽에 보면 ‘정치 과정의 단계’라는 게 있다. ‘이익표출→이익집약→정책결정→정책집행’. 지금 이것이 지켜지고 있을까? MB는 거의 다 안 하고 있다. 최고로 안 하는 것이 ‘이익집약’과 ‘정책결정’ 과정이다. 이익집약은 시민단체나 정당, 언론에 의해 집약되는 것인데, MB는 자기 마음대로 하고 있다. 정책결정은 제대로 하는가? ‘대운하 하겠다’ 해놓고 ‘안 하겠다’ 하고 또다시 ‘하겠다’고 하고. 정치 과정의 단계도 모르는 MB, 대통령 자격이 있나? 중3 학생도 아는 것을.”
이들은 '광화문 세대' '아고라 세대' '행동하는 10대'가 되겠다고 했다.
‘내가 사랑하는 이 나라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여고생입니다’ - ID 차가운비
“MB씨는 대한민국 국민을 너무 우습게 보셨습니다. 우리 국민이 좀 빨리 끓고 빨리 식는다지만, 지금 자라나는 10대들은 절대 안 잊습니다. 지금의 어른들이 4공, 5공을 뼛속까지 기억하고 있듯.”
지지자들도 마지막 단계의 통보를 하고 있었다. 기독교인들 역시.
△ 사진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제발… 우리나라 국민들을 위한 정치를 해주십시오’ - ID 하늘
“다른 나라 대통령은 제 국민 지키기에 여념이 없는데, 이명박 대통령은 국민더러 희생하라고 하네요. 당신이 진정 두려워하는 이가 누군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전 당신을 뽑았습니다. 믿음을 보여주세요.”
‘당신은 바리새인입니다’ - ID 유흥식
“이명박 장로, 당신은 바리새인입니다. 그들 때문에 예수님은 죽었습니다. 지금도 당신 때문에 예수님이 죽습니다. 낮고 천한 곳에 속한 사람을 위한 분이 예수셨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지금 어떤 일을 하고 계시죠? 서민들은 다 죽어갑니다. 지금 당신 눈에는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만 보입니다. 당신은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다윗왕도 선지자가 와서 잘못을 지적했을 때 바로 상황을 회개하고 돌렸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일주일에 10분만 아고라로
이들이 원하는 것은 진정한 '소통'이었다.
‘소통의 의지를 보여라!’ - ID 카라멜모카
“대한민국의 CEO를 자처하신 이명박 대통령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국민이 반대하는 모든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지 않습니까! 왜 길이 아닌 곳으로 모두를 끌고 가려고 하십니까? 길이 아닌 곳을 가는 것은 모험가에게나 어울립니다. 대통령은 모든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이 제일 큰 직무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 ID 준희맘
“이명박 대통령은 왜 존경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국민에게 거짓으로 그리 말을 하시는지요? 지금까지의 행동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에게 하는 짓거리로 보십니까? 우리는 이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 외치지 않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소통입니다.”
물론, 서민과의 소통이다. 재벌이나 종교 지도자와의 한정적 소통이 아닌.
‘이명박 정권은 재벌 기업인들과의 핫라인을 폐쇄하라’ - ID 희망만들기
“유례가 없는 정경유착이 가능한 재벌과의 핫라인을 대놓고 ‘기업 프렌들리’ 정책이라며 내놓고 실행하고 있지만, 국민과의 소통은 안중에도 없는 대통령의 독선에 정신을 차리게 해줍시다. 취임 초에 개설했던 기업인(재벌) 30인과의 상시 직통 전화 연락을 즉시 폐쇄해야 합니다. 진정한 지도자로서 국민을 위한 여러 계층의 소리를 골고루 듣고 진정한 국가 발전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한 줄에 진리를 담기도 했다.
‘★2MB와 정치인들이 꼭 알아야 할 공식★’ - ID 빨간우산1
“民心 = 天心”
‘일주일에 단 10분만 아고라에 와주세요’ - ID 퓨처뮤점
“제가 말하고 싶은 건 대통령님이 아고라를 일주일에 10분 만이라도 봐달라는 겁니다. 집무실 자리에 앉아서 수십만 명이 외치는 목소리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미국과의 쇠고기 재협상이다. 아니면 재신임을 물으란 것이다.
‘재협상 아니면 재신임’ - ID 구로동k
“노무현 정부는 스스로 재신임을 묻는 국민투표를 제안한 바 있다. 만약 당신들이 정말 옳다는 확신이 있고 주권재민을 인정한다면 배짱과 소신을 한번 보여주기 바란다. 그런 것도 없다면 더 이상 우리 국민과 대한민국을 온 세계에 망신시키지 말고 스스로 물러남이 옳지 않은가!”
대규모 공연·행진·전국 투어…
‘청와대는 절대 안전할 겁니다’ - ID 이사야
“설령 시민들 손에 무기가 들린다 할지라도 장갑차와 총으로 무장한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권력이 있기 때문에 청와대만큼은 안전하게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순간 당신은 더 이상 우리나라 대통령이 아니라 그저 ‘청와대에 사는 사람’일 뿐이죠. 대통령이라는 직책에 앉아 있으려면 국민과 소통을 하시길 바랍니다. 당신이 우리의 뜻에 반하는 정책을 계속 한다면 우리는 5년 내내 촛불을 들 수도 있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평화스런 집회에 참석하는 우리와 불안한 마음으로 청와대에 앉아 있는 당신 중 누가 먼저 지치나 내기라도 하실래요? 나경원이라는 사람이 <100분 토론>에 나와서 ‘대통령을 바꾸실 건가요?’ 이러더군요. 그럼 대통령을 바꾸지 ‘국민’을 바꾸시겠습니까?”
아고라인들은 해외 사례까지 들어 이명박 대통령의 결단을 압박했다.
‘타이레놀의 존슨앤존슨과 2MB 정부’ - ID 스트렌졀
“존슨앤존슨의 타이레놀 리콜 사건이 문득 생각납니다. 1980년대 미국에서 몇 사람이 ‘타이레놀’을 복용하고 사망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조사 결과 어떤 정신병자가 ‘일부’ 타이레놀에 청산가리를 넣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때 존슨앤존슨은 시중에 유통되는 타이레놀의 전량 리콜을 결정했습니다. 정신병자 한 명이 청산가리를 넣은 몇 병을 막기 위해 3천만 병이나 되는 제품을 수거하였습니다. 광우병이라는 병이 있답니다. 누구는 먹어도 된다고 하고, 누구는 조금이라도 먹으면 큰일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걸리면 죽는 것은 사실입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냥 괜찮다고 합니다. 리콜할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저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말합니다. 그대들의 대처 방식에 대한민국의 주주이자 소비자인 나는, 실망 이외에 아무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고. 끝까지 이렇게 간다면 나는 주주이기를 거부하든가, 극히 떨어지는 소통 능력을 보여주는 현 대표이사를, 우리나라를 위하여 교체할 수밖에 없다고.”
'명박퇴진'이란 말머리가 아고라의 게시판을 가득 메운 것은 바로 이런 결연함의 표현이었다. 물론, 퇴진이 아닌 현실을 찾아야 한다는 현실론도 상당수다.
‘2008년 6월,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 - ID 늘바라기
“이명박 대통령은 우리나라의 모든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과주의, 강대국 사대주의, 빨리빨리 일처리 방식, 철학 없는 실용 강조, 원칙 없는 정책, 단기간적 안목, 부정직함, 부정부패, 군주주의적 사고방식, 후진국 콤플렉스, 밀실정치.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대단한 국민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드는 촛불이 국민이 하나 되는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명박 정권의 무리한 퇴진보다는 앞으로 국민을 두려워하며 긴장하게 하는 감시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고라인들은 더 많은 영역에서의, 더 많은 공간에서의 촛불을 요구하고 있었다.
‘촛불집회! 물리력보다는 상상력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 ID 북새통선생
“이제 촛불집회의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고민이 생기는 시점입니다. 이제는 다양한 상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나라당 당사 앞으로 행진을 하든지, 아니면 서울의 강남에서 모여 강북으로의 행진을 고려한다든지, 서울광장에서 대규모 공연을 하면서 흥을 돋우든지, 여의도에 모였다가 광화문으로 간다든지, 소규모라도 전국투어를 기획한다든지 일반 국민들도 얼마든지 동참할 수 있고 새로 참가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팽팽한 한계선상에서 누가 참으면서 더 상상력을 발휘하고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국민의 열정을 끌어오느냐의 전쟁이지, 전경과 일진일퇴하면서 혈기를 방출하고 분노를 해소하는 전쟁이 아닙니다.”
열린 공간과 매체를 지켜내라
결국 중요한 것은 모든 정보가 공정하게 오갈 수 있는 공간과 매체를 지켜내는 일이라고 했다.
‘촛불이 계속되길 원한다면, 이 전쟁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 ID bardtale
“주도세력 없는 국민들의 자발적 참여, 너무나도 멋집니다. 그러나 주도세력 없는 자발적인 시민운동은 구심점과 응집력에서 약점을 보이기 때문에 추진력이 상대적으로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운동이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건전한 방향으로 가기 위한 중추적 역할은 진실된 정보 전달이 원활히 이뤄질 때 가능합니다. 결국 촛불이 꺼지지 않기 위해선 거짓언론에 의한 의도적 언론 조작 및 통제를 막는 것이 우선시되어야 합니다. , 는 그들에게 선전포고했습니다. <한겨레>, <경향> 은 말 할 것도 없지요. 그들을 지켜 줘야 하는것이 이 시대의 우리 아고라, 아니 국민의 의무가 아닐까요. 정부는 최시중을 필두로 벌써 장악에 들어갔습니다. 임기로 보장된 정연주 사장입니다. 전초전이 되겠군요.”
물론, 아고라인들이 가장 지키고 싶은 곳은 아고라라는 광장일 것이다. 지금 아고라인들은 그렇게 스스로를 지키는 촛불을 들고 서 있다. (다음 아고라와 <한겨레21>의 공동기획은 촛불이 꺼지는 그날까지 계속된다.)
추신: 이 기사를 마감한 뒤, 6월13일 저녁 일부 보수단체 회원들이 와 난입을 시도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상황을 가장 빨리 전한 것도 아고라였다.
■ [한겨레21- 다음 ‘아고라’ 공동 기획 ] ‘청와대에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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