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박민진2008.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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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Brave new world)

 

올더스 헉슬리| 이덕형 역| 문예출판사| 1998.10.01 | 332p | ISBN : 8931003587

 


 책을 읽으며 자주 눈을 감고 상상했다. 내가 느끼는 이 책의 ‘신세계’가 디스토피아인가와 유토피아인가를 자문했다. 그것은 멋진 신세계라 붙여진 이 책의 제목이 반어법인가 아니면 단순히 그 자체로 ‘멋진 신세계’인가를 구별하는 사고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진정한 행복은 무엇인지 묻는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끊임없이 내게 ‘진짜’가 무엇이냐며 묻고, 나는 생각하고 신중히 대답한다.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은 “어떻게 하면 내가 행복할 수 있을까?”하는 물음이다. 그것이 인간의 특권이라 배워 왔으며 그것이 삶의 이유라고 느껴왔다. 그렇지만 삶을 살면서 점점 더 그것이 부질없어 지고, 내가 생각하는 행복에 의문을 제기하게 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아침에 눈을 뜨고, 똑같은 방식으로 삶이 진행되고 있다 느낄 때 삶의 무료함을 느낀다. 내가 이상적이라고 정해놓은 순리대로 진행되지 못하는 삶을 바라볼 때 삶의 지리멸렬함을 한탄하게 된다. “이 세상은 진짜일까?” 하는 어찌 보면 헛된 생각 말이다. 유리병 속에서 태어나는 신세계 속 그들이 불쌍하게 느끼지만 과연 내가 진정 그들보다 행복한지에는 이유를 제시할 수가 없다. 난 답을 망설이고, 다시 신중한 생각을 반복한다. 


 내가 생각하는 유토피아의 정의에 대해 생각해보면 그것은 제팬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하야오는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를 극단적으로 나누어 표현한다. 둘은 공존할 수 없으며, 행복과 불행의 기준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소녀와 소년이 디스토피아에서 벗어나 유토피아로 들어가는 순간을 극의 정점으로 두고, 그 화두를 통해서 사람들과 소통하는 작품 스타일로 그는 현재 이 시대의 가장 완전한 꿈의 공장장으로 불리 운다. 그의 작품인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간단하게 살펴보면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의 기준 즉, 유토피아의 기준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이 작품에 간략한 내용은 약 천년 후에 문명의 발달은 지구를 멸망시킨다. 그리고 자연에 대한 파괴는 문명의 발달과 동일시된다. 자연을 정복하려 들수록 자연은 인간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나우시카는 자연과의 화해를 통해 진정한 구원을 얻는다. 즉, 자연을 보존하는 것. 다시 말하면 이 세상 자체를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인간들이 살아갈 때 비로써 이상적인 유토피아에 도달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세상의 순리라는 것이 있다. 바람이 불고, 물이 흐르며 초원의 대지가 청록의 기운을 뿜는 것이 순리이다. 또한, 사람과 사람이 서로와 소통하고, 관계를 맺는 것 또한 순리이다. <멋진 신세계>는 이런 순리에 반하는 영화다. <멋진 신세계> 속의 세계의 아이들은 인공수정으로 태어나 유리병 속에서 보육되고 부모도 모른다. 그리고 지능의 우열만으로 장래의 지위가 결정된다. 과학적 장치에 의하여 개인은 할당된 역할을 자동적으로 수행하도록 규정되고, 고민이나 불안은 정제로 된 신경안정제(소마)로 해소된다.이처럼 태초에 인간에게 주어진 존엄성을 모두 깡그리 무시하는 <멋진 신세계> 속 신세계(이하 신세계)는 그야말로 디스토피아 그 자체다. 작품 자체에 메시아가 있는 것도 아니며, 그 어떤 윤리적인 고찰 또한 없다. 그저 묵묵히 냉소적인 어조로 신세계를 조명할 뿐이다.   



 세상의 진리는 개인에게는 하나이다. 그것들이 모여 세상을 이룬다. 그런 논리로 따지면 이 세상은 셀 수 없는 진리가 있다. 그러나 한가지의 진리를 빼고는 모두 착각 속에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진리는 단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유토피아는 제각각이며, 상대적이며 절대적이고, 전체적이며 개인적이다. 내가 믿는 세상의 진실들이 과연 진짜인지는 확신할 수가 없다. 즉, 인간은 절대적이지 못하기에 진정한 유토피아를 알 수 없고, 진정한 행복을 정의내릴 수 없다.  


 우리가 사는 시대(이하 현 세계)에는 기쁨과 슬픔이 공존한다. 그렇지만 신세계에는 그런 개념자체가 없다. 오로지 쾌락이라는 본능적인 유희만이 존재할 뿐이다. 사랑이 없다는 참으로 슬픈 세상이다. 신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보카노프스키법이라는 유전공학으로 공장에서 태어난다. 수백, 수천, 수만 명의 얼굴은 모두 동일하고 유전자형 또한 모두 동일하다.태어남에 있어서 선택이 없다. 인생이 계획되어 졌다는 사실은 기초적인 자아가 없다는 사실이다. 사랑이라는 개념은 녹슬어 버렸고, 부모는 욕이 되어버리는 세상(성행위를 통한 출산은 신세계에서는 범죄다. 아주 아이러니 하게도 미국의 ‘마더 퍽’과 같은 욕이 생각나는 것은 나뿐일까?)이 된 것이다. 탄생의 공장자동화는 세상을 획일화했고, 규격화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 신세계는 고통 없는 세상이기에 인간의 짧은 식견에 웃어 보일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유토피아라 정의할 수 있는 이상도 없음에 절망스럽기 그지없다. 그 이유는 우리가 믿고 있는 세상의 룰에 전혀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신세계는 태초부터 목적이 정해진 획일화된 세상이 되다보니 좋고 싫고의 개념이 사라진 탓이다. 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디스토피아라고 할 수도 없다. 현재 모든 인류가 믿고 있는 세상의 순리가 관연 진실인가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진리는 하나이고, 그 진리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보니 신세계를 디스토피아라 몰아붙일 수 없고, 진정한 행복을 정의내릴 수 없다. 개인적으로 행복하다는 감정에 대해 솔직해져 보자. 필자의 경우는 몇몇 가지가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초등학교 3학년 지독한 콤플렉스로 똘똘 뭉쳤던 난 처음으로 반에서 5등 안에 들어 선생님께 칭찬받던 일이 생각난다. 그리고 성적표를 가져다 드렸을 때의 어머니의 표정. 처음 여자 친구와 손을 잡고 공원을 걸을 때의 시큰한 풀 향내. 할머니와 함께 들어간 아랫목의 따스함. 도저히 잊을 수 없는 행복이 있다. 행복은 이처럼 지극히 개인적이 것이고, 기준이 모호한 잔상과도 같은 불분명함을 가진다. 유토피아를 정의하는 기준이 행복이라면 그것을 형성하는 주체는 개개인이다. 내가 행복이라 느꼈던 이유는 그 때 내 머릿속을 휘감던 정신적인 쾌감이었다. 그 기쁨은 말로 할 수가 없는 그 무언 가이다. 진정 행복하냐고 묻는 질문에는 대답을 어려워하면서도, 대답을 할 수 없으면서도 굳이 대답을 찾아내는 것을 인간의 본능이라 말한다면 억지일까? 사람들은 행복이라는 것에 너무도 쉽게 단정 지어 버린다. 세상을 궁금해 하지 않고, 진리에 욕심을 부리지 않으니 내가 가진 행복을 주체를 모르며, 내가 닦아내야 할 썩은 고름을 구분할 수 없다. 육체적 물질적 쾌락과 인생의 행복을 헷갈려한다. 좋은 차를 굴리고, 좋은 옷을 입고, 괜찮은 이성을 꼬드겨 결혼을 하고, 성관계를 통해 쾌락을 추구하고, 사회적 지위를 통한 권력을 가지는 그것이 진정한 행복일까? 혹은 종교적인 힘에 의지해 맘을 편히 맡기고는 죽음이 행복하다며 웃고 있는 모습이 행복일까? 각자의 행복이 다양한 만큼 대답이 힘든 질문들이다. 대답을 할 수 없다면 질문을 통해 그 본질을 알아야 하는데, 이 세상은 그 과정에 인색하다. 세상은 단순화에 익숙해져 버렸다. 산업혁명 후 우리가 배운 것들은 세상을 빠르게 사는 방법이다. 인생이 얼마나 짧은지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인간과 인간의 소통까지 순식간에 해치우고 있는 것이다. 빨리 집어들 수 있는 심플한 답을 찾기 때문에 내가 내 자신에게 진실한 질문을 하지 못하고, 그 결과 아주 가벼운 대답들만 머릿속에서 춤을 춘다. 행복의 소중함을 알면서도 인생의 목적은 사라졌다. 그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이라 하면 할 말은 없지만, 고민과 고민 속에서 사람들이 어떻게든 행복을 찾는 행위들은 참으로 소중하다. 쉬운 답보다는 어렵더라도 솔직한 답을 해보자. 당신의 행복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었습니까?   



 소설 속 신세계와 내가 사는 현세계가 다르지 않다. 행복은 불분명한데 모두 삶의 목적을 단순히 정의한다. 현 세계에서는 물질적 혹은 실존적인 그 무언가에 행복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안심하며, 신세계에서는 고통과 감정을 없애는 쾌락이 행복이라 정의한다. 그렇기 때문에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구분이 의미가 없는 것이며, 세상은 혼란 속에 빠지게 된다. 행복을 찾는 문제에 너무도 많은 열을 올리며 매달리지만, 인류는 당연하게도 그 해답을 찾지 못해 울음을 그칠 수가 없다. 완전치 못한 자신들을 탓하며 초조한 삶을 지속한다.  



 야만인 보호구역의 존은 버나드의 도움으로 신세계의 최상위 계층으로 올 수 있게 된다. 존은 신과 자연, 감정 등을 중시한다. 게다가 글을 읽을 수 있게 되면서 세익스피어 책을 어릴 때부터 통달해 온 현세계의 감정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한마디로 세익스피어가 말하는 인생의 희노애락에 통달한 평범한 소년인 것이다. 그가 자신의 야만인 세계에서 신세계로 떠날 때 이렇게 말한다. '멋진 신세계~! 오 멋진 신세계!'. (세익스피어의 템페스트 中) 그는 진정 신세계를 동경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철학적 고통과 감정의 고달픔에 힘겨웠던 존은 그것자체를 부정하고, 필요 없다고 여기는 그 세계가 좋아보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한다. 슬픔이 없이는 기쁨이 있을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이해되지 않는 곳, 신앙이라는 것이 없는 곳, 자유라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신세계에 이내 싫증을 낸다. 존은 사람들에게 감정과 종교와 사상의 중요성에 대해서 연설을 한다. 슬픔과 고통이 없이는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소마라는 약품으로 자신의 감정을 죽이는 행위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라 말한다. 존은 이런 사회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세계유럽주재총통 무스타파몬드에게 끌려간다. 존은 의기양양한 태도로 몬드에게 세익스피어의 사상을 아냐고 묻는다. 그러자 몬드는 세익스피어는 훌륭한 작가이자 철학가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사람들에게 유익하지는 않다고 말한다. 그의 번뇌와 고통은 세상을 살아가는 의미를 주기보다는 그들에게 고통을 전파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오히려 셰익스피어 같은 책은 이 사회에 해가 될 뿐이야' 라고 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다른 종교와 문화까지 철저히 제한다는 것이다.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세익스피어의 고통과 번뇌를 통한 철학이 의미가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행복의 오류이다. 분명하진 않아도 우리가 너무도 당당하게 신세계를 불행하다 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사람은 생각을 통해 인생을 판단하고, 역사를 쓰는 주체가 된다는 점이다. 인간의 목적은 사고에 있고, 철학이라는 학문으로 그것을 표현한다. 



 철학이란 국어사전의 의미를 찾아보면 그 어떤 대상이든지 깊게 생각하고 탐구하는 행위를 말한다. 행복 또한 그 대상이 된다. 아니 행복은 철학이라는 행위의 목적이다. 본질을 알고, 그 본질에 대해 의문을 제시했을 때 비로써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믿음에서 시작하는 학문이다. 소설 속 신세계와 현세계의 차이는 그 점이다. 그 차이에서 작가가 의도하는 메시지는 우리가 그 차이점을 없애며 세상을 살고 있다는 비판적인 형식의 권고이다. 쉽게 설명하면 영화 <메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는 절대자이지만 자신은 그것을 믿지 못한다. 지금 이 세상이 굴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기 때문에 자신의 숨겨진 능력조차 알지 못한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비트단위의 세상 속에서 산다. 있음과 없음으로 정의하는 세상에 산다. 대화의 소중한 인터넷의 욕구분출에 막혀있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해서 종교라는 단체를 만들고 안식을 찾지만 점점 약해져가는 자신을 막을 길은 없어 보인다. 섹스와 폭력은 미학으로 등장해서 서로의 초조함을 없애는 도구로 악용되고, 오늘도 물질적인 것을 충족하기 위해 의미 없는 학문을 머릿속에 집어넣는다. 누군가가 “당신은 왜 사나요?” 물었을 때, 화를 내지 않고, 자신 있게 한마디로 말을 할 수 있을까? 모든 이들이 극단적으로 감정을 단순화하기 때문에 내가 사는 이유까지 단순해져 버린다. 목적이 없고, 의미가 없다. 좋은 직장을 갖기 위해서 살고요, 그걸로 좋은 차를 뽑아서 우리 부모님을 호강시켜 줄 수 있기 때문에 삽니다. 그리고 그게 행복합니다. 이렇게 난 얘기할 수 없다. 본질은 그게 아닌 것을 아는 이성적인 인간이기에 그렇다. 생각하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사는 이유를 명확히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진리가 아님에도 소중한 것은 생각하는 행위 자체가 행복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저는 안락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신을 원합니다. 시와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을 원합니다. 저는 죄를 원합니다. 불행해질 권리를 원합니다. 늙어 추해질 권리, 굶을 권리, 질병에 걸릴 권리, 내일 일로 불안에 떨 권리, 온갖 고민에 시달릴 권리 그 모든 것을 원합니다.”  



 인생은 고통 속에서 목적의 윤곽이 나타난다. 무언가를 했을 때 나오는 반작용에서 진정한 유희를 느낀다. 그리고 뿌듯한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진리와 가까워짐을 느낄 때 비로써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일 수 있다. 감정은 백해무익하지 않다. 예술의 원천이자 인생의 기쁨이다. 우리가 소설을 보며 그 신세계의 사람들이 불쌍하다 느끼는 이유가 그거다. 성취가 없고, 의미 없는 쾌락만이 존재한다. 생각하고 생각해서 가장 올바른 길을 찾아 인생의 길을 결정했을 때 목적이 뚜렷해지고, 성취의 기쁨이 있다. 고통을 즐기라는 말이 의미심장한 이유가 그것이다. 고통 뒤에 따라올 성취가 진짜이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필연적이기에, 정부의 과도한 인권침해가 불가피하기에 다가오는 미래의 공장화 되는 문명을 막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인간의 고뇌와 생각이 과학기술과 아주 밀접하기에 더욱 막는다는 말초적인 수단으로는 분명 쉽지가 않다. 누군가가 관리해야 질서가 있고, 방향이 있다. 게다가 관리를 위해서는 법이 존재한다. 법이 복잡해지면 혼란이 오기에 그래서 법은 체계적이고, 필요범위에서 단순화한다. 좀 더 고심하면 나올 수 있는 더 나은 결과도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 어쩔 수 없지만, 그게 현재의 우리 모습이다. 어쩌면 이 책의 작가가 체념한 듯 무미건조한 말투로 신세계를 조명하는 것은 그것이 숙명과도 같기에 그렇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작가는 지독히 체계적인 구성으로 이 책을 집필했다. 사회와 과학, 문화의 이론과 지식들을 총 동원해서 미래를 예측했다. 하지만 놓친 것이 있다. 진정 행복하고자 했던 이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끊어진 테이프처럼 우리의 현재에서 미래로 가는 과정은 생략되어 있다. 메시아가 아니라 그저 현명한 사람이 없는 것이다. 지금 분명 나쁜 징조를 보이며 문명은 퇴락하는 듯하지만, 사랑을 하는 인간은 이제 인식할 수 있다.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더 나은 미래로 현재의 항로를 전환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소설 <멋진 신세계>는 제목 자체가 반어법도 묘사도 진실도 아니다. 그저 경고이다. 행복을 알 수 없으면 그것을 찾으려는 시도라도 해야 될 것 아니냐는 물음이다. 지금 이대로 가다가는 감정까지 쓰레기가 되는 상황이 오는데 도대체 왜 의미 없는 삶을 반복하고 있냐는 경고이다. 복잡한 것이 아니라, 섬세한 것이다. 그 물음에 지속적인 철학을 했을 때 내가 행복과 가까워짐을 느낄 수 있다고 느낀다. 내 머릿속의 유토피아가 내게 물을 준다. 무언가가 싹을 피움을 몸소 느낀다. 그 어떤 화학작용보다도 복잡하게 줄기를 피어내지만, 내가 감정은 명확하다. 난 행복하다. 오늘도 순수한 철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