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프닝 _ 다른 세계를 인지하는 방식

홍은화2008.06.20
조회209

 

 

최근에 본 영화 두편을 간략하게 연이어 페이퍼 발행을 할까 합니다.

 

실은 딱히 쓰고자 하는 욕구가 이는 영화는 없었습니다.

 

" 섹스 & 더 시티 "  임정양과 즐겁게 보고,

 

" 해프닝 "이 해프닝으로 끝나는 느낌이였고,

 

" 쿵푸팬더 " 는 유치하다면서, 깔깔 거리며 웃으면서 보았다는 정도.

 

 

각설하고 해프닝에 대한 이야기 부터 시작하겠습니다.

 

 

M. 나이트 샤말란 감독 " 식스센스 " 에 대한 전율은 내 생에 마지막 영화를 볼 때 까지도 잊지못할 " 결말 " 로 기억 될 것이다.

 

나는 " 반전 " 대신 " 결말 " 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샤말란 감독의 식스센스 이 후, 공포영화의 감독들은 " 반전" 에 대한 어느정도의 고민을 해야 했을 것이고, 관객은 샤말란의 이후 작품들에서 계속된  " 반전 " 을 기대하였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관객이 원한건 예상치 못한 결말 혹은 예상된 결말일지라도 " 공포 " 의 원인에 대해 들여다 보고 싶을 뿐이였다.

 

" 해프닝이 재미없다  = " 반전 " 이 없다 " 라는 등식을 성립시켜서는 곤란하다.

 

그래서 나는 " 반전" 이란 말을 쓰기가 조심스럽다.

 

이 영화에 대한 페이퍼를 쓰기 싫었던 이유는 이제, 영화의 좋은 부분들을 쓰는데 좀더 주력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 반전 " 때문에 재미없었던 것이 아니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이번 영화가 다소 내게 실망으로 다가온 이유는 " 샤말란 " 특유의 " 공포 " 가 딱히  공포스럽지 않았다는 것이다.

 

"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인부들 , 자신의 핀으로 목을 찌르는 여자, 총으로 연쇄적 자살을 하는 사람들, 전선에 목매달아 죽은 사람들 " 이런 " 현상" 의 장면에 " 공포 "를 느끼는 관객은 (미안하지만) 좀 유아적 관점인 듯 하다. (지금 나는 실세계가 아닌 " 영화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그리고 그장면을 보고 내가 놀라지 않았다는 것도 아니다)

 

곧 다가올 부천 판타스틱 영화만 해도 피 낭자한 슬래셔에 엽기적 살인, 자살의 " 현상 " 을 넘쳐나게 만끽(?) 할 것이다.

 

하지만 그 " 현상 " 들이 " 공포" 라는 존재로 다가오려면 " 공포의 원인 " 과  " 공포에 대한 극복(혹은 탈피) 의지"가 함께 존재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해프닝에서는 이 두가지 모두가 미비하거나 심지어 결여되어버린다. (처음부터 결여된 것이 아니라, " 죽게 된다면 함께 죽자 !" 라며 생존의지가 결여된다.

 

그렇다면 샤말란 감독 영화들의  " 공포의 원인"은 왜 공포스러운가?

 

그것은 샤말란 감독 모든 작품에 등장한 특유의 시선으로 " 공포의 원인"이  < " 나" 와 " 다른 세계"의 존재 >를 인지하는 과정에서 겪는 고통을 극대화시켜 보여주기 때문이다.

 

" 식스센스 "(스포일러, 즉 반전내용 포함)  에서 주인공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귀신 세계를 보고 있으며 , 아동 심리 치료사인 말콤(브루스 윌리스)은 이전에 그러한 귀신을 보는 아동에 대한 심리치료를 잘못했다가 총에 맞아 죽어 그 주인공과의 대면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즉, 말콤은 " 나 " 라는 존재가 속해 있는 세계와  " 나 " 라는 존재가  속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부정하던 " 다른 세계 "를  인지하게 되는 순간!(좀 더 아래 그 이유를 다시 언급) 관객은 경악하게 되었던 것이다.

 

" 식스센스"의 주인공은 " 나 " 와 " 타자 "  - 내가 여기서  타인이 아닌 타자라고 쓰는 이유는 타인이란 나와 내 주변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제 3의 인물이라 규정한다면, 타자란 "나" 이외의 모든 이를 뜻한다. 즉, 주인공의 엄마는 타자이되 타인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말콤 역시 영화 전반에 걸쳐 마치 " 나" 를 도와 주며 타인이 아닌 친구가 되므로 타자가 되는 것이다. - 가 한 공간에 어떻게 존재하는지, 또 그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경험하는 인물인 것이다.

 

주인공은 " 공포의 탈피 " 를   " 나" 와  "  다른 세계"의 타자를 도와주며 " 공포 "를 극복해 나간다.

 

샤말란의 첫 영화는 " 공포 " 의 대명사로 볼 수 있는 , 사후 세계 영역을 소재로 하였다.

 

이후  외계인 ( 싸인 ) , 요정 ( 레이디 인 워터 ), 식물 (해프닝)  같은 영역의 소재들을 등장시키고 있다.

 

이렇듯 " 나 " 와 " 다른 세계 " 의 접합은 " 나 " 의 세계가 온전히 유일 존재가 아니라는 각성을 유발케 하는데 이에 대한 가장 쉽고 직설적 영화가 " 빌리지 "인 것이다.

샤말란 영화의 이런 담론 중,

 

" 식스 센스" 를 단연 최고로 꼽는 이유는 단지, " 반전 " 이라는 서사 장치가 아닌 말콤의 " 타자화" 때문이다. " 식스 센스 " 는 관객으로 하여금 " 나 " 의 존재가 주인공 뿐만 아니라, 말콤에게로까지 확대되어 있다. 그러다 일순간 말콤은  " 나 " 가 아닌 " 타자 " - 다른 (귀신) 세계의 인물 - 로 분리시킴으로써 관객에게 진귀한 경험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이 후 영화들이 " 나 " 와 " 다른 세계 " 를 단순하게 이분법적으로 구획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그의 첫(식스 센스) 플롯에 매료되었던 관객들은 다소 실망하기에 이르는게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전편들에 대해 다소 호평하는 이유는  "공포에 대한 극복 의지"라는 공포영화의 서사장치 때문이었다.

 

인간의 공포는 공포를 극복하거나 탈피하려고 노력할 때까지 " 공포 "를 느끼는 것이지

 

공포를 극복 할 의지가 없어진다면  "공포감" 역시 소멸되어진다고 본다.

 

" 해프닝 " 의  이전작들은 주인공이 어떤 식으로든 그들의 (트라우마를 포함한 ) 공포를 극복하려는 의지와 함께 이야기가 전개 된다.

 

하지만, " 해프닝" 의 이야기에는 " 공포 극복 의지" 를 갖게하기도 전에 " 죽음 -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므로 공포의 소멸- " 을 택한다.

 

마치 , 영화 " 인베이젼 " 에서 감염된 것 처럼.

 

하지만, " 인베이젼 " 에서는 감염의 경로인 " 주사 " 라든가 기타 경로에 대해 도망치거나 싸울 수 있는 선택 권이 있기에  감염되지 않으려하는 " 의지 "가 존재하게 된다.

 

그 " 의지" 가 존재하는 순간까지만  " 공포 " 인 것이다.

 

영화 " 해프닝 " 에서는  관객이 영화속 인물들이 감염되기 직전, 감염된 사람들을 보면서 갖는 " 공포 " 를  함께 공유해야만 " 공포 영화 "라는 장르에 부합하면서 " 재미 " 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감염된 사람들"을 보라!  전혀 공포스럽지가 않다.

 

자살을 택하지만 순간적인 고통만이 존재하며,

 

자살에 대한 종교적 물음은 회피되어진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바이러스 감염이므로)

 

이는 영화 " 미스트 " 처럼  주인공들이 " 괴생물체 "의 숙주가 된다거나, 고통속에서 죽지도 못한다거나, 종교적 물음이 수반되는 " 자살 " 을  해야한다는 선택과 과정을 지켜보며 주인공들의 공포심이 관객에게 전이되었던 것과 같은 효과를 주지 못한다는 문제를 수반한다.

 

 

" 죽음이 전혀 공포(고통)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는 것은 " 공포영화 " 로서는 큰 무리수가 아닌가!

 

그런 와중에 주인공들이 삶의 의지를 포기하고 " 함께 죽기"를 선택 하니, 영화 해프닝에서의 "공포"란 존재는 완전 소멸 되어 지고 만다.

 

그렇다고 공포를 제외한 다른 이야기 구조가 눈에 띄는 것도 아니다.

 

좀더 공포 요소를 확대 시켜 보자면 식물이 인간에 대한 선별적 공격을 가한다는 것과 공포 가해자가  스스로 죽겠금 한다는 것이데 , 그 요소들은 "선별적 공격"의 담론에 대해 별 감흥을 주지 못하면서 플롯을 이끄는 힘을 잃었다는 것이다.

 

즉, 샤말란은 < " 나 " 와 " 다른세계" 의 인지와 소통 >이 불가능한 사람들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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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프닝에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수학선생과 학생, 세상과 소통을 끊은 할머니,

식스센스에서 영혼의 존재(다른세계의 존재)를 인지하되 소통하지 못해 고통받으며 살아가다 그러한 현상을 심리적 치료로 해결하려 했던 말콤을 죽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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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빌어 " 공포 영화" 의 방식으로 "다른 세계"를  인정하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런데, 그 " 다른세계 "에 대한 규정이 이번 영화에서 모호하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 다른 세계"라는 것을 규정하는 것은 중요하다. " 다른세계"가 존재 해야만 그 세계를 인지한다거나 소통한다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므로)

 

 

정말 " 식물 " 인 것인지, 아닌지 명확하지 않으며 이러한 모호성은 9.11 테러처럼 갑작스럽게 찾아드는 공포는 비단 " 정치적 문제만은 아니다 " 라는 위험한 사상이 담긴  프로파간다(링크)의 한 부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9.11 (무영웅) 이후, 우주전쟁이나 미스트 같은 영화들에서 주인공들은 더 이상 " 영웅" 이 아니였다.

하지만 적어도 " 원인 없음 (명확하게 규정되어진 " 다른세계, 외계인과 다른 차원의 생물들") " 은 아니였다.

 

해프닝에서 인간이 " 식물 " 세계를 인정하고 소통하며 나아가 존중해야 한다는 담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또 그렇게 보일까봐 영화는 계속 모호하게 처리한다. 왜냐하면 영화에서는 다른 가능성들을 제기 하면서 " 정치적 문제 일수도 있다" 는 가능성을 확보해 두고 싶어서 였다.

 

물론, 두마리 토끼 모두 놓쳤으며 위에 설명한대로 오히려 전자(정치적 문제만은  아니다)에 힘이 기울어지고 말았다.

 

 

그래도, 영화 해프닝에서   " 다른세계"를 인지하는 방식을 치환하여 보면 꽤 흥미로워진다.

 

 

즉 " 다른 세계(식물)" 를  " 나(식물) " 로, " 나 " 를 " 다른세계 " 로 치환하는 발상이다.

 

 " 나(식물) " 는 멸종이나 존재 위협에 대한 공포를  느껴 " 다른세계(인간)"를 공격 할 수 밖에 없다. 는  모티브 말이다.

 

서로 다른 세계의 충돌이다. 그럼에도 공존해야 한다.

 

 

여기서 " 상징계 " (링크)를 이야기 하며 다음 페이퍼인 " 쿵푸 팬더 "로  넘어가려 한다.

 

" 나  의 세계"  (혹은 "나" 라는  존재가 속한 세계 )와  " 다른 세계 "의 인지와 소통은 프로이드의 발달 단계를 빌리자면 상징계로의 입문에 대한 이야기이다.

 

 

" 다른 세계 " 를 인지하고 그 세계와의 소통에 수반되는 고통을 공포영화로 표현해주는 샤말란의 이야기는 이번 " 해프닝" 영화가 재미없었다 해도 내게 늘 기대감을 갖게 할 것이다.

 

그리고 " 상징계 " 이야기에서 " 쿵푸팬더"로 넘어가는 이유는 미뤄두었다 어제사 읽은 " 씨네 21" 허문영 님께서 쓰신 이야기 때문이다.

 

 

 

 

 

 

 

 

 

 

 

 

[제 131호. 해프닝 _ 다른 세계를 인지하는 방식 ]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