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할 것이지만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1) 예언과 지식은 폐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언과 지식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일시적인 것입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 앞에서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언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고전 14:3을 보십시다.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첫째,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예언뿐만 아니라 모든 은사의 목적은 교회에서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것은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교회 전체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곧 봉사하며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둘째, 권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도록 말씀으로 권면하는 것입니다.
셋째, 안위입니다. 누군가 힘든 일이나 슬픔을 당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바로 예언의 목적입니다.
계속해서 본문에는 지식의 은사가 나옵니다. 이 지식은 “영적인 지식,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이해”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고전 12:8에 보면 “지식의 말씀”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지식과 말씀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예언도 폐하고 지식도 폐한다고 했습니다. 원문에 보면 “폐한다”는 동사가 수동태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폐하여 진다”는 것입니다. 무엇에 의하여 폐하여 진다는 것입니까? 해답이 9∼10절에 나옵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예언과 지식은 온전한 것에 의해서 폐하여 진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우리 모두가 온전해 집니다. 그때는 누가 설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필요도 없고 가르침을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때는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 뵈옵게 될 것입니다.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뵈옵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을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중간에 나서서 가르치고 설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영광의 빛과 사랑이 충만한데 무슨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안위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처럼 예언과 지식은 폐하여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만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않고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떠한 은사를 주셨든지, 어떠한 직분을 맡기셨든지 간에 사랑으로 섬기십시다. 그것만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사랑만이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않을 뿐입니다. 은사나 직분은 온전한 것이 올 때는 폐하여질 뿐입니다.
(2) 방언은 그친다고 했습니다.
방언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고전 14:22,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방언은 누구를 위한 표적으로 주셨다고 했습니까?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으로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성숙해지고 온전해지면 방언은 그치게 됩니다. 믿음이 연약하고 불완전할 때, 그 믿음의 성숙과 성장을 위해서 주신 표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방언 기도가 안 된다고 속상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억지로 방언 기도하려고 혀에 힘 줄 필요도 없습니다. 이처럼 방언도 그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만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않고 영원한 것입니다.
(3) 사랑은 영원합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사랑은 “끝이 없다”는 말입니다. 사랑의 영원성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13장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우리를 향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않고 영원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랑을 이미 받았습니다. 이 사랑 속에 지금도 살고 있습니다. 바로 그 사랑 때문에 오늘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죄악 가운데 그 동안 방황하셨습니까? 죄를 많이 지으셨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않고 영원합니다.
실패하셨습니까? 병드셨습니까?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남보다도 더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런 사랑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받고 있습니다.
이 사랑에 대한 보답이 무엇입니까? 사랑에 대한 보답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요일 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않고 영원한 것처럼 우리의 사랑도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향한 우리의 사랑도, 이웃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변함이 없기를 바랍니다.
참된 사랑은 낙심이 없습니다. 절망하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2. 사랑은 온전하기 때문입니다 (9-10절).
(1) 모든 은사는 부분적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부분적”이라는 말씀이 3 번씩이나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12절에도 보면 “부분적”이라는 말씀이 다시 한 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모든 은사는 부분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사도 바울은 이 말을 4 번씩이나 반복해서 사용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은사는 결코 절대적이지 못합니다. 온전하지 못합니다. 부분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할 수밖에 없습니까?
첫째는 인간의 한계성 때문입니다.
우리는 유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한하십니다. 유한한 인간의 머리로 어찌 무한하신 하나님의 모든 진리를 온전히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롬 11:33)
둘째는 인간의 타락성 때문입니다.
우리의 은사는,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직분은 어디까지나 부분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온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떠한 은사를 주셨든지, 어떠한 직분을 주셨든지 간에 이것은 결코 교만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감사의 동기가 되고 겸손의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받은 은사와 직분은 어디까지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명심하면서, 우리는 겸손하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기고 또 성도들을 섬기는 자세를 취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2) 사랑은 온전합니다.
사랑만이 온전한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은 과연 어떠한 점에서 온전하겠습니까?
2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로 사랑은 시간적인 면에서 온전합니다. 영원하기 때문에 온전하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사랑은 공간적인 면에서도 온전합니다. 사랑이 존재하지 못할 영역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 삶의 어디에서나 소중하고 필요한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만 있으면 어떠한 문제라도 근본적으로 쉽게 해결될 수 있습니다.
벧후 1: 5-7에 보면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뒤집어서 설명한다면 이런 이야기가 됩니다. 덕이 없는 믿음은 아무런 소용이 없고, 지식이 없는 덕은 사람을 해치며, 절제가 없는 지식은 교만하게 만들고, 인내가 없는 절제는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그리고 경건이 없는 인내는 자기중심적인 완고함을 낳게 하며, 형제 우애가 없는 경건은 외식에 빠지게 되고, 진정한 사랑이 없는 형제 우애는 인간적인 정(情)의 범위를 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마지막에 가서는 사랑을 공급하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것이 사랑 위에 세워짐으로써만 그것들의 본래적인 의미가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랑이 없는 명분이란 제구실을 못함은 물론 오히려 자기도 괴롭고 남도 괴롭히는 문제만을 낳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직 사랑만이 그 모든 것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사랑은 온전한 것입니다. 사랑은 전부입니다. 전부를 소유한 사람은 사소한 부분을 떨쳐버리는 것을 개의치 않습니다.
힘써 사랑을 연습하십시다. 사랑을 훈련하십시다. 그리할 때 우리의 삶 속에서 절로 사랑의 꽃은 아름답게 피어나게 되고 사랑의 열매도 아름답게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형상을 점차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3. 사랑은 성숙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11-13절).
우리에게 항상 있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없으면 우리는 결코 좋은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왜 사랑이 제일이겠습니까?
(1) 사랑은 영속성에서 믿음과 소망보다 더 뚜렷하고 현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이르게 되면 우리의 믿음과 소망은 그 사명이 완수됩니다. 따라서 그것들은 더 이상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빛과 사랑이 넘치는 나라입니다. 그러니 사랑만큼은 천국에서도 영원합니다.
이처럼 사랑이 영속성에 있어서 믿음과 소망보다는 더 뚜렷하기 때문에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사랑이 있는 곳에는 믿음과 소망이 절로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믿음과 소망의 원천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 3:16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사랑으로 시작했습니다. 중반부입니다.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사랑으로 시작해서 믿음이 생깁니다. 하반부입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영생의 소망도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니 사랑은 믿음과 소망의 근원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고전 13:7에 보면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라고 했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믿음이 절로 생깁니다. 또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며”라고 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소망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믿음도 소망도 존재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이처럼 사랑이 믿음과 소망의 근원이 되기 때문에 제일이라는 것입니다.
(3) 사랑은 성숙하게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루마니아의 『리차드 범브란드』 목사님이 한번은 기독교인 30 명과 함께 어느 감옥에 갇혀 있는데 하루는 바로 자기를 잡아넣고 고문하던 비밀경찰 대위가 잡혀 들어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어떻게 여기를 들어오게 되었소?”하고 물어보았더니 “나도 이제 기독교인입니다”라고 대답하면서, 자기가 겪은 일을 얘기합니다.
열두 살 난 어린이가 꽃다발을 들고 자기를 찾아와서는 자기 아내에게 갖다 주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웬 것이냐?”고 물어보았더니 그 어린이가 “저는 어머니 아버지 두 분 다 감옥에 갇히셨습니다. 어머니의 생일에는 꽃다발을 드려 왔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우리 어머니 아버지를 다 붙잡아갔기 때문에 오늘은 드릴 수가 없어서 당신께 가져왔어요. 이것을 당신 부인께 갖다주세요”하더라는 것입니다. “왜?” “어머니께서 항상 가르쳐주셨어요. 원수를 사랑하라고요. 그래서 우리 어머니 아버지를 붙잡아간 원수인 당신을 내가 사랑해서 가지고 온 것입니다.” 이 경찰은 어린이가 안겨준 사랑의 꽃다발을 붙들고 이 아이와 함께 울면서 회개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마침내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사람이 변합니다. 내게 사랑이 있으면 우선 나 자신이 변합니다. 아울러 다른 사람도 변하게 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힘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변화가 있기 마련입니다.
생각하는 것, 깨닫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이 어린 아이 같은 사람도 장성한 사람처럼 성숙하게 변화시키는 힘이 사랑에 있습니다(11절).
영국의 유명한 문필가요, 캠브리지와 옥스퍼드대학의 교수였던 루이스(C. S. Lewis)
“사람은 에로스의 사랑에 의해서 태어나며, 스톨게의 사랑에 의해서 양육을 받고, 필로스의 사랑에 의해서 성숙된다. 그리고 아가페의 사랑에 의해서 완성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사랑의 사람이 되어서 우리가 어디에 가든지 사랑의 꽃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2008. 6. 22
그 중에 제일은 사랑 (고전 13:8-13)
13절에 보면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왜 그럴까요?
1. 사랑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8절).
오늘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할 것이지만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1) 예언과 지식은 폐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언과 지식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일시적인 것입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 앞에서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언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고전 14:3을 보십시다.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첫째,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예언뿐만 아니라 모든 은사의 목적은 교회에서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것은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교회 전체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곧 봉사하며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둘째, 권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도록 말씀으로 권면하는 것입니다.
셋째, 안위입니다. 누군가 힘든 일이나 슬픔을 당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바로 예언의 목적입니다.
계속해서 본문에는 지식의 은사가 나옵니다. 이 지식은 “영적인 지식,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이해”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고전 12:8에 보면 “지식의 말씀”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지식과 말씀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예언도 폐하고 지식도 폐한다고 했습니다. 원문에 보면 “폐한다”는 동사가 수동태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폐하여 진다”는 것입니다. 무엇에 의하여 폐하여 진다는 것입니까? 해답이 9∼10절에 나옵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예언과 지식은 온전한 것에 의해서 폐하여 진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우리 모두가 온전해 집니다. 그때는 누가 설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필요도 없고 가르침을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때는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 뵈옵게 될 것입니다.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뵈옵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을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중간에 나서서 가르치고 설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영광의 빛과 사랑이 충만한데 무슨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안위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처럼 예언과 지식은 폐하여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만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않고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떠한 은사를 주셨든지, 어떠한 직분을 맡기셨든지 간에 사랑으로 섬기십시다. 그것만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사랑만이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않을 뿐입니다. 은사나 직분은 온전한 것이 올 때는 폐하여질 뿐입니다.
(2) 방언은 그친다고 했습니다.
방언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고전 14:22,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방언은 누구를 위한 표적으로 주셨다고 했습니까?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으로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성숙해지고 온전해지면 방언은 그치게 됩니다. 믿음이 연약하고 불완전할 때, 그 믿음의 성숙과 성장을 위해서 주신 표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방언 기도가 안 된다고 속상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억지로 방언 기도하려고 혀에 힘 줄 필요도 없습니다. 이처럼 방언도 그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만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않고 영원한 것입니다.
(3) 사랑은 영원합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사랑은 “끝이 없다”는 말입니다. 사랑의 영원성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13장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우리를 향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않고 영원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랑을 이미 받았습니다. 이 사랑 속에 지금도 살고 있습니다. 바로 그 사랑 때문에 오늘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죄악 가운데 그 동안 방황하셨습니까? 죄를 많이 지으셨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않고 영원합니다.
실패하셨습니까? 병드셨습니까?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남보다도 더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런 사랑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받고 있습니다.
이 사랑에 대한 보답이 무엇입니까? 사랑에 대한 보답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요일 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않고 영원한 것처럼 우리의 사랑도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향한 우리의 사랑도, 이웃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변함이 없기를 바랍니다.
참된 사랑은 낙심이 없습니다. 절망하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2. 사랑은 온전하기 때문입니다 (9-10절).
(1) 모든 은사는 부분적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부분적”이라는 말씀이 3 번씩이나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12절에도 보면 “부분적”이라는 말씀이 다시 한 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모든 은사는 부분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사도 바울은 이 말을 4 번씩이나 반복해서 사용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은사는 결코 절대적이지 못합니다. 온전하지 못합니다. 부분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할 수밖에 없습니까?
첫째는 인간의 한계성 때문입니다.
우리는 유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한하십니다. 유한한 인간의 머리로 어찌 무한하신 하나님의 모든 진리를 온전히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롬 11:33)
둘째는 인간의 타락성 때문입니다.
우리의 은사는,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직분은 어디까지나 부분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온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떠한 은사를 주셨든지, 어떠한 직분을 주셨든지 간에 이것은 결코 교만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감사의 동기가 되고 겸손의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받은 은사와 직분은 어디까지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명심하면서, 우리는 겸손하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기고 또 성도들을 섬기는 자세를 취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2) 사랑은 온전합니다.
사랑만이 온전한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은 과연 어떠한 점에서 온전하겠습니까?
2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로 사랑은 시간적인 면에서 온전합니다. 영원하기 때문에 온전하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사랑은 공간적인 면에서도 온전합니다. 사랑이 존재하지 못할 영역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 삶의 어디에서나 소중하고 필요한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만 있으면 어떠한 문제라도 근본적으로 쉽게 해결될 수 있습니다.
벧후 1: 5-7에 보면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뒤집어서 설명한다면 이런 이야기가 됩니다. 덕이 없는 믿음은 아무런 소용이 없고, 지식이 없는 덕은 사람을 해치며, 절제가 없는 지식은 교만하게 만들고, 인내가 없는 절제는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그리고 경건이 없는 인내는 자기중심적인 완고함을 낳게 하며, 형제 우애가 없는 경건은 외식에 빠지게 되고, 진정한 사랑이 없는 형제 우애는 인간적인 정(情)의 범위를 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마지막에 가서는 사랑을 공급하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것이 사랑 위에 세워짐으로써만 그것들의 본래적인 의미가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랑이 없는 명분이란 제구실을 못함은 물론 오히려 자기도 괴롭고 남도 괴롭히는 문제만을 낳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직 사랑만이 그 모든 것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사랑은 온전한 것입니다. 사랑은 전부입니다. 전부를 소유한 사람은 사소한 부분을 떨쳐버리는 것을 개의치 않습니다.
힘써 사랑을 연습하십시다. 사랑을 훈련하십시다. 그리할 때 우리의 삶 속에서 절로 사랑의 꽃은 아름답게 피어나게 되고 사랑의 열매도 아름답게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형상을 점차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3. 사랑은 성숙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11-13절).
우리에게 항상 있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없으면 우리는 결코 좋은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왜 사랑이 제일이겠습니까?
(1) 사랑은 영속성에서 믿음과 소망보다 더 뚜렷하고 현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이르게 되면 우리의 믿음과 소망은 그 사명이 완수됩니다. 따라서 그것들은 더 이상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빛과 사랑이 넘치는 나라입니다. 그러니 사랑만큼은 천국에서도 영원합니다.
이처럼 사랑이 영속성에 있어서 믿음과 소망보다는 더 뚜렷하기 때문에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사랑이 있는 곳에는 믿음과 소망이 절로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믿음과 소망의 원천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 3:16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사랑으로 시작했습니다. 중반부입니다.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사랑으로 시작해서 믿음이 생깁니다. 하반부입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영생의 소망도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니 사랑은 믿음과 소망의 근원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고전 13:7에 보면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라고 했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믿음이 절로 생깁니다. 또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며”라고 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소망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믿음도 소망도 존재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이처럼 사랑이 믿음과 소망의 근원이 되기 때문에 제일이라는 것입니다.
(3) 사랑은 성숙하게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루마니아의 『리차드 범브란드』 목사님이 한번은 기독교인 30 명과 함께 어느 감옥에 갇혀 있는데 하루는 바로 자기를 잡아넣고 고문하던 비밀경찰 대위가 잡혀 들어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어떻게 여기를 들어오게 되었소?”하고 물어보았더니 “나도 이제 기독교인입니다”라고 대답하면서, 자기가 겪은 일을 얘기합니다.
열두 살 난 어린이가 꽃다발을 들고 자기를 찾아와서는 자기 아내에게 갖다 주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웬 것이냐?”고 물어보았더니 그 어린이가 “저는 어머니 아버지 두 분 다 감옥에 갇히셨습니다. 어머니의 생일에는 꽃다발을 드려 왔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우리 어머니 아버지를 다 붙잡아갔기 때문에 오늘은 드릴 수가 없어서 당신께 가져왔어요. 이것을 당신 부인께 갖다주세요”하더라는 것입니다. “왜?” “어머니께서 항상 가르쳐주셨어요. 원수를 사랑하라고요. 그래서 우리 어머니 아버지를 붙잡아간 원수인 당신을 내가 사랑해서 가지고 온 것입니다.” 이 경찰은 어린이가 안겨준 사랑의 꽃다발을 붙들고 이 아이와 함께 울면서 회개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마침내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사람이 변합니다. 내게 사랑이 있으면 우선 나 자신이 변합니다. 아울러 다른 사람도 변하게 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힘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변화가 있기 마련입니다.
생각하는 것, 깨닫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이 어린 아이 같은 사람도 장성한 사람처럼 성숙하게 변화시키는 힘이 사랑에 있습니다(11절).
영국의 유명한 문필가요, 캠브리지와 옥스퍼드대학의 교수였던 루이스(C. S. Lewis)
“사람은 에로스의 사랑에 의해서 태어나며, 스톨게의 사랑에 의해서 양육을 받고, 필로스의 사랑에 의해서 성숙된다. 그리고 아가페의 사랑에 의해서 완성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사랑의 사람이 되어서 우리가 어디에 가든지 사랑의 꽃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