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 제5대 대통령 임기 4년을 뒤돌아보며,

장용복2008.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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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지난기사를 곱씹어보자_5>

 

박정희 대통령 제5대 대통령 임기 4년을 뒤돌아보며,

1967. 7. 1    
-넘치는 의욕 … 젊음으로 허다한 난제돌관
-10일1회꼴 출장
-외국원수에서 꼬마까지 접견4만명
-방문 적극외교로 지위비약

 

 

 

▲박정희 대통령 제3공화국 5대 국회 개원식 참석. 5대 국회 개원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5대 국회의장에는 이효상, 부의장에는 장형순, 나용균 의원이 선출됐다. 1963. 12. 17


1961년5월16일 현역장군으로서 군사혁명을 주도했고 1963년12월17일 민정 이양과 더불어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 이제 그 임기를 끝내고 다시 6대 대통령에 취임한 박정희  대통령,

그는「젊은 대통령」(1917년 9월30일생) 「부지런한 대통령」「일하는 대통령」이라고 흔히 불러진다. 그의 정력이 노 대통령으로 불려지던 이승만 박사나 임기를 못 채우고 만 윤보선씨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왕성하다는 것은 그가 5대 대통령직을 맡아있는 동안 무려 4만 명을 넘는 내외 인사들을 청와대에서 접견했고, 국내출장 = 1백85회  해외출장 = 4회라는 엄청난 기록만 보아도 짐작이 간다.

넘쳐흐르는 그의 의욕은 가끔 「시행착오」라든지 실천 과정에서의 「무리」등을 수반했다고 일부  비난을 여러차례 받기도 했으나 제1차 5개년 계획의 강행, 월남파병, 한일협정 체결 등을 비롯 많은 난제들을 과감히 풀어 나갔다.

이처럼 새로운 지도자로 등장했던 박대통령은 오늘 또다시 4년 임기의 대통령직에 취임, 이 나라의 충실한 길잡이가 되겠다고 선서했다. 지난4년 동안 「일하는 대통령」으로서의 그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확인행정
박대통령은 틈만 있으며 민정시찰을 했다. 풍수해나 한해지구 시찰은 물론 산업시설의 기공식이나 준공식 그리고 문화재 등 각종행사에는 거의 빠짐없이 참석했으며 이 기회를 이용하여 직접 민정을 살피고 지방행정 현황을 직접 파악하곤 했다. 확인행정 공개행정의 기틀을 마련한 그의 출장 통계를 보면 1주일마다 1개 지방이 된다.

①목적별
▲각종 건설상 및 준공식 참석 54회 ▲민정시찰 1백44회 ▲각종행사 31회 ▲계 2백99회

②지방별
▲서울 경기 33회 ▲강원19회 ▲충북 17회 ▲충남 18회 ▲전북 16회  ▲전남 14회 ▲경북 20회 ▲경남 24회 ▲제주 8회 ▲부산 16회 ▲계 1백85회

이밖에 그는 매월 무역진흥 확대회의를 소집, 관계국무위원과 국책은행 회사의장, 여당의 정책수립 책임자 등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수출의 진흥·확대책을 논의 확인 시달했고,  매주 정부·여당 연석회의를 열어 정부·여당간의 의견을 직접 조정 했으며 또 비서관들을 소집, 정책상의 문제점을 분석 검토하는 등 바쁜 일과를 줄곧 보내왔다.

 

◇내외인사 접견
그는 년 평균 1만명 이상의 내외 인사를 청와대에서 접견했다. 국민학교 아동에서부터 시작하여  내외 정치인 경제인 학자 예술가 종교인등 각계 각층의 인사들을 두루 만나 의견을 묻고 소신을 피력하고 상의했다.

주요외빈의 접견상황을 보면… ▲로버터 케네디.... ▲러스크 미국무장관..... ▲「게르스텐·마이어」서독  하원 의장 (64년5월27일) =한독간의 경제 협력 및 방독초청 기틀 마련 ▲「도모우」월남 부수상 (64년8월13일) = 월남지원 문제 논의 ▲「나타시만」UN 사무차장 (64년8월20일) = 유엔 총회  대책협의 ▲장군 자유중국 총통 비서장 (64년8월21일)  = 우의다짐▲「번디」미 극동담당 차관보 (64년10월1일)  = 군경 원확대  군원이관 문제협의 ▲「포츠」AID 극동담당  차관보 (64년11월19일) = 상동 ▲엄가윤 자유중국 행정원장 (64년12월1일) = 협조 다짐

▲유명일본외상 (65년2월18일) = 납득할 만한 대한 성의 표시  촉구 ▲「로지」미 대통령 특사  (65년4월27일) = 월남문제등 논의  ▲「라만」말레수상 (65년4월29일) = 통상확대 문제논의 ▲「로스토」미 국방성 정책 위원장  (65년5월3일)  ▲「스튜워드」영 외상 (65년10월18일) = 교역확대 문제논의 ▲「키」월남수상 (65년11월9일) 

▲「험프리」미 부통령 (66년1월2일과 2월23일)= 월남파병 경제협력 증진문제논의 ▲「러스크」미 국무장관 (66년7월9일) = 월남 및 아시아 정세 검토 ▲「닉슨」전 미 부통령 (66년8월13일) ▲안신개 전 일본수상 (66년9월1일과 10일)  = 반공태세 협조를 다짐 ▲「조나만」「레스토」왕국수상 (66년11월5일) 이상과 같은 많은 외빈을  접견하는 동시에 특히 67년 봄에는  「존슨」미국대통령과「뤼브케」서독대통령을 맞아 각각 정상회담을 열어 협조와 유대강화를 다짐하는 등 요청에 의한 적극외교의 실을 과시하기도 했다.

 

◇방문외교
①서독방문
박대통령은 「뤼브케」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64년 12월6일 방독, 「뤼브케」대통령과 「에르하르트」수상을 만나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을 통해 한미 양국은 우호증진 및 경제협력에 합의했는데 정치면에서는 서구진출에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고 동일한 여건 하에 놓인 양국의 국토통일 결의 및 노력을 다짐했으며 대미 일변도 외교에서 다원외교로의 전환을 기했고 경제면에서는 한독경제협정을 체결하여 1억5천9백만 마르크의 차관을 획득, 경제외교를 한층 강화했다.

②미국방문
박대통령은 65년5월16일「존슨」대통령의 초청으로 방미, 파격적인 대환영을  받고 두차례의 정상회담을 가졌다. 양국원수는 긴밀한 상호협조 행협의 조속체결, 군경원의 계속 등을 공동으로 성명, 보다 두터운 우위와 신의의 가교를 놓고, 새로운 협조체제를 이룩했는데, 이때 AID차관 1억5천만 달러를 획득했다.

③동남아 순방
박대통령은 66년2월7일부터 18일까지 말레이시아 태국 자유중국등 3개 우방국가를 차례로 방문했다. 순방 국마다 정상회담을 가져 집단 안전대책, 월남사태, 공동 번영문제등에 관해 진지한 의견을 교환 동남아에의 경제진출 터전을 마련했다.

④마닐라 정상회담 참석
월남지원국인 한국 미국 비을빈 태국 호주 「뉴질런드」월남등  7개국 정상회담이 66년10월21일 「마닐라」에서 열렸다. 이 회담중 「존슨」미국 대통령은 두차례에 걸쳐 박대통령을 찾아 이례적인 단독회담을 가짐으로써 새 태평양시대에 있어서의 우리 비중이 커졌음을 반증했다.  7개국 원수들은 월남문제의 해결과 아시아·태평양국가의  유대강화·공동번영을 위한 제원칙에 합의했는데 월남평화협상에 대한미국의 독주를 견제하고 유화론을 전면 후퇴시키는데 우리 외교의 성과가 있었다.

 

◇월남파병
64년9월11일 이동병원과 태권도 교관등 1백40명을 파월 한 바 있으나 다시 월남의 요청에 의해 65년1월8일 비둘기부대(비전투원)2천명을 증가키로 각의에서 의결, 1월29일 국회동의를 거쳐 파병했다.

65년7월 정부는 또다시 전투부대의 파월을 응락, 8월13일 야당의 반대리에 국회의 동의를 얻음으로써 우리나라는 처음으로 외국에 출병, 반공전선의 일익을 담당케됐다. 주월군 규모는 약4만 5천명으로 알려져 있다.

 

◇한일국교정상화
14년간이나 끌어오던 한일회담은 65년2월20일 마침내 양국대표가 동경에서 기본조약과 제협정에 가조인하고 6월22일 조인식을 올리고 8월14일 여당의원만이 출석한 국회에서 비준에 동의, 12월18일 비준서 교환을 함으로써 매듭지어지고 한일양국은 61년만에 국교를 정상화 하기에 이르렀다.

 

◇한미행정협정체결
1953년 8월이 정권 때부터 추진해오던 한미 행협교섭은 미측의 회피 군사혁명등으로 진전을 못보아오다가 65년6월 부터 본격화, 초안작성을 마쳤고, 66년6월 우리측에서 보완안을 제시 절충 끝에 7월9일 조인되고 국회의 동의를 얻어 67년2월9일부터 발효되었다. 이 협정은 주한미군에 대한 형사관과 미군에 대한 민사청구권 군사노무자의  처우등을 규정하고 있다.

<젊음과 패기로 일하는 대통령 박정희, 67년 임기 4년을 뒤돌아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