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너무 쉽게 변해가네

이정현2008.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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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과대학 증축동의 난간 앞에서 J와 얘기를 하다가 저 너머 흑석동의 밤이 깊어지다. 드문드문 켜지기 시작하는 옥탑방의 불빛들과 그와는 비교도 안되게 밝은 대학병원의 휘황찬란한 빛이 대조되었다.

 

 2003년 여름, 100일 휴가를 나온 내 눈에는 짓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난잡한 공사판이 들어왔다. 2004년 겨울이 되니까 거대한 구조물로 바뀌어 있었고, 2005년 봄에 제대를 하니 흑석동의 밤거리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P양에 대한 아픈 기억들과 새롭게 만난 K양과의 연애에 휘말려 있어서 풍경이 담고 있는 아픔을 깨닫지 못했다. 

 

 병원이 들어선 그 자리는 옥탑방을 힘겹게 머리에 이고 있는 단독주택들과 구멍가게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허름한 골목이었는데. 이제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의과대학 너머로 보이는 저 단독주택들도 이제 입대하는 후배들이 제대할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모두 복잡한 공사판이거나 깔끔한 주택가로 변해가겠지. 그 당연한 사실이, 슬프다.

 

2.

 

 문득 생각이 나 찾아간 한양대학교 법과대학 주변은, 공사판이었던 예전과는 달리 빽빽하게 공과대학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공사판 뒤의 철제 레미콘 근처에 앉아 술을 마시던 그 시절은 흔적도 없다.

 

 그 시절 나는 K 양에게 빠져 있었고, L 선배와 문학을 꿈꾸었는데 전공을 잘못 택했다고 한탄하기를 즐겼고, 죽마고우인 O와 R과는 정기적으로 만나서 설명할 수 없는 열정으로 스타 크래프트를 하다가 당구를 치곤 했다. 지독하게 의대를 가고 싶었던 누나 Y는 당시 다니던 학교를 관두고 다시 시험을 봐서 한양대 의대에 들어갔는데, 지금쯤은 가운을 입고 환자를 받고 있을게다.

 

 그 시절의 기억을 되새기는 디딤돌이 될 만한 것들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깔끔하고 깨끗하게만 변해가는 외양들이,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지저분한 청춘을 보낸 이들은 대체로 깔끔하고 럭셔리하게 보이는 장소들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 스타벅스 같은 깔끔한 커피숍들은 도서관 커피와 조악하게 만들어 파는 과일쥬스를 들고 누군가를 기다리던 그 초조함을 상기시키지 못한다.

 

3.

 

 다시 학교로 시선을 돌리니, 2000년과 2001년도에 새벽에 술을 사서 학교 담장을 넘다가 넘어져서 울던 후배 L 양과 그녀를 부축하면서도 캔맥주를 따던 K가 생각난다.

 

 그 시절, 학교 정문은 자정이 되면 문을 닫았다. 2002년 가을이 되자 정문과 담장을 헐어버리고 작은 광장이 들어섰다. 군대 가기 전에 무수히 들렀던 정문 앞의 게임방 주인형은 지금쯤 무엇을 할까. 지금은 그 건물에 스시 캘리포니아와 생과일 쥬스를 파는 가게가 생겼다. 새벽이면 홀로 들어가서 비틀즈의 노래를 신청했던 술집 는...?

 

4.

 

 눈을 돌리니 도서관 앞 산책로에 조명이 켜졌다. 짙은 어둠 때문에 가까이 가도 누가 벤치에 앉아 있는지 알아보기 어렵던 산책로가 환하게 밝혀졌다. 이제는 학교 안에서 어둠 속에 홀로 있을 장소가 별로 없다.

 

 의과대학 난간 너머의 저 동네도 재개발로 사라질 터이다. 그러나, 그러나 나는 그 비좁고 더러웠던 골목길 사이사이에서 헤매이던 내 청춘을 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그다지 밝은 청춘을 보내지 못했던 나는, 천천히 변해가다가 어느날 갑자기 새롭게 변신하여 깨끗해져 가는 주변의 풍경이 슬프다.

 

 5.

 

  "이 모든 것들은 사라져갈텐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한 작가의 탄식이 떠오른다. 기회가 되면 흑석동 골목길의 풍경들을 렌즈에 담으리라. 그것들이 사라지기 전에.

 

  도서관에서 나와 바라본 흑석동의 야경이 언제나 내가 바라보던 그 풍경이 아닐 날이 곧 다가올거라는 사실. 이것은 사람도 마찬가지겠지. 모두들 죽어가고 있으니까. 언젠가는 모두들 사라질텐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데도 늘 마음 속에 칼날을 움켜쥐고 살아간다. 남을 베기 위해서, 혹은 상처받지 않으려는 꼼수에.